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문학 - 삶, 그 열림과 생성의 시간 아우또노미아총서 10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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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잠재성과 활력에 주목해야
 [인터뷰] 『카이로스의 문학』펴낸 조정환 문학평론가
이메일보내기 위지혜 기자
 
 
 

“‘다중’이라는 개념을 노동자나 민중, 대중하고 대비시킬 때는 휴먼‘human’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보다 본연적으로 들어가면 ‘사람’만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중’은 우주 만물을 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실재로 그렇게 봐야만 ‘다중’에 대한 온전한 접근이 가능하다.”

조정환 문학평론가가 세 번째 평론집 『카이로스의 문학』을 엮어냈다. 민주주의의 민족문학론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민족문학론과 자기비판』(연구사,1989), 노동해방문학론을 중심으로 한 『노동해방문학의 논리』(노동문학사,1990) 이후 15년만이다.

그의 긴 공백기간에는 9년이라는 수배생활이 있었다. 1989년 <노동해방문학> 창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1990년 말부터 1999년까지 전국지명수배령 아래 수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 사이 ‘이원영’이라는 필명으로 다양한 철학적 연구와 함께 번역 작업들을 해 온 저자 조정환을 만나 그가 이번 평론집에서 강조하고 있는 ‘삶문학’과 '버추얼리즘'에 대해 들어봤다. 다음은 고봉준 문학평론가와 그가 나눈 인터뷰를 기자가 정리한 것이다.

오랜만에 평론집이 나왔다. 평론집을 엮게 된 특별한 계기나 과정이 있나.

수배가 풀리고 2000년 이후부터 문학에 관한 글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일상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문학에 대해 늘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80년대 가졌던 생각들과 달라진 어떤 문학 지형에 대한 나름의 생각은 있었으나 준비할 시간이 사실상 없었다. 한마디로 현실이 안 받쳐주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재작년부터 '미학세미나'를 하기 시작했는데, 한 1년 반 정도 공부하면서 어느정도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 그래서 너무 늦기 전에 일단 지난 글을 묶으면서 총론에서 내가 그동안 공백으로 남겨뒀던 그 기간을 총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90년대 문학의 성격을 ‘문학의 산업화’로 규정하면서, 문학권력 논쟁이 권력의 불공정성이나 비양심성을 지적했지만 권력자체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았고, 또 문학의 상업주의적인 부분에서는 상대적으로 간과했다고 말하고 있다. 문단 지형을 볼 때 문학권력을 반드시 상업주의로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학연이나 지연 같은 연고주의를 통한 상징권력의 재생산은 아닐런지.

인적인 맥락에서 보면, ‘문학판’이라는 것이 사람관계로 많이 움직이기 때문에 인적인 네트워크가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학맥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작품들의 선별 할 때는 계산이 따른 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시장 속에서의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선별 요소이고, 그런 조건 속에서 ‘연’이라고 하는 것이 부차적으로 고려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요한 측면에서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현재 자본주의에서 놓이는 위치나 문학의 기능, 그것을 따지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이후에 나온 주목할 만한 작가들의 경우
그 자신이 충분히 ‘소수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소수적’인 경향을 자기 작품 속에 본능에 가깝게
담아내는 그런 현상을 볼 수 있다."

지금 한국문학은 철저하게 ‘문단’이라는 좁은 영역을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이 90년대 이전의 문학과 90년대 이후의 문학의 성격을 규정짓는 특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소수문학적인 가능성’이라는 것이 과연 문단 안에서 가능한 것인지 궁금하다.

해방 이후에 문학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 영역으로 구축한 것이 ‘문단’이었는데, 우리는 80년대 문단이라는 것이 와해되는 경험을 겪었다. 나 역시 정식으로 문단이라고 하는 데에 데뷔한 적이 없고,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당시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이 굉장히 활발했고 비제도적인 유통망이 발전돼 있었기 때문에 굳이 기존 매체들을 부리지 않더라도 책을 출판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다가 90년대 운동이 쇠퇴하면서 다시 문단이 복원되는데, 그것이 과거의 형태로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라는 것이 문단에 침투하면서 과거 엘리트적인 작가 선별하고는 다른 선별 기준이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창작경향을 볼 때 시장이라는 것은 굉장히 복잡한 요소를 갖는데, 무조건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긍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문학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반드시 시장 내부에 있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또 시장 내부에서도 현존하는 시스템을 넘어서고, 그것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들이 전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이후에 나온 주목할 만한 작가들의 경우 그 자신이 충분히 ‘소수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소수적’인 경향을 자기 작품 속에 본능에 가깝게 담아내는 그런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만이 유일한 장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80년대를 돌이켜보면, ‘노동문학’이나 ‘노동해방문학’이라는 것이 문학제도 바깥에서부터 출현해서 일정한 접전을 이뤄나가는 과정이 있었다. 그때 당시 집단창작이라거나,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글쓰기가 사실상 ‘소수’라고 하는 것에 딱 걸맞지는 않지만 새롭게 나타났던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비제도적 영역에서 소수적인 실험들이 이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요즘 인터넷은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소수적 가능성’이라는 것은 비시장성 영역에서도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 또 그런 곳에서 나온 힘들을 차후에 시장 내부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지 않나는 생각이다. 

문학권력 논쟁과 관련해서,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은 권력의 평면에서 불가능하고 삶의 평면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셨는데, 삶의 평면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권력’과 ‘삶’이란, 만약 ‘힘’ 개념으로 얘기한다면 ‘권력’대 ‘활력’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힘’의 두 가지 유형에 대한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데, 아마도 80년대의 운동을 넘어설 수 있는 분기점이 있다면 바로 힘의 두 가지 부분을 가르는 데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도 부보아르(pouvoir)와 피상스(puissance)를 가르고, 네그리 같은 경우도 그와 유사하게 힘을 구분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다. 또 맑스의 경우에는 『경제학-철학 수고』 같은 데서 ‘활동력’과 ‘노동력’을 구분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 그 자체는 자본이 활동력을 자기에게 걸 맞는 형태로 변형시켜 사용하는 권력의 세포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활동력을 노동력으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하자마자 안정적인 기반이 확보된 셈이다. 노동력을 축적해 낸 결과는 경제적으로 보면 자본이고, 정신적으로 보면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과 권력’ 측면에서 보자면, 문학이 권력이었던 것은 꼭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문학이고, 인문학이라는 것은 오히려 신자유주의 이전의 사회 속에서 더 정치적 기능이 강했기 때문이다. 순수문학조차도 그림자진 정치 형태를 갖고 있었고, 정치적인 발언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그것에 대항하는 60년대 참여문학이나, 70년대 민족문학이나, 80년대 민중문학, 노동문학 역시 정치적인 차원에서 그 자신이 대안적 권력이라는 방향에서 작업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우파적인 정치문학이 있고, 좌파적인 정치문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권력을 동일시하는 관점의 역사는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책에도 썼다시피 80년대 문학운동이 90년대 문학권력으로 전화되는 것은 특별히 이상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문학이 이해될 때 드러내는 문제점들이 이 책에서 얘기하려는 내용이었다. 90년대 문학권력론자들의 경우는 분파화 된 문학 집단들이 행사하고 있는 불공정성, 비합리성을 문제 삼았다.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공정성과 합리성만을 문제 삼을 때에는 대안권력, 과거의 우파적인 정치문학에 대해서 좌파적 정치문학이 대안권력을 추구한 것처럼, 대안권력을 추구하거나 권력분점을 요구하거나 이런 경향을 갖게 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문학이 현재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이 구조를 완전히 해체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숙고로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을 견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노동력’을 ‘활동력’으로 전환시킨다는 것 같은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목표 속에서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함정이랄까, 그런 한계를 드러냈다는 것이라고 본다.

최근 예술이나 정치철학에서 재현패러다임의 극복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현, 권리, 주권, 표상, 대의제 같은 개념들이 극복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재현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에는 쉽지 않은 현실적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언젠가, ‘노동거부’에 대한 담론이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최소한의 권리마저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억압적인 효과를 발휘한다고 비판했는데, ‘권리’나 ‘재현’ 같은 개념도 마찬가지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묘한 지점들이 분명히 있다. 현실에서 개혁적인 혹은 혁신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담론이나 개념, 아이디어, 혹은 물화된 제도들에 대한 비판이 이것이 수행하는 순기능을 부정해버림으로써 오히려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느냐는 두려움이 상당히 많이 있다.

이 문제를 풀어가는 데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재현 혹은 권리가 가진 가능성 모두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안 된다고 본다. 어떤 재현이나 개혁, 권리 등의 문제를 제기할 때 그것이 놓여 있는 지반을 동시에 드러내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그냥 그것에 멈춰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지고, 실제로 결과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키아밸리 같은 경우를 보면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는 ‘사자의 계기’하고, 개혁적인 문제, 군주가 신민들을 대함에 있어서 군주가 수행할 수 있는 변화의 지점을 ‘여우의 계기’로 해서,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혜를 동시에 얘기한다. 지금 우리는 여우 이야기만 하거나 사자 이야기만 하는 것에 그쳐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여우 이야기만 하고 근원적인 힘의 대한 이야기를 제외시켜 버리게 될 때에는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만들어 나가는 개혁담론으로 한계 지워져 버리기 때문에 위험한 측면을 갖는다. 반대로 개혁적 계기를 전부 부정해 버리고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이상적 문제제기에 머물 때에는 로맨틱한 차원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두개를 어떻게 분리시키지 않고 동시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표현과 재현의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재현 그 자체가 표현의 그 계기로서 주어지는가, 아니면 표현을 억압하는 것으로서 나타나는가. 그런 식으로 문제를 중첩적으로 볼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권력적이거나 중앙집권적인 것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의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필
요가 있다고 본다."

황종연의 ‘비루한 것의 카니발’에 대한 비판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그만큼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90년대 문학이 표방해온 사인화된 세계가 특이성을 개별성이나 개체성으로 바꿔버림으로써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한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개체를 특이성으로 정의한다면, 이때 특이성들의 연합 내지 소통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가능하겠는가.

‘개인’을 ‘singularity’(특이성)로 파악하는 것하고, ‘individuality’(개인성)로 파악하는 건 굉장히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individuality’로서 개인을 파악할 때는 개인 대 개인의 연합 가능성은 내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초월적인 매개자가 필요하게 된다. 근대에서 법을 세우는 문제와 같다. 개인들을 법의 통제아래 둠으로써 양자 간의 갈등을 통제하는, 그럼으로써 사회로부터 분리되어서 옹립된 권력영역을 구축하고 정당화한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특이성'은 개체들 간의 연결을 제3항이 아니라 스피노자 식으로 얘기하면 ‘실체’라고 하는 기반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개체들 간의 차이적인 힘들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러한 것 때문에 이 양자 간의 연합 가능성은 내적인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삼인주의에서 공공영역은 제 삼자의 매개를 합법화하는 정치이데올로기이고, 신자유주의 경우에도 초국적의 형태로 연합한 자본들을 수많은 사람들의 삶 위에 세우고, 이것을 주권형태로 표현해 내는 것이 제국이라는 실체다. 이렇게 공공의 방식, 혹은 주권의 방식, 초월적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조직화의 방향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그것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창출해낼 필요 없이 이미 네트워크라는 방식으로 90년대 이후에 시도되고 있다. 우리는 쉽게 인터넷에서 네트워크적인 모델을 찾을 수 있고, 좀 길게 본다면 1800년대 좌파운동이 추구했던 인민군 형태, 인민군형태는 중앙집권적인 방식인데, 이 것이 1960년대로 가게 되면 도시 게릴라 운동으로 바뀌게 된다. 일정하게 네트워크적인 성격하고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중첩돼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90년대 네트워크 같은 경우를 보게 되면 중앙집권적 성격이 거의 희미해져가는 상황에서 2002년 촛불시위처럼 사람들의 결집이나 재결집이 특정한 지도부의 지휘 아래 이뤄지지 않고 내적인 뭔가에 스스로 참여하는 힘들에 의해서 모임들이 생성되고 흩어졌다가 모이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권력적이거나 중앙집권적인 것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의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80년대의 민중문학론이나 노동해방문학론이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중요한 원칙으로 내세웠다면, 재현 패러다임에서 표현 패러다임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는 논리 속에선 언뜻 자생성에 대한 강조 같은 게 느껴진다. 혹시 표현 패러다임이 또 하나의 미학주의로 전락할 위험은 없는가. 그리고 그것이 자생성에 대한 옹호인지 말해 달라.

삶의 에너지들의 분출을 중심으로 해서 사고하기 보다는 분출 가능성을 가진 힘들을 어떻게 잘 조직해서 내가 바라는 바의 지점에 도달하게 만들까라고 하는 사고법이 있다. 자본가는 그것이 이윤을 많이 축적할 수 있는 것이었을 터이고, 지금 좌파들 같은 경우는 생산력을 더 활성화시키는 방법일 터이지만, 사유 구조는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사유 구조에 대한 대항이랄까. 그것이 ‘표현’ 개념으로 나오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대중이라고 부르는 다수의 사람들(다중)의 삶의 내재적 에너지를 중시하고, 이것들의 역동적인 움직임들을 우리가 잘 파악해서 우리의 정치적 활동이라고 하는 것도 그 중 일부로 전개해 나가게 하자는 것이 취지이다. 

이렇게 볼 때는 ‘자생성’ 담론하고 말만으로 보면 크게 다를 바 없을 수도 있다. ‘자생’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성을 설정하는 위에서 해석도 분리 정립된 외부로의 힘이라면, 의식성이라고 하는 것을 오히려 다중의 힘들의 계기로서 파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성도 다중의 ‘피상스’ 속에 들어 있는 자생적인 힘인 것이다. 의식성 자체가 자생성하고 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의식성이 자발적인 것이고, 누구나 의식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아나가고 있다고 일단 보고 있는 것이다.

삶을 ‘잠재성’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잠재성’의 관점에서, 삶에 있어서 문학의 위상과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잠재성’이라는 개념이 나로서는 90년대 말부터 중요한 어휘로 여겨져 왔고, 지금도 잠재의 문제를 얼마만큼 잘 파악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잠재라고 함은 실재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 현실적인 것하고는 다르지만 실재하지 않은 것은 아닌 어떤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잠재’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잠재의 정의는 사실상 문학이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이 다루고 잘 표현해 온 것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의 경우는 오히려 현실화된 차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고, 철학의 경우는 ‘잠재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지만 현실과 상관관계 안에서 그것을 고민했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은 항상 현실적인 것을 초월하려고 하는 지향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잠재’라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구현해 냈던 독특한 지점이 환상과 구분되는 잠재성과 관계를 맺고 드러내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리얼리즘’이 등장하면서 잠재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온 경향이 있었다. ‘virtual’(잠재적인) 것과 ‘actual’(현실적인) 것은 모두 ‘real’에 속하는 것인데, 리얼리즘은 보통 ‘actual’한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현실화 된 것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현실의 전형, 총체성, 진리를 잘 드러내는가 하는 평가기준을 설정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점차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 미학적 조건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향후의 문학들이 현실적인 것 속에서도 잠재적인 것을 어떤 억압 없이 자유롭게 추구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90년대 이후 문학에서 상당히 낙관적인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주의적 규율의 억압적 지점이라거나 과거 사실주의 이전의 문학들이 가졌던 공상성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유머감각이라거나 아이러니를 동원해 ‘잠재성’을 건드리는 능력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조정환의 『카이로스의 문학』(갈무리, 2006)

 
평론집의 제목이 ‘카이로스의 문학’이다. 시간을 생성의 역능이 갖는 역동성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생성’이라는 말 자체는 ‘생산’과는 달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는 데 그것이 다시 과거에 있었던 것으로 귀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산의 영역을 ‘actual’(현실적인) 것에서 찾는다면, 생성의 영역은 ‘virtual’(잠재적인) 것에 찾는 경향을 보여준다.

과학적인 방식으로 얘기해보면, 인간의 삶을 넘어 전 우주적인 삶을 들뢰즈는 ‘부정관사적인 삶’이라고 하는데, 그 삶을 지칭할 때 ‘생성’이라는 문제가 잡히기 시작한다. 그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현실적인 모든 것이 부정관사적인 삶으로 전화되어 가는 과정들, 이 삶은 자기 자신을 열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열어간다는 것은 어떤 아이가 태어난다거나, 작가가 작품을 써서 완성한다거나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부 잠재적인 의미에서 부정관사적인 삶이 자기를 표현하되, 그렇게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이 도달하는 지점은 부정관사적인 삶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구분되는 특정한 영역을 갖는 것이 아니고 삶 속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한 시인이 꽃을 노래할 때 꽃을 여는 것, 혹은 어떤 작가가 이주노동자를 소재로 해서 글을 썼을 때 그들의 삶이 그 속에서 열리는 것, 그 열림을 ‘생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열어냄 자체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생성’이라기보다 부정관사적인 삶이 자기 자신을 열어내서 전체로서의 삶을 다른 것으로 바꿔나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생성’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번 책을 비롯해 최근 ‘다중’이라는 개념이 많이 등장한다. 저자는 "‘다중’은 근대의 피조물이 아니라 근대를 생산하는 존재고, 근대를 살고 있지만 근대 외부를 구성한다"고 말하고 있다. ‘노동자’, ‘다중’, ‘민중’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다중’이라는 개념을 노동자나 민중, 대중하고 대비시킬 때는 휴먼‘human’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보다 본연적으로 들어가면 ‘사람’만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중’은 우주 만물을 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실재로 그렇게 봐야만 ‘다중’에 대한 온전한 접근이 가능하다.
 
‘다중’이란 것은 구분은 가능하지만 그러나 분할은 불가능 수많은 것을 말한다. 우리가 지금은 인간의 모습으로 있지만 죽고 나면 물로 증발하거나, 무기물로 변해버린다. 그때는 인간이 아니었다고 봤던 그 무엇으로 우리가 전환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것도 구분은 되고 있지만 사실은 분할 불가능한 어떤 하나가 드러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계급은 ‘일한다’는 표상을 가지고 대상을 파악하기 때문에 눈이 곧바로 공장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노동계급을 공장이라고 하는 특수한 공간에 집결돼 있는 임금노동자들이라고 정의해 버리는데, 그것이 우리 시대변화의 주체성을 설명하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 협소해져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단 노동계급하고 다중은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중이라는 것은 노동계급보다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민중의 특성은 오래 전부터 정부의 구성 주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은 주권자이다. 즉 부르주아적이냐, 그렇지 않냐를 떠나서 일단 민중의 행동양식은 주권을 창출함으로써 자기 삶을 보장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스피노자나, 홉스가 살던 시대를 보면  ‘민중’하고 ‘다중’을 확연히 가르는데, 민중은 리바이어던에 의해 통일될 집단으로 보고, 다중은 주권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권 외적에서 움직이는 ‘위험한 세력’으로 분류한다. 다시 말해 ‘민중’은 주권을 지켜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고, ‘다중’이란 것은 주권에 적대적이고 주권을 해체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민중의 ‘주권’이라고 하는 것은 군주권에서 나온 것이고, 군주권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지배체제다. 이것이 나아가 한 사람이 아닌 한 집단의 지배, 한 당의 지배가 되기도 하고, 관료들의 지배가 되기도 하는데, 이처럼 하나의 원리나 형식, 의지로 규합되어진 하나의 힘에 의한 타자에 대한 독재의 직격지배를 주권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들은 이러한 주권에 대해 거부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주권의 필요성에 대해 얘기하는 쪽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결국 민중운동은 새로운 집권의 창출 형식으로 진행되게 된다. 그래서 반주권적이고 탈주권적인 ‘다중’은 그런 의미에서 민중하고 구별된다.

이번 평론집에선 유독 삶문학과 ‘덕’에 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여기서 말하는 ‘덕’은 ‘품성’이나 ‘도덕’과 ‘윤리’같은 개념과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그리고 ‘덕’이 질서 속에 있지만, 그 질서에 대항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느낌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덕’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덕성이다. 이 외부라는 것은 주권으로부터 오는 지배적인 것을 말한다. 맑스가 이데올로기를 설명할 때 지배계급의 필요이자 지배계급의 생각이라고 말 한 것처럼,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권력의 음성들을 규범화한 것을 도덕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ethic’하고는 구별되는 것인데, 『에티카』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와 같이 명령어로 시작하기 보다는, ‘우리는 스스로를 원인으로 삼는 것을 실체’라고 보고 있다. 자기 원인적인 것을 윤리학의 단초로 삼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것을 ‘힘’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 힘이 ‘정동(affect)’, ‘이성’, ‘자유’와 같은 것들로 자기를 구체화 시켜나간다고 봤다. 이것을 윤리적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고, 이 과정 전체를 ‘덕’의 과정으로 봐도 상관없을 듯 하다. 내재적 차원의 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 우리가 ‘표현’이라고 부르는 그 과정을 ‘덕성’의 과정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문학과 관련해 향후의 활동계획이 있다면?

그동안 정치철학이나 사회과학 쪽에서 많은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문학은 상대적으로 신경을 못 쓴 경향이 있었는데, 미학공부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들을 보충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번 봄에 집단작업으로 ‘9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이 보여주고 있는 성격이 무엇인가’를 주제로 세미나 형태의 강의를 기획하고 있다.

온라인상에서 이뤄지고 있는 ‘자율평론’의 경우에는 오프라인 작업을 계획 중이다. 기존의 정론은 정론으로 해나가되, 문학평론이나 능력이 닿는다면 문학작품들도 취급할 수 있는 잡지 작업을 올 안에 할 생각이다.

나로서는 아직도 철학이나 많은 부분에 있어 공부가 더 필요해서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에 시간을 투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이런 작업들을 통해서 조금씩 하다보면 현재 판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나가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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