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 I
얼마 전에 발간된 [근대철학] 창간호에 수록된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원래 제 학위논문에서 좀 미진하게 다루었던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쓴 것인데,
쓰다가보니, 책 한 권으로 확장해도 괜찮은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외국에서도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드문 편인데, 잘 발전시켜보면 철학사적으로, 또
스피노자 철학 체계에 대한 연구로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기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당분간은 다른 주제에 매달려야 할 처지라서 당장 이 문제를 진척시키기는
좀 어렵겠지만(사실 참고해야 할 역사적인 문헌들이 만만치 않아서 쉽게 끝낼 수 있는 일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가까운 장래에 본격적으로 논의를 발전시키고 싶군요.
이 글은 작년 여름에 서양근대철학회에서 발표했던 글을 좀 다듬은 것인데, [근대철학]에는
분량 제한이 있기 때문에 축약본이 실렸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인용하거나 논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분들은 [근대철학]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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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 I
1. 머리말
이 글은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또는 (스피노자가 이를 주로 복수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notiones communes 개념의 기원과 의미, 그리고 번역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notio communis 또는 “공통 통념” 개념1)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인식론”의 측면에서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개념은 {윤리학} 2부에서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데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하는 것, 또는 예속적인 삶의 양식을 합리적으로 개조하고 자유를 영위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주요 목표라면, 들뢰즈가 잘 보여주었듯이 공통 통념은 이러한 이행을 성취하는 데서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Deleuze 1969 17장 참조)
따라서 우리는 공통 통념이라는 개념이 그의 철학, 특히 {윤리학}에서 체계적으로 규정되고 여러 번 사용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뒤에서 볼 것처럼 그의 저작에서 이 개념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개념이 가장 의미 있게 사용되는 {윤리학} 2부 정리 37에서 40의 논의 역시 공통 통념에 대한 체계적인 규정을 제시해주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이 글에서 논의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윤리학} 2부를 중심으로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을 좀더 체계적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이다.2) 이러한 재구성은 네 가지 단락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2절과 3절에서 우리는 notio communis 개념의 철학사적인 유래를 해명해볼 생각인데,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데카르트에서 이 개념의 특성과 용법이다. 데카르트는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한 notio communis 개념을 근대 철학사에 새롭게 복권시키는 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다른 개념이나 문제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스피노자는 notio communis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의에 기대어, 그것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비판하고 재구성하면서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공통 통념 개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론적 독창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논의를 좀더 꼼꼼히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이러한 논의를 거쳐 4절에서는 공통 통념 개념의 특성과 형성 과정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스피노자의 용법을 재구성해볼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개념의 차이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3)
2. 고대 스토아학파에서 notio communis의 의미
notio communis는 에피쿠로스 또는 고대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특히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키케로는 {아카데미아 학파에 대하여Academici Libri}에서 스토아 학파의 인식론을 다음과 같이 소묘하고 있다.
왜냐하면 감각들의 원천이자 심지어 그 자체가 감각들과 동일한 것인 정신은 정신을 움직이게 하는 사물들로 정신 자신을 향하게 만드는 자연적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은 어떤 인상들visa을 곧바로 사용하기 위해 포착하는 반면 다른 인상들은 저장해두는데, 여기에서 기억이 생겨난다. 하지만 정신은 나머지 우리 인상들을 유사성에 따라 조직하며, 이러한 [조직된] 인상들로부터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통념들(그리스인들이 때로는 엔노이아이ennoïai라고 부르고 때로는 프롤렙시스prolêpsis라고 부르기도 한)이 생겨난다ex quibus efficiuntur notitiae rerum. 이성적 추론과 증명, 셀 수 없이 많은 사실들이 보태지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지각(perceptio/katalêpton)이 나타나며, 점차 개선되어 지혜에 이르게 된다.(Cicero 2005, pp. 19-20)
키케로에 따르면 프롤렙시스는 “정신 안에서 선취된 사물들에 대한 일종의 표상이며, 이것 없이는 사물을 이해할 수도 없고 탐구나 토론을 수행할 수도 없”4)(Cicero 1978, p. 54-55)는 것으로, 그는 이 용어를 에피쿠로스가 고안해냈다고 말하고 있다.(같은 곳) 에피쿠로스가 과연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5), 적어도 이 용어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에 의해 체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키케로는 이 인용문에서 엔노이아이와 프롤렙시스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별다른 언급도 하지 않고 있지만,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간주되는 아에티우스Aetius의 단편에서는 두 개념의 차이가 좀더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사람이 태어날 때 영혼 안에 어떤 것이든 기록할 수 있는 종잇장 같은 중추부hēgemonikon를 지니고 있다. 그는 이 위에다 자신의 관념들 각각을 새겨 넣는다. 첫 번째 기록방법은 감각에 의한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떤 것, 예컨대 하얀 것을 지각했을 때, 이 하얀 것이 사라진 뒤에는 이것에 대한 기억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일한 종류의 많은 기억들이 생겼을 때, 우리는 우리가 경험을 갖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수의 유사한 인상들이 경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관념들은 이와 같은 식으로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자연적으로 일어나며, 다른 것들은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이루어진다. 전자가 “프롤렙시스”이라고 불리며, 후자는 “엔노이아”라고 불린다.(Long & Sedley 1987, p. 238)
이 두 가지 개념 사이에,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인식론 사이에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헬레니즘 연구자들 사이의 논쟁점 중 하나지만6), 우리의 논의를 위해서는 두 개념을 등가적인 것으로, 곧 notio communis 개념의 이론적 원천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아에티우스의 단편(그리고 앞서 인용한 키케로의 구절)의 중요성은 오히려 스토아학파에서 공통 통념이 지닌 경험적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곧 키케로나 아에티우스 모두 공통 통념을 우리의 정신에 본유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관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습득되고 더 많은 경험과 교육을 통해 강화, 향상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는 공통 통념을 일종의 본유 관념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개별적인 경험들을 통해 발현되는 소질이나 능력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 때문에 키케로가 말하는 프롤렙시스의 특성, 곧 “이것 없이는 사물을 이해할 수도 없고 탐구나 토론을 수행할 수도 없”다는 것을 초월적이거나 초월론적 원리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7)
3. 데카르트의 notio communis 개념
스토아학파에서 체계적으로 사용된 이후 중세철학 내내 notio communis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유스투스 립시우스Justus Lipsius 또는 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등에 의해 스토아주의가 복권되면서 다시 이 개념도 철학적인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8) 립시우스를 비롯한 신스토아학파 사상가들이 고전 스토아학파에서 사용된 notio communis 개념의 의미에 충실했다면, 데카르트는 이 개념에 대해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활용하고 있다.
1) 공통 관념의 특성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9) 이론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지도규칙}에 나오는 “단순 본성”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개념은 규칙 6에서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에 대한 정의와 함께 처음 등장하고 있는데, 규칙 8에서 이 개념에 대한 좀더 명확한 규정이 나온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실재 자체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때의 실재 자체란 지성의 접근이 가능한 한에서만 고찰되는 실재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실재를 가장 단순한 본성과 복합적인 것 혹은 합성적인 것으로 나눈다. 단순한 것 중에는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아니면 이 두 가지에 모두 속하는 것이 있고, 끝으로 합성적인 것 중에는, 지성의 판단이 이것에 대해 어떤 것을 규정하기 전에 이미 그렇게 되어 있음을 지성이 경험하는 것이 있는 반면에, 또 지성 자신이 합성한 것도 있다.(AT X, 399; 이현복 I, 62-63쪽)
규칙 12에 나오는 데카르트의 부연 설명에 따르면, 정신적 또는 순수하게 지적인 단순 본성은 “정신의 어떤 빛을 통해 또 그 어떤 물질적인 상의 도움 없이 지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으로 “인식, 의심, 무지, 의지의 작용”과 같은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반면 물질적 단순 본성은 “오직 물체 속에만 있다고 인식되는 것”으로, 모양, 연장, 운동 등이 있다. “끝으로, 공통적인 것이란 때로는 물질적인 것에, 때로는 정신적인 것에 구별 없이 귀속되는 것이다. 존재, 단일, 지속 등이 그런 것이다.”(AT X, 419; 이현복 I, 86쪽)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러한 단순 본성들은 “모두 그 자체로 알려지는per se notas 것이고 어떠한 오류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AT X, 420; 이현복 I, 87쪽) 왜냐하면 단순 본성들은 단순하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우리가 이러한 단순 본성에 조금이라도 도달한다면, 이는 전체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단순 본성은 우리가 어떤 판단이든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기초 인식이다.10)
데카르트는 공통적인 단순 본성에 공통 관념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여기에 공통 관념이 포함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단순 본성들을 서로 연결해 주는 연결선vincula과 같은 것으로, 추론에서 도출되는 모든 것, 이를테면 제삼자와 같은 것은 서로 같으며, 제삼자와 같은 방식으로 연관되지 않는 것은 서로 상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등은 공통 관념의 명증성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공통 관념은 순수 지성에 의해 인식되거나, 아니면 순수 지성이 물질적 상을 직관함으로써 인식된다.” (AT X, 419; 이현복 I, 86쪽) 따라서 공통 관념들은 단순한 것들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들은 “그 자체로 알려지는” 명증한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선천적으로 자연의 빛을 지니고 있고, “똑같은 자연의 빛을 지닌 모든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notions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본유적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들은 단순성과 명증성, 본유성을 특성으로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후기 저작에서 단순 본성이라는 용어는 드물게 출현하는 편이며,11) 따라서 공통 관념도 단순 본성과 연계되기보다는 공리나 영원진리와 관련하여 언급된다. 예컨대 「두번째 성찰에 대한 답변」 말미에 나오는 기하학적 증명에는 “공리들 또는 공통 관념들 axiomata sive notiones communes”라는 표제 아래 10개의 명제들이 제시되고 있다.(AT VII 164-66)12) 또한 {철학원리} 49항에서 “공통 관념 또는 공리communis notio sive axioma”(AT VIII-1, 24/원석영, 41쪽)라고 말하고 있고13), {뷔르만과의 대화}에서는 영원진리를 공통 관념과 동의어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영원진리들을 공통 관념들이라 불리는 것eas, quae communes notiones vocantur으로 이해한다.”(Descartes 1981, p.103)
공리 또는 영원진리로서의 공통 관념들에 대해 데카르트는 “공통 관념들 또는 공리들 [...] 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모두 나열하기가 쉽지 않다”(AT VIII-1, 23-24; 원석영, 41)고 말하면서 몇 가지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라든가 “어떤 것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같은 명제 또는 “사고하는 것은 사고하는 동안 실존하지 않을 수 없다”(49항)는 것, “무는 어떠한 속성이나 특성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52항) 등이 그것들이다.14) 또한 「두번째 성찰에 대한 답변」에 나오는 10개의 공리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결과 안에 있는 것들 중, 유사한 또는 좀더 상위의 형태로 원인 안에 실존하지 않았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나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또는 “관념들 안에 단지 표상적으로 실존하는 실재성이나 완전성 전체는 그 원인들 안에서는 형상적으로 또는 탁월하게 실존해야 한다.”
2) 공통 관념의 단순성
데카르트는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에서 notio communis에 대해 똑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 이는 데카르트 연구자들 사이에서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문제다. 가령 장 라포르트Jean Laporte에 따르면 데카르트에서 공통 관념들 또는 공리들은 “단순 본성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연결선들vincula 또는 필연적 관계들을 보편적인 용어들로 번역한 것”(Laporte 1988, p. 305)이며, 따라서 이는 초기 저작에서 말하는 단순 본성들과 다르지 않다. 강조점이나 뉘앙스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앙리 구이에Henri Gouhier 역시 장 라포르트와 마찬가지로 공통 관념은 “단순 본성들로 간주된 실재들res 사이의 연결선들로 사용되는 단순 본성의 일종”이라고 말하고 있다(Gouhier 1987, p. 274). 반면 앨런 하트Alan Hart는, 이들의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지만,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초기 저작에서 나타나는 공통 관념과 후기 저작에서 사용되는 공통 관념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경우 다른 단순 본성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것인 데 반해, 후자는 이 단순한 것들을 연결시켜서 지식을 형성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르다는 것이다.15)
그러나 앨런 하트의 논거는 그다지 설득력 있는 것 같지 않다. 다음 구절이 그가 제시하는 주요 전거다. “그렇다면 우리 정신 안에 내재해 있는 이런 모든 공통 관념이 이와 같은 운동에서 유래하고, 이것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제 3의 것과 동등한 두 가지는 서로 같다”는 것과 같은 공통 관념을 우리 정신 안에 형성시켜 줄 수 있는 물질적 운동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나에게 가르쳐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운동은 개별적인 것particulares인 반면에 공통 관념은 보편적인 것이고 운동과는 어떠한 유사성도, 어떠한 관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AT VIII-2, 359-60; 이현복 II, 191-92쪽) 그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공통 notions 또는 공리들은 운동들과 관련되지 않지만, 단순 notions의 경우는, 운동들이 정신이 단순한 본유 관념들을 현실화하는 기회가 되는 한에서, 물질적 운동들과 관련되어 있다”(Hart 1970, p. 120―강조는 하트)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단순 관념들은 물질적 운동을 기회로 현실화되는 반면, 공통 관념들은 운동과 무관하며, 단순한 것들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두 가지 점에서 그릇된 주장이다. 첫째, 그가 인용한 구절에서 데카르트는 단순한 notions과 공통 notions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의 논점은 레기우스의 경험론적 주장에 맞서 모든 notions은 다 “성향 내지 잠재성dispositione sive facultate”이라는 의미에서 본유적임을 주장하는 데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 데카르트가 운동의 개별성과 공통 notions의 보편성을 대비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둘째, 그는 단순 notions과 달리 공통 notions은 단순 notion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만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서 경험적 기회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들이 지닌 존재론적 함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논리학적 규칙들이나 수학적 공리들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역으로 라포르트나 구이에의 입장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좀더 분명하게 설명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연결선”으로서의 공통 관념이 단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인데, 이들은 이 점에 관해 뚜렷한 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제라르 시몽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좀더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공리들의 단순성은 그것들이 관계가 아니라 존재를, 상이한 존재자들 사이의 연결이 아니라 각각의 물체들이 그것들의 독특성 속에서 소유하고 있는 존재의 일반적인 특성들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비롯한다.”(Simon 1996, p. 131) 곧 그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공통 관념들은 논리학적이거나 수학적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유일한 한 가지 주제, 곧 실존의 환원 불가능성, 무의 불가능성, 실체의 필연성 사이의 연계라는 주제만을 함축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공통 관념의 사례들이 논리학적 규칙들이나 수학적 공리들과는 무관한 존재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공통 관념들 또는 공리들이 지닌 단순성 역시 이러한 존재론적 함의에서, 곧 각각의 실재들이 지니고 있는 “존재의 일반적인 특성들”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몽의 주장은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들의 성격을 좀더 일관성 있게 해명해줄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연관성을 좀더 정확히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4.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개념
공통 통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용법에서 주목할 만한 점 중 하나는 이 용어가 초기 저작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더 나아가 체계적인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초기 저작에서 이 용어는 단 두 번 사용되는데, 한 번은 올덴부르크의 반론에 답변하면서 스피노자가 그의 반론의 요점을 정리하고 있는 곳에서16), 다른 한 번은 메이으르(Lodewijk Meyer)가 스피노자를 대신하여 작성한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서문」이다.17) {윤리학}이나 {신학정치론} 같은 후기 저작에서도 notio communis라는 용어 자체는 드물게 출현하며, {윤리학}에서는 6번18), {신학정치론}에서는 5번 사용될 뿐이다19). 하지만 특히 {윤리학} 2부에서 이 개념은 상당히 독창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가 4절에서 중심적으로 다룰 주제도 바로 2부에 나타난 공통 통념 이론이다.20)
데카르트의 용법과 비교해볼 때 notio communis에 대한 스피노자의 용법은 두 가지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notio 개념이 일의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데카르트와 달리 notio는 더 이상 단순성과 명증성, 본유성으로만 규정되지 않으며, 상상의 notio와 이성의 notio로 분화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서 notio는 인식론적 갈등 내지 분화의 소재가 된다. 이는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에서 notio의 애매성은 인간학적인 삶의 양식의 차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바로 이 때문에 notio communis에 대한 규정과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 역시 데카르트와 달라진다. 데카르트에게는 notio communis가 형성되고 구체화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재할 뿐만 아니라, 이 개념이 윤리적 실천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분석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이론은 이 두 가지 내용을 핵심적인 요소들로 지니고 있다.
1) notio의 애매성
이 단락에서는 우선 스피노자에서 notio가 어떻게 규정되는지, 이 개념에 관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notio, 곧 통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점은 2부 정리 40의 주석 1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로써 나는 공통적이라 불리며 우리의 추론의 기초를 이루는 통념들notiones의 원인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다른 원인들, 곧 어떤 공리들 내지는 통념들의 원인들이 존재하는데, 우리의 방법으로 이를 설명해보면 유익할 듯하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어떤 통념들이 다른 통념들보다 유익하며, 어떤 통념들이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는지 명백해질 것이기 때문이다.(G II 120―강조는 스피노자)
곧 그에 따르면 통념들에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이라 불리며, 우리의 추론의 기초를 이루는quae communes vocantur, quaeque ratiocini nostri fundamenta sunt” 통념, 곧 공통 통념이 있고, 그 이외에 “또다른 통념들”도 존재한다. 이 구절 바로 뒤에서 이러한 또다른 통념들의 예로 “이차적이라 불리는 통념들quas secundas vocant”21)이나 사람, 말, 고양이 등과 같이 “보편적이라 불리는 통념들”이 예시되고 있다. 스피노자는 이것들 중 특히 두 가지 통념의 형성 원인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 중 하나는 “초월적 용어들termini transcendentales”이라고 불리는 것, 곧 존재자ens, 실재res, 어떤 것aliquid 같은 것들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 말, 개 등과 같은 “보편 통념들notiones universales”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초월적 용어들은 “인간 신체가 동시에 일정한 숫자의 이미지들만을 판명하게/구분되게distincte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데서 생겨난다. 곧 만약 이미지들이 이 숫자 이상으로 나타나게 되면, “이미지들은 혼동되기 시작할 것이며, 만약 신체가 동시에 그 자체로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할 수 있는 이미지의 숫자가 훨씬 더longe excedatur 초과되면 이것들은 서로 완전히inter se plane 혼동되어 버릴 것이다.”(G II 120-21) 다시 말해 만약 신체에서 이미지들이 동시에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된다면 정신도 이 이미지들을 판명하게 상상할 수 있지만, 신체에서 이 이미지들이 완전히 혼동되어 버리면 정신은 아무런 구분 없이 모든 물체들을 혼동되게 상상해서, 이 물체들이 “마치 하나의 속성 아래quasi sub uno attributo, 예컨대 존재자, 실재 등과 같은 속성 아래 포괄되는 것처럼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 용어들이 “최고로 혼동된 관념들summo gradu confusas”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반면 보편 통념들은 전자와 비슷한 원인을 갖고 있지만, 전자와는 달리 “완전히” 혼동될 만큼 많은 이미지들이 신체에서 형성될 경우에 생기는 게 아니라 “정신이 (각각의 사람의 피부색이나 키 등과 같이) 개개의 [사람들의] 적은 차이들을 상상하지 못하고 그들의 숫자도 상상하지 못하며, 단지 이 차이들이 신체를 변용하는 한에서 모두 합치하는 것만을 판명하게 상상하게 될 정도만큼 상상의 힘을 능가”할 때 생긴다. 따라서 보편 통념들은 초월적 용어들만큼 혼동된 것은 아니지만, 개개의 이미지들 사이의 차이와 실질적인 일치점 또는 대립점들을 지각하지 못하는 신체와 정신의 무능력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는 초월적 용어들과 공통적이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이러한 보편 통념은 모든 사람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상이하게 형성된다고 지적한다. 곧 “각자는 자신의 신체의 성향에 따라pro dispositione sui corporis” 보편 통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의 직립 자세를 경탄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직립 동물로 이해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사람을 웃을 수 있는 동물로, 털 없는 두발 달린 동물로, 이성적 동물로 생각하게 된다. 이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인간을 정의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라는 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보편 통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논의는 매우 신랄하고 비판적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 notio는 훨씬 더 광범위한 외연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단순하고 자명한 것, 본유적인 것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반대로 그는 1종의 인식에 속하는 notio와 2종의 인식에 속하는 notio를 명확히 구별하며, 전자를 후자로 대체하는 것, 또는 후자에 기초하여 적합한 인식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데카르트 역시 notio가 누구에게나 명석하게 인식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는 선입견이 그러한 인식을 가로막기 때문이다.(AT VIII-1 24; 원석영 42)22)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데카르트에게 notio는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만이 존재하며, 선입견에서 해방되어 이를 명석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다. 반면 스피노자에게는 하나의 notio가 아니라 두 개의 notio가 문제가 된다. 이는 그가 notio를 상이한 인식의 종류의 문제설정, 따라서 상이한 삶의 종류라는 문제설정 속에 편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 40의 두 번째 주석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많은 것을 지각하여 보편 통념들notiones universales을 형성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보편 통념들은] (I) 감각들을 통해 우리에게 단편적이고 혼동된 방식으로mutilate, confuse, 그리고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 없이sine ordine ad intellectum23) 표상되는 독특한 실재들로부터 [형성된다](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를 보라). 이 때문에 나는 보통 이러한 지각들을 모호한 경험에 의한 인식cognitionem ab experientia vaga이라 부른다. (II) 기호들로부터 [형성된다]. 예컨대 어떤 단어들을 듣거나 읽음으로써 우리는 실재들을 다시 떠올리고recordemur, 이 실재들에 관해, 우리가 실재들을 상상하는 수단들과 유사한 어떤 관념들을 형성함으로써 [보편 통념들이 형성된다](2부 정리 18의 주석을 보라). 전자와 후자처럼 실재들을 고찰하는contemplandi 방식을 나는 다음부터 첫 번째 종류의 인식, 억견opinio 또는 상상이라 부를 것이다. (III) 마지막으로 우리가 실재의 특성들에 대해 공통 통념들 및 적합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보편 통념들이 형성된다](2부 정리 38의 따름정리, 정리 39와 그 따름정리, 정리 40을 보라).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나는 이성 및 두 번째 종류의 인식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두 가지 인식의 종류는, 우리가 조금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모든 점에서 서로 대립하고 전면적으로 단절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첫 번째 종류의 인식은 “거짓의 유일한 원인”(E II P41)인 한에서 개조되고 대체되어야 할 대상이다. 더욱이 인식의 종류는 항상 그에 상응하는 삶의 종류, 삶의 양식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통념의 애매성이라는 문제는 데카르트에서처럼 단지 선입견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곧 상상적인 notio는 하나의 선입견의 결과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삶(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삶)을 형성하고 재생산하는 조건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는 상상의 이론, 또는 알튀세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데올로기의 이론이 존재하는 데 반해 데카르트에게는 그러한 이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바로 notio에 대한 양자의 관점의 차이가 생겨난다.
2) 공통 통념의 의미
notio 개념의 차이로 미루어볼 때 notio communis라는 개념 역시 상이한 의미로 사용될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선 공통점을 살펴보자. 데카르트처럼 스피노자도 notio communis를 때로는 공리로 제시하며, 때로는 이를 “단순한 것”으로 특징짓기도 한다. 가령 {윤리학} 1부 정리 8의 주석 2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실체의 본성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 이 정리[1부 정리 7]는 모든 사람에게 공리이며, notiones communes 중 하나로 간주될 만하다.”(G II 50) 하지만 notio communis는 {윤리학}에서 이런 의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또한 {신학정치론} 6장의 주석 6에서는 다음과 같이 공통 통념을 단순한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의 본성을 명석 판명하게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공통 통념들이라 불리는 지극히 단순한 어떤 통념들quasdam notiones simplicissimas, quas communes vocant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필요하다.”(G III 253)
또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거듭 공통 통념은 “우리의 추론의 기초”(E II P40s1)라든가 “이성의 기초”(E II P44c2d), 심지어 “철학의 기초”24)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공통 통념을 추론이나 이성 또는 철학의 기초로 간주하고 있다면, 이는 그가 notio communis의 근거 또는 대상을 속성 및 가장 일반적인 특성들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곧 notio communis는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또는 그것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철학이나 이성의 기초가 되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다. 반면 데카르트에게 notio communis는 “자연의 빛” 덕분에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을 뿐, 그 근거가 분명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 따른 notio communis에 대한 고유한 용법은 {윤리학} 2부 정리 37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다. 곧 여기에서 notio communis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관념들ideas 또는 통념들notiones이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어떤 점에서 일치하며 이는 우리에게 적합하게, 곧 명석하고 판명하게 지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notio communis는 자명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획득하고 구성해나가야 하는 참된 인식 또는 적합한 인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물체는 어떤 점에서 일치하며”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실재의 특성들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실재에 대한 실질적인 인식을 제공해준다. 그런데 물체들은 단 한 가지 점에서만 일치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점에서 일치할 수 있다. 가령 상이한 두 인간의 신체는 연장의 일부라는 점에서 서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고도로 조직화된 기관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치하며, 어떤 것은 먹을 수 있고 어떤 것은 먹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이처럼 일치점이 다양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것들에 기초를 두고 얻을 수 있는 참된 인식 또는 적합한 인식의 범위도 다양하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3) 공통 통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1) 두 가지 공통 통념
이제 공통 통념들이 형성되는 구체적인 방식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이 점과 관련하여 일단 주목해야 할 것은 2부 정리 38과 39에서 제시되고 있는 두 가지 적합한 인식의 형태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스피노자는 2부 정리 38과 39에서 두 가지 형태의 공통 통념을 지적하고 있다.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 그리고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25)
인간 신체와, 인간 신체가 통상적으로 그것들에 의해 변용되는 어떤 물체들에 공통적이고, 또 고유한 것은 이것들 각각의 부분과 전체 안에 균등하게 존재하며, 이것에 대한 관념 역시 정신 안에서 적합하게 존재할 것이다.26)
마르샬 게루 이후 관행적으로 각각 “보편적 공통 통념notion commune universelle”과 “고유한 공통 통념notion commune propre”이라고 불리는27) 이 두 가지 형태의 공통 통념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곧 보편적인 공통 통념에서 고유한 공통 통념으로, 또는 역으로 후자에서 전자로 이행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지 해명하는 것이 스피노자 공통 통념 이론의 재구성에서 핵심 과제가 된다.
먼저 “보편적 공통 통념”의 경우를 보면, 스피노자는 이것의 대상을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 그리고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의 사례는 스피노자가 정리 37이나 정리 38의 따름정리에서 지시하고 있듯이 「자연학 소론」 보조정리 2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조정리 2
모든 물체는 어떤 것들에서 합치한다in quibusdam conveniunt.
증명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단 하나의 동일한 속성의 개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합치하기 때문이다(같은 2부의 정의 1에 의해). 그리고 때로는 좀더 느리게 운동하고 때로는 좀더 빠르게 운동할 수 있으며, 절대적으로 말하면, 때로는 운동할 수 있고 때로는 정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합치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의 가장 보편적인 사례는 바로 “속성”이다. 존재하는 모든 실재들은 그것이 속하고 있는 속성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물체들에 공통적인 연장 속성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처럼 보편적 성격을 띠는 인식은, 수동적인 상태에서도 적합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28) 아직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인식은 세부적인 동일성과 차이, 대립들을 정확히 식별할수록 구체적인 데 반해, 모든 물체들이 공유하는 연장 속성은 차이 없는 동일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는 또한 윤리적인 의미에서도 추상적이다. 스피노자에게 부적합성에서 적합성으로의 이행은 항상 실천적ㆍ윤리적 이행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적합한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 실천, 곧 능동화 과정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재들 사이의 동일성과 차이, 대립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하는 보편적인 공통 통념은 그만큼 구체적인 실천에서도 적은 도움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편적인 인식과는 다른, 좀더 구체적인 인식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정리 39의 대상이다. 앞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정리 38과 달리 정리 39에서는 인간 신체와 몇몇 물체들에 공통적이고 또한 고유한 것이 인식의 대상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공통 통념, 곧 “고유한” 공통 통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적합한 인식과 부적합한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부적합한 관념들의 형성
부적합한 관념들에 대한 논의는 {윤리학} 2부 정리 24에서 정리 31에 이르기까지 전개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부적합한 관념들의 본성 및 형성에 관한 제일 체계적인 논의는 정리 29의 따름정리 및 주석에서 볼 수 있다. 우선 따름정리를 그대로 인용해보자.
이로부터 인간 정신은 그것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quoties ex communi naturae ordine res percipit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해, 그리고 외부 물체들에 대해서도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동되고 단편적인 인식만을 가진다confusam tantum & mutilatam habere cognitionem는 점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정신은 (2부 정리 23에 따라) 신체의 변용들의 관념들을 지각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은 (2부 정리 19에 따라) 변용들의 관념들을 통해서만 자신의 신체를 지각하며, 마찬가지로 (2부 정리 26에 따라)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을 통해서만 외부 물체들을 지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들을 갖고 있는 한에서 정신은 (2부 정리 29에 따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2부 정리 27에 따라)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도, (2부 정리 25에 따라) 외부 물체들에 대해서도, 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2부 정리 28 및 그 주석에 따라) 단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만을 가질 뿐이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자연의 공통의 질서ordo communis naturae”라는 개념이다. 이는 “공통 통념들”과 마찬가지로 “공통의communis”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인식의 종류들의 분류에서 공통 통념들은 제 2종의 인식, 곧 적합한 인식으로 분류되어 있는 데 반해, 스피노자는 여기서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인식을 부적합한 인식으로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왜 “공통의”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양자는 각각 부적합한 인식과 적합한 인식으로 나누어지는지,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따름정리 바로 다음에 나오는 주석에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정신은, 내적으로 규정될 때마다, 곧 그것이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될 때마다가 아니라non quoties interne, ex eo scilicet, quod res plures simul contemplatur, determinatur ad earundem convenientias, differentias, et oppugnentias intelligendum,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 곧 그것이 외적으로, 다시 말해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될 때마다quoties externe, ex rerum nempe fortuito occursu, determinatur ad hoc, vel illud contemplandum 단지 혼동되고 단편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G II 114) 스피노자는 이번에는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내적으로 규정되는 것”의 일반적인 대비를 바탕에 깔고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하는 것을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곧hoc est”이라는 접속사는 의미론적 동치를 의미한다). 그런데 내부와 외부에 대한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스피노자는 내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 각각에 대해 독특한 규정을 부여하고 있다. 곧 그에 따르면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하는 것은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되는 것을 의미하며, 내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정리 29의 주석에 따르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하는 것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는 여러 개의 실재들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와 우발적으로 마주치는 “이것 또는 저것”을 개별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어떤 실재들이 우리의 신체에 강한 자극과 충격을 줄 때마다 때로는 이것을, 때로는 저것을 즉자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 따라서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은 자연의 실재 질서에 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른 지각(E II P18s)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은 우리에게 외부 물체들의 본성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쳐주기보다는 우리 신체의 습성이나 기질을 더 많이 반영하는 지각이다. 그렇다면 왜 이것을 “자연의 공통의 질서”라고 부를까? 샤를르 라몽Charles Ramond이 잘 보여주었듯이29) 바로 이 점에 “자연의 공통의 질서”라는 표현의 역설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이는 자연의 실재 질서를 가리킨다.(E IV P57s) 2부 정리 7에서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이나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스피노자에게는 자연의 객관적 질서를 가리키는 표현들이 존재하는데, “자연의 공통의 질서” 역시 그 중 한 가지이다.30) 따라서 모든 것에 공통적인 특성들에 대한 인식으로서, 그리고 그것들에 기초를 둔 인식으로서 공통 통념들에 의한 인식은 이러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인식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실재적인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을 낳는다. 왜 이러한 역설이 생길까? 그것은 우리가 자연 전체로서 이러한 질서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곧 수동적인 상태에서 인식하기 때문이다31).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지각, 인식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지각만을 우리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른 지각 일반과 동일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합한 인식과 부적합한 인식의 차이점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지각의 특징을 좀더 분명하게 규정해야 한다. 여기서는 2부 정리 14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자연학 소론」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 정리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 정신은 매우 많은 수의 실재들을 지각할 수 있는 소질을 지니고 있으며apta est plurima percipiendum, 그 신체가 매우 많은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이러한 소질은 더욱 커진다eo aptior quo ejus corpus pluribus modis disponi potest.
증명에서 요청 3과 요청 6에 준거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정리는 「자연학 소론」의 결론에서 직접 따라 나온다. 이 정리가 첫 번째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매우 많은 실재들을 지각할 수 있는 정신의 소질이나 능력은 신체가 매우 많은 방식으로 배치되는 능력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곧 신체가 외부 물체들로부터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고(요청 3) 이를 통해 얻은 변용의 역량으로 매우 많은 방식으로 외부 물체들을 변용하고 배치할 수 있게 되면(요청 6), 그만큼 정신의 지각의 능력도 증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 능력은 신체의 능력에 비례하며, 신체의 능력은 변용되는 능력과 변용하는 능력의 증대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정신의 지각의 능력과 신체의 변용 능력이 스피노자에게는 능동적인 능력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32)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리 29에서 말하는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지각”, 곧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하지 못하고 그 대신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되는 지각은 이러한 능동적 능력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수동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이러한 정신은 신체가 매우 적은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는 능력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적은 수의 실재들 또는 (정리 17에 나오는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미지들을 동시에 지각하지 못하고 실재들에 대한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만을 얻게 되는 것이다.
(3) 적합한 관념들의 형성
그렇다면 이러한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과 다른 식으로 지각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스피노자를 이를 “내적으로 규정”되는 지각으로, 곧 “정신이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되는 지각으로 부르면서, 부적합한 지각 또는 인식과 다른 적합한 인식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내적으로 규정되는 지각과 공통 통념들의 형성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스피노자는 {윤리학} 2부 정리 41에서 1종의 인식과 2종 및 3종의 인식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첫 번째 종류의 인식은 오류의 유일한 원인이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이 정리의 증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정리 40의 주석에서 말한 것처럼 1종의 인식에는 부적합하고 혼동된 모든 관념이 속한다. 따라서 (2부 정리 35에 따라) 이러한 인식은 오류의 유일한 원인이다. [...]” 그는 여기서 1종의 인식이 오류의 유일한 원인인 이유를 이 인식이 “부적합하고 혼동된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또는 정리 29의 따름정리 및 주석이나 정리 35의 용어법대로 말하면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이라는 점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1종의 인식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 곧 부적합한 인식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때문에 그것은 오류의 원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떤 인식이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일까? 이는 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와 주석에 따르면 자연의 공통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식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지각이다.33) 이러한 인식은 정신이 “외적으로 규정”될 때, 곧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될” 때 형성되는 인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를 단편적 인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또한 이는 2부 정리 40의 주석 2에서 말하듯이 우리의 신체를 변용하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한데 뭉뚱그려서 상상할 때 생겨나는 인식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는 이를 혼동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1종의 인식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이기 때문에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대립”을 제대로 알려줄 수 없으며, 각각의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기질에 따라 왜곡되고 변형된 인식만을 제공해줄 뿐이다.
반면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두고 있는 2종의 인식은 이처럼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인식을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에 따라 개조하는 인식이다. 다시 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와 주석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언급에 따르면, 이러한 인식은 “내적으로 규정되는”, 곧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되는 인식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실재들을 동시에 고려하게 되면,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라 인식할 때와는 달리 이러저러한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실재들의 이런저런 측면들을 단편적으로 지각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다면적인 인식 내지 지각은 이를 기초로 하여 실재들 사이의 합치와 차이, 대립을 고려하기 때문에, 단편적 지각에 수반되는 혼동된 인식에 빠질 위험성도 적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은 훨씬 더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내적 규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식은 여전히 지각의 차원에서, 곧 변용들의 질서와 연관에 대한 지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적 인식이다. 따라서 이것과 자연의 공통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지각과의 차이는 동일한 상상적 인식 내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다면적 지각의 노력을 통해 우리가 소수의 물체들 사이의 공통적 특성을 지각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 좀더 많은 물체들 사이의 특성들에 대한 지각으로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게 된다면, 우리는 좀더 많은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둔 인식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둔 2종의 인식은 상상적 인식 안에서 자신의 성립 조건을 발견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우리는 들뢰즈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34)
5.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개념의 의미를, 데카르트와 비교하면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논의는 데카르트와의 차이점을 드러내면서 스피노자의 용법의 고유성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의를 지닐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의 의미를 해명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논의가 주로 {윤리학} 2부에 국한되어 있을 뿐 {윤리학} 5부나 {신학정치론}에서 볼 수 있는 공통 통념의 용법과 의미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학정치론}은 {윤리학}과 달리 엄밀한 학문적 논증이 아니라 합리적인 삶의 규칙에 따라 우중(愚衆)을 인도하기 위한 실천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공통 통념 개념이 지닌 실천적 함의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을 전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신학정치론}에 대한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또는 notio를 “개념”이나 “관념”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이유 역시 좀더 분명히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우리가 후속 논문에서 다룰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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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이 글에서 스피노자의 경우 notio communis를 “공통 통념”이라고 번역했으며, 데카르트의 경우는 “공통 관념”이라고 번역했다. 동일한 용어를 이처럼 철학자에 따라 상이하게 번역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며, 사실 될 수 있는 한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notio communis의 경우 이러한 차이는 이 개념에 대한 두 철학자의 인식의 차이에서 유래하며, 따라서 상이한 번역이 얼마간 불가피하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notio communis 및 notio라는 용어에 대한 번역의 문제는 이론적으로 의미 있는 쟁점을 제기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충분히 다루기 위해서는 별도의 논문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심사위원들(익명의 심사위원들의 꼼꼼한 논평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겸해 두어 가지 점만 지적해두기로 하겠다. 첫째, 우리가 “notio”를 “개념”으로 번역하는 것을 피한 이유는, 데카르트에서 “notio sive idea”라는 표현은 발견할 수 있는 반면 “notio sive conceptus”라는 표현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주 9) 참조). 둘째, 본문에서 지적하겠지만 데카르트에서 notio는 인식론적 일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관념”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스피노자에서는 notio가 상상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인식의 종류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를 “관념”이라는 용어로 번역하기는 어렵다. 셋째,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에서 notio를 “관념”의 동의어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idea”와 “notio”라는 두 가지 상이한 원어를 동일한 “관념”이라는 단어로 번역할 경우 상당한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개념”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이 경우 notio라는 개념이 지닌 독자적인 이론적 위상과 문제설정은 “관념”이라는 개념 속으로 파묻혀 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notio에 관한 독자적인 역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통념”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한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통념”이라는 용어는 notio가 항상 “보편적”이거나 “공통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잘 드러내줄 수 있다. 둘째, 또한 이 용어는 notio가 논증이나 증거를 통해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 명증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 두 가지 점만으로도 “통념”이라는 용어는 notio에 대한 역어로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제안에 대한 좀더 충실한 논거들은 후속 논문에서 제시해볼 생각이다.
2) 한편 신학정치론에서는 윤리학과는 다소 상이한 용법이 나타나는데, 자클린 라그레Jacqueline Lagrée는 이를 “종교적 공통 통념 이론”이라고 부르고 있다.(특히 Lagrée 1989; 1990 참조)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고 다른 곳에서 좀더 논의해보겠다.
3) 이 글에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저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약어를 사용할 것이다. 데카르트 전집의 경우 AT라는 약칭 아래 권 수는 로마자로(I, II, III ...), 페이지 수는 아라비아 숫자로(1, 2, 3, ...) 표시할 것이다. 국역본의 경우에는 “참고문헌”에서 밝힌 것처럼 역자의 이름에 따라 책을 표기하고, 쪽수를 적을 것이다. 스피노자 전집은 G라는 약칭 아래 역시 권 수는 로마자로, 페이지 수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할 것이다. 스피노자의 각각의 저작 및 윤리학의 정의와 공리, 정리, 증명, 주석 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시한다.
지성교정론: TIE, 소론: KV, 신학정치론: TTP, 윤리학: E
정의: D, 공리: A, 정리: P, 증명: d, 따름정리: c, 주석: s, 보조정리: L, 서문: praep, 부록: app,
E II P29s → 윤리학 2부 정리 25의 주석.
KV II, 17, §5 → 소론 2부 17장 5절.
TIE, 38 → 지성교정론 38절.
TTP VI ad6 → 신학정치론 6장 주 6)
4) “anteceptam animo rei quamdam informationem, sine qua nec intellegi quicquam nec quarei nec disputari possit.”
5)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Goldschmidt 1984, pp. 114 이하; Lévy 1992, pp. 302 이하 참조.
6)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에서 프롤렙시스 개념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Goldschmidt 1984 참조.
7) Sandbach 1930이 프롤렙시스에 대한 가장 완고한 경험론적 입장을 대표한다면, 현대의 주석가들은 대개 온건 본유론적인 입장을 택하고 있다.
8) 이 점에 대해서는 Lagrée 1989; 1991; 1994를 각각 참조. 신스토아학파의 용법에서 두드러진 것 중 하나는 이른바 종교적 notio communis 이론이다. 이 이론은 뒤플레시스 모르네의 기독교 종교의 진리에 대하여De la vérité de la religion chrétienne(1581) 이래 17세기 전반에 걸쳐 상당히 확산되었으며, 특히 에드워드 허버트 셔버리Edward Herbert Cherbury의 이론과 스피노자의 이론 사이에는 상당한 친화성이 존재한다. Lagrée 1989; 1990을 각각 참조.
9)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데카르트의 경우 notio communis를 “공통 관념”으로 번역했다. 반면 데카르트 국역본(이현복 I, II, 원석영)에서는 모두 이를 “공통 개념”으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ideas sive notiones”, 곧 “관념들 또는 notions”라는 표현은 몇 차례에 걸쳐 사용하고 있는 반면(가령 AT VIII 358), 어디에서도 “ideas sive conceptiones”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을 고려해볼 때, 차라리 notio는 “관념”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10)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단순성”은 원자나 요소 또는 원초적 형상의 단순성이 아니라 인식하는 정신에 나타나는 가장 단순한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대체하는 새로운 인식의 질서를 수립한다. 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Marion 1981, pp. 131 이하 참조.
11) 하지만 단순 본성 개념이 초기 저작, 특히 정신지도규칙에만 등장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장 라포르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 개념은 드물기는 하지만 후기 저작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Laporte 1988 참조.
12) 데카르트 자신은 이 10개의 “공리들 중 여럿”은 “좀더 잘 설명될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공리들이라기보다는 정리들로” 제시되어야 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AT VII 164)
13) 또한 “성찰” 반론에 대한 두 번째 답변도 참조. “공리들 또는 공통 관념들axiomata sive communes notiones”(AT VII 164)
14) 데카르트에서 공통 관념들의 사례에 대한 좀더 포괄적인 고찰로는 Gouhier 1987, pp. 272-73 참조. 공통 관념의 사례들은 초기 저작인 정신지도규칙에서부터 뷔르만과의 대화 및 말년의 서신교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15) “단순 관념들은 초기 저작에서는 보편자들(실체, 자아, 연장)의 일반 범주인 데 반해 「어떤 비방문에 대한 주석」에서는 개별 관념들도 포함하고 있다. 공통 관념들은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 특수한 관념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공리들 내지 사유의 규칙 또는 근거율이다.”(Hart 1970, p. 121)
16) “선생께서 내가 제시한 것에 대해 제기한 세 번째 반론은, 공리들은 ‘notiones communes’로 간주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G IV 13)
17) “axiomata seu notiones communes”(G I 127).
18) E I P8s2(G II 50); E II P38c2(G II 119); E II P40s1(G II 120); E II P44c2d(G II 126); E II P47s(G II 128)
19) TTP IV(G III 64); TTP V(G III 77); TTP VI ad6(G III 253); TTP VI(G III 88); TTP XIV(G III 179)
20) 따라서 notio communis가 윤리학이 이룩한 주요 혁신 가운데 하나라는 들뢰즈의 말은 일리가 있다. “실제로 공통통념들은 윤리학에만 고유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이전의 저작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새로움이 단지 단어의 새로움일 뿐인 것인지 아니면 귀결들을 이끌어내는 개념의 새로움인지를 아는 것이다.”(Deleuze 1999, 170쪽) 번역 가운데서 “공통개념”은 “공통통념들”이라고 고쳤다.
21) 게루에 따르면 이는 유와 종, 범주 등과 같은 논리적 개념들을 의미한다. Gueroult II, p. 364.
22) 또한 철학원리 1부 71-72항도 참조.
23)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 없이sine ordine ad intellectum”라는 이 표현은 윤리학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표현이고, 실제로 이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도 상당히 모호하다. 이는 대개 “지성에 대해 무질서하게/질서 없이”라고 번역된다. 가령 Curley는 “without order for the intellect”라고 번역하고 있고, Bartuschat는 “ohne Ordnung für den Verstand”(Spinoza 1999b)로, Pautrat는 “sans ordre pour l'intellect”(Spinoza 1999a)로 번역하고 있다. Appuhn과 게루(Gueroult II, p. 382)는 “désordonnée pour l'entendement”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내용상으로는 다른 번역들과 거의 같다. 반면 Shirley는 “without any intellectual order”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런 번역은 여기서는 별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5부 정리 10에 대한 해석에서는 상당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Macherey의 번역(“sans ordre allant dans le sens de l'intellect”, Macherey 1997, p. 312)을 따랐는데, 이 구절의 의미를 제일 정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5부 정리 10에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거기에서는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번역하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24) “철학의 기초는 공통 통념들이며, 자연으로부터만 이끌어내야 한다.”14장 (G III 179)
25) “Illa, quae omnibus communia, quaeque aeque in parte, ac in toto sunt, non possunt concipi, nisi adaequate.”
26) “Id, quod corpori humano, & quibusdam corporibus externis, a quibus corpus humanum affici solet, commune est, & proprium, quodque in cujuscunque horum parte aeque, ac in toto est, ejus etiam idea erit in mente adaequata.”
27) Gueroult II, pp. 327 이하 참조.
28) 갈릴레이나 데카르트가 확립하려고 했던 근대 수리물리학이 이러한 보편적 인식의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여기서는 개별 물체들이나 몇몇 물체들의 고유한 특징보다는 물체들이 물체들인 한에서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 곧 속성이나 특성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29) Ramond 1995 pp. 231 이하 참조; 또한 박기순 2006 주 28) 참조.
30) 반면 몇몇 주석가들은 이를 상상적인 질서, 또는 “자의적인 질서random order”나 “거칠고 정교화되지 않은raw, uncultivated” 질서로 간주하기도 한다. 예컨대 Yovel 1994, p. 95; Segal 2000, p. 14 주 5) 등 참조.
31) “우리는 다른 것들 없이 자신에 의해 자신을 인식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인 한에서 수동적이다/수동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Nos eatenus patimur, quatenus Naturae sumus pars, quae per se absque aliis non potest concipi.”(E IV P2)
32) 능동과 수동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는 3부 정의 2에서 제시된다. 이 정의에 대한 분석은 진태원 2006, 7장을 참조하라.
33) 2부 정의 3의 해명에서 볼 수 있는 “지각”과 “개념” 사이의 스피노자의 구별에 따르면 지각은 “수동성”을 더 함축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34) 공통 통념 이론에 대한 들뢰즈 논의의 문제점은 그의 모순적인 주장에 있다. 곧 그는 우리가 실존의 차원에서는 부적합한 관념들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2종의 인식은 상상적 인식 안에서 자신의 성립 조건을 발견한다고, 곧 우리는 실존의 차원에서 적합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그의 스피노자 해석에 특유한 본질과 실존, 관계와 역량의 분리에서 비롯하는 결과다.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6 4장과 6장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