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전야
현대수필문인회 엮음 / 문학관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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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 아침은 눈이 퉁방울이 되도록 우는 날이다. 첫 대목부터 곱지 않은 톤으로 심상치 않은 글이다. 한 사람을 찾기 시작하면 각처에서 방송을 보고 가족을 줄줄이 만날 때는 그보다 더한 인간미 넘치는 드라마가 없다. 이산 가족 상봉의 이야기야 구절구절 한없이 이어지는 글이다. 다 지우고 이 한 구절이면 끝난다. 이산 가족 찾아 만나는 장면의 압권이다.

'우리 아이들이 네, 다섯 살 때쯤이다. 추운 겨울날 일광욕을 시킨답시고 잠깐 집 골목에 놀도록 했다. - 중략 - 오만가지 방정맞은 생각은 왜 그렇게도 많이 떠오르는 지, 질주하는 자동차도 보였다가 험상궂은 남자의 손도 보이곤 했다. 입은 타들어 가고 시야가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급한 상황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호사스러웠는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애를 태운다는 것은 수분을 말리는 일인가보다. - 중략 - 간신히 찾아낸 곳은 집과 멀리 떨어진 아파트 놀이터엿다. 두놈이 손이 빨개지도록 정신없이 미끄럼을 타며 놀고 있었다.'

한 편의 수필이 독자를 끌어 모으는 힘은 이렇듯 절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는 웬만한 충격요법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인위적인 힘으로 애써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 감동하거나 절실하지 않은 사건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학에 있어서 절실함은 릴케의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에게 보내는 편지만한 것이 없으리라. '쓰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을 때에야 비로소 문학에 뜻을 두라는 말처럼. 수필 한 편에서도 절심함이 이토록 자명한 것이다.

'뱃전에서 어미 원숭이와 새끼 원숭이를 떼어놓았을 때, 어미가 죽은 뒤에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더라는 단장에 얽힌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아이들 찾느라 애간장 녹이던 때의 비유다. 이 원숭이의 이야기는 내 나이 58이 되도록 처음 듣는다. 이 끔찍함이 모정일 것이다. 이 섬듯함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숙연함을 맛보게 된다.

'형제간의 우애가 턱없이 얇아져 가는 세상이다. 피를 나눈 형제끼리 사소한 일로 감정대립을 하기도 하고, 아직 살아 있는 부모의 재산을 앞에 놓고 으르렁거리는 집도 허다하다. - 중략 - 옛날에는 종갓집이 어려우면 아래 형제들이 도와주며 집안을 일으키며 중심을 세웠다. 이제 그런 미풍양속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다. - 하략 -' 이 이야기는 이미 모두 잘 아는 현대 가정사의 진부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너무 길다. 그러나 그 답은 간단하고 너무 짧다.

'얼마나 꾸밈없는 그대로의 모습인가. 각본도, 연출도 없이 펼쳐지는 눈물 섞인 드라마를 보고 또 봐도 싫증나지 않는다.' 글의 함축미를 애써 찾을 필요 없다. 바로 이것이 함축성이다. 애써 꾸미지 않아도 이토록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솜씨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의 결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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