전세도 1년밖에 안 남았고… - 보조작가 김국시의 생활 에세이
김국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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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걸었다. 어렸을 적엔 자고로 삶이란 꿈을 갖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걸어나가야하는 줄 알았는데, 웬걸. 꿈은 현실벽에 부딪힌지 오래고 목표는 바쁜 일상으로 하루를 넘기기 어려웠다. 목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단 생각뿐이다. 내게 주어진 일상으론 그거 따라하다간 남은 삶마저 갈려나갈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삭삭 갈려서 다시 태어나는게 좋았을까. 나는 무얼 하기 위해 살아가나, 이런 생각이 가득할 때쯤 하던 일들을 모두 멈췄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곰곰히,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 무얼 위해 살아갈까?


 나 같은, 그러니까 일도 없고 돈도 없으면서도 행복 찾아 삼만리인 젊은이라면 <전세도 1년밖에 안 남았고>라는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바람빠진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이런 걱정들을 이미 온몸으로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나부터도 책 제목을 보자마자 ‘내 통장엔 00만원(금액은 비밀이다)밖에 안 남았고’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렇다. 이 불안정함은 자본주의 사회에선 어쩔 수 없는,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정의 덤이다. 안 받고 싶은 덤인데 어쩌겠나. 어거지로 밀어넣어주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안고 가야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그 가혹한 덤을 어깨에 지고도 갈만한 여정이라는 것을. 아니, 가야만 하는 여정이라는 것을. 비록 전세도 1년밖에 안 남았지만 말이다.


 <전세도 1년밖에 안 남았고>는 스물 셋에 알바로 시작해, 6년동안 다양한 분야의 방송작가 일을 하며 질기게 버텨오던 보조작가 김국시의 고군분투기다. 열악한 노동조건도 부당한 대우도 참고 견뎌야 겨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짠내 나는 방송작가의 경험담부터 열심히 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안고 사는 애달픈 고민들이 담겨있다. 특히,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을 솔직하게 써내려가 많은 공감이 느껴진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같은 곳을 맴돌고 있다는 생각에 지쳐가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쯤 왔는지도 모른 채 주저 앉았다고 말하며 ‘얼마나 이렇게 주저앉아 쉬어야 다시 내 호흡을 찾을 수 있을까, 이대로 내 안에 있는 숨을 다 내뱉고 영영 쓰러져버리는 게 아닐까, 무서웠다’고 말하는 김국시 작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겨드랑이가 찌릿찌릿했다는 이야기를 읽을 땐 저 깊숙한 곳에 덮어두었던 일들이 생각나 울컥했다. 작가라는 직업은 아니지만 나도 무언가를 창작하는데 몰두해야하는 일을 했었다. 일정 직급에 오르지 않으면 내내 막내처럼 부려지는 그런 일. 그래서 일이 시작되면 일상이 무너졌다. 열심히 몰두해서 일을 마무리했지만 남는 건 나빠진 건강과 보고서에 들어간 내 이름 석자. 그래, 이걸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았지, 라며 나를 다독였지만 기쁘진 않았다. 너무 지쳤던걸까. 김국시 작가처럼 나 또한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도, 나아갈 궁리를 하고 싶지도 않았었다. 이런.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집어든 고작 손바닥만한(그렇지만 귀여운!) 책 한 권이, 무작정 열심히 살아야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먹먹하다. 


 그렇지만 <전세도 1년밖에 안 남았고>는 우울함만 가득한 에세이는 아니다. 꿈을 향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한다거나 희망찬 미래가 가득할거란 허무한 결말로 끝내는 에세이도 아니다. 달달한 살구색 표지에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곳곳에 그려져 있는 이 책을 읽다보면 그만큼 귀여운 김국시 작가의 말투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삶이 늘 괴롭고 힘든 일만 있는건 아니니까. 소소한 행복도 우리 곁에 살고 있으니까. 작가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읽는 독자로서는 그야말로 단짠단짠 조화로운 맛이다. 김국시 작가가 아프게 적어 놓은 그 마음들을 읽으며 내 마음도 이랬던 것 같다,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게 되기도, 행복한 시간들은 그저 여행의 추억을 얘기하며 함께 아이스크림 먹을 사람이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는 김국시 작가의 말에 다른 사람들에겐 말 못했던 소박하지만 소중한 나의 행복들을 인정하게 되기도 한다. 여전히 어디로 가야할지는 모를지도 모른다. 답을 주는 책은 아니니까. 다만 <전세도 1년밖에 안 남았고> 덕분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것이다. 가벼워진만큼 더 방방 뛰며 김국시 작가처럼 행복을 찾아 살고 싶단 마음이 생길 것이다.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까지 열심히 살았는데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잠시 멈춤’의 시간을 살아가는 당신들이 생각난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그 결정을 하기까지 지난한 시간들을 보냈음을 김국시 작가의 삶을 통해 짐작해본다. 대단한 걸 해줄 순 없지만, 그저 ‘어디에도 깊이 뿌리내리지 못해 곧 떨어져나갈 것만’ 같지만 여전히, 조용히 오늘도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김국시 작가와 당신들 그리고 나를 응원해본다. 비록 내 통장엔 00만원(끝까지 금액은 비밀로 하겠다)밖에 안 남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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