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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삼부작
폴 오스터 지음, 한기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1996년 5월
평점 :
절판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을 그다지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읽을 만한 책을 찾는 것이 귀찮아진 나는 한 권쯤 더 읽어 보아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이라도 쑤셔 넣어야 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렵게 읽지 않았던 그의 다른 작품을 보는 것은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몇몇 구절 속에서 나는 그가 '말(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명명)'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대체로 그의 말투는 단정적이면서도 회의적이기도 했다. 이런 느낌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나도 모르게 논문을 읽으면서 하던 버릇대로 인상적이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구절에 띠지를 붙이며 읽어 갔던 것인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 순간 눈에 들어온 너덜너덜하게 삐져나와 있는 띠지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곤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어 쓰레기통에 버려야만 했다.
결국 존재의 문제이다.
그리고 결국 혼자이고, 혼자일 때에는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 사념들 속에 묻힐수록 자신은 더욱 더 고립되고, 그러다 보면 존재 자체도 무의미해 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하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 될 수도 있을 것인데, 그것은 보통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나 일어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거짓된 모습에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곳과 동시에 저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이편 뿐이며 저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항상 이러한 세계에, 그저 여기 있는 것 이상의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는 세계에 만족한다. 그런 것은 명확하고 완벽한 것이어서 일부러 걸음을 멈추고 확인해 볼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세계가 나로부터 사라지고 희미한 그림자 이외에 달리 볼 것이 없게 된다면 전에는 한번도 생각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삶이란 필연적인 사실들의 집합이며 우연한 교차나 요행 또는 목적이 없는 것들은 달리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일 뿐이다.
Il me semble que je serais toujours bien là où je ne suis p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