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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쉽게 찾기 ㅣ 호주머니 속의 자연
윤주복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적, 산림청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우리집 서가에는 식물도감 따위의 책들이 몇 편 꽃혀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보았던 책은 '해충도감'이었는데, 그 책에는 나무에 서식하는 각종 해충들의 흑백사진과 함께 애벌래의 특징들이나 나무에 어떤 종류의 해를 입히는지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 책 덕분에 어릴 적 플라타너스에서 떨어지는 애벌래들을 '송충이'라 부르며 기겁하는 아이들에게 송충이는 소나무에서만 사는 것이고, 플라타너스에서 사는 애벌래는 '미국흰줄나방애벌래'라고 말해 줄 수 있었다. 물론, 송충이와 달리 미국흰줄나방애벌래는 독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애벌래가 너의 팔뚝을 기어다니더라도 쏘일 염려가 없다는 친절한 설명도 해 주었다.
사실 길거리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수없이 마주치는 나무들이지만,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저 무의미한 나무일 뿐인지라. 나는 때때로 그 나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그렇다고 사람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게 나무를 볼 때마다 일일이 이름을 불러 줄 만큼 너그럽지 못한 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는지, 서점의 할인 판매대에서 마주친 이 책을 선뜻 사게 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제목과는 달리 길에서 보았던 나무를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무별 잎모양, 계절별 꽃 색깔 등으로 나무를 찾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배려해 주었지만, 책을 들고 나무 앞에 서서 꼼꼼이 비교해 가며 찾지 않는 이상, 우연히 지나친 한 그루의 나무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책 속에서 다시 찾아내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름대로 '호주머니 속의 자연'이라는 부제를 달고서,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들려고 노력했다고는 하지만, 천연색 칼라 사진이 수두룩한 이 책은 가볍게 들고 다닐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다.(물론 좀 더 튼튼한 팔뚝과, 여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책장 한 구석에 꽃힌 채 문득 기억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 이 책의 운명이었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올 봄에는 나름대로 이 책을 통해 회양목과 조팝나무를 새롭게 기억하게 되었으니, 책으로서는 뿌듯한 일이었을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