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퍼온글] ‘문학 속의 서울’

# 문학 속에서 본 서울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무척 궁금하다. 1960년부터~2000년까지 서울의 모습. 여러 문인들의 작품 속에는 어떻게 그려져 있을까? 시, 소설, 수필과 같은 작품과 가사와 대중문화로 묘사된 서울의 모습을 만나보자. 이 책 에 쓰여 진 한 구절을 보면 더욱 선명해 질 것이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지난 600여 년간 한국 사회의 변동을 꼼꼼하게 기록한 역사 텍스트이기도 하다. 역사 텍스트에는 공식적인 기록과 일상적인 이야기가 공존하지만, 서울의 역사는 공식적인 기록물로서만 존재해왔다. 우리가 문학 텍스트에 형상화된 서울을 읽는 이유는, 마법에 걸린 문학을 통해서 공식성에 가려진 서울의 일상, 삭제된 서울의 구체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프롤로그)


‘문학 속의 서울’


(2007년 2월 23일 세계일보기사)

한국문학 통해 서울의 변천사 들여다보니…


  문학은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예술이다. 가짜인데 진짜 같고, 거짓말인데 현실보다 더 적나라하게 진실을 드러내기도 하니 말이다. 허언(虛言)을 통해 진언(眞言)에 다다르려는 특성 때문에 문학은 종종 역사를 이해하는 2차 텍스트로 이용돼 왔다. 다양한 역사책들을 통해 1970년대 서울 빈민들의 삶을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가짜 이야기인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서 그것을 들여다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문학작품의 내용을 현실과 단순 등치시킬 순 없다. 문학은 역사 연구자들이 추구하는 ‘사실’을 완벽하게 재현하진 않지만, 거기에 당대의 어떤 ‘진실’이 녹아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 속의 서울’은 이와 같은 역사와 문학의 접합지점을 부각시켜 한국문학을 통해 1960년대 이후 서울의 변화를 통시적으로 살펴보고자 기획된 책이다.
개화의 과정을 거친 후 한국문학이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했던 시기의 문학작품들 중에서 서울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을 선별하여 써내려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원재료의 힘에 있다.


이 책의 기본 에피소드들이 돼 준 문학작품들이 담고 있는 감동과 재미와 공감의 힘, 그것은 이 책 한 권을 엮어 나가는 데 필요한 소중하고도 값진 모자이크 조각들이었다. 거기에 살을 덧붙이는 작업은 물론 필자들의 몫이었다. 문학작품이 내뿜고 있는 진실을 훼손하지 않되 그와 관련된 사실들을 가이드해 주는 것은 단순히 원재료에 양념을 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재조직화하여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한국문학과 서울의 역사, 이 두 마리 토끼 사이에서 둘 다 포기하지 않되 이들 사이의 조합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자도, 편집자도, 디자이너도 정신없이 매진하다 보니 어느새 책이 세상에 나와 있다. 모든 편집자들이 그러하겠지만, 책의 출간과 함께 기대도 부풀지만 두려움도 앞선다. 문학이 인간 삶의 밝은 부분보다는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측면이 강하기에 지나치게 무거운 느낌이 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독자들의 눈에 그것이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면 그 어두움 속에서 느껴지는 ‘서울살이의 짠함’이야말로 이 책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한국문학 속에, 그리고 서울의 역사 속에 어려 있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2007년 2월 23일 경향신문기사)

서울 ‘밑바닥서 하늘까지’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시대적인 급변을 겪어왔고, 서울은 그 변화의 정중앙에 있던 도시다. 사진 왼쪽부터 거리공연이 펼쳐지고 있는 홍대 앞, 개발되기 전 난곡, 새롭게 단장된 청계천의 모습.

 

▲문학 속의 서울…김재관·장두식


신기하게도, 혹은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작품은 철저한 허구이면서 한편으로 우리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문학을 통해 사람들은 가상의 인물, 낯선 세상을 만나지만 그곳은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의 한 단면이다. 문학작품은 ‘문학’ 그 자체인 동시에 훌륭한 ‘역사 텍스트’이다. 서울이라는 도시 역시 한국사에 있어서는 거대한 ‘역사 텍스트’다. 600여년간 수도로서 한국전쟁 이후 인구 1000만의 거대도시가 된 오늘날까지 급속도로 진행된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말해주는 공간이 바로 서울이다. 저자는 문학과 서울이라는 두 거대한 역사 텍스트를 통해 지난 40여년 우리 시대의 생활상을 조명한다.


1960년대. 서울에는 부자들만의 동네인 성북동이 개발되기 시작한다. 콘크리트 옹벽으로 성을 쌓고 다른 이들의 접근을 불허하는 동네가 생기면서 공간은 신분적 차이를 드러내는 상징이 된다. 성북동에서 평창동, 한남동에서 강남으로. 이때부터 공간은 빈부 격차를 가시화하는 기호가 됐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는 개발에 의해 삶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나는 애절한 서민들이다.


1970년대. 오직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영자. “배웠다는 사람들이 더 악마구리떼 같은” 식모생활을 견디다 못해 버스차장이라는 새 직업을 구하지만 만원버스에 매달려가다 그만 한쪽 팔을 잃고 만다. 풍요롭게 변화하는 서울과는 달리 영자의 삶은 밑바닥이다. 영자는 외팔이 창녀로 생활하다 어렵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만, 그와의 행복마저도 이룰 수 없게 되자 불을 지르고 죽음에 이른다.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는 당시 서울의 이농민들이 겪었던 최악의 상황을 나타내는 반어적 표현이다.


1980년대. 여동생 융이가 광화문에서 열린 개헌촉진대회에 참가했다 결국 경찰에 연행되고 만다. 어머니는 “서가에서 불온서적부터 치우자”며 나를 재촉한다. 우여곡절끝에 융이가 풀려나자 할아버지는 집안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이중간첩이었고 아버지는 이에 대한 반감으로 철저하게 소시민의 삶을 택했던 것이다. 김만옥의 ‘그리운 거인들’에 등장하는 이 가정은 뒤틀린 현대사의 축소판이요, 당시의 광화문은 민주세력이 집결해야 할 최종 목적지였다.


1990년대. ‘압구정동… 좋게 말하면 이 땅 신흥 자본 상류층의 집단 대명사요, 넘치는 부의 상징이지만 기분대로 부르면 이 땅 끝없는 욕망과 타락의 전시장, 아니 똥통 같이 왜곡된 한국 자본주의가 미덕(?)처럼 내세우는 환락의 별칭적 대명사이다.’ 압구정동 테러리스트는 성도착증 노인, 사치와 향락에 빠진 여대생을 연쇄살인한다. 이순원의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는 욕망과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이 밖에도 저자는 다양한 시와 소설, 대중음악의 가사 등을 통해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 이면의 우리 모습을 차분하게 복원해낸다


(2007년 2월 24일 뉴시스기사)

서울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문학

 


<사진>은 영화 ‘아이스케키’의 한 장면이다.

 

‘문학 속의 서울’은 한국문학을 매개로 1960년대 이후 서울의 변화를 꿰뚫어 보는 책이다. 문학으로 살피는 서울의 역사, 그 속에 담긴 인간의 모습이다. 한국문학을 필터로 격변기를 거쳐 간 서울 시민들, 당대의 분위기, 그리고 거기 살았던 사람들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본다.


‘간다/ 울지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김지하 ‘서울길’중


가난한 고향을 버리고 상경해 비 맞으며 동대문 거리를 걷는 소년, 달동네 약수터에서 삶의 애환을 나누는 여인들, 혹독한 노동 착취에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노동자, 영동 한복판에서 향락과 퇴폐에 찌든 중년 직장인, 그리고 그것들을 관찰하며 글을 쓰는 작가들이 있다.


‘잠실은 모래로 만들어진 동네이다. 모래 땅에 모래 아파트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둑을 쌓고 그 위에 아스팔트를 깔아 도로를 내기 전에는 범람한 강물이 여름 잠실을 덮쳐누르곤 했었다. 모래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잠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시멘트와 철근이다. 시멘트와 철근을 빼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모래만 남아 흩날리게 될 것이다. 모래는 모래끼리 아무리 뭉치려고 해도 뭉치지 못한다. 슬픈 일이다.’-조세희 ‘민들레는 없다’ 중


60년 이후 ‘문학 속의 서울’은 우울하지만 매우 활기차다. 그 활기는 서울의 양적, 질적 성장 때문이 아니다. 정치적, 경제적 상황의 추상적인 정황보다도, 그 상황 속에서 직접 서울의 땅을 부지런히 걸어 다니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형상 덕이다. 다양한 인물 형상과 구체적인 배경들은 서울의 부분이면서 서울의 전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갈등을 견디고 헤쳐 가는 인물들의 악전고투는 세상이 어떤 지향을 가지고 발전해야 할 지 암묵적으로 제시해준다.


‘사이렌이 불자 행인들이 걸음을 재촉했고, 완장을 찬 민방위 대원들이 곳곳에서 호루라기를 불었다. 수십 대로 밀려 정차한 버스들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주위 행인들이 모두 지하도로 몰려갔으므로 텅 빈 거리로 막 백색의 사이카가 달렸다. 그 뒤로 통제 깃발을 단 군용 지프와 검은 승용차가 따라가고 있었고 민방위 보도 취재반의 방송 이동차가 그 옆으로 천천히 달려갔다.’-강석경 ‘맨발의 황제’중


‘그 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고 그 거리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것은 단순한 동네 이름이 아니다. 이 땅의 ‘압구정동’이나 ‘로데오 거리’ 또한 단순히 그런 지명을 가진 한 동네를 지칭하는 이름이거나 한 거리의 이름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좋게 말하면 이 땅 신흥 자본 상류층의 집단 대명사요 넘치는 부의 상징이지만, 체면 가릴 것 없이 기분대로 부르면 이 땅 졸부들의 끝없는 욕망과 타락의 전시장, 아니 똥통 같이 왜곡된 한국 자본주의가 미덕(?)처럼 내세우는 환락의 별칭적 대명사이다.’-이순원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중


문학작품은 허구다. 하지만 사회의 전형을 묘파하려 한다는 점에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서브 텍스트로서 손색이 없다.


(2007년 2월 23일 한겨레기사)

서울아! 아, 서울아!

 

 

  문학작품 속에 그려진 서울의 모습을 다룬 선행 작업으로는 두 권짜리 단행본 <서울을 품은 사람들>(문학의집·서울 펴냄)이 있었다. 수필가 전숙희, 시인 황금찬, 소설가 김용성, 평론가 김우종씨 등 원로 및 중견 문인 156명이 필자로 참여한 이 책은 대체로 일제강점기에서부터 1950, 60년대까지의 서울에 대한 문학적 증언이라 할 법했다. 새롭게 나온 <문학 속의 서울>이 그 책과 자매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1960년대 이후 서울의 변모와 그에 대한 문학적 대응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의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김재관씨와 장두식씨가 공저한 이 책은 서울문화재단이 기획한 ‘서울문화예술총서’의 두 번째 권으로 나왔다.


  인용한 대목에 담긴 취지는 두 가지. 하나는 서울이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는 것, 또 하나는 공식 기록이 감추고 있는 구체적 진실을 문학 텍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의 서울(과 대한민국)의 변모를 관찰하는 눈에 가장 뚜렷하게 다가오는 것은 역시 눈부신 개발과 발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정치적 부자유와 경제적 불평등을 담보로 한 성취이기도 했다. 지은이들이 서울을 일러 “물적 유토피아이면서 질적 디스토피아”(프롤로그)라 규정하는 까닭이다.


“간다/울지 마라 간다/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간다/울지 마라 간다/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팍팍한 서울 길/몸 팔러 간다”(김지하 <서울 길> 부분)


시인 신동엽의 ‘서울 사랑’


서울의 개발과 발전은 농촌 출신 사람들의 쇄도를 수반했다. 서울이 발전하면서 그들을 끌어들였는가 하면 그들이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서울의 발전이 가속화하기도 했다. 누대에 걸쳐 살아 온 고향과 터전을 버리고 서울로 향하는 이들의 심중에는 설레는 꿈과 함께 앞으로 기다리고 있을 고난과 모욕에 대한 두려움과 체념 또한 엄연히 자리하고 있었음이다. 그렇지만 서울은 고향의 순수와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의 도시이기도 했으니, 시인의 서울에 대한 사랑 고백이 아예 생뚱맞지만은 않은 연유이다.


“그러나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지금쯤 어디에선가 고향을 잃은/누군가의 누나가 19세기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그 포도송이 같은 눈동자로 고무신 공장에/다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신동엽 <서울> 부분)


사당동 산동네를 배경으로 한 정도상의 단편 <서울, 그 어느 쓸쓸한 사랑>에서도 일용직 건설 노동자, 파출부, 봉제공장 노동자, 버스 안내양 등 힘들고 보수 낮은 일에 종사하는 산동네 주민들(이들은 거개가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찾아든 ‘실향민’들이다)은 마을 공동 수도 격인 약수터와 친목계를 매개 삼아 농촌 공동체의 노나메기 정신을 실천에 옮긴다. 그렇지만 대도시 서울의 본질은 역시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단절과 비인간화에 있다고 해야 옳으리라. 최인호의 단편 <타인의 방>과 조세희의 <민들레는 없다>는 아파트로 대표되는 인간 관계의 사막화를 음울하게 묘사한다.


“잠실은 모래로 만들어진 동네이다. 모래 땅에 모래 아파트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잠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시멘트와 철근이다. 시멘트와 철근을 빼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모래만 남아 흩날리게 될 것이다. 모래는 모래끼리 아무리 뭉치려고 해도 뭉치지 못한다. 슬픈 일이다.”(<민들레는 없다> 부분)


박영한·최수철은 ‘층간소음’ 소재로


박영한의 소설 <지상의 방 한 칸>최수철의 <소리에 대한 몽상>은 나란히 아파트 층간 소음을 소재로 삼았지만, 그 접근 방식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지상의 방 한 칸>에서 주인공인 소설가는 소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히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방 한 칸을 찾아 서울 변두리와 근교를 샅샅이 훑고 다닌다. 그러나 이런저런 까닭으로 번번이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얻은 김포 어름의 집조차 가구공장이 들어서면서 소음의 공격을 받을 참이다. 결국 그는 소음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소설이 인간의 소음을 담는 한, 소설가는 인간의 소음을 긍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소리에 대한 몽상>에는 처음부터 층간 소음에 우호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위층에 사는 ‘칼귀’ 사내가 그인데, 결국은 그의 감화를 받은 주인공 역시 층간 소음의 긍정적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고독한 단독자가 아니라 아래위층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층간 소음을 고통스러워하거나 거꾸로 그것을 즐기는 서울 시민들은 지하철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펼쳐 든 스포츠 신문을 곁눈질하거나 민방위 훈련의 사이렌 소리에 쫓겨 걸음을 재촉하거나 한다(강석경 <맨발의 황제>). “허기지고 지친/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싸구려 상품을 샘나게 찍어두며/300원어치 순대 한 접시로 허기를 달래고/이리 기웃 저리 기웃/구경만 하다가/허탈하게 귀갓길로/발길을 돌”(박노해 <가리봉 시장>)리는 가리봉 시장과 “졸부들의 끝없는 욕망과 타락의 전시장, 아니 똥통 같이 왜곡된 한국 자본주의가 미덕(?)처럼 내세우는 환락의 별칭적 대명사”(이순원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압구정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곳이 또한 서울이다. 이처럼 카멜레온 같고 괴물 같은 서울에 대해 지은이들이 끝내 사랑을 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서울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1960년 이후의 ‘문학 속의 서울’은 우울하지만 매우 활기차다. 그 활기는 서울의 양적, 질적 성장 때문이 아니다. 정치적, 경제적 상황의 추상적인 정황보다도, 그 상황 속에서 직접 서울의 땅을 부지런히 걸어 다니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형상 때문이다.”(에필로그)

 

‘눈물의 영자’가 ‘바람난 사라’로 - 문학속의 ‘서울사람 변천사’

 



한국 문학사엔 서울 거리를 산책하며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는 구보씨가 3명 등장한다. 1930년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처음 등장했던 구보씨는 70년대에 최인훈씨의 동명 작품에서 부활했고, 90년대 주인석씨의 연작소설에 또 나타났다. 이들 3명의 구보씨는 서울이 공룡처럼 커짐과 동시에 여기에 깃든 사람들의 꿈이 날로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인 김재관·장두식씨가 펴낸 책 ‘문학 속의 서울’(생각의나무 발행)은 1960년대 이후 서울의 변모를 시를 통해,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냈다.

 

  문학 속에서 서울의 현실은 대체로 어둡다. 비극적 카타르시스가 희극의 쾌미보다 더 큰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시, 소설이 절실하게 담고 있는 대도시 서민들의 애환은 독자를 우울하게 할 수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안도감을 주는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껴안아 온 서울 사람의 모습엔 한국인의 꿈이 녹아 있다. 문학작품 속에는 70년대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90년대 ‘즐거운 사라’까지 서울의 시대상을 대표하는 여인들의 눈물과 웃음이 함께 버무려져 있다.

 

  ◆ 1960년대 ‘산업화의 꿈과 그늘’& 70년대의 ‘풍요 속 빈곤’ = 소설과 시에 나타난 60·70년대의 서울은 잘 살기 위한 꿈을 안고 시골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산업화의 상징적 공간이다.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휑하니 바람이 부는, 생존경쟁의 싸움터다.

 

  김승옥씨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65년작)이 산업도시로 진입한 서울 시민의 소통부재와 허무감을 담고 있다면, 신동엽의 시 ‘종로 오가’(1967년작)는 고향을 떠나온 소년이 서울에 와서도 소외당하는 상황을 그려냈다. 김광섭의 유명한 시 ‘성북동 비둘기’(68년작)는 요즘도 부촌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성북동이 개발되면서 삶의 보금자리를 잃고 <사람들의 애절함을 ‘비둘기’에 비유하고 있다.

 

  70년대의 서울 풍경을 묘파한 수작으로 꼽히는 최인호씨의 소설 ‘타인의 방’(71년작)은 아파트 생활이 주는 편리함과 더불어 익명성으로 인한 이웃과의 단절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73년에 발표된 조선작씨의 ‘영자의 전성시대’는 시골에서 상경해 식모와 버스 차장을 하다가 왼쪽 팔을 잃어버리고 창녀가 된 영자의 비극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 조세희씨의 연작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년작)은 도시 하층민들의 삶을 가슴 서늘한 우화로 만들어 이후 200쇄를 찍는 스테디셀러 행진을 하고 있다.

 

◆ 1980년대 ‘시대의 우울’& 90년대의 ‘바람난 도시’ = ‘꽃이라고 하더라도 꽃 같지는 않게/신문 같은 신문 같지는 않게/한국 같은 한국 같지는 않게/시 같은 시 같지는 않게.’

 

  오규원 시인의 작품 ‘서울·1984·봄’은 신군부의 폭압에 바짝 엎드린 서울 시민의 모습을 이같이 표현했다. 오 시인이 이 작품을 90년대에야 발표한 것은 물론 정치상황의 변화를 반영한 것. 86년에 나온 강석경씨의 소설 ‘숲 속의 방’은 반독재 투쟁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대학생들의 휴식처가 종로 2가 선술집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양귀자씨의 연작 소설 ‘원미동 사람들’(86년작)은 서울에서 밀려나 교외에서 공동체를 이룬 변두리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했으며, 장정일씨는 시‘중앙’과 ‘나’(88년작)를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중앙, 즉 서울 지향 의식을 통렬히 풍자했다. 

 

  90년대의 서울을 문학 작품은 ‘바람난 도시’로 묘사한다. 91년에 나온 마광수씨의 소설 ‘즐거운 사라’는 여대생의 남성 편력을 통해 신흥 상류 지역으로 부상한 강남권의 기묘한 성 풍속을 드러내고 있다. 이순원씨의 소설‘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92년작)는 압구정동의 세태를 통해 천박한 자본주의의 거품에 빠진 서울의 모습에 경고를 가한다. 97년에 나온 이남희씨의 소설 ‘플라스틱 섹스’는 홍대 앞 라이브클럽을 배경으로 여주인공의 동성애 공표(커밍아웃)과정을 다룸으로써 변화하고 있는 서울의 내부를 들여다봤다.

 

  ◆ 2000년대 ‘희망의 빛을 찾아’ = 김훈씨의 단편소설 ‘배웅’은 2003년도 서울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중년 남자 김장수가 주인공이다. 식품회사 대표였던 그는 외환위기 사태 이후 택시를 몰게 됐는데, 사납금 채우기에 언제나 급급해한다. 그에게 서울은 미래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도시다.  공지영씨의 베스트셀러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5년작)에서 서울은 성폭력과 빈부갈등이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소돔과 고모라’다. 이 비열한 도시를 누가 구원할 수 있을까. 소설은 평생 감옥에 갇힌 죄인들을 위해 봉사한 모니카 수녀의 헌신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를 통해 서울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파멸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의 빛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2007년 2월24일 한국일보기사)

낭만과 우수 그리고 욕망이 버무려진… 문학 속의 서울

 
                             

지금은 이름만 남은 3ㆍ1 고가 도로.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한양과 경성, 그리고 서울. 지난 600여 년간 한국 사회의 격동이 가장 정치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텍스트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경기도 전체가 수도권으로 편입됐다고 할만큼 저 곳의 놀라운 포식성은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기도 한다. 시대적 성감대로서의 문학은 서울의 격변을 어떻게 징후적으로 포착해 왔을까. 문학이 윤리적 모색을 본질로 한다고 할 때, 우리 문학은 격변을 증언하는 최전선에 있다.

 

국문학자 김재관ㆍ장두식 씨는 신동엽의 <종로 오가>와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를 기점으로, 그 풍경과 서정을 기록해 왔다. 먼지만 날리는 고향 땅을 등지고 풀칠이나마 할 요량으로 온 서울 땅에서의 극빈과, 삶의 보금자리를 뺏긴 인간의 모습으로 문학은 서울을 증거했다. 최인호의 <미개인>이 1970년대 중산층의 속물성에 대한 슬픈 자화상이라면, 최인훈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서울 사람들의 모습을 풍자했다.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 시대>에서 서울은 외팔이 창녀에게 비극을 안겨준 범인으로 그려졌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는 약자들을 잡아 먹는 비열한 포식자로 등장한다. 박완서의 <꽃을 찾아서>는 1980년대 ‘광주’라는 암운 아래서 광풍처럼 막 번지던 강남 개발의 모습을 증언한다. 본문의 친화력은 대중문화 속에 나타난 서울을 논하는 대목에서 두드러진다. 1970년대의 대중음악에 나타난 서울을 논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낭만적 유토피아와 우수’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1970~80년대의 유행가. 양병집의 <서울 하늘>,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혜은이의 <제3 한강교> 등 당대를 풍미했던 가요가 갖는 의미가 예술사적으로 분석돼 있다.

 

한편 시인들은 권력과 금력에 휘둘리는 서울의 격변을 바라보며 저항의 언어들을 쏘아 올렸다. 김지하의 <오적>이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은 절망의 서울상을 포착했다. 장정일은 시 <서울에서 보낸 3주일>에서 ‘비에 젖은 서울의 쌍판은 마스카라 번진 창부 같구나’라고 읊었다. 그러나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는 포장된 행복 안에 불행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음을 문학은 증언했다. 메이드 인 아메리카의 천국인 서울(김주영의 <서울 구경>), 성 정체성의 극심한 혼란(이남희의 <플라스틱 섹스>), 거품처럼 끓어 나는 욕망 공간(이순원의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나이트클럽과 비밀 요정이 지배하는 곳(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등으로 1990년대 이후의 서울은 문학을 통해 변주된다.

 

우리 시대 문학은 현재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압구정동에 이르러 책은 이렇게 말한다. “빈부의 양극화가 한국의 주요한 사회 문제가 되었지만, 오늘도 우리는 ‘욕망이 평등한 사회’에서 꿈을 꾼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강박 관념속에서….”

 

수록된 글은 단국대 교지에 실렸던 연재물이다. 군더더기 없는 서술과 대중적 친화력은 언론의 손길을 거쳤다는 점에도 기인한다. 두 저자는 이 대학 동양학연구소의 연구 교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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