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플라톤 전집에 관한 몇 가지 생각...

얼마 전에 다치바나 다카시의 동경대 강의록을 읽다가 떠오른 것이었나, "한 작가의 작품을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히 읽어나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니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우선 시바 료타로의 <탐라 기행>을 읽다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 현문숙 씨는 말이 없을 때는 생각에 잠겨 있다. 교토 대학에서 사회학을 배울 때는 특히 그리스 철학을 하던 다나카 미치타로 교수를 존경하여 <플라톤 전집>을 읽기로 결심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몇 년 간이라는 기한을 정해놓고 매일 얼마씩을 일과로서 읽게끔 자신에게 의무를 과하였다. 매사에 그런 식이어서, 예를 들어 내가 <구카이 풍경>이라는 졸저를 주었더니 그것을 읽는 데 1년이 걸렸다고 부인 문순례 씨가 말해주었다. 인용이 있으면 일일이 그 원전을 찾아서 읽고 난 뒤에야 다음 대목을 읽어 나갔다는 것이다. (128쪽)

이 대목을 처음 읽었을 때, 어디에선가 읽었는지 몰라도 서울대 철학과 교수였던 고 박홍규 선생의 일화가 떠올랐다.(이 글을 쓰기 위해 여기저기 뒤적여 보았는데도 출처가 정확히 어디였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아마도 이정우나 다른 제자들의 회고에 나온 이야기 같았는데.) 즉 박 선생이 학부 수업 시간에 슐라이어마허가 번역한 독어판 플라톤의 대화편을 학생들과 함께 강독했는데, 내용이 어렵고 학생들이 잘 따라오지 못해서 한 시간에 두어 줄도 나가지 못할 때가 많았고, 한 학기 내내 애를 써도 결국 서너 페이지밖에는 진도가 나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박 선생은 아랑곳 없이 방학이 끝나고 다음 학기가 되면 다른 학생들과 함께 지난 학기에 읽다 멈춘 부분부터 강독을 재개하곤 했고, 그런 식으로 몇 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독어판 플라톤의 대화편 하나를 다 읽어치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놀라운 고집과 여유 모두를 지닌 양반이 아닐까 싶다. 웬만큼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것이라면 한 번 해보고 나서 귀찮아서라도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게다가 나처럼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방학 때 나 혼자서라도 다 읽어치우면 읽어치우지 굳이 수년 간에 걸쳐 느릿느릿 거북이마냥 그 대화편 하나를 붙들고 있었을 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대 학자로서의 놀라운 면모였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한동안 머릿속에 담아놓고만 있었던 이런 일화를 굳이 적어보는 까닭은, 어제 우연히 네이버에서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가 (아마 "비트겐슈타인 전집"이란 제목으로 검색을 하다 그랬을 거다) 플라톤 전집의출간에 관한 최근 기사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작년 이맘때쯤 된 모양인데, 나로선 금시초문이어서 깜짝 놀랐다. 이야기에 따르면 이제이북스에서 약 30여 권 분량으로 된 플라톤 전집을 내달(3월)부터 시작해서 수년 내에 완간할 예정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니코마코스 윤리학> 등의 원전 번역을 내놓아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는데, 내친 김에 아리스토텔레스 전집까지 내놓겠다며 상당히 큰 결심을 한 모양이어서 결과가 주목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의아한 생각도 없지 않은 것이, 내가 알기로는 이미 서광사에서 성균관대 박종현 교수의 주도 하에 플라톤의 주요 작품이 번역 출간 중에 있고, 그와는 별도로 같은 출판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작품도 번역을 추진 중에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기로 박종현 교수의 플라톤 역주 작업은 1997년에 <국가(정체)>가 출간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티마이오스>, <에우티프론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필레보스>까지 모두 네 권이 출간되었고, 그 외에도 <연회(향연)>, <프로타고라스 / 메논>, <테아이테토스>,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테스>, <고르기아스>, <정치가>가 근간 목록에 올라 있었다. 문제는 이 번역 사업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박종현 교수의 경우에는 이미 단독, 또는 공동 작업의 결과물을 네 권이나 출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의 다른 번역 내정자들은 아직까지도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일반 책을 번역하는 것보다는 훨씬 큰 노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이미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간 상황에서는 한편으로 아쉬움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그만큼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연회(향연)>의 경우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소피스테스>와 <정치가>는 한길사에서 다른 번역본이 출간되었고, <파르메니데스> 역시 <플라톤의 변증법>이라는 송영진의 저서에 부록으로 번역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기존에 출간이 예고되었던 책의 번역본이 "뜬금없이" 다른 번역자에 의해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다는 것은 의도적인 중복 출판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독자로서는 약간의 혼란이랄까,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물론 여러 가지 속사정(추측컨대 어쩌면 가장 큰 것은 출판사의 이해관계, 그리고 번역자들이 소속된 학교라든지 계열 등의 이해관계가 아닐까)이 있겠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기존에 10년 넘게 번역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플라톤 저작집에 대한 선망이 너무 컸던 까닭인지, 지금처럼 번역 작업이 사분오열 군웅할거의 추세로 접어드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물론 내지 말라는 법은 없고, 서광사 판본만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최근 들어서 그리스어 라틴어 원전 번역이 일종의 "추세"를 이루고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 단기간 내에 두어 종의 <플라톤 전집>을 갖게 된다는 것은 약간 시기상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물론 이제이북스라는 곳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집을 냄으로써 예상되는 한 가지 미덕은, 적어도 그 디자인 하나는 아주 "멋깔"스럽게 뽑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여기서 나온 책을 몇 권 사 보았는데, 이건 표지는 물론이고 본문에 이르기까지 예전 이론과실천의 책에서 느껴지던 세련된 단순함이 물씬물씬 풍겨서 기분이 좋았다. 솔직히 요즘 학술서 내는 곳 중에서 이 정도로 책의 외형에 신경 쓰고 감각이 뛰어난 곳은 못 본 것 같다.)

 

 

 

 

 

 

물론 영어권에만 해도 플라톤의 주요 저작집 번역은 여러 종류가 있는 것으로 알지만, 솔직히 그 모두가 이처럼 단시일 내에 경쟁적으로 출간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가령 몇 년 전엔가는 이미 두어 종류의 번역본이 있던 프랑스에서 "새로운 번역"의 플라톤 전집이 완간되었다고 하는데, 기획과 번역 의뢰에서부터 완간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22년이라고 했다. 우리 역시 프랑스의 사례를 반드시 본떠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책세상 판 <니체 전집>의 번역 때처럼 차라리 전공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일사분란한 공동 작업을 펼쳐 그 성과물을 내놓는 것도 나름대로는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박종현 교수의 고군분투야말로 놀라운 집념이고 존경해 마지않을 만한 일이지만, 개인의 힘으로서는 모두 감당하기가 힘들 것이라 추측되기 때문이다. 가령 서광사에서 준비하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집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형이상학>, <범주론 / 명제론 / 분석론 후서>, <철학에 대한 권유>, <자연학> 등이 근간 목록에 올라 있었지만, <형이상학>을 담당했던 조요한 교수가 타계하는 등의 변동으로 인해 나중에는 <정치학>을 비롯해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 <수사학>이 추가된 반면 <형이상학>과 <범주론 (외)>는 근간 목록에서 빠져버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니코마코스 윤리학>, <영혼에 관하여(데 아니마)> , <소피스트적 논박>, <변증론>, 그리고 부분 발췌역인 <형이상학> 등의 번역서가 다른 출판사에서 선보였고 말이다.

 

 

 

 

 

 

이번에 이제이북스의 전집 출간 계획이 보도되면서도 역시 "플라톤 전집 하나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나온 모양인데, 내 기억에 이런 말을 처음 한 사람 중 하나는 바로 도올이었던 것 같다.(<동양학>의 각주 가운데 하나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플라톤 전집"이란 것이 어디 옆집 멍멍이의 이름이 아니고, 게다가 돈이 있다고 해서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그걸 과연 개탄하고 자시고 할 만한 일인지 하는 의구심도 없지는 않다. 가령 우리나라에 서양철학이라는 학문이 상륙하고, 대학에서 정식 과목으로 가르쳐진 지는 겨우 100년이 될까말까 하지 않나 생각되는데, 물론 플라톤이 서양철학의 비조이자 최고봉인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간 그리스어 원전 독해력을 지닌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했던 우리의 현실로 볼 때 그건 지나친 기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박종현 교수라든지 다른 선구적인 인물들의 기여로 인해, 이제 앞으로 우리나라에는 플라톤 전집이 (잘만 하면) 한 가지뿐만 아니라 두어 종이나 나올 기회가 생겼고, 아마 앞으로도 그 종수는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일은 없으리라고 본다.

오히려 문제는 그동안 플라톤을 비롯한 철학 원전 분야의 "업계"를 장악하고 있던 영어 및 일어 중역본에 비해서 일종의 비교우위를 장악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은 물론 박종현 교수의 역주서가 꾸준히 독자층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 단순 판매량으로 볼 때에는 <국가>나 <대화편>의 영어 중역본이 일반 독자들에게는 훨씬 더 잘 먹혀들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전공자와 일반 독자의 차이, 즉 딱딱한 문장을 견딜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박종현 교수나 다른 플라톤 번역자들의 경우에는 해당 언어와 사상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 없는 전문가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뛰어난 "문장가"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어 원전 번역본인 천병희 교수의 역주서들이 생각만큼 "읽기 좋은" 편은 아니라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물론 원문에 정확한 것도 중요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말 문장을 어떻게 맛깔스럽게 만들 것이냐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보다 고전 역주 작업에 있어 훨씬 앞선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시대에 맞춰 여러 가지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는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그나저나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 전에도 우리나라에 <플라톤 전집>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물건이 있긴 있었다. 숭실대 철학과 최민홍 교수란 양반이 번역한 것으로 되어 있는 여섯 권짜리인데 <국가>나 <향연> 같은 유명한 작품들뿐만 아니라 <이온>, <소 히피아스>, <클레이토폰>, <에뤽크시아스> 같은 생소한 작품들까지 망라하고 있어서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처음에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헌책방에서는 다른 출판사의 지형을 인수해 일종의 덤핑용으로 대량 생산한 것으로 유명하던 모 출판사에서 펴낸 1980년대의 중판본이 종종 보이고 나 역시 이걸로 한 질 갖고 있은 지가 오래 되었다. 물론 전공자들은 "학술적 가치는 전무한 일어중역본"이라고 혹평하는 책이지만, 솔직히 그동안 굳이 <티마이오스>나 <필레보스>를, 또는 <카르미데스>와 <크라튀로스>를 읽어보고 싶은 사람은 이 책만으로도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솔직히 전공자들도 잘 들춰보지 않는 나중 대화편들의 경우, 아무리 원전 번역이 있다 하더라도 일반인들이 들춰보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플라톤 전집이라는 것,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고 단기적으로는 출판사의 매상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심각한 태클이 될 수도 있겠다. 적어도 이제이북스에서 다음 달에 첫 선을 보일 전집 1차 출간분만 해도 솔직히 나조차도 생소한 대화편들이 대부분이니 말이다. 과연 일반 독자들이 읽기나 할까? 물론 책세상의 니체 전집에 대해서도 그 수많은 <유고>를 읽을 독자들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열린책들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만 봐도 <죄와 벌>의 판매량과 그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의 판매량은 확연이 다를 것이기에 말이다. 그렇게 보자면 전집은 대책없는 "낭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물론 있으면 좋고, 꽂아 두면 뽀다구도 팍팍 나지만, 만들기는 힘이 들고 잘 팔리지도 않는다. 어느 기자는 "플라톤, 칸트, 헤겔 전집조차 없는 우리 현실"을 개탄하면서 아예 "번역청"을 설립하자는 황당한 주장(뭐든지 "관(官)"이 개입하면 잘 되던 것까지 망쳐 버린다는 절대진리를 기자는 망각해 버린 것일까?)까지 펼쳐놓았는데, 내가 알기로는 일본에서도 헤겔 저작집이 꾸준히 번역되기는 했어도 "전집"이란 이름으로 딱 완결된 산물을 내놓진 않은 것 같다.(그리고 솔직히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정도는 되어야 "전집"이지, 칸트나 헤겔의 경우에는 주요 작품을 망라한 "선집" 정도가 적절하다고 본다. 비교적 현대와 가까운 사람이니 작품 수도 좀 많겠는가.) 게다가 이와나미의 키케로 전집의 경우, 부실한 번역과 편집 때문에 다치바나 다카시 같은 "평범한 독자"에게 따끔하게 비판을 받은 적이 있었으니, "전집"이라고 해서 반드시 "품질"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왜 "전집"이 필요한 것일까? 일단은 "과시" 목적이 아닐까 싶다. 가령 니체 전집은 한국의 니체 연구의 역량을, 플라톤 전집은 한국의 플라톤 연구의 역량을 "보여주는" 작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게다가 물론 그 "질"은 논외로 하고서 말이다.) 그렇다면 문득 떠오르는 말은 "낭만"이라는 한 마디뿐이다. 플라톤 전공자에게 있어서나, 또는 "독서가"에서 "수집가"로 전업한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나 "전집"이란 곧 "낭만"의 대명사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먹지 않고 냄새만 맡아도 배가 부른 음식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전집이란 것 역시 들춰보지 않고 꽂아두기만 해도 뭔가 가슴이 뿌듯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독서가" 아닌 "수집가"의 주책에 불과하다면 물론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 그나저나, 왜 "이제이(EJ)북스"인가 했더니만 사장 이름인 "응주(EJ)"의 약자이기 때문인 모양이다.(내 추측이지만.) 지금까지 낸 책만 살펴보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안 망하고" 여전히 버티는 게 참으로 신기할 지경인데, 웬만하면 전집 완간할 때까지 좀 더 오래오래 잘 버티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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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주마"관"산으로 뒤적이기 (78) : 도올과 허혁

저녁 약속이 있어서 집사람까지 해서 셋이 식당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도올의 요한복음 강연" 이야기가 나왔다. 그 강연에서 도올이 뭐라뭐라 말한 것에 대해 보수 기독교 단체 쪽에서 이의를 제기했고, 또 거기에 대해 오늘자 신문에 한신대 김경재 교수가 일종의 중재인지 평가인지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집사람은 김용옥이 비록 신학자는 아니지만, 양식비평이라는 성서 해석학의 한 분야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웠을 사람이니, 웬만큼 허약한 논리로는 상대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요지로 이야기했다. 아닌 게 아니라, <논어>나 <노자>나 요한복음 강의로 인해 전국민적인 명사가 되기 이전의 도올, 그러니까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와 <절차탁마 대기만성>의 저자 도올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뒤의 책은 얼핏 보기에는 "동양학" 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독교에 대한 도올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해 놓은 것이며, 그 책에서 도올이 내세우는 자신의 "한문해석학"이란 것이야말로 실제로는 불트만의 "성서해석학"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책의 제2부는 "독서법과 판본학의 입장에서 새롭게 본 기독교"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내게는 영지주의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던 글로 더욱 인상적이었고, 이 글의 말미에 "예수는 무당이라"고 주장해서 보수 기독교 단체 측에서 일종의 "테러"(?) 시도까지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어쩌면 기독교에 관한 도올의 입장이랄까, 견해랄까 하는 것은 이 책을 참조하면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이른바 보수 기독교 쪽에서는 아직까지도 "마귀 사탄"과 동일시되는 인물인데, 사실 기독교 신학사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인물이며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를 꼽는다면 아마 수위 다툼을 하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다. 그의 성서 해석학은 그 "과격함" 때문에 보수 신학자들이나 십일조 강요하는 무식한 목사들, 그리고 무지몽매한 일반 신도들(흔히 말해서 웬만한 젊은 목사나 전도사들을 "찜쪄먹는" 할머니 권사님들) 모두로부터 "영문도 모른 채" 미움을 받지만, 사실 신학도 학문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토록 "과격하다"는 평가를 들을 만한 그의 학문적 태도야말로 성서를 대하는 가장 "정직한" 태도일 수도 있다. 단적으로 말해 불트만은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그가 과연 신학자로서의 학문적 성실성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적 성실성을 어떻게 조화시켰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의 무식한 기독교인들이 인정하는 방식으로는 성서의 권위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성서란 축자영감도 절대권위도 아닌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소스로부터 "편집"된 텍스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나라처럼 성서의 "일점일획"까지도 고스란히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한다는 무식한 기독교를 숭앙하는 사람들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는 주장일 수밖에 없다. 학문적으로야 나무랄 데 없는 주장이고, 실제로도 우리나라에서 신학 하는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한 번씩은 들춰봐야 할 책의 저자이지만(하긴 그의 책은 좀 많이 번역되었던가!) 신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신앙" 적인 측면에서는 독약과도 같은 인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바로 그런 까닭에 천하의 "불트만"조차도 우리나라에서는 졸지에 "마귀사탄"으로 여겨지는 셈인데, 여기서 가장 크게 손해를 본 사람은 아마도 그의 동포인 또 다른 신학자 "몰트만"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불트만과 몰트만의 생각이나 주장은 크게 달랐지만, 꽤 오래 전부터 단지 이름이 비슷한 까닭에 우리나라에서는 항상 "불트만인지 몰트만인지"라는 식으로 나란히 매도당하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불트만과 도올,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사이에 일종의 "다리" 노릇을 한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허혁이다. 허혁이란 사람은 아마 기독교인 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신학에 대해 관심이 있고, 그중에서도 교회 권사님들이 무척 싫어하는 "자유주의 신학" 쪽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 그리고 더 나아가 "불트만인지 몰트만인지"로 대표되는 양식비평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야 그의 이름을 알듯 말듯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나온 불트만의 책은 거의 모두가 허혁의 번역이고, 우리에게는 "밀림의 성자"로만 알려졌지만 사실은 천재 신학자이기도 했던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대작 <예수의 생애 연구사> 역시 허혁의 번역이다. 생전에 이런저런 논문을 발표했는지 모르지만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없는 듯하고, 말년에 제자들이 일종의 기념문집이랄까 하는 것을 한 권 펴냈는데, 두껍긴 하지만 번역 말고 평생 쓴 것이 그 정도라면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다. 오히려 허혁이란 이름은 불트만, 슈바이처, 로핑크 등의 이름과 나란히 기억되고, 문장이 아주 유려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번역은 앞으로도 꽤나 오랫동안 통용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그 분야에 있어서는 한국 내에서 가장 독보적인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나 역시 불트만의 책을 통해 허혁과 만나게 되었는데, 정작 허혁이란 인물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거꾸로 도올 때문이었다. 도올의 큰형인 김용준의 글 모음인 <사람의 과학>이란 책을 보면 서문에 "나의 큰형, 김용준"이라는 도올의 발문이 붙어 있는데, 이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좀 길지만 매우 흥미로운 일화이기 때문에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

  • 내가 다녔던 보성중, 고등학교에는 서원출이라는 걸출한 교장의 리더십 때문에 당대 보기드문 석학들이 교사로 은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쯤인가? 우리 보성학교로 키가 껑충 크고 허우대가 멀쑥한 독일어 선생님 한 분이 새로 오셨다. 그는 상초가 심히 발달하여 몸무게의 중심이 몽땅 어깨로 이동하여 있는 느낌이었다. 키가 큰 반면 어깨는 앞으로 굽어 있었고, 두상은 백운대의 바위만큼이나 큰데 머리는 헝크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고난의 성상이 서린 좀 신성한 기운이 감돌았다. 귀밑에는 석학의 회색빈발이 고결한 품격을 나타내주었으나, 두 눈은 썩은 동태눈처럼 맥아리없이 저 먼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의 느낌은 한없이 착하게 보였고, 무엇인가 범상치 않은 심오한 프로페조르의 느낌을 주었다. 그의 이름은 허혁이었다. 그가 독일의 뮌스터 대학에서 박사를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독일에서 박사까지 한 사람이 고등학교에 와서 독일어를 가르친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좀 이해가 가기 힘들었다. 허나 독일에서 온 독일어 선생이라는 신선한 충격은 당시 보성의 학우들에게는 커다란 화제였다. 허나 허혁은 매우 졸린 사람이었다. 말하는 것을 잘 들어보면 퍽 씨알맹이 있는 얘기가 많은데, 그것을 매우 졸리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독일 얘기를 하거나 독일어 교과서에 나오는 일화에 얽힌 얘기를 할 때도 뭔가 고등학교 선생에게서는 들어보기 힘든 심오하고 매서운 언사가 툭툭 던져지곤 하는데, 매우 졸린 분위기를 깔고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는 매우 민주적인 사람이래서 통솔력이 없었다. 주변의 기를 압도하는 허세나 과장이 너무 없었다. 그래서 그의 독일어 시간은 아이들이 졸고 떠드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그럴수록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가 순한 것 같아도, 그의 말 속에는 항상 단호함과 지적 날카로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그에게 매우 난처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고 1 2학기 때의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 "선생님은 겨우 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실려고 그 어려운 독일유학을 하셨습니까? 무언가 선생님이 공부하신 것에 비해 지금 하시고 계신 일이 너무 시시한 것이 아닙니까?"
  • 나는 지난 일이지만 이 나의 질문을 명료하게 한 자도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허혁 선생은 이러한 나의 질문에 뚜렷한 대답을 회피했다. 그는 맨 앞줄에 앉어있는 (2번인가? 3번인가?) 나를 꿰뚫어지게 쳐다보고는 난처한 몸짓으로 빙그레 미소를 짓고 말아버렸다. 넌 아직 나를 알 수 없는데, 내가 무엇을 변명하리요? 하는 눈치였다. 나는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
  • 허혁 선생은 "이혼한 경력이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 교단에서 배척을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 교계나 학계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전공이 또 큰 문제였다. 허혁 선생은 불트만을 전공했는데, 불트만이야말로 당대 교단에서는 최대의 이단자였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신화적 허구 속에 안주하기를 희망했던 당대 교계의 모든 사람에게는 그들의 존재의 근원을 허물어버리는 매우 무서운 이단의 칼날이었다. 그러저러한 연유로 허혁 선생은 교단이나 신학계로 복귀를 못하고 독일어 선생이라는 간판을 잠시 빌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완벽히 불트만의 해석에만 몰두하는 완벽한 학자였다. 학문의 전일성으로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허혁만한 인물을 만난 적이 없다. (40-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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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일반/ No. 182. 내 마음의 모래바람에게 보내는 쓸쓸한 편지 두 번째

시인 고은의 짤막한 시 중에서 단 두 줄로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것이 몇 편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아래의 시인데요.

미안하다
나 같은 것이 살아서 오일장 국밥을 사먹는다


어제 제가 만드는 잡지의 편집주간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막판 교정을 마치고 교정지를 필름출력소로 보내놓고 두 사람이 함께 국밥집에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요. 편집하는 이들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건, 적건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선생이란 호칭일 겁니다. 어떤 경우엔 선생이라 부르는 것에 부아가 날 만큼 형편없는 글을 보내놓고 나 몰라라 하는 필자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제 경우엔 그래도 비교적 행복한 편집자입니다.

사실 이번호 잡지 기획을 하면서 적지 않이 신경이 쓰였습니다. 제 부사수로 들어온 친구에게 87년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고 하더군요. 마치 제게 80년 광주가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87년은 또 그와 같은 일이었을 겁니다. 물론 제가 겪은 87년은 아직 어렸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른바 민주화 세대로 분류되기 보다는 민주화 이후 세대로 분류되는 것이 적당할 겁니다. 다만, 그 나이 또래에서 흔히 하지 못했던 경험을 했다는 것이 저를 저의 동년배 세대와는 약간 다른 세대로 분류하게 만들 수는 있겠습니다. 만약 연령별로 구분하는 일반적인 세대별 분류로 하자면 오히려 저는 "경대 친구들"이라고 불리웠던 80년대 말, 90년대 초반 학번 세대에 가깝습니다.(저는 아직도 이렇게 학번으로 구분하는 세대론에 대해 일정한 반감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제가 몸담고 있는 잡지의 편집위원들 세대는 이른바 민주화 세대의 가장 앞선 학번대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긴급조치 세대, 긴조세대라고 약칭하여 불리는 70년대 말 학번에서 80년대 초 학번에 이르는 세대니까요. 이들에게 광주는 그 이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바로 79년 서울의 봄 때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 바로 그들이기도 하지요. 이들이 바로 그 자신도 속한 한홍구 선생의 대한민국사 4권에 나오는 계엄군이 밀려오는 서울대 한 편에서 누군가 한 명은 남아 계엄군에게 빈 학교를 넘겨주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던 유시민과 같은 세대입니다.

제가 87년 이후 97년에 이르는 제법 긴 시간대를 냉소로 보냈다는 고백은 이전부터 참 많이도 해왔습니다. 때로 인터넷으로 만나는 인연이란 비슷한 성장사를 공유하지 못할 뿐더러 매번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것처럼 자신을 알리기 위해 반복적으로 혹은 발작적으로 자신을 소개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저는 문화망명지의 여기저기에 저의 축적된 고통과 반성을 흩뿌려놓았음에도 사람들은 그걸 그다지 열심히 읽어주지 않거든요. 나의 글이 불임환자의 정액 처럼 열매 맺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르면 가끔 허망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매번 절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 혹은 저의 생각을 읽도록 붙잡아두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까닭은 그나마 이것이 살아남은 제가 밥값을 하는 몫이라고 생각에서 입니다.

살아오면서 나름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저보다 더 아픈 사람도 있었겠으나 매 순간 더 잘 살지 못하고 있는 저를 질책하며 먼저 간 친구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애쓰려곤 합니다. 문득, 저 시를 다시 읽노라니 왈칵하는 기분이 들어 이런 글을 씁니다. 필름교정을 보고 인쇄로 넘어간 책은 편집자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더 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죠. 몇 달에 걸쳐 전력을 다해 사귀고, 가꾼 나무 한 그루, 혹은 병아리 한 쌍을 시장 좌판에 내보내는 기분이 듭니다. 매일같이 이별하는 일간지가 있고, 매주 이별하는 주간지나 월간지의 편집자들의 기분이 이보다 진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사귀는 시간으로 치자면 계간지 편집자가 가장 긴 연애기간을 가질 테니까요.

제가 만드는 잡지는 어느새 다음호 특집 기획을 완료했고, 필자 선정을 끝마쳤으며 일부 특집 관련 원고에 대해서는 원고청탁까지 완료했습니다. 이번 주말에 있을 편집회의에서는 가을호 특집 기획회의를 가질 예정입니다. 이미 주제는 정해졌고, 세부 항목을 짜기로 되어 있지요. 이제 설 지나서 발간되는 책은 2007년 봄호이지만 저는 벌써 2007년 가을을 살고 있습니다. 하여간 그와 같은 짓거리를 해온지도 다가오는 5월이면 어느새 만 11년째가 됩니다.  얼마전 TV드라마 "하얀 거탑"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제가 TV드라마를 잘 안 본다고 했더니 한 친구가 제게 "남자들은 그냥 드라마 본다고 해도 될 것을 꼭 마누라 핑계를 대더라"면서 절 힐난 하더군요. 그런 거야 사실 제가 변명하는 것보다는 제 집사람에게 물어보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문화망명지를 오랫동안 지켜본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제 집 사람은 이곳에 글을 남기거나 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거의 참견을 안 하는 편이지만, 이곳에 오르는 글들, 남편이 어딘가에 쓰는 글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읽는 것 같습니다. 대개 아내에게 한 마디 참견을 들을 때는 제가 뭔가 과도한 잘못을 저질렀거나 약간 넘쳤다고 생각이 들 때입니다. 좋은 얘기는 거의 안 해주지만 아내가 지적해주는 과실은 거의 다 옳은 말들이라 제가 별로 변명할 거리가 없어요. 하여간 농담 삼아 제가  “TV홈쇼핑에 등장하는 여성 속옷 판매 프로그램은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지. 특히 "언더웨어의 패션 트렌드 경향에 대한 학문적 일고찰"이란 연구논문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농담을 했지만, 사람은 누구나 24시간을 사는데, 저라고 해서 없는 시간이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교정보고 돌아와도 잠들기 전에는 책 한 줄이라도 봐야 하루를 산 것 같은 사람에게(잘난 척?) TV드라마는 종종 사치입니다. 대학원에서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요새 대중문화영역에서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케이블TV 같은 부분에 대해서도 그다지 열심히 보진 않습니다. 가끔 외국산 드라마가 국내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수용될까? 어째서 저런 드라마, 리얼리티 쇼가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가하는 것에 대해 관심은 생기지만 제가 실제로 천착하기엔 밥벌이에도 목을 메야 하는 제 삶이 너무 빠듯합니다.

앞서 책 읽기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부분에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어제도 하루 종일 마감 전 마지막 교정을 보고 돌아왔는데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까지 그날 잠시 짬을 내서 헌책방에 들러 사 온 판타지라이브러리 백과사전 "천사"편 한 권을 다 떼고 누웠습니다. 그리고 알라딘 서재와 망명지에 올릴 책 리뷰『대장정 - 세상을 뒤흔든 368일』을 쓰다가 원고지 매수로 환산해보니 어느새 대략 40여 쪽 분량을 썼더군요. 사실 이 책은 자본주의화 이후 중국공산당이 특히 신경 쓰는 부분, 사회계급분화에 따른 계급간 격차가 점차 벌어지는 것(참 아이러니죠? 사회주의 국가에서 계급 격차를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은)을 과거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봉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같은 사람은 그와 같이 빤히 보이는 속내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평가면에서는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공산당사, 중국혁명사와 함께 천천히 다시 읽기를 하면서 이번엔 제법 느릿느릿한 리뷰 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건 주변 사람들에게 매일 같이 듣는 핀잔 중 하나가 돈도 안 되는, 이와 같은 글쓰기인데 사실 청탁받아 쓰는 글보다 제게는 이와 같은 글이 훨씬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길은 여러 가지이겠으나 이와 같이 돈이 되지 않는 행위, 노동과 분리되지 않는 유희 또한 그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인터넷상으로 몸담고 있는 두 개의 주된 공간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와 알라딘의 “바람소리 쓸쓸한 서재, 풍소헌”이 제게는 그와 같은 공간입니다. 알라딘 서점은 이유야 어쨌든 누군가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내기도 하고, 제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게도 된다는 점에선 역시 제 메인 무대는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입니다.

하여튼 지난 주말, 토요일과 일요일엔 "황해문화"에 실릴 권두언을 썼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쓰게 되는 원고가 권두언인데, 마감에 맞추기 위해 미리 판을 다 짜놓은 상태라 제가 써야 하는 글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획에 대한 편집위원회의 간단한 소개와 더불어 짤막한 권두에세이 포함해 원고매수를 절대로 35매 이상 넘길 수 없는 글이었습니다. 다 쓰고 보니 34.9매로 정확하게 맞춰서 쓰긴 썼더군요.(언제나 하고픈 말로 넘치는 사람이지만, 프로 글쟁이는 정해준 매수를 정확하게 끊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제 철칙이기도 합니다.) 부사수 녀석을 너무 잘 단란시켜 놔서 제가 마감에 늦으면 절 잡아먹을 듯 협박하여 저 역시 마감 기일을 간신히 맞추긴 했습니다. 오늘 아침 필름교정을 보러 나가기 전에 각 신문사 문화부, 학술 담당 기자들에게 이 메일로 보도자료와 함께 특집 원고, 기획 원고 파일을 보내주었습니다. 덕분에 필름 교정보는 내내 담당 기자들의 전화에 시달리긴 했는데, 과연 몇몇 신문에서, 그리고 과연 몇몇 기자가 이번호가 담은 속내를 잘 짚어줄지 약간 걱정도 됩니다.

나이들어 친구사귀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제 경우엔 늘그막에 무슨 복인지 요 근래 갑작스레 친해진 친구들이 몇몇 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바흐친 책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더니 홀연히 나타나 제게 자기가 대학생 시절 읽었던, 지금은 정말 구하기 힘들어진 바흐친 책들을 보내준 저랑 동갑내기 친구도 있고, 한 1년 쯤 전 저에게 갑자기 재발견된 대학 후배도 있습니다. 지난 겨울 갑자기 제게 말을 걸어와서 그전엔 잘 모르다가 이제 막 알게 된 친구도 있습니다. 그 친구는 제게 형이 돈에 팔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겨서 형이 삼성의 광고 카피를 쓴다고 하더라도 자기는 이해해주겠노라고 너스레를 떨더군요. 그런데 저는 이미 12년 쯤 전 그러니까 삼성의 이건희 회장께서 “마누라와 자식 말고 전부 다 바꾸라”고 큰 소리 치던 시절에 삼성 광고 카피(TV광고는 아니고)를 쓴 적이 있습니다. 삼성 라이온즈 팬북을 만든 적도 있는데, 제가 팬북을 만들던 무렵에 이승엽 선수는 라이온즈에 투수로 입단했었을 겁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책을 만든 적도 있지만, 주로 상대했던 기업은 한보그룹이었습니다. 그 무렵엔 제가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의 인사말도 쓴 적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잡았던 직장이 작은 규모였지만 나름 알짜배기 출판광고기획사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했던 거지요. 그러다가 수서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제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생겼고, 때마침 7년여를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지는 일도 생겨서 아무런 연고도 없던 인천으로 내려와 지금의 잡지 편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3년 정도 의욕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 폐인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자본과 인간, 자본과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끝에 그 일을 그만두었다기 보다는 당시 한보그룹이 수서비리로 세무조사 등을 당하게 되면서 덩달아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 결국 그만두게 된 것이긴 하지만,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삼성이나 한보그룹의 카피를 써줄 일은 두 번 다시 없겠지요. 어쨌거나 이곳에 와서도 한동안 냉소적인 저 자신을 벗어나진 못했었지만, 지금의 잡지에서 좋은 사람들, 좋아할 만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이나 혹은 어린애 같이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 치기로 벌이는 감정적이고 소모적인 반항은 제법 많이 털어냈고, 그런 과정들을 통해 제 자신도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김명인 편집주간과 함께 국밥을 먹으며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실 이번 권두언의 내용이 본의 아니게 편집주간의 글과 논지가 상당히 유사해졌더군요. 두 사람이 이번 기획을 하면서 87년이 혁명이다, 아니다를 놓고 서로 약간의 신경전 아닌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제 부사수에게 왜 나는 87년을 혁명이라고 규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기획과정에 본의 아니게 강의 비슷한 장광설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68이 혁명이라면 87이 혁명이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제 입장이었고, 저 자신에게도 87을, 혹은 87에 이르는 과정과 그 이후 20년 동안 한국사회의 변화과정은 혁명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편집주간 역시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했음에도 공연히 시비를 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더군요. 잡지를 만들면서 서로 일정하게 뜻이 어긋나고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제 딴에는 이 부분에 대해 괜히 심각해져서 편집주간과 편집장의 견해가 너무 많이 틀어지면 일하기 힘든데 하면서 투덜거리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김 주간의 글을 다 읽고 나서 혼자 흐뭇했다는 것이 제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사실 이번 호에 대해서도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호는 무척이나 애착이 갑니다. 기획도 기획이려니와 제 나름대로 한 번은 꼭 정리해야 하는 것을 정리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의든 아니든 제 나름으로 87년 혁명은 제 인생에 있어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었고, 그 사건이 제 인생의 행로를 결정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국밥을 먹으며 당신의 글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개인적으로 매우 감동적이었다고 수줍게 고백했습니다. 하긴 김 주간은 저와 어느덧 8년여 이상을 함께 해오고 있어서 이 덩치 좋고, 때로는 깡패 같고, 때로는 감시견 같은 편집장의 수줍음을 아직은 잘 이해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고통스러운 고백과 성찰이 나에겐 그가 교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을 내밀히 들여다보고 있음을 재확인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냉소로 가득 찬 지식인만큼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글을 쓰는 자는 세상에 드뭅니다. 그와 같은 점에서 저는 김명인 같은, 머리뿐만 아니라 심장에도 "비애(파토스)"를 지니고 살아가는 지식인을 동지적으로 사랑합니다. 어쩐지 이와 같은 공개적인 애정고백이 저 답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중요한 건 제가 여전히 덩치가 좋고, 깡패 같고, 감시견 같은 작자라는 것이지요.

알량한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보내며 말이 참 길었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누구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지만 “나 같은 것이 살아서 오일장 국밥을 사먹는다”는 그 미안함을 언제나 품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제가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미안함의 일단을 그나마 덜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그대도 제 곁을 떠나 또 어디론가 간다 하더군요. 세상을 살면서 제가 가장 많은 이별을 하는 자는 아니겠지만, 늘 보내는 일이 서툽니다. 그래서 누구 하나 버리지 못하고 드러낼 수 없는 마음속의 상처처럼 품고 사는 모양입니다. 부디, 잘 다녀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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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 I

얼마 전에 발간된 [근대철학] 창간호에 수록된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원래 제 학위논문에서 좀 미진하게 다루었던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쓴 것인데,

쓰다가보니, 책 한 권으로 확장해도 괜찮은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외국에서도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드문 편인데, 잘 발전시켜보면 철학사적으로, 또 

스피노자 철학 체계에 대한 연구로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기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당분간은 다른 주제에 매달려야 할 처지라서 당장 이 문제를 진척시키기는

좀 어렵겠지만(사실 참고해야 할 역사적인 문헌들이 만만치 않아서 쉽게 끝낼 수 있는 일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가까운 장래에 본격적으로 논의를 발전시키고 싶군요.

이 글은 작년 여름에 서양근대철학회에서 발표했던 글을 좀 다듬은 것인데, [근대철학]에는

분량 제한이 있기 때문에 축약본이 실렸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인용하거나 논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분들은 [근대철학]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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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 I



1. 머리말


  이 글은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또는 (스피노자가 이를 주로 복수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notiones communes 개념의 기원과 의미, 그리고 번역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notio communis 또는 “공통 통념” 개념1)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인식론”의 측면에서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개념은 {윤리학} 2부에서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데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하는 것, 또는 예속적인 삶의 양식을 합리적으로 개조하고 자유를 영위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주요 목표라면, 들뢰즈가 잘 보여주었듯이 공통 통념은 이러한 이행을 성취하는 데서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Deleuze 1969 17장 참조)

  따라서 우리는 공통 통념이라는 개념이 그의 철학, 특히 {윤리학}에서 체계적으로 규정되고 여러 번 사용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뒤에서 볼 것처럼 그의 저작에서 이 개념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개념이 가장 의미 있게 사용되는 {윤리학} 2부 정리 37에서 40의 논의 역시 공통 통념에 대한 체계적인 규정을 제시해주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이 글에서 논의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윤리학} 2부를 중심으로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을 좀더 체계적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이다.2) 이러한 재구성은 네 가지 단락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2절과 3절에서 우리는 notio communis 개념의 철학사적인 유래를 해명해볼 생각인데,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데카르트에서 이 개념의 특성과 용법이다. 데카르트는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한 notio communis 개념을 근대 철학사에 새롭게 복권시키는 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다른 개념이나 문제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스피노자는 notio communis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의에 기대어, 그것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비판하고 재구성하면서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공통 통념 개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론적 독창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논의를 좀더 꼼꼼히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이러한 논의를 거쳐 4절에서는 공통 통념 개념의 특성과 형성 과정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스피노자의 용법을 재구성해볼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개념의 차이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3)


2. 고대 스토아학파에서 notio communis의 의미


  notio communis는 에피쿠로스 또는 고대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특히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키케로는 {아카데미아 학파에 대하여Academici Libri}에서 스토아 학파의 인식론을 다음과 같이 소묘하고 있다.


왜냐하면 감각들의 원천이자 심지어 그 자체가 감각들과 동일한 것인 정신은 정신을 움직이게 하는 사물들로 정신 자신을 향하게 만드는 자연적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은 어떤 인상들visa을 곧바로 사용하기 위해 포착하는 반면 다른 인상들은 저장해두는데, 여기에서 기억이 생겨난다. 하지만 정신은 나머지 우리 인상들을 유사성에 따라 조직하며, 이러한 [조직된] 인상들로부터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통념들(그리스인들이 때로는 엔노이아이ennoïai라고 부르고 때로는 프롤렙시스prolêpsis라고 부르기도 한)이 생겨난다ex quibus efficiuntur notitiae rerum. 이성적 추론과 증명, 셀 수 없이 많은 사실들이 보태지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지각(perceptio/katalêpton)이 나타나며, 점차 개선되어 지혜에 이르게 된다.(Cicero 2005, pp. 19-20) 


  키케로에 따르면 프롤렙시스는 “정신 안에서 선취된 사물들에 대한 일종의 표상이며, 이것 없이는 사물을 이해할 수도 없고 탐구나 토론을 수행할 수도 없”4)(Cicero 1978, p. 54-55)는 것으로, 그는 이 용어를 에피쿠로스가 고안해냈다고 말하고 있다.(같은 곳) 에피쿠로스가 과연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5), 적어도 이 용어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에 의해 체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키케로는 이 인용문에서 엔노이아이와 프롤렙시스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별다른 언급도 하지 않고 있지만,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간주되는 아에티우스Aetius의 단편에서는 두 개념의 차이가 좀더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사람이 태어날 때 영혼 안에 어떤 것이든 기록할 수 있는 종잇장 같은 중추부hēgemonikon를 지니고 있다. 그는 이 위에다 자신의 관념들 각각을 새겨 넣는다. 첫 번째 기록방법은 감각에 의한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떤 것, 예컨대 하얀 것을 지각했을 때, 이 하얀 것이 사라진 뒤에는 이것에 대한 기억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일한 종류의 많은 기억들이 생겼을 때, 우리는 우리가 경험을 갖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수의 유사한 인상들이 경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관념들은 이와 같은 식으로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자연적으로 일어나며, 다른 것들은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이루어진다. 전자가 “프롤렙시스”이라고 불리며, 후자는 “엔노이아”라고 불린다.(Long & Sedley 1987, p. 238) 


이 두 가지 개념 사이에,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인식론 사이에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헬레니즘 연구자들 사이의 논쟁점 중 하나지만6), 우리의 논의를 위해서는 두 개념을 등가적인 것으로, 곧 notio communis 개념의 이론적 원천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아에티우스의 단편(그리고 앞서 인용한 키케로의 구절)의 중요성은 오히려 스토아학파에서 공통 통념이 지닌 경험적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곧 키케로나 아에티우스 모두 공통 통념을 우리의 정신에 본유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관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습득되고 더 많은 경험과 교육을 통해 강화, 향상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는 공통 통념을 일종의 본유 관념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개별적인 경험들을 통해 발현되는 소질이나 능력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 때문에 키케로가 말하는 프롤렙시스의 특성, 곧 “이것 없이는 사물을 이해할 수도 없고 탐구나 토론을 수행할 수도 없”다는 것을 초월적이거나 초월론적 원리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7) 


3. 데카르트의 notio communis 개념


  스토아학파에서 체계적으로 사용된 이후 중세철학 내내 notio communis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유스투스 립시우스Justus Lipsius 또는 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등에 의해 스토아주의가 복권되면서 다시 이 개념도 철학적인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8) 립시우스를 비롯한 신스토아학파 사상가들이 고전 스토아학파에서 사용된 notio communis 개념의 의미에 충실했다면, 데카르트는 이 개념에 대해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활용하고 있다.


1) 공통 관념의 특성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9) 이론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지도규칙}에 나오는 “단순 본성”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개념은 규칙 6에서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에 대한 정의와 함께 처음 등장하고 있는데, 규칙 8에서 이 개념에 대한 좀더 명확한 규정이 나온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실재 자체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때의 실재 자체란 지성의 접근이 가능한 한에서만 고찰되는 실재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실재를 가장 단순한 본성과 복합적인 것 혹은 합성적인 것으로 나눈다. 단순한 것 중에는 정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아니면 이 두 가지에 모두 속하는 것이 있고, 끝으로 합성적인 것 중에는, 지성의 판단이 이것에 대해 어떤 것을 규정하기 전에 이미 그렇게 되어 있음을 지성이 경험하는 것이 있는 반면에, 또 지성 자신이 합성한 것도 있다.(AT X, 399; 이현복 I, 62-63쪽)


규칙 12에 나오는 데카르트의 부연 설명에 따르면, 정신적 또는 순수하게 지적인 단순 본성은 “정신의 어떤 빛을 통해 또 그 어떤 물질적인 상의 도움 없이 지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으로 “인식, 의심, 무지, 의지의 작용”과 같은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반면 물질적 단순 본성은 “오직 물체 속에만 있다고 인식되는 것”으로, 모양, 연장, 운동 등이 있다. “끝으로, 공통적인 것이란 때로는 물질적인 것에, 때로는 정신적인 것에 구별 없이 귀속되는 것이다. 존재, 단일, 지속 등이 그런 것이다.”(AT X, 419; 이현복 I, 86쪽)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러한 단순 본성들은 “모두 그 자체로 알려지는per se notas 것이고 어떠한 오류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AT X, 420; 이현복 I, 87쪽) 왜냐하면 단순 본성들은 단순하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우리가 이러한 단순 본성에 조금이라도 도달한다면, 이는 전체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단순 본성은 우리가 어떤 판단이든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기초 인식이다.10)

  데카르트는 공통적인 단순 본성에 공통 관념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여기에 공통 관념이 포함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단순 본성들을 서로 연결해 주는 연결선vincula과 같은 것으로, 추론에서 도출되는 모든 것, 이를테면 제삼자와 같은 것은 서로 같으며, 제삼자와 같은 방식으로 연관되지 않는 것은 서로 상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등은 공통 관념의 명증성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공통 관념은 순수 지성에 의해 인식되거나, 아니면 순수 지성이 물질적 상을 직관함으로써 인식된다.” (AT X, 419; 이현복 I, 86쪽) 따라서 공통 관념들은 단순한 것들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들은 “그 자체로 알려지는” 명증한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선천적으로 자연의 빛을 지니고 있고, “똑같은 자연의 빛을 지닌 모든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notions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본유적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들은 단순성명증성, 본유성을 특성으로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후기 저작에서 단순 본성이라는 용어는 드물게 출현하는 편이며,11) 따라서 공통 관념도 단순 본성과 연계되기보다는 공리나 영원진리와 관련하여 언급된다. 예컨대 「두번째 성찰에 대한 답변」 말미에 나오는 기하학적 증명에는 “공리들 또는 공통 관념들 axiomata sive notiones communes”라는 표제 아래 10개의 명제들이 제시되고 있다.(AT VII 164-66)12) 또한 {철학원리} 49항에서 “공통 관념 또는 공리communis notio sive axioma”(AT VIII-1, 24/원석영, 41쪽)라고 말하고 있고13), {뷔르만과의 대화}에서는 영원진리를 공통 관념과 동의어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영원진리들을 공통 관념들이라 불리는 것eas, quae communes notiones vocantur으로 이해한다.”(Descartes 1981, p.103)

  공리 또는 영원진리로서의 공통 관념들에 대해 데카르트는 “공통 관념들 또는 공리들 [...] 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모두 나열하기가 쉽지 않다”(AT VIII-1, 23-24; 원석영, 41)고 말하면서 몇 가지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라든가 “어떤 것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같은 명제 또는 “사고하는 것은 사고하는 동안 실존하지 않을 수 없다”(49항)는 것, “무는 어떠한 속성이나 특성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52항) 등이 그것들이다.14) 또한 「두번째 성찰에 대한 답변」에 나오는 10개의 공리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결과 안에 있는 것들 중, 유사한 또는 좀더 상위의 형태로 원인 안에 실존하지 않았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나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또는 “관념들 안에 단지 표상적으로 실존하는 실재성이나 완전성 전체는 그 원인들 안에서는 형상적으로 또는 탁월하게 실존해야 한다.” 

 

2) 공통 관념의 단순성


 데카르트는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에서 notio communis에 대해 똑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 이는 데카르트 연구자들 사이에서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문제다. 가령 장 라포르트Jean Laporte에 따르면 데카르트에서 공통 관념들 또는 공리들은 “단순 본성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연결선들vincula 또는 필연적 관계들을 보편적인 용어들로 번역한 것”(Laporte 1988, p. 305)이며, 따라서 이는 초기 저작에서 말하는 단순 본성들과 다르지 않다. 강조점이나 뉘앙스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앙리 구이에Henri Gouhier 역시 장 라포르트와 마찬가지로 공통 관념은 “단순 본성들로 간주된 실재들res 사이의 연결선들로 사용되는 단순 본성의 일종”이라고 말하고 있다(Gouhier 1987, p. 274). 반면 앨런 하트Alan Hart는, 이들의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지만,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초기 저작에서 나타나는 공통 관념과 후기 저작에서 사용되는 공통 관념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경우 다른 단순 본성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것인 데 반해, 후자는 이 단순한 것들을 연결시켜서 지식을 형성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르다는 것이다.15)

  그러나 앨런 하트의 논거는 그다지 설득력 있는 것 같지 않다. 다음 구절이 그가 제시하는 주요 전거다. “그렇다면 우리 정신 안에 내재해 있는 이런 모든 공통 관념이 이와 같은 운동에서 유래하고, 이것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제 3의 것과 동등한 두 가지는 서로 같다”는 것과 같은 공통 관념을 우리 정신 안에 형성시켜 줄 수 있는 물질적 운동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나에게 가르쳐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운동은 개별적인 것particulares인 반면에 공통 관념은 보편적인 것이고 운동과는 어떠한 유사성도, 어떠한 관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AT VIII-2, 359-60; 이현복 II, 191-92쪽) 그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공통 notions 또는 공리들은 운동들과 관련되지 않지만, 단순 notions의 경우는, 운동들이 정신이 단순한 본유 관념들을 현실화하는 기회가 되는 한에서, 물질적 운동들과 관련되어 있다”(Hart 1970, p. 120―강조는 하트)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단순 관념들은 물질적 운동을 기회로 현실화되는 반면, 공통 관념들은 운동과 무관하며, 단순한 것들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두 가지 점에서 그릇된 주장이다. 첫째, 그가 인용한 구절에서 데카르트는 단순한 notions과 공통 notions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의 논점은 레기우스의 경험론적 주장에 맞서 모든 notions은 다 “성향 내지 잠재성dispositione sive facultate”이라는 의미에서 본유적임을 주장하는 데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 데카르트가 운동의 개별성과 공통 notions의 보편성을 대비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둘째, 그는 단순 notions과 달리 공통 notions은 단순 notion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만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서 경험적 기회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들이 지닌 존재론적 함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논리학적 규칙들이나 수학적 공리들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역으로 라포르트나 구이에의 입장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좀더 분명하게 설명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연결선”으로서의 공통 관념이 단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인데, 이들은 이 점에 관해 뚜렷한 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제라르 시몽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좀더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공리들의 단순성은 그것들이 관계가 아니라 존재를, 상이한 존재자들 사이의 연결이 아니라 각각의 물체들이 그것들의 독특성 속에서 소유하고 있는 존재의 일반적인 특성들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비롯한다.”(Simon 1996, p. 131) 곧 그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공통 관념들은 논리학적이거나 수학적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유일한 한 가지 주제, 곧 실존의 환원 불가능성, 무의 불가능성, 실체의 필연성 사이의 연계라는 주제만을 함축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공통 관념의 사례들이 논리학적 규칙들이나 수학적 공리들과는 무관한 존재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공통 관념들 또는 공리들이 지닌 단순성 역시 이러한 존재론적 함의에서, 곧 각각의 실재들이 지니고 있는 “존재의 일반적인 특성들”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몽의 주장은 데카르트의 공통 관념들의 성격을 좀더 일관성 있게 해명해줄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연관성을 좀더 정확히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4.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개념


  공통 통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용법에서 주목할 만한 점 중 하나는 이 용어가 초기 저작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더 나아가 체계적인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초기 저작에서 이 용어는 단 두 번 사용되는데, 한 번은 올덴부르크의 반론에 답변하면서 스피노자가 그의 반론의 요점을 정리하고 있는 곳에서16), 다른 한 번은 메이으르(Lodewijk Meyer)가 스피노자를 대신하여 작성한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서문」이다.17) {윤리학}이나 {신학정치론} 같은 후기 저작에서도 notio communis라는 용어 자체는 드물게 출현하며, {윤리학}에서는 6번18), {신학정치론}에서는 5번 사용될 뿐이다19). 하지만 특히 {윤리학} 2부에서 이 개념은 상당히 독창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가 4절에서 중심적으로 다룰 주제도 바로 2부에 나타난 공통 통념 이론이다.20)

  데카르트의 용법과 비교해볼 때 notio communis에 대한 스피노자의 용법은 두 가지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notio 개념이 일의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데카르트와 달리 notio는 더 이상 단순성과 명증성, 본유성으로만 규정되지 않으며, 상상의 notio와 이성의 notio로 분화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서 notio는 인식론적 갈등 내지 분화의 소재가 된다. 이는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에서 notio의 애매성은 인간학적인 삶의 양식의 차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바로 이 때문에 notio communis에 대한 규정과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 역시 데카르트와 달라진다. 데카르트에게는 notio communis가 형성되고 구체화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재할 뿐만 아니라, 이 개념이 윤리적 실천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분석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이론은 이 두 가지 내용을 핵심적인 요소들로 지니고 있다.


1) notio의 애매성


  이 단락에서는 우선 스피노자에서 notio가 어떻게 규정되는지, 이 개념에 관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notio, 곧 통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점은 2부 정리 40의 주석 1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로써 나는 공통적이라 불리며 우리의 추론의 기초를 이루는 통념들notiones의 원인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다른 원인들, 곧 어떤 공리들 내지는 통념들의 원인들이 존재하는데, 우리의 방법으로 이를 설명해보면 유익할 듯하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어떤 통념들이 다른 통념들보다 유익하며, 어떤 통념들이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는지 명백해질 것이기 때문이다.(G II 120―강조는 스피노자)


곧 그에 따르면 통념들에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이라 불리며, 우리의 추론의 기초를 이루는quae communes vocantur, quaeque ratiocini nostri fundamenta sunt” 통념, 곧 공통 통념이 있고, 그 이외에 “또다른 통념들”도 존재한다. 이 구절 바로 뒤에서 이러한 또다른 통념들의 예로 “이차적이라 불리는 통념들quas secundas vocant”21)이나 사람, 말, 고양이 등과 같이 “보편적이라 불리는 통념들”이 예시되고 있다. 스피노자는 이것들 중 특히 두 가지 통념의 형성 원인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 중 하나는 “초월적 용어들termini transcendentales”이라고 불리는 것, 곧 존재자ens, 실재res, 어떤 것aliquid 같은 것들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 말, 개 등과 같은 “보편 통념들notiones universales”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초월적 용어들은 “인간 신체가 동시에 일정한 숫자의 이미지들만을 판명하게/구분되게distincte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데서 생겨난다. 곧 만약 이미지들이 이 숫자 이상으로 나타나게 되면, “이미지들은 혼동되기 시작할 것이며, 만약 신체가 동시에 그 자체로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할 수 있는 이미지의 숫자가 훨씬 더longe excedatur 초과되면 이것들은 서로 완전히inter se plane 혼동되어 버릴 것이다.”(G II 120-21) 다시 말해 만약 신체에서 이미지들이 동시에 판명하게/구분되게 형성된다면 정신도 이 이미지들을 판명하게 상상할 수 있지만, 신체에서 이 이미지들이 완전히 혼동되어 버리면 정신은 아무런 구분 없이 모든 물체들을 혼동되게 상상해서, 이 물체들이 “마치 하나의 속성 아래quasi sub uno attributo, 예컨대 존재자, 실재 등과 같은 속성 아래 포괄되는 것처럼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 용어들이 “최고로 혼동된 관념들summo gradu confusas”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반면 보편 통념들은 전자와 비슷한 원인을 갖고 있지만, 전자와는 달리 “완전히” 혼동될 만큼 많은 이미지들이 신체에서 형성될 경우에 생기는 게 아니라 “정신이 (각각의 사람의 피부색이나 키 등과 같이) 개개의 [사람들의] 적은 차이들을 상상하지 못하고 그들의 숫자도 상상하지 못하며, 단지 이 차이들이 신체를 변용하는 한에서 모두 합치하는 것만을 판명하게 상상하게 될 정도만큼 상상의 힘을 능가”할 때 생긴다. 따라서 보편 통념들은 초월적 용어들만큼 혼동된 것은 아니지만, 개개의 이미지들 사이의 차이와 실질적인 일치점 또는 대립점들을 지각하지 못하는 신체와 정신의 무능력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는 초월적 용어들과 공통적이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이러한 보편 통념은 모든 사람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상이하게 형성된다고 지적한다. 곧 “각자는 자신의 신체의 성향에 따라pro dispositione sui corporis” 보편 통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의 직립 자세를 경탄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직립 동물로 이해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사람을 웃을 수 있는 동물로, 털 없는 두발 달린 동물로, 이성적 동물로 생각하게 된다. 이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인간을 정의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라는 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보편 통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논의는 매우 신랄하고 비판적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 notio는 훨씬 더 광범위한 외연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단순하고 자명한 것, 본유적인 것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반대로 그는 1종의 인식에 속하는 notio와 2종의 인식에 속하는 notio를 명확히 구별하며, 전자를 후자로 대체하는 것, 또는 후자에 기초하여 적합한 인식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데카르트 역시 notio가 누구에게나 명석하게 인식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는 선입견이 그러한 인식을 가로막기 때문이다.(AT VIII-1 24; 원석영 42)22)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데카르트에게 notio는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만이 존재하며, 선입견에서 해방되어 이를 명석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다. 반면 스피노자에게는 하나의 notio가 아니라 두 개의 notio가 문제가 된다. 이는 그가 notio를 상이한 인식의 종류의 문제설정, 따라서 상이한 삶의 종류라는 문제설정 속에 편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 40의 두 번째 주석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많은 것을 지각하여 보편 통념들notiones universales을 형성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보편 통념들은] (I) 감각들을 통해 우리에게 단편적이고 혼동된 방식으로mutilate, confuse, 그리고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 없이sine ordine ad intellectum23) 표상되는 독특한 실재들로부터 [형성된다](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를 보라). 이 때문에 나는 보통 이러한 지각들을 모호한 경험에 의한 인식cognitionem ab experientia vaga이라 부른다. (II) 기호들로부터 [형성된다]. 예컨대 어떤 단어들을 듣거나 읽음으로써 우리는 실재들을 다시 떠올리고recordemur, 이 실재들에 관해, 우리가 실재들을 상상하는 수단들과 유사한 어떤 관념들을 형성함으로써 [보편 통념들이 형성된다](2부 정리 18의 주석을 보라). 전자와 후자처럼 실재들을 고찰하는contemplandi 방식을 나는 다음부터 첫 번째 종류의 인식, 억견opinio 또는 상상이라 부를 것이다. (III) 마지막으로 우리가 실재의 특성들에 대해 공통 통념들 및 적합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보편 통념들이 형성된다](2부 정리 38의 따름정리, 정리 39와 그 따름정리, 정리 40을 보라).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나는 이성 및 두 번째 종류의 인식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두 가지 인식의 종류는, 우리가 조금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모든 점에서 서로 대립하고 전면적으로 단절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첫 번째 종류의 인식은 “거짓의 유일한 원인”(E II P41)인 한에서 개조되고 대체되어야 할 대상이다. 더욱이 인식의 종류는 항상 그에 상응하는 삶의 종류, 삶의 양식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통념의 애매성이라는 문제는 데카르트에서처럼 단지 선입견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곧 상상적인 notio는 하나의 선입견의 결과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삶(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삶)을 형성하고 재생산하는 조건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는 상상의 이론, 또는 알튀세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데올로기의 이론이 존재하는 데 반해 데카르트에게는 그러한 이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바로 notio에 대한 양자의 관점의 차이가 생겨난다.


2) 공통 통념의 의미


  notio 개념의 차이로 미루어볼 때 notio communis라는 개념 역시 상이한 의미로 사용될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선 공통점을 살펴보자. 데카르트처럼 스피노자도 notio communis를 때로는 공리로 제시하며, 때로는 이를 “단순한 것”으로 특징짓기도 한다. 가령 {윤리학} 1부 정리 8의 주석 2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실체의 본성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 이 정리[1부 정리 7]는 모든 사람에게 공리이며, notiones communes 중 하나로 간주될 만하다.”(G II 50) 하지만 notio communis는 {윤리학}에서 이런 의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또한 {신학정치론} 6장의 주석 6에서는 다음과 같이 공통 통념을 단순한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의 본성을 명석 판명하게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공통 통념들이라 불리는 지극히 단순한 어떤 통념들quasdam notiones simplicissimas, quas communes vocant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필요하다.”(G III 253)

  또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거듭 공통 통념은 “우리의 추론의 기초”(E II P40s1)라든가 “이성의 기초”(E II P44c2d), 심지어 “철학의 기초”24)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공통 통념을 추론이나 이성 또는 철학의 기초로 간주하고 있다면, 이는 그가 notio communis의 근거 또는 대상을 속성 및 가장 일반적인 특성들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곧 notio communis는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또는 그것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철학이나 이성의 기초가 되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다. 반면 데카르트에게 notio communis는 “자연의 빛” 덕분에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을 뿐, 그 근거가 분명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 따른 notio communis에 대한 고유한 용법은 {윤리학} 2부 정리 37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다. 곧 여기에서 notio communis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관념들ideas 또는 통념들notiones이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어떤 점에서 일치하며 이는 우리에게 적합하게, 곧 명석하고 판명하게 지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notio communis는 자명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획득하고 구성해나가야 하는 참된 인식 또는 적합한 인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물체는 어떤 점에서 일치하며”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실재의 특성들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실재에 대한 실질적인 인식을 제공해준다. 그런데 물체들은 단 한 가지 점에서만 일치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점에서 일치할 수 있다. 가령 상이한 두 인간의 신체는 연장의 일부라는 점에서 서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고도로 조직화된 기관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치하며, 어떤 것은 먹을 수 있고 어떤 것은 먹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이처럼 일치점이 다양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것들에 기초를 두고 얻을 수 있는 참된 인식 또는 적합한 인식의 범위도 다양하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3) 공통 통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1) 두 가지 공통 통념


  이제 공통 통념들이 형성되는 구체적인 방식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이 점과 관련하여 일단 주목해야 할 것은 2부 정리 38과 39에서 제시되고 있는 두 가지 적합한 인식의 형태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스피노자는 2부 정리 38과 39에서 두 가지 형태의 공통 통념을 지적하고 있다.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 그리고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25)


인간 신체와, 인간 신체가 통상적으로 그것들에 의해 변용되는 어떤 물체들에 공통적이고, 또 고유한 것은 이것들 각각의 부분과 전체 안에 균등하게 존재하며, 이것에 대한 관념 역시 정신 안에서 적합하게 존재할 것이다.26) 


마르샬 게루 이후 관행적으로 각각 “보편적 공통 통념notion commune universelle”과 “고유한 공통 통념notion commune propre”이라고 불리는27) 이 두 가지 형태의 공통 통념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곧 보편적인 공통 통념에서 고유한 공통 통념으로, 또는 역으로 후자에서 전자로 이행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지 해명하는 것이 스피노자 공통 통념 이론의 재구성에서 핵심 과제가 된다.

  먼저 “보편적 공통 통념”의 경우를 보면, 스피노자는 이것의 대상을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 그리고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의 사례는 스피노자가 정리 37이나 정리 38의 따름정리에서 지시하고 있듯이 「자연학 소론」 보조정리 2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조정리 2

모든 물체는 어떤 것들에서 합치한다in quibusdam conveniunt.

증명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단 하나의 동일한 속성의 개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합치하기 때문이다(같은 2부의 정의 1에 의해). 그리고 때로는 좀더 느리게 운동하고 때로는 좀더 빠르게 운동할 수 있으며, 절대적으로 말하면, 때로는 운동할 수 있고 때로는 정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합치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의 가장 보편적인 사례는 바로 “속성”이다. 존재하는 모든 실재들은 그것이 속하고 있는 속성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물체들에 공통적인 연장 속성은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처럼 보편적 성격을 띠는 인식은, 수동적인 상태에서도 적합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28) 아직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인식은 세부적인 동일성과 차이, 대립들을 정확히 식별할수록 구체적인 데 반해, 모든 물체들이 공유하는 연장 속성은 차이 없는 동일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는 또한 윤리적인 의미에서도 추상적이다. 스피노자에게 부적합성에서 적합성으로의 이행은 항상 실천적ㆍ윤리적 이행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적합한 인식은 인간의 윤리적 실천, 곧 능동화 과정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재들 사이의 동일성과 차이, 대립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하는 보편적인 공통 통념은 그만큼 구체적인 실천에서도 적은 도움을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편적인 인식과는 다른, 좀더 구체적인 인식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정리 39의 대상이다. 앞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정리 38과 달리 정리 39에서는 인간 신체와 몇몇 물체들에 공통적이고 또한 고유한 것이 인식의 대상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공통 통념, 곧 “고유한” 공통 통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적합한 인식과 부적합한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부적합한 관념들의 형성


  부적합한 관념들에 대한 논의는 {윤리학} 2부 정리 24에서 정리 31에 이르기까지 전개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부적합한 관념들의 본성 및 형성에 관한 제일 체계적인 논의는 정리 29의 따름정리 및 주석에서 볼 수 있다. 우선 따름정리를 그대로 인용해보자.


이로부터 인간 정신은 그것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quoties ex communi naturae ordine res percipit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해, 그리고 외부 물체들에 대해서도 적합한 인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혼동되고 단편적인 인식만을 가진다confusam tantum & mutilatam habere cognitionem는 점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정신은 (2부 정리 23에 따라) 신체의 변용들의 관념들을 지각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은 (2부 정리 19에 따라) 변용들의 관념들을 통해서만 자신의 신체를 지각하며, 마찬가지로 (2부 정리 26에 따라)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을 통해서만 외부 물체들을 지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념들을 갖고 있는 한에서 정신은 (2부 정리 29에 따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2부 정리 27에 따라)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도, (2부 정리 25에 따라) 외부 물체들에 대해서도, 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2부 정리 28 및 그 주석에 따라) 단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만을 가질 뿐이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자연의 공통의 질서ordo communis naturae”라는 개념이다. 이는 “공통 통념들”과 마찬가지로 “공통의communis”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인식의 종류들의 분류에서 공통 통념들은 제 2종의 인식, 곧 적합한 인식으로 분류되어 있는 데 반해, 스피노자는 여기서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인식을 부적합한 인식으로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왜 “공통의”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양자는 각각 부적합한 인식과 적합한 인식으로 나누어지는지,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따름정리 바로 다음에 나오는 주석에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정신은, 내적으로 규정될 때마다, 곧 그것이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될 때마다가 아니라non quoties interne, ex eo scilicet, quod res plures simul contemplatur, determinatur ad earundem convenientias, differentias, et oppugnentias intelligendum,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할 때마다, 곧 그것이 외적으로, 다시 말해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될 때마다quoties externe, ex rerum nempe fortuito occursu, determinatur ad hoc, vel illud contemplandum 단지 혼동되고 단편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G II 114) 스피노자는 이번에는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내적으로 규정되는 것”의 일반적인 대비를 바탕에 깔고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하는 것을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곧hoc est”이라는 접속사는 의미론적 동치를 의미한다). 그런데 내부와 외부에 대한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스피노자는 내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 각각에 대해 독특한 규정을 부여하고 있다. 곧 그에 따르면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하는 것은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되는 것을 의미하며, 내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정리 29의 주석에 따르면 자연의 공통의 질서로부터 실재들을 지각하는 것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는 여러 개의 실재들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와 우발적으로 마주치는 “이것 또는 저것”을 개별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어떤 실재들이 우리의 신체에 강한 자극과 충격을 줄 때마다 때로는 이것을, 때로는 저것을 즉자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 따라서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은 자연의 실재 질서에 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른 지각(E II P18s)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은 우리에게 외부 물체들의 본성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쳐주기보다는 우리 신체의 습성이나 기질을 더 많이 반영하는 지각이다. 그렇다면 왜 이것을 “자연의 공통의 질서”라고 부를까? 샤를르 라몽Charles Ramond이 잘 보여주었듯이29) 바로 이 점에 “자연의 공통의 질서”라는 표현의 역설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이는 자연의 실재 질서를 가리킨다.(E IV P57s) 2부 정리 7에서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이나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스피노자에게는 자연의 객관적 질서를 가리키는 표현들이 존재하는데, “자연의 공통의 질서” 역시 그 중 한 가지이다.30) 따라서 모든 것에 공통적인 특성들에 대한 인식으로서, 그리고 그것들에 기초를 둔 인식으로서 공통 통념들에 의한 인식은 이러한 자연의 공통의 질서를 인식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실재적인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을 낳는다. 왜 이러한 역설이 생길까? 그것은 우리가 자연 전체로서 이러한 질서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곧 수동적인 상태에서 인식하기 때문이다31).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지각, 인식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지각만을 우리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른 지각 일반과 동일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합한 인식과 부적합한 인식의 차이점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지각의 특징을 좀더 분명하게 규정해야 한다. 여기서는 2부 정리 14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자연학 소론」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 정리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 정신은 매우 많은 수의 실재들을 지각할 수 있는 소질을 지니고 있으며apta est plurima percipiendum, 그 신체가 매우 많은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이러한 소질은 더욱 커진다eo aptior quo ejus corpus pluribus modis disponi potest.


증명에서 요청 3과 요청 6에 준거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정리는 「자연학 소론」의 결론에서 직접 따라 나온다. 이 정리가 첫 번째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매우 많은 실재들을 지각할 수 있는 정신의 소질이나 능력은 신체가 매우 많은 방식으로 배치되는 능력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곧 신체가 외부 물체들로부터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고(요청 3) 이를 통해 얻은 변용의 역량으로 매우 많은 방식으로 외부 물체들을 변용하고 배치할 수 있게 되면(요청 6), 그만큼 정신의 지각의 능력도 증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 능력은 신체의 능력에 비례하며, 신체의 능력은 변용되는 능력과 변용하는 능력의 증대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정신의 지각의 능력과 신체의 변용 능력이 스피노자에게는 능동적인 능력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32)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리 29에서 말하는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지각”, 곧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하지 못하고 그 대신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되는 지각은 이러한 능동적 능력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수동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이러한 정신은 신체가 매우 적은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는 능력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적은 수의 실재들 또는 (정리 17에 나오는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미지들을 동시에 지각하지 못하고 실재들에 대한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만을 얻게 되는 것이다. 


(3) 적합한 관념들의 형성


  그렇다면 이러한 자연의 공통의 질서에 따른 지각과 다른 식으로 지각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스피노자를 이를 “내적으로 규정”되는 지각으로, 곧 “정신이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되는 지각으로 부르면서, 부적합한 지각 또는 인식과 다른 적합한 인식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내적으로 규정되는 지각과 공통 통념들의 형성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스피노자는 {윤리학} 2부 정리 41에서 1종의 인식과 2종 및 3종의 인식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첫 번째 종류의 인식은 오류의 유일한 원인이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이 정리의 증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정리 40의 주석에서 말한 것처럼 1종의 인식에는 부적합하고 혼동된 모든 관념이 속한다. 따라서 (2부 정리 35에 따라) 이러한 인식은 오류의 유일한 원인이다. [...]” 그는 여기서 1종의 인식이 오류의 유일한 원인인 이유를 이 인식이 “부적합하고 혼동된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또는 정리 29의 따름정리 및 주석이나 정리 35의 용어법대로 말하면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이라는 점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1종의 인식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 곧 부적합한 인식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때문에 그것은 오류의 원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떤 인식이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일까? 이는 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와 주석에 따르면 자연의 공통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식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지각이다.33) 이러한 인식은 정신이 “외적으로 규정”될 때, 곧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부터 이것 또는 저것을 고려하도록 규정될” 때 형성되는 인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를 단편적 인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또한 이는 2부 정리 40의 주석 2에서 말하듯이 우리의 신체를 변용하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한데 뭉뚱그려서 상상할 때 생겨나는 인식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는 이를 혼동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1종의 인식은 단편적이고 혼동된 인식이기 때문에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대립”을 제대로 알려줄 수 없으며, 각각의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기질에 따라 왜곡되고 변형된 인식만을 제공해줄 뿐이다.

  반면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두고 있는 2종의 인식은 이처럼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른 인식을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에 따라 개조하는 인식이다. 다시 2부 정리 29의 따름정리와 주석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언급에 따르면, 이러한 인식은 “내적으로 규정되는”, 곧 “동시에 여러 가지 실재들을 고려한다는 사실에 의해 실재들 사이의 합치, 차이 및 대립을 파악하도록 규정”되는 인식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실재들을 동시에 고려하게 되면, 자연의 공통적 질서에 따라 인식할 때와는 달리 이러저러한 실재들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따라 실재들의 이런저런 측면들을 단편적으로 지각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다면적인 인식 내지 지각은 이를 기초로 하여 실재들 사이의 합치와 차이, 대립을 고려하기 때문에, 단편적 지각에 수반되는 혼동된 인식에 빠질 위험성도 적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은 훨씬 더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내적 규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식은 여전히 지각의 차원에서, 곧 변용들의 질서와 연관에 대한 지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적 인식이다. 따라서 이것과 자연의 공통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지각과의 차이는 동일한 상상적 인식 내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다면적 지각의 노력을 통해 우리가 소수의 물체들 사이의 공통적 특성을 지각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 좀더 많은 물체들 사이의 특성들에 대한 지각으로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게 된다면, 우리는 좀더 많은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둔 인식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공통 통념들에 기초를 둔 2종의 인식은 상상적 인식 안에서 자신의 성립 조건을 발견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우리는 들뢰즈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34)


5.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개념의 의미를, 데카르트와 비교하면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논의는 데카르트와의 차이점을 드러내면서 스피노자의 용법의 고유성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의를 지닐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의 의미를 해명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논의가 주로 {윤리학} 2부에 국한되어 있을 뿐 {윤리학} 5부나 {신학정치론}에서 볼 수 있는 공통 통념의 용법과 의미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학정치론}은 {윤리학}과 달리 엄밀한 학문적 논증이 아니라 합리적인 삶의 규칙에 따라 우중(愚衆)을 인도하기 위한 실천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공통 통념 개념이 지닌 실천적 함의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공통 통념 개념을 전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신학정치론}에 대한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스피노자의 notio communis 또는 notio를 “개념”이나 “관념”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이유 역시 좀더 분명히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우리가 후속 논문에서 다룰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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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이 글에서 스피노자의 경우 notio communis를 “공통 통념”이라고 번역했으며, 데카르트의 경우는 “공통 관념”이라고 번역했다. 동일한 용어를 이처럼 철학자에 따라 상이하게 번역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며, 사실 될 수 있는 한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notio communis의 경우 이러한 차이는 이 개념에 대한 두 철학자의 인식의 차이에서 유래하며, 따라서 상이한 번역이 얼마간 불가피하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notio communis 및 notio라는 용어에 대한 번역의 문제는 이론적으로 의미 있는 쟁점을 제기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충분히 다루기 위해서는 별도의 논문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심사위원들(익명의 심사위원들의 꼼꼼한 논평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겸해 두어 가지 점만 지적해두기로 하겠다. 첫째, 우리가 “notio”를 “개념”으로 번역하는 것을 피한 이유는, 데카르트에서 “notio sive idea”라는 표현은 발견할 수 있는 반면 “notio sive conceptus”라는 표현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주 9) 참조). 둘째, 본문에서 지적하겠지만 데카르트에서 notio는 인식론적 일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관념”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스피노자에서는 notio가 상상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인식의 종류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를 “관념”이라는 용어로 번역하기는 어렵다. 셋째,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에서 notio를 “관념”의 동의어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idea”와 “notio”라는 두 가지 상이한 원어를 동일한 “관념”이라는 단어로 번역할 경우 상당한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개념”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이 경우 notio라는 개념이 지닌 독자적인 이론적 위상과 문제설정은 “관념”이라는 개념 속으로 파묻혀 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notio에 관한 독자적인 역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통념”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한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통념”이라는 용어는 notio가 항상 “보편적”이거나 “공통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잘 드러내줄 수 있다. 둘째, 또한 이 용어는 notio가 논증이나 증거를 통해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 명증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 두 가지 점만으로도 “통념”이라는 용어는 notio에 대한 역어로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제안에 대한 좀더 충실한 논거들은 후속 논문에서 제시해볼 생각이다.     

2) 한편 󰡔신학정치론󰡕에서는 󰡔윤리학󰡕과는 다소 상이한 용법이 나타나는데, 자클린 라그레Jacqueline Lagrée는 이를 “종교적 공통 통념 이론”이라고 부르고 있다.(특히 Lagrée 1989; 1990 참조)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고 다른 곳에서 좀더 논의해보겠다.  

3) 이 글에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저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약어를 사용할 것이다. 데카르트 전집의 경우 AT라는 약칭 아래 권 수는 로마자로(I, II, III ...), 페이지 수는 아라비아 숫자로(1, 2, 3, ...) 표시할 것이다. 국역본의 경우에는 “참고문헌”에서 밝힌 것처럼 역자의 이름에 따라 책을 표기하고, 쪽수를 적을 것이다. 스피노자 전집은 G라는 약칭 아래 역시 권 수는 로마자로, 페이지 수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할 것이다. 스피노자의 각각의 저작 및 󰡔윤리학󰡕의 정의와 공리, 정리, 증명, 주석 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시한다.

      󰡔지성교정론󰡕: TIE, 󰡔소론󰡕: KV, 󰡔신학정치론󰡕: TTP, 󰡔윤리학󰡕: E

      정의: D, 공리: A, 정리: P, 증명: d, 따름정리: c, 주석: s, 보조정리: L, 서문: praep, 부록: app,

      E II P29s → 󰡔윤리학󰡕 2부 정리 25의 주석.

    KV II, 17, §5 → 󰡔소론󰡕 2부 17장 5절.

    TIE, 38 → 󰡔지성교정론󰡕 38절.

     TTP VI ad6 → 󰡔신학정치론󰡕 6장 주 6)   

4) “anteceptam animo rei quamdam informationem, sine qua nec intellegi quicquam nec quarei nec disputari possit.”

5)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Goldschmidt 1984, pp. 114 이하; Lévy 1992, pp. 302 이하 참조.

6)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에서 프롤렙시스 개념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Goldschmidt 1984 참조.

7) Sandbach 1930이 프롤렙시스에 대한 가장 완고한 경험론적 입장을 대표한다면, 현대의 주석가들은 대개 온건 본유론적인 입장을 택하고 있다.

8) 이 점에 대해서는 Lagrée 1989; 1991; 1994를 각각 참조. 신스토아학파의 용법에서 두드러진 것 중 하나는 이른바 종교적 notio communis 이론이다. 이 이론은 뒤플레시스 모르네의 󰡔기독교 종교의 진리에 대하여De la vérité de la religion chrétienne󰡕(1581) 이래 17세기 전반에 걸쳐 상당히 확산되었으며, 특히 에드워드 허버트 셔버리Edward Herbert Cherbury의 이론과 스피노자의 이론 사이에는 상당한 친화성이 존재한다. Lagrée 1989; 1990을 각각 참조.

9)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데카르트의 경우 notio communis를 “공통 관념”으로 번역했다. 반면 데카르트 국역본(이현복 I, II, 원석영)에서는 모두 이를 “공통 개념”으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ideas sive notiones”, 곧 “관념들 또는 notions”라는 표현은 몇 차례에 걸쳐 사용하고 있는 반면(가령 AT VIII 358), 어디에서도 “ideas sive conceptiones”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을 고려해볼 때, 차라리 notio는 “관념”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10)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단순성”은 원자나 요소 또는 원초적 형상의 단순성이 아니라 인식하는 정신에 나타나는 가장 단순한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대체하는 새로운 인식의 질서를 수립한다. 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Marion 1981, pp. 131 이하 참조.

11) 하지만 단순 본성 개념이 초기 저작, 특히 󰡔정신지도규칙󰡕에만 등장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장 라포르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 개념은 드물기는 하지만 후기 저작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Laporte 1988 참조.

12) 데카르트 자신은 이 10개의 “공리들 중 여럿”은 “좀더 잘 설명될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공리들이라기보다는 정리들로” 제시되어야 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AT VII 164)

13) 또한 󰡔“성찰” 반론에 대한 두 번째 답변󰡕도 참조. “공리들 또는 공통 관념들axiomata sive communes notiones”(AT VII 164)

14) 데카르트에서 공통 관념들의 사례에 대한 좀더 포괄적인 고찰로는 Gouhier 1987, pp. 272-73 참조. 공통 관념의 사례들은 초기 저작인 󰡔정신지도규칙󰡕에서부터 󰡔뷔르만과의 대화󰡕 및 말년의 서신교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15) “단순 관념들은 초기 저작에서는 보편자들(실체, 자아, 연장)의 일반 범주인 데 반해 「어떤 비방문에 대한 주석」에서는 개별 관념들도 포함하고 있다. 공통 관념들은 확실한 지식을 얻기 위해 특수한 관념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공리들 내지 사유의 규칙 또는 근거율이다.”(Hart 1970, p. 121)

16) “선생께서 내가 제시한 것에 대해 제기한 세 번째 반론은, 공리들은 ‘notiones communes’로 간주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G IV 13)

17) “axiomata seu notiones communes”(G I 127).

18) E I P8s2(G II 50); E II P38c2(G II 119); E II P40s1(G II 120); E II P44c2d(G II 126); E II P47s(G II 128)

19) TTP IV(G III 64); TTP V(G III 77); TTP VI ad6(G III 253); TTP VI(G III 88); TTP XIV(G III 179)

20) 따라서 notio communis가 󰡔윤리학󰡕이 이룩한 주요 혁신 가운데 하나라는 들뢰즈의 말은 일리가 있다. “실제로 공통통념들은 󰡔윤리학󰡕에만 고유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이전의 저작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새로움이 단지 단어의 새로움일 뿐인 것인지 아니면 귀결들을 이끌어내는 개념의 새로움인지를 아는 것이다.”(Deleuze 1999, 170쪽) 번역 가운데서 “공통개념”은 “공통통념들”이라고 고쳤다.

21) 게루에 따르면 이는 유와 종, 범주 등과 같은 논리적 개념들을 의미한다. Gueroult II, p. 364.

22) 또한 󰡔철학원리󰡕 1부 71-72항도 참조.

23) “지성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질서 없이sine ordine ad intellectum”라는 이 표현은 󰡔윤리학󰡕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표현이고, 실제로 이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도 상당히 모호하다. 이는 대개 “지성에 대해 무질서하게/질서 없이”라고 번역된다. 가령 Curley는 “without order for the intellect”라고 번역하고 있고, Bartuschat는 “ohne Ordnung für den Verstand”(Spinoza 1999b)로, Pautrat는 “sans ordre pour l'intellect”(Spinoza 1999a)로 번역하고 있다. Appuhn과 게루(Gueroult II, p. 382)는 “désordonnée pour l'entendement”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내용상으로는 다른 번역들과 거의 같다. 반면 Shirley는 “without any intellectual order”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런 번역은 여기서는 별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5부 정리 10에 대한 해석에서는 상당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Macherey의 번역(“sans ordre allant dans le sens de l'intellect”, Macherey 1997, p. 312)을 따랐는데, 이 구절의 의미를 제일 정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5부 정리 10에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거기에서는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번역하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24) “철학의 기초는 공통 통념들이며, 자연으로부터만 이끌어내야 한다.”14장 (G III 179)

25) “Illa, quae omnibus communia, quaeque aeque in parte, ac in toto sunt, non possunt concipi, nisi adaequate.”

26) “Id, quod corpori humano, & quibusdam corporibus externis, a quibus corpus humanum affici solet, commune est, & proprium, quodque in cujuscunque horum parte aeque, ac in toto est, ejus etiam idea erit in mente adaequata.”

27) Gueroult II, pp. 327 이하 참조.

28) 갈릴레이나 데카르트가 확립하려고 했던 근대 수리물리학이 이러한 보편적 인식의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여기서는 개별 물체들이나 몇몇 물체들의 고유한 특징보다는 물체들이 물체들인 한에서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 곧 속성이나 특성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29) Ramond 1995 pp. 231 이하 참조; 또한 박기순 2006 주 28) 참조.

30) 반면 몇몇 주석가들은 이를 상상적인 질서, 또는 “자의적인 질서random order”나 “거칠고 정교화되지 않은raw, uncultivated” 질서로 간주하기도 한다. 예컨대 Yovel 1994, p. 95; Segal 2000, p. 14 주 5) 등 참조.

31) “우리는 다른 것들 없이 자신에 의해 자신을 인식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인 한에서 수동적이다/수동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Nos eatenus patimur, quatenus Naturae sumus pars, quae per se absque aliis non potest concipi.”(E IV P2)

32) 능동과 수동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는 3부 정의 2에서 제시된다. 이 정의에 대한 분석은 진태원 2006, 7장을 참조하라.

33) 2부 정의 3의 해명에서 볼 수 있는 “지각”과 “개념” 사이의 스피노자의 구별에 따르면 지각은 “수동성”을 더 함축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34) 공통 통념 이론에 대한 들뢰즈 논의의 문제점은 그의 모순적인 주장에 있다. 곧 그는 우리가 실존의 차원에서는 부적합한 관념들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2종의 인식은 상상적 인식 안에서 자신의 성립 조건을 발견한다고, 곧 우리는 실존의 차원에서 적합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그의 스피노자 해석에 특유한 본질과 실존, 관계와 역량의 분리에서 비롯하는 결과다.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6 4장과 6장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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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사회주의에 대해2 -울라님, 윤타님과

울라
노동자 국가 창출을 위해 노동자 정당이 존재하고, 당은 진공상태가 아닌 계급투쟁이라는 엄혹한 조건에서 존재하는 바, 당의 일상적 존재양식은 투쟁일 것입니다. 그리고 투쟁에서의 승리와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가 양립할 수 없을 때 후자의 폐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은 이 가치들의 이상적 구현은 혁명의 완성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신념에 근거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의 진정한 담지자는 제도, 불문율 등의 형식이 아닌 주체라는 것, 노동자 당에서의 민주주의의 달성은 이러저러한 형식이 아닌 혁명적 주체의 재생산에 달려있다는 것,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당의 일상적 실천 가운데서 당과 함께하고 단련되어야 한다는 것은 계급투쟁이라는 명제를 인정하는 이들에게는 1903년 이래로 공식화된 합리적 결론일 것입니다. 우리가 열사에게서 삶을 뜨겁게 사랑하는 이유가 삶을 불살라버린 근거가 되어버린 모순을 발견하듯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진형 사회주의'란 결국 적당히 사회주의 교양을 공부한 자유주의자의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 2007-02-06 12:37
 
로쟈
**님/ 농반진반입니다.^^
울라님/ 정답입니다. 마치 모범답안 같습니다... - 2007-02-06 14:34
 
푸하
문제는 부정적인 것의 담지자가 되고 싶은 개체가 있는가? 하는 것 같아요. - 2007-02-06 21:29
 
기인
그런 개체는 있을수도 있는데, 제가 문제삼고 있는 부분, 또는 고민하고 있는 부분은. "다시 돌아온 주체"입니다. 과연 혁명적 주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용없는 당위가 아니라, 규정된 법률같은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담금질 되는 혁명적 주체라는 것. 그리고 그 실천과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사이의 역사적(현재 시점에서) 긴장. 당의 일상적 실천 가운데서 당과 함께하고 단련된다는 것. 그런데 현재 당이 과연 있는가? 아니면 당 또한 만들어가야 하는가?
계속 회귀하는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충분한 이론적 반성이 부재하다는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울라님이 말씀하시는 '합리적 결론'이 더 이상 모든 '사회주의자'가 흔쾌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 또한 이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너무 쉽게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였어, 또는 그들은 맑스를 '곡해했어' 정도로 덥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 결국 그래서, 전망이 뚜렷하지 않고, 어떻게 가야하는지, 정말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으니, 답답한 것 아닐까요. '답답'하다라는 말은 너무 나이브하고, 오히려 '절망'과 '답답'의 중간에 가깝습니다. - 2007-02-07 14:32 수정  삭제
 
울라
올바른 전망 / 올바른 전망의 구체화로서의 혁명 / 구체화의 매개로서의 사회주의자 => 올바른 관념없이는 역사도 없다!?
의문)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현존하지 않는 데/존재한 적이 없는 데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올바른 전망/개념을 갖는 것은 가능한가?
'사회주의는 전망이 아니라 운동이다. 이 운동은 자본주의가 산출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운동으로서 자본주의와 함께 모순적 통일체을 구성한다. 우리는 모순적 통일체로서의 이 역사의 시기의 종착지를 사회주의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전망이 불투명해서 못한다 = 적정이윤이 보장이 되지 않아서 투자 안한다> 사회주의는 투기가 아닙니다.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배우리라 믿습니다. - 2007-02-07 17:14
 
기인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배워야 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동의. 그런데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 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라는 판단은 역시 의심이 갑니다. 그렇다면 '전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또는 '전위'라는 주체는 불필요하고, pt가 역사적 운동과정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체의 역할(또는 주체효과)를 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제가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는 '당'이 있습니까?
현 시점이 '전망'이 불투명한 시점이라는 것은 바로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있지 못한 시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한 의문을 던지신 것처럼,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현존하지도 않았고,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역사적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반성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실패에 대한 (이론적)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반성도 하나의 실천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닐까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 날고, 철학의 임무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고, 주체는 실천을 통해 구성되지만, 이론 또한 물질화된다는 것. '전진하는 운동'에 따른 새로운 '이론'이 전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 그 '이론'이 확고히 없어서 그것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울보님 지적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따로 제 페이퍼에 정리해 두겠습니다. ^^ - 2007-02-07 22:09 수정  삭제
 
yoonta
이상하게 길게만 쓰면 댓글이 잘 등록이 안되고 있습니다. -_- 짧게 쓰면 이렇게 올라가고..할말이 많은 내용의 글인데 - 2007-02-07 23:48
 
로쟈
'에디터로 쓰기'로 해보시죠... 그래도 그런가요?.. - 2007-02-07 23:59
 
yoonta
그래도 마찬가지라는...알라딘에 상담해봐도 원인불명이라는군뇨..ㅜ.ㅜ - 2007-02-08 00:01
 
푸하
그렇다면 짧은 글의 무한연쇄를 시도해봐도 괜찮을 듯합니다.^^: - 2007-02-08 00:14
 
로쟈
아무래도 댓글이 아닌 페이퍼를 쓰시는 게 빠를 듯하네요.^^ - 2007-02-08 00:18
 
yoonta
제가 페이퍼쓰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은 독백처럼 혼자 주절거리다보면 독선에 빠지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완성도의 차원에서는 페이퍼가 더 좋지만 말이죠. 어떤 분은 댓글이 주렁주렁달리는게 싫다고 하시는데 저는 진흙탕속에서 뒹굴게 되더라도 댓글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글이 더 좋더군요.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이 미처 생각치 못했던 생각들도 발견하게 되구요.^^ 근데 문제는 페이퍼도 안올라가네요..-_- 아 근데 어느정도분량까지 올라가는지는 실험안해봤는데 이정도까지는 올라가나보네요. - 2007-02-08 00:42
 
울라
"전위는 전능하지 않습니다. 저 오래된 미래에 대한 초월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종지부를 찍어야 됩니다. 구시대의 전위는 노동자 국가 건설까지에만 가교를 놓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후의 사회주의운동의 발전은 신시대의 주인에게 과제로 남겨놓으면 됩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정세와 과제, 정세와 과제, 정세와 과제... 이 쉼없는 무한연쇄의 짐을 지고서 지금 이 땅에 '당'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안식일을 기원합니다. - 2007-02-08 01:07
 
기인
전위가 전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구시대의 전위'라고 하신 것이 현시대의 전위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노동자 국가 건설' 자체가 반성되고 새롭게 이론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요? (pt의 정치권력 장악과 국가독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자율주의가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떠한 길도 적확한 '전망'으로 제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저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전혀 상관없이 또 다시 '노동자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 것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이론이 재구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현실적으로 실재적으로 '당'이라는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종의 '최종심급' 비슷한 의미에서의 '당' 건설이라고 하며, 또 이는 정세와 과제의 '무한'연쇄 속에서 투쟁-실천의 '무한' 연쇄 속에서 먼 지평선으로 다가가는 것 뿐이라면! 지구가 둥글고 유한하다는 확신 속에서만이 먼 지평선으로 다가가는 행위가 유의미하다면, 그 본질적 전제에 관한 반성이 과연 확고히 이루어졌느냐가 의문입니다.
물론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은 원칙적으로 전진하는 운동에 대한 이론적 반성으로서 이루어지겠는데, 그 '전진하는 운동'이라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도 포함되는 현정세라는 것입니다. - 2007-02-08 08:59 수정  삭제
 
울라
평소 스타일대로 말하겠습니다.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에서 제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가 X 같아서 운동하고, 무릅 꿇고 사는니 서사 싸우다 죽겠다는 뒤틀린 심정으로 운동하지, 해방/평등/우리의 아름다운 사회주의 여신을 추앙해서 운동할 수 있을 것 같냐"는 것입니다. 이념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이 사회에서 아직도 가진 것이 많아서 못 하는것 아닙니까? 자기가 가진 알량한 것들이랑 죄다 버리고 낮은 곳에 임하소서~ 이 X같은 곳에서 팔뚝질 안하고 살 수 있나...
그리고 노동자국가 권설이란게 뭐 대단한 것 이야기 한 것도 아니고, 억압받는 자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 억압을 끝장낼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강령이야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근데 이 강령이란게 골방에서 책만 파서는 나오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상아탑 안주인들의 ddr에 기대하느니...
아! 소련의 경험에 대한 반성이야 정말이지 중요하죠. 근데 전 91년 이전의 삶, 러시아어, 러시아인, 그들의 고통과 희망에 직접 맞닿아 있는 활동가가 쓴 글이 나오면 읽으렵니다. 2차문헌에서 짜집기한 논문들의 자기재생산을 바라보는 심정이란... 흐미~~

'이루어야 할 상태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개념이 미친 해악은 두 가지이다. 첫째 역사는 이 정당하기 그지없는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는 객관주의의 유포. 둘째 이 훌륭하기 그지없는 관념에 많게 세계를 끼어맞추어야 한다는 주관주의의 유포. 역사의 관조자 혹은 절대군주가 되려는 자 환상에서 깨어나소서. - 2007-02-08 11:25
 
yoonta
울라/소위 레닌주의적 전위당주도의 노동자국가라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짜집기한 논문들"을 보지 않아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쯤은 이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제가보기엔 아직도 님은 한국의 80년대식 맑스레닌주의라는 협소한 시야안에 갖혀계신듯 합니다. 제가 바로 그랬거든요..-_- - 2007-02-08 14:24
 
울라
80년대 스탈린주의 밀수품과 1917년 레닌의 사유를 구분못하는 이가 지금도 있습니까? 전위/당/노동자국가 등 이런 단어들만 나오면 깍~깍~ 소리치며 저기 아직 시체가 걸어다닌다며 질색하는 분들. 한 번 세상 엎어보세요. 그러면 믿어줄게요.

80년대 값싼 낭만으로 어쩌구저쩌구 주변에서 맴돌던 이들. 당신들이 반 푼어치의 값싼 입으로 '동지'라 불렀던 어떤 이들이 수인이 되어서도 꺾지 않았던, 그리고 지금도 키워나가고 있는 그 신념에 발언할 자격이 있습니까?

로자님의 서재를 별 시덥잖은 말들로 어지럽혀 미안합니다. - 2007-02-08 16:56
 
로쟈
별 말씀을. 한데, 견적상 댓글로 카바될 수 있는 말씀들이 아닐 듯한데요.^^ - 2007-02-08 17:15
 
기인
로쟈님 말씀에 동의 ^^; 처음의 논점과는 다른 부분으로 많이 나아갔지만, 분명 울라님이 말하신 것처럼 제가 절박한 노동자의 상황에서 비정규직 투쟁이나 생존권 투쟁에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상황이라서 (꾿꾿하게 공익월급 받아가며 사교육으로 연명하며 자기변명하고 있는 학삐리!라는 상황) 전망이다 뭐다, 고민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저와같은 '계급'의 사람들이 한때나마 노동자 중심주의와 pt독재를 믿었던 사람들이 요즘 전반적으로 회의하고 있는 까닭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휴머니스트적 동질감으로서 노동자 계급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라면
계속 되풀이되는 논점이지만, 울라님이 말하신 것처럼 pt독재, 공산주의, 꼬뮨,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 내용이 소련에 대한 반성으로 채워지거나, 적어도 어떤 길은 '아닌지'를 과거 잘못된 길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통해서 반성되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물론 확고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저술과 블루 프린트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닫힌 체계로서, 목적론적으로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것의 폭력성과 실패(즉 교조적 맑시즘)로부터 우리는 배운것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앞으로의 전진하는 운동을 통해서 이론이 조직화되는 것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계속 돌아오는 지점은,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맑스가, 레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시대의 맑스가, 레닌이 아니라. 지금의 맑스와 레닌 말입니다. 제 의문점이 어느정도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도 레닌의 전위당주도의 노동자국가는 실패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 '스탈린'이라는 지점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럼 스탈린은 사회주의 외부에서 나온 괴물입니까? 스탈린에 의해 조성된 그리고 그가 '발명한' 여러 것들은 비-사회주의라고 처단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스탈린이라는 괴물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레닌주의 안에 분명 있었고, 스탈린주의도 그렇게 쉽게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스탈린 이후, 지금 소련은 당연히 부정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실패를 말미암은 '원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일국-사회주의의 한계이든, 치졸하게는 서방넘들의 압박이든 간에. 그러기에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울라님 말처럼 91년 이전 러시아 활동가의 글이 나오면 읽게다라고 하셨는데, 저도 읽고 싶습니다. 도대체 러시아는 무엇이었는지. 이것이 해결이 안 되면, '팔뚝질'은 하나의 상황에 대처하는, 또는 '조직'의 판단에 따르는 일 밖에 더 되겠습니까? - 2007-02-08 17:50 수정  삭제
 
yoonta
울라/ 당시에도 스탈린은 취급도 안해줬습니다. 주 텍스트는 레닌저작집과 MEW같은 것들었죠. 모르긴 몰라도 님보다는 제가 접한 맑스레닌 저작들이 더 많을걸요? 그리고 위에처럼 말씀 격하게 하시는것보니 제가 무슨 코리아혁명의 배신자쯤으로 보이시나보네요.? 님같은 분들이 과거에도 있었죠. 그런 분들이 소위 혁명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동료사회주의자들을 학살하곤 했었죠..한마디만 더하면 세상은 "한번 엎"는 것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님에게 하려는 이야기는 결국 이겁니다. - 2007-02-09 01:28
 
울라
휴머니스트적 동질감... 자본주의 모순이 여전히 '그'의 문제이고 운동이 '그'의 고통에 공감해야 할 문제인가요. '그'의 해방없이는 '나'의 해방이 없다는 인식이 심장을 뛰게합니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나의 해방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기인님의 대안에 대한 사유가 올곧은 지도력을 고민하는 것이라면 이 엄혹한 시기에 뜻있는 동지를 만난듯 기쁨니다. 그렇지만 그 고민의 성패여부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열심히 하세요. 불편한 글에 인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yoonta/ 동료사회주의자를 학살하고 학살당했던 시대를 체험한 듯 말하네요... 몇마디 댓글로 상대방을 값싼 낭만, ~주의, 학살자로 규정짓는 것 또한 학살의 인터넷버전이라고 생각되네요. 우리는 어쩌면 그토록 미워하며 깔보는 스탈린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요즘같이 칠흑같은 시기에 눈 막고 귀 막고서 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 반성과 성찰의 터널을 통과했으리라는 착각은 착각일 뿐이죠.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수많은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해지고 있는 '말'들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이 근거에 접속해 보시겠습니까?
(80년대 그것들을 읽으셨으니 일어는 정말 잘하시겠네요^^) - 2007-02-09 13:30
 
yoonta
그래서 그런사람(학살한사람) 없다...라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원래 그런겁니다. 소위 레닌주의란게. 줄줄이 읊어드릴 생각 없고 또 그러지도 못하니 역사책 좀 보세요. "짜집기 논문"이라고 비아냥거리기 이전에 기본 소양은 익히셔야죠. 그리고 기본 매너하고.."몇마디댓글로 상대방을 값싼 ~주의"자로 규정한것은 누가먼저인지 위 댓글들을 다시한번 읽어보시길. - 2007-02-09 20:37
 
울라
yoonta님 하나 제안하겠습니다. "소위 레닌주의적 전위당 주도의 노동자국가라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을 정리해서 올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럼 거기에 제가 가능한 한 성심껏 답하겠습니다.
저도 학교라는 공간에 거주하고 있을 때에는 반-레닌주의자였습니다. 자율적인 활동가들의 동등한 관계맺기를 기획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몸에 쓰여지고 있는 세계는 점점 "강고한 규율의 당을 달라"는 목소리를 높여 가고 있습니다.
님은 협업에 의한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을 칭송해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협업을 왜 거부합니까? 적의 압도적인 힘을 체험하고 있노라면 전 감히 이러한 거부에 대해 이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은 집단적 협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집단적 '노동'은 공동으로 노동하고 공동으로 향유하는 공동노동이기도 합니다. 이 공동노동은 규율없이는 자신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전 동지들의 노동의 축적물/공동의 노동수단을 제 실책으로 소진시켜서는 안 된다는, 제한된 역량을 집중해서 돌파해야 된다는 최소의 조직적 책임을 규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평가받고 제 역량에 맞추어 알맞은 위치에서 활동하는 것. 전 이것을 규율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러한 규율에 대해 억압이라고 낙인찍을 것입니까?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제가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곳에 있기 위해서 전 이 억압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자유로운, 너무나 자유로운 그러나 무력한, 너무나 무력한 개인이기를 거부하겠습니다. 전 개인이기보다 '지도'받는 인자가 실상 더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쓰여지지 않은 세계가 너무나 광할합니다. 글로 세계를 인식하기에 앞서, 그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 2007-02-10 00:28
 
기인
울라님/ 저도 그 '휴머니스트적 동질감'이 아니라, 이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의 해방 속의 '나'의, '우리'의 해방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지점은 저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우리'의 해방의 궁극적 길이 아닌, 그 '매개'단계 내지는 방법론이 반성되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죠. 울라님과 대화하면서 내 고민이 '형이상학적' 이었는지 자문해보기도 합니다. 문제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라면, 이 지점부터 즉 '어떻게 변혁시킬 것이고' '변혁을 하려면 나의 세계관은 어때야 하는가' 부터 사유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천의 문제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실제 (어쨌든) 성공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역사적 반성과 '함께' 우리는 실천의 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고, 그것 자체가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울라님 말씀처럼 이것이 '지도력'을 고민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 고민의 성패여부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지가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천적 고민이냐, 형이상학적 고민이냐, 변증법적 사유냐, (소부르주아적) 합리주의적 사유냐를 가르는 것이 그 지점이 되겠지요. 기본적으로 제 입장은, 제 고민 또한 나름의 '실천'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고민'후 '행동'이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외 활동으로는 모 단체의 당비나 또 다른 모 단체의 후원금 정도로 자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고민이 하나의 '지도력'이 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 부분을 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 2007-02-10 08:03 수정  삭제
 
기인
사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지만, 아직 80년 이후의 서구 맑시즘의 기본 문제틀 자체도 따라가기 벅찰지경이라서, 어떻게 하면 적어도 '내'가 확신을 갖고, '우리'로 확장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수준이죠;; - 2007-02-10 08:06 수정  삭제
 
기인
마지막으로 제 생각을 정리하자면, 구조주의적으로 '주체' 물음을 주체를 발생시키는 호명하는 힘의 문제로 변신(?)시키더라도 그 '구조'가 '주체'의 자리를 대체할 뿐이 아닌가하는 문제로 나아가고, 여기서부터 탈구조주의자들에게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할터이지만, 저는 아직 어떠한 확신도 없습니다. 계속 고민을 하면서도 현정세와 '현재'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음은 물론이죠. 힘듭니다. 여기까지 페이퍼에 정리해 놓겠습니다. - 2007-02-10 23:05 수정  삭제

 

어쨌든 정리해 놓습니다. 위 대화에서도 짐작하실 수 있지만, 이제 제 관심은 스탈린입니다. 스탈린! 지젝이 레닌도 좋아하던데, 저는 스탈린을 좋아하던 싫어하던, 도대체 스탈린이란 무엇인지 공부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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