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나이 60이 다된 고령에 본격적인 글쓰기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여 문학인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 사람이다. 따라서 늦깍기 문인들에겐 우상이며 모범으로 회자되는 소설가다.

소설의 주제는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이 일상에서 대수롭게 생각지도 않았던 시각(視覺)을 잃는다면? 인류 역사가 쌓아놓은 빛나는 문명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할까. 더 근원적인 문제로 들어가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장구한 시간과 공력을 들인 교육의 결과는 얼마나 견고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참담하다. 양심이나 긍지, 이성은 어디에도 없다. 원시세계, 동물의 세계, 맹수들의 세계에서도 존재하는 룰(rule)마저 깨어진 난잡하고 치졸하고 역겨운 세상이다. 거기 ‘의사의 아내’가 눈뜬 자로 설정된 것은 천사 하나 오롯이 빚어 놓은 것만 같다.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이 의사의 아내의 눈을 통해 세상을 조망한다. 그의 시선을 따듯하다. 헌신과 사랑, 눈뜬 자로서의 책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마지막 의지에 관하여 천착(穿鑿)한다.

작가는 묻는다. 세상이 모두 눈멀고 당신 하나 눈뜬 자라면 니체가 말하는 철인이 되어 인류를 이끌 자신이 있는가.

소설 속에 이런 말이 있다. 남의 아파트를 종횡무진 자기 멋대로 사용하던 늙은 여인이 찾아온 집주인에게 먹을 것을 내어 놓으라는 몰염치성에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는 검은 안대를 낀 노인이 “늙은 마귀할멈은 뭐라는 거야.” 다음에 나오는 지문은 “그는 자기를 모르고 한 말이다.” 그가 그 노파와 같은 생활을 해 본 뒤에도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노파는 혈혈단신 거대 아파트 속에서 살기위해 작은 공터에 토끼와 닭을 사육하고 도살하며 양배추를 뜯어먹고 살아온 노파다. 그것도 물과 불이 사라진 아파트에서 날고기 날 배추를 먹고 살았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한마디로 불결함, 악취와 구토…. 앞뒤 가릴 새 없이 분별없이 쌓여가는 분뇨의 세상이다. 화장실은 분뇨로 넘쳐흐르고 똥은 수용소 안마당과 복도를 점령해 버렸다. 신발과 옷은 물론 손과 발 머리에 얼굴까지 똥칠이다. 어디 인간이라 할 수 있으랴. 그뿐이 아니다. 눈먼 자들이 눈먼 자들의 식량을 강탈하고 귀중품을 강제징수하며 성욕을 충족 시키기 위하여 여자를 공출해 윤간하기까지 한다.

최근에 일어난 실화 하나 들어보자. 넝마를 주어 나르는 노파가 승용차에 치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다. 젊은 여인 ― 운전자가 병원으로 모신다. 손해배상을 해주겠다. 엉엉 울며 죄송하다, 잘못했다. 쌀쌀 비는데 “이년아 눈이 없느냐. 내 손수레 어찌할 거냐. 내가 죽었으면 어찌했을 거냐.” 속사포로 쏘아대는데 모였던 구경꾼들이 하나둘 사라져 버린다. 차에 치인 노인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 싹 거두고. 숭례문 방화범이 70대 노인이고, 벌교 앞바다 성폭행 살해범이 70을 넘긴 노인이었다.

그 노인들은 문맹이 아니다. 중등이상의 교육을 받은 노인이다. 20년 전 무식했던 노인들을 문맹이었지만 칼 같은 인간의 도(道)는 지켰다. 세상은 변했고 망가졌다. 동정은 사라졌다. 노블레스 오블레즈란 말은 아직도 생소하고 낮선 말이다. 이 눈뜬 노인들은 『눈먼 자들의 도시』인들의 뺨을 난타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사라마구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밝혀 의인(義人)을 찾으라고 외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사의 아내는 현인이나 성인(聖人)이 아니다. 평범한 인간으로 겸손을 잃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에게 가능성을 일깨우는 희망의 글 이다.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필체는 불쾌하다. 문장부호는 쉼표, 마침표이다. 물음표, 따옴표, 느낌표, 말줄임표…. 모두 생략해 버렸다. 다닥다닥 붙여 놓은 문장들. 손가락으로 일일이 짚어가며 읽어야 할 판이다.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을 쓴 러시아 작가 리오니드 치프킨의 글이 이렇다. 꼭 이렇게 써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 글에 집중하라고. 왜?

말과 생각과 글의 일치를 시도하는 새로운 글쓰기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현실과 상상의 조화, 화자와 화자가 서술하는 담론간의 일치, 내적 담화와 담론의 긴장, 독자들의 집중력을 요구하여 작가가 구축한 허구와 사실의 세계에 참여토록 하는 노력이 얼마나 성공적인가에 대하여는 회의적 이다. 원서와 번역본의 차이 때문일까.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지워졌다. 불특정 다수가 살아가는 도시에서 실상 이름은  필요 없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실명(失明)에서 이름은 사치다. 조직과 계급, 사회 경제체제가 붕괴된 곳에서 인간 개체의 특징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냥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아내, 안과의사, 안과의사의 아내, 검은 안대를 한 노인, 사팔뜨기 소년,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 이렇게 일곱 명이 주요 등장인물로 명명된다. 이름을 지우고 나니 실체는 사라지고 그림자만 남는다. 아니면 이름이 인간 실체를 지우고 우리는 이름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작가가 말하는 사악한 통제기구는 정부다. 그리고 대리인이 군인으로 등장한다. 수용소 안의 질서는 충분히 통제가능하다. 그러나 정부는 냉정하다. 이미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진, 눈 머는 병을 옮기는 보균자로서 스스로 자멸하기를 기대하는 시스템으로 변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할 당연한 의무를 포기하는 이 몰지각한 행위는 인간을 위한 조직이 아니다. 그게 우리가 믿고 의심치 않는 정부라는 기구이다.

그러나 이 견고하고 거대한 조직도 백색 공포 앞에 와르르 무너진다. 은행장이 회의 장소로 가는 길, 9층과 10층 사이 엘리베이터 속에 갇히고, 정전(停電)으로 은행 지사장 총회는 난장판으로 변한다. 지사장들은 총회의 장소 의자에 앉자마자 눈이 멀고 컴퓨터와 마이크, 스피커, 조명등은 일시에 꺼지며 책상 밑으로 굴러 떨어지거나 깨어져 아수라장이 되어 조직은 쑥밭이 된다. 어찌 은행만이겠는가 방송국, 행정기관, 정부조직, 사법당국, 모든 국가 기관이 마비된다. 시각(視覺)의 부재, 이 것 하나만으로 인간 세상을 정립하던 은유의 힘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인간을 인간이게 한 것. 그게 눈뜸의 힘이었던가.

다행히 소설을 의사의 아내 한 사람의 사랑과 헌신으로 인간 탐험의 순례를 마치면서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로부터 하나하나 치유되기 시작한다.

이 글에 대하여 조지 오웰의 『1984』, 카프카의 『심판』, 히틀러의 유대인 수용소, 솔제니친의 『암 병동』과 비교하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꼭 비교하려면 윌리암 골딩의 『파리 대왕』을 찾아야 한다.

인위적 조직과 규범, 통제로서의 인간말살이 아니라 사라진 감각, 에고, 슈퍼에고가 아닌 이드로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때문이다. 

읽기를 마쳤다. 그리고 나에게 묻는다. 나의 궁벽한 교양과 지성, 그리고 초라한 이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지나온 날들의 점철된 얼룩진 행위들은 어떤 속죄로 치유될 수 있을까. 

 

윤동주의 서시를 다시 읊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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