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 그늘에 들다
강은소 지음 / 문학관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 지금, 어디쯤 흐르고 있을까
영상이 손에 잡힐 듯 떠오르는 글이다. 수양버들이 빽빽 들어선 학교가 있다. 높디높은 국기게양대가 있고, 창문 드르륵 열어 아버지가 소리도 없이 웃으시며 내다보신다. 철필 긁는 사각거리는 소리에 갑자기 떠오르는 잃어버린 시간들. 과수원이 있는 작은 동네, 거기 저녁연기 집집마다 일직선 하늘로 피어오르고.

[여름방학 때, 당번활동을 하러 온 언니들과 재밌게 놀았던 일이 기억난다. 그 날 찍은 사진이다. ……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듣고, 더불어 산다는 의미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한 폭 그림이다. 크레파스로도, 수채화로도 이렇게 못 그리리. 글로 그린 그림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화가들은 아는 지 모르겠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 3편의 소설이 떠오른다. '어느 날 기억의 모티브는 시간의 집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갈 때가 있다. 지난해 팔월. 아버지의 정년 퇴임식을 위해 스므 해가 넘도록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모교에 갔다. 이젠 수양버들이 한 그루도 보이지 않는 교정이지만, 지나간 세월이 떠올랐다. 잊었던 기억들이 살아나고, 기억 속의 그리운 얼굴들이 미소를 지었다'에서 '그러자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이 맛, 그것은 콩브레 시절의 주일 날 아침……물을 가득 채운 도자기 사발에 작은 종이 조각을 담그면, 그때까지 구별할 수 없던 종이 조각이 금세 퍼지고……꽃이, 집이, 사람이 되는 놀이를 보는 것처럼'으로 시작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처음으로 낯선 곳에서 보낸 밤들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아늑하고 따스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에선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주인공 오스카의 할머니 4겹치마가, '세월의 강은 멈출 줄 모르고 흐른다. 작은 개울은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온갖 풍파를 견디고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는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이 연상된다. 아름다운 글은 항상 아름다운 명작을 연상하게 하는 법이다.

- 가을 단상
이 책 첫 번째 작품 '복수 설화를 아십니까'의 도입한 시 '낙태일기·5'는 첫 대면하는 독자 기죽이기에 안성맞춤이다. 어디선가 본 듯도 한 시인데……. 일부러 분당수필 회원들에게 재차 묻기까지 했으니.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어머니 생신 날/ 우체국 빠져나오며/ 이제사 단풍드는/ 키 작은 나무 한 그루] '어머니 생신 날' 마지막 연이 눈물 샘 콕 찌르고 만다. 이 수필은 초등학교 운동회를 소재로 어머니의 시집살이를 떠올리며 과거 여인들의 시집살이 애환을 그린 글이다.

[장손인 오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맞는 운동회 날. 할머니와 고모들은 모두 운동회 구경을 가고 어머니는 집에 남게 되었다. …… 시상식 참석도 못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머니는 남몰래 눈물을 삼켰으리라. 층층시하 대가족의 시집살이로 어머니의 젊은 날은 그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좋으나 싫으나 한 가족이고 언젠가 주도권은 넘겨주는 것이 순리이거늘 왜들 집집마다 어느 집에 누가 더 심하게 하나 내기라도 하는 지. 그러나 서러워하지 마시라. 모든 것은 농경사회와 부계사회 일변도로 인해 생겨난 불협화음 아니던가. 이젠 핵가족화 했고, 농경사회에서 탈피해 산업사회가 되었으며,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지 않는가. 앞으로 여권 신장은 날로 팽창하리라.

어디를 가나 여자 세상이다. 분당 수필에 가도 여자, 독서 공부를 가도 여자, 식당에서도 여자 손님들한테 잘 보여야 장사가 제대로 된다고 한다. 이미 네델란드에선 출생하면 아이가 어머니의 성을 따른다고 하지 않는가. 향후 이혼 가정이 많아져 재혼할 때마다 아버지 성을 따라야 하는데, 그 바뀌는 빈도수는 해가 갈수록 많아 질 것이니 자손들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는 원시 - 모계사회(이원복의 '만화로 떠나는 21세기, 미래 여행' 참조)로의 복귀이다. 이런 슬픈 '어머니의 노래'도 이 글이 마지막이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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