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기인 > [퍼온글] 문학과 철학-유종호, 박이문, 김우창

 

유종호(이하 유) : 오늘은 '문학과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두 분 선생님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왼편에 앉아 계신 분이 박이문 선생이십니다.(함께 박수) 우리나라에는 무주택자들이 많습니다. 웬만큼 살면 보통 집이 한 채씩 있는데, 그 이상으로 살면서 집이 서너 채씩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이문 선생은 학위가 서너 개가 됩니다. 그러니까 1가구2주택식으로 문학에도 학위가 있고 철학에도 학위가 있습니다. 그것도 문학은 프랑스에서 철학은 미국에서 수여를 해서 보통 사람들을 기죽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나오셔서, '문학과 철학'이라는 제목의 연사로서는 더 이상 적합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최적임의 인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저서를 가지고 계시고 또 미국에 시몬스여대라고 하는 보스턴 근처의 명문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셨습니다. 요즘은 연세대학에서 특별초빙교수로 강의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고려대학에서 가르치고 계시는 김우창 선생이 나와 계십니다. 이전에 한 번 나오셨는데, 오늘 이 자리에는 꼭 모셔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다시 모셨습니다. 윌러스 스티븐즈라고 하는, 매우 철학적이고 어려운 미국 시인을 연구하셨고 문학 이외에도 철학책을 많이 읽으셔서 그 방면에 조예가 깊으십니다.


철학과 문학은 상당히 근친성이 많은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이자 동시에 문학자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르트르도 그렇고, 또 어떻게 보면 니체 같은 사람도 시인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이고, 그래서 근친성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옛날부터 그리스에서도 철학과 시가 어떤 경쟁 관계에 있다고 해서 플라톤 같은 사람은 철학이 시보다 한층 더 우위에 속한다, 시는 철학에 비해서 조금 낮은 차원의 것이라는 얘기를 해서 철학과 시의 관계, 철학과 문학의 관계는 친연성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경쟁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두 분 선생님께서 어떻게 철학과 문학을 같이 접하게 되셨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지요.


박이문(이하 박) : 저는 제대로 문학도 못하고 철학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직업상으로 문학을 하고 철학을 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느꼈고 불편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은퇴하면서 상당히 자유롭게 해방되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처음에 문과대학에 입학을 했는데, 문과대학의 많은 학생들이 입학을 앞두고 고민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의 경우는 전연 주저해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학교 1,2학년 때부터 시인이 된다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 시인만 된다면 죽어도 그만이다 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해방 직후에 서울에 와서 서점에서 시집을 보게 되면, 나는 시집을 언제쯤 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도 친구들이, 네가 시집을 엮으면 내가 내주겠다고 했을 정도이지만 그 당시 시집 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시인(작가)이 되고 싶었냐 하면, 제가 어려서부터 주위의 삶의 모습을 둘러보면서 상당히 불편함을 느꼈고 산다는 것에 대해서 즐거움이라든가 놀라움보다도 어려운 일이고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비교적 지방에서는 고통 없이 지냈지만 관찰하는 입장에서 보면 말이 안 되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삶에 있어서 부족한 무엇을 달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시라는 하나의 형태에서 발견할 것 같고, 잘 모르지만 나도 그런 길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까 주저없이 문과에 들어갔다고 했지만 약간의 주저는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가 6년 졸업이었는데 3,4학년 때부터 알지도 못하는 일본어로 된 철학적인 책을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많이 뒤져보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는 문학을 통해서 채워지지 않는 여러 가지 정서(연애, 실연)가 문학적인 욕망으로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시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당시부터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가령, 나의 시는 내가 진심으로 고생하면서 쓴 시인데 좋다고 하는 사람이 없고 왜 김소월의 시는 뜨거운 말도 아닌데 좋다고 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세상을 조금 분명하게 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당히 추상적이고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모든 것을 분명히 설명해보고 싶다는 철학적인 욕망이 일어나서, 맞지 않는 양면의 세상을 보는 두 가지 욕망이 양쪽으로 갈라진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편으로는 세상을 분명히 보자, 끝까지 캐보자, 논리를 따져보자는 욕망, 가장 궁극적이면서 지적인 욕망이 철학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욕망이라면, 거꾸로 뜨겁게 노래하고 춤추고, 그런 시적인, 예술적인 욕망이 문학적인 욕망입니다. 그 두 가지 욕망을 보면 한편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적인 냄새가 안 나는 문학작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 한 편을 쓰더라도 거기에는 인생에 대한 고민을 담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문학과 철학적 사유는 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수업 시간에도 시를 쓸 정도로 문학에 도취했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뭔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청난 격동기에 우리가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무언가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찾고자 하던 저의 욕망이 철학적인 욕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불문학과를 졸업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불문학하는 것이 제일 화려하다고 생각하고 프랑스를 가장 멋있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상놈 같고 구라파는 양반 같은 편견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적으로 불문학을 하게 된 것은 저의 큰형이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법과대학을 나왔는데 많은 문학 서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시를 쓴다고 했는데 잘 안되었고, 억지로 문학의 학위를 끝냈고, 세상을 알아보자, 세계를 밝혀보자 라는 욕망에서 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을 하면서 교수가 되겠다는 직업적인 욕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할 수 없이 먹고살려니까 교수가 되고 그러다 보니까 평생 철학 교수로 있었습니다.


: 김우창 선생께서는 아주 방대한 양의 철학적인 책을 많이 읽으셨는데, 처음 철학책을 읽으신 얘기라든가 철학에 매료된 얘기를 조금 해주시지요.


김우창(이하 김) : 방대한 철학책을 읽은 것같은 인상을 주는 재주가 있어서 읽은 것같지, 실제로 읽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지금 박이문 선생님께서 철학과 문학에 대한 깊은 생에 있어서의 신비적인 불이(不二)를 정열적으로 말씀을 해주셨는데, 저는 그렇게 얘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문학을 하면서 일생을 보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후회스럽고 공연한 것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 다닐 때,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서 읽은 것인데, 한정된 돈을 가지고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 하나를 사면 다른 것을 못 사기 때문에 주인공이 여러 가지 많은 것에 대해서 마음을 결정할 수 없었다 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뭘 했어도 후회는 했을 것 같지만 문학을 선택한 것이 과연 잘한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박이문 선생님처럼 자전적인 얘기를 좀 하자면, 고등학교 때 문학책도 읽고 철학책도 읽고, 우리 세대가 일본말을 조금 할 줄 아는 마지막 세대니까 일본말로 된 책도 읽고 남이 못 읽는 것을 읽는 재미로 읽은 책도 있습니다. 제가 정치학과를 들어가서 1년을 다녔는데 너무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해야겠다고 해서 철학과를 갈까 문학과를 갈까 궁리를 하다가, 철학하는 사람은 머리 기르고 이상하게 다니는 것이 너무 싫어 보여서 정상적인 복장을 하고 다니는 문학 공부하는 사람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철학하는 사람이 그런 경향이 좀 있었습니다. (박 : 저는 거꾸로 생각했습니다.)(함께 웃음) 그래서 결국 문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 외적인 것도 있었지만 사실 자기가 어떻게 해서 오늘날 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왜 제가 문학하는 사람이 되었고 문학 선생이 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그때 그 외면적인 이유로 문학을 했는데, 또 달리 생각하면 우리나라에 그 당시 철학도 그렇고 다른 책들을 읽어봐도 심금에 오는 글들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문학 작품을 읽어도 쉽고, 제가 대학 다닐 때 실존주의가 유행했는데 실존주의는 철학이지만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 면도 좀 있어서 철학보다 문학이 좀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철학이 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이과였는데 과학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것저것을 해봤기 때문에 논리적인 것이 더 많은 철학이 더 낫다는 느낌을 가지면서도 또 그게 뭔가 실감이 안 난다는 느낌을 가졌고, 제가 박이문 선생님보다 나이가 훨씬 아래지만 저희도 우리 역사가 복잡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해방 전에 초등학교 다니고 해방 후에 중학교 들어가서 다니다가 6.25 전쟁 일어나고 군사 독재가 있었고, 이러니까 모든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혐오감이 있었습니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것 이런 것에 대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듣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식의 철학 자체도 상당히 추상적인 것 같아서 언어로 하는 문학이 더 낫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학 언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보다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는 것이고, 또 달리 얘기하면 우리가 마음 속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밖에서도 정당한 소리가 되는 것이 문학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내면의 소리가 곧 외면의 소리가 되고, 거창하게 릴케 식으로 얘기하면, '세계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내면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자 한다'고 자기 시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 우리가 스스로 마음에서 느끼는 것이 밖에서도 정당한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학에는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시인이 구질구질한 얘기를 하면서, 남에게 내놓는 것은 구질구질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내 속에 느끼는 것이 당신에게도 올 것이다 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 소리를 하는 것일 겁니다. 내면적인 소리가 외면적인 소리와 일치하는 세계, 추상적인 것에 의해서 강요되지 않는 세계가 문학 속에 있다는 느낌이 있어서, 고등학교 때 물리학, 수학에도 상당한 관심이 있었지만 그런 것보다는 철학, 철학보다는 문학, 이런 식으로 흘러흘러서 지금까지 온 것 같습니다.


: 아까 불문과가 화려해 보인다고 하셨는데, 영문과 들어가기보다 쉽지 않았나요?(함께 웃음)


: 아니죠. 영문과는 싱거운 사람들이 하는 거지요.(함께 웃음) 프랑스 문예가 그림이나 미술에서 얼마나 화려했습니까. 쉬르리얼리즘, 다다 등이 다 프랑스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다리도 런던보다는 예쁘고 그렇습니다.


: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에는 이렇다할 음악이 없지 않습니까?(박 : 예, 그렇긴 하죠.) 문학과 철학의 친연성이나 근친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요.


: 철학과 문학을 얘기할 때, 철학과 문학을 각각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전연 다른 얘기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텍스트들, 가령 파스칼의 {팡세} 같은 작품은 문학사에도 나올 수 있고, 철학사 혹은 사상사에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령 성서라든가 불경 같은 경전도 어떤 면에서는 보기에 따라서 은유적인 문학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쓴 글을 분류하는 것이 엄청나게 애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문학이다, 아니다 라고 하지만, 어떤 텍스트를 보면 문학으로 읽어야 할지, 철학적이고 사회학적인 비문학으로 읽어야 할지가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최근에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해체주의니 하는 말들이 많이 나와서 미국에서도 리차드 로티라는 철학자가 왔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요새 얘기하기를 문학과 철학은 구별이 안된다는 얘기가 아주 강하게 주장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복잡하기는 하지만 철학적인 차원에서 주장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주장의 근거가 상당히 막역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여러분이 아시겠지만 미술사에서 뒤샹의 변기가 있지 않습니까? 대리점에 쌓여 있는 변기와 우리 집에서 사용하는 변기는 전연 형태나 구조가 같은 복사물이니까 생산물로서는 같지만, 뒤샹이 갖다 놓은 변기는 굉장히 중요한 예술 작품이라고 하고 다른 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고 분류합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우리가 언뜻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많은 경우에 어떤 것은 처음부터 예술 작품으로 봐야 된다는 기호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각으로 봐서, 눈으로 읽어서 문학과 철학이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기에는 어떤 텍스트인지 구별이 안 되고 실제 물체로서의 집합으로는 똑같지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어떤 변기는 예술 작품이 되지만 어떤 변기는 예술 작품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문학과 철학은 분류상에서 구별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을 문학이다, 철학이다 라고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작품을 쓸 때, 자기 나름대로 깊은 생각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깊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느낌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철학적인 욕망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문학뿐 아니라 예술 작품은 일종의 철학적인 요소가 있고, 철학적인 욕망이나 필요에 의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평이라든가 미술평을 보면, 이것은 우주의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다, 현대의 부조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라고 얘기하는데, 그런 것이 전부 철학적인 언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어떤 것이 철학인지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학과 철학은 얽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철학과 문학은 서로 뗄 수 없지만 반드시 떼어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일반적인 진리라든가 가장 추상적인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인 명제를 언급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추상적입니다. 철학과 예술은 진리의 문제를 추구하는 점에 있어서는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또 하나 철학자가 예술가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가장 투명하게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그냥 느낌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밝히고자 하는 것이 철학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석적이고 조직적입니다. 수학적인 욕망, 물리학적인 욕망, 과학적인 욕망이 철학적인 표현을 하고자 하는 욕망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을 분명히 설명하고 밝혀서 이론화하려는 욕망이 철학자의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흐릿하게 하면, 그것은 철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상당히 분석적이고 추상적입니다. 그런데 예술적인 표현의 토양은 분석적이 아니라 상당히 감성적이고, 종합적입니다. 일부러 흐리멍텅하게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처럼 해야 됩니다. 분명하게 한다면 시나 문학이 아닙니다. 가령 분명히 쓴 작품을 시라고 읽고, 분명한 관점에서 그 작품을 해석할 때에는 문학적인 해석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건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시를 쓰고자 하는 욕망과 요청, 조건은 철학적인 진리를 찾고자 하는 욕망과 한편으로는 양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가면 학생들이 성경을 많이 공부하는데, 종교적인 교리로 공부하는 것보다 많은 경우에 문학으로서의 성경이라는 강의를 듣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문학책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문학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서뿐만 아니라 모든 신문 기사도 그렇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한 것처럼 어떤 작품의 총체를, 하나의 통일된 무엇을 문학 작품으로 보느냐, 철학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그냥 눈으로 보아서 되는 게 아니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의해서 구별된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뒤샹의 변기는 물질로서는 똑같지만 그것을 어떤 관점이나 맥락에 의해서 쳐다보느냐에 따라서 문학적인가 아닌가가 구별되는 것입니다. 문학 작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A라는 작품을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고, 예술적인 관점에서 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달라지는 것이지, 구체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내용의 차원에서 구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저의 이론입니다. 그 이론을 양상론이라고 하는데 어떠한 양상에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술이 무엇이고, 문학이 무엇이고, 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미 철학적인 것입니다. 양상이라는 것은 보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가령 꽃은 빨갛다 라는 문장이 있다면, 그것의 현재적인 양상, 칸트가 얘기하는 것인데 꽃이 그렇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즉 그것이 어떻다는 것은 사실 확인을 위한 주장인 것입니다. 거꾸로 사실이 아니라,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 라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꽃은 빨갛게 보일 수 있다 라고 할 때에는, 내 말이 맞다, 틀리다 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가령, 꽃은 빨갛게 보일 수도 있고 파랗게 보일 수도 있다고 할 때에는 맞는지 틀리는지를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건적인, 가상적인 관점에서 '볼 수가 있다'는 가능성은 세계를 보는 가능한 틀을 제공하는 것이지, 사실이라고 확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렇다고 하는 단정적인 명제와 '볼 수 있다' 라는 가설적인 명제는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그런 것을 양상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정언적 양상, 개연적 양상, 필연적 양상 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작품을 문학 작품이냐 철학적 서적이냐 라고 할 때, 그것을 그냥 봐서는 모릅니다. 철학적, 역사적인 배경, 어떤 관점에서 어떤 양상으로 그 저서가 제출(제안)되었느냐 하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결정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문학적인 역사와 논리적인 관계 같은 것을 아는 틀에서만 둘의 관계가 설명된다고 생각합니다.


: 박이문 선생의 양상론을 비판하든가, 아니면 김우창 선생께서 생각하시는 문학과 철학의 친연성 혹은 차이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 박이문 선생님은 철학을 하시니까 개념적으로 정리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고, 문학하는 사람은 대개 어물어물 불분명하게 얘기를 하니까, 철학하는 이는 논리적 명증성을 가지고 얘기를 하는 것이고, 문학하는 사람은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니게 얘기를 보통 합니다. 양상론과도 연결되는 게 있겠지만, 철학과 문학에 대해서 어떻게 다른가, 같은가 라는 것을 제 생각을 중심으로 보충해서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철학은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이고, 문학은 원리로부터 벗어나서 원리에서 떠난 잡다한 경험적인 현상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차이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철학은 하나에 관심이 있고, 문학은 많은 것에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라는 것은 원리인데, 원리라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타당한 것을 얘기하는데 반해서, 잡다한 것은 결국 같은 원리에서 나오더라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우리 주변의 사실, 잡다한 일상사에 대한 문제를 얘기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적인 사건에 관계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문학의 기본적인 양식이라는 것은 서사, 즉 얘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를 갔더니 마침 누구를 만나서 라는 식으로 주로 사건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당신이 그 사람을 여기에서 만나게 된 것에 대해서 인간의 우연적인 만남은 없는 것이고, 그것은 필연적인 인과 관계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는 식으로 원리적으로 사건을 떠나서 얘기하면 철학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문학이 잡다하게 일어난 일들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종합적인 원리가 무엇인가 라고 늘 생각합니다. 문학은 많은 데에서 하나로 가려고 얘기하는 것이고, 철학은 하나로부터 많은 것으로 내려와 보려고 한 원리를 가지고 많은 것을 설명해 보고자 하는 것인데, 즉 방향이 다른 것이지 근본적인 관심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윤리적인 문제,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이 철학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얼마전까지 미국 철학은 매우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 문학에서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아까 박이문 선생께서 파스칼을 예로 드셨는데, 파스칼의 {팡세}는 문학인 것 같기도 하고, 철학인 것 같기도 합니다. 좀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데카르트의 {방법 서설} 같은 것도 철학적인 방법에 관한 얘기이지만, 내용에 보면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다가 겨울에 방에 앉아 있는데, 난로는 따뜻하고, 이런 얘기들이 나옵니다. 내가 어릴 때는 어떤 공부를 했는데, 다 별로 재미를 못 봤고, 결국 믿을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얘기들이 있어서, 사실 데카르트의 {방법 서설} 같은 철학적인 논설도 이야기 비슷합니다. 이것이 불문학의 특징(전통)인 것 같기도 합니다.


대학 다닐 때 불문학이 상당히 부러웠는데, 영문학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저는 영문과를 다녔지만, 소설이면 소설, 시면 시와는 별로 관계없이 철학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같은 코스에서 취급하는 법도 없고, 같은 역사책에서 다루는 법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데이비드 흄과 핸리 휠딩을 같이 다룬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 밑에는 이런 관계들이 있다고 들춰내는 것은 있지만, 영문학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불문학에서 파스칼도 그렇고, 데카르트도 그렇고, 몽테뉴의 대표적인 {에세이}도 문학인지 철학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문학과 철학이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프랑스가 가진 특별한 전통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고, 또 유럽 전체에 있어서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내려오는 하나의 새로운 문학사적인 양상을 나타내기도 하고, 또 문학사적으로도 특별한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유럽 사람들이 17세기 이후에, 어떻게 해서 경험적인 사실들이 하나의 철학적인 원리에 수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학이라는 학문도 생기고, 미학에 관한 서양 철학에서의 중요한 저서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 바움가르텐의 서적 등에서부터 미학을 철학에서의 문제로 삼은 것 같습니다. 철학에서 우리가 잡다하게 생각하는 감각적인, 경험적인 사실들이 어떻게 하나의 원리 속에 이해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유럽의 철학과 문학에서 어떻게 해서 경험적 사실이 하나의 통일된 원리 속에 수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면 철학사나 문학사에서 특별한 현상이기도 하고, 철학이나 문학의 중심점이 옮겨갔다는 얘기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전까지는, 철학이라는 것을 정의하기가 어렵지만, 거룩한 말씀으로 인생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개념을 풀어주기도 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만한 거창한 말들을 설명해주고, 논리적인 관계도 지키면서 설명해주는 것이 철학이 하는 일이었는데, 데카르트, 몽테뉴, 파스칼을 통해서 철학의 중심은 개념적 분석에서부터 의식의 통일성으로 옮겨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 같은 사람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하는 유명한 말은 의식이 굉장히 중요해졌다는 것이고, 몽테뉴에서도 수필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경험하고 생각한 것을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존재로서 파악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몽테뉴의 관심은 세상 만사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지만, 또 자아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냐 라는 것에 대한 관심이 몽테뉴는 굉장히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아라는 것, 자의식이라는 것을 하나의 원리로 해서 잡다한 것을 설명하려고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개념이나 원리가 아니라 움직이는 자아(자의식)를 가지고 잡다한 것을 설명하려고 하면 철학이 훨씬 유연해집니다. 하나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하면 문제가 많은데, 움직이는 의식이라는 것은 늘 대상 세계에 대해서 열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상 세계의 잡다한 것에 대해서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몽테뉴나 파스칼도 그렇고, 이런 전통이 계속 되어서 문학에서 가령 프루스트 같은 사람의 작품은 굉장히 문학적인 얘기지만, 철학적, 심리학적인 반성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읽어도 재미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오히려 재미가 없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느릿느릿 움직이니까 너무 관찰을 많이 하고 거기에다가 개념적인, 심리적인 자기 반성을 많이 하다 보니까 재미가 없어지긴 하지만, 그게 의식의 움직임이 많이 보입니다. 20세기 초에 서양 문학에서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소설 테크닉으로도 등장을 하게 됩니다. 의식으로 철학의 중심이 옮겨오면서 하나의 통일된 의식 속에 잡다한 경험을 통합할 수 있느냐 라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철학적인 소설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얼른 보기에는 철학적인 소설들이 아니지만 밑바닥에는 사실 철학적인 충동이 담겨 있는 소설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사에 있어서 특이한 현상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잡다한 인생을 경험하면서 이것을 통합하는 하나의 원리가 무엇인가, 하나의 통일된 의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 하나의 통일된 의식을 가지고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현실을 설명하려는 특히 현상학에서 그것이 많이 드러나는데, 일과 다를 합쳐서 그것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보려는 철학적인, 문학적인 충동은 서양사에서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문학과 철학이 그렇게 존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령, 이퇴계를 읽으면 아무 문학적인 재미가 없습니다. 퇴계의 성리학은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는 얘기도 있지만, 그것은 순전히 몸을 단정히 하라는 추상적인 얘기를 하기 위한 것이지, 이야기 차원에서는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논어를 보면, 공자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자기 신세를 한탄하면서 내가 상가집 개 같다 라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공자라는 사람도 이런 느낌을 가졌구나 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문학적으로 호소하는 것들이 있긴 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사실 이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수라는 강에 가서 목욕하고, 비파나 뜯으면서 있는 것이다 라는 것을 보면, 공자의 내면적, 감각적, 경험적인 사실이 논어에 나와 있지만, 다른 특히 신유교, 성리학, 주자학은 다릅니다. 퇴계나 율곡을 보면, 철학은 도학이니까, 도학 군자들이 하는 것이고, 허튼 얘기는 공부 심각하게 하는 사람이 읽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또 플라톤의 글을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플라톤은 시를 심각하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면 안된다고 얘기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볼 때, 몽테뉴, 파스칼, 데카르트를 한 쪽으로 하면서, 프루스트나 영국의 제임스 조이스라든지 미국의 헨리 제임스 같은 사람들의 철학적인 소설은 매우 특이한 역사적인 현상이고, 문학과 철학은 별개의 것으로 존재해왔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결론적으로 보태서 하나를 얘기하자면, 문학이라는 것은 이야기 재미인데, 무엇 때문에 이야기를 하느냐 라고 하면, 답변하기 곤란한 것이 많습니다.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의 원리를 내놓아야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서양 근대소설에서는 그 원리로써 형식적인 정합성이라든지 의식의 단일성이라든지 여러 가지 숨은 원리들이 나타나게 되고, 동양뿐만 아니라 비서양 세계에서는 이 얘기 저 얘기하다가, 인생을 단정하게 도덕적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라고 갖다 붙여서 {춘향전}은 외설스런 이야기도 있고, 잡담이나 농담도 많은데, 정조를 지키라는 것이라고 주제를 붙입니다. 이야기 재미로 한 것에다가 어떤 철학적, 윤리적인 의미를 가짜로 갖다 붙인 경우도 굉장히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세계적으로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지, 서양에서의 파스칼의 경우는 서양적인 특이성을 얘기하는 것이지, 철학과 문학은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옛날에 니체 전기를 읽어봤는데, 니체의 {비극의 탄생} 같은 것은 아포리즘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자기 딴에는 체계적으로 글을 썼는데, 나중에 아포리즘 같은 것이 굉장히 많고, 단편적인 것이 많이 나오는 책을 썼지요. 그것은 몽테뉴와 라 로쉬푸코의 글을 읽고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평전을 쓴 사람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프랑스 문학이나 철학을 말씀해주셔도 좋고, 체계적인 철학자와 비체계적인 철학자의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지요.


: 니체의 글이 문학성이 있다고 해서, 그의 저서를 문학서로 분류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니체가 가지고 있는 수사학적인 멋있는 말, 발랄한 표현이 내용과 동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니체의 글이 문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표현의 발랄함, 신선성, 참신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꾸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여러 가지 인생에 대한, 종교에 대한, 신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철학적인 얘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오래 붙잡는 깊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철학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철학이 추구하는 목적과 문학이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하는 것은 문제를 가장 일반화해서 체계적으로 설득, 설명, 입증하려고 하는 담론이나 텍스트에 초점이 갈 때에 그것이 철학적인 것이고, 거꾸로 사람을 홀리거나 놀라게 하거나, 경이롭게 하거나 일상적인 생활과는 다른 것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잠깐 화제를 돌려서, 책을 굉장히 많이 내셨고 시집도 많이 내셨습니다. 그런데 대개 시집을 내는 철학자들이 분석철학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박이문 선생을 굳이 우리가 구별하자면 분석철학자이신데, 어떻게 시를 쓰는지가 좀 궁금합니다. 그리고 시의 언어와 철학의 언어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조금 말씀해 주시지요.


: 언어의 표현 방법에 대해서 초점을 두는 텍스트가 문학적인 것이고, 일반적인 명제에 대해서 초점을 두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적, 문학적인 언어는 가능하면 새로운 것, 놀라운 것을 말하는 것이고, 즉 상투적인 것이 아니라, 똑같은 것도 다른 말로 바꿔서 신선하게 표현을 하고자 하는 느낌과 생각이 문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문학적인 언어의 호소는 언어의 의미를 감성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말이라도 추상적인 사랑이라는 말보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사건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문학적인 언어이고, 철학적인 언어는 추상화된 이성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어야 되지, 감각적인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이 시인을 공화국에서 추방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예술가들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자꾸 헷갈리게 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예술가들은 이데아를 복사하기 때문에 예술적인 표현들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얘기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느낌이나 지각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직관에 의해서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이 자신의 관점에 의해서 그렇게 얘기한 것이지,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플라톤이 예술을 잘못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문학적인 언어를 쓸 때에는 다원적인 해석이 가능하도록 불투명하게 쓰는 편입니다.


: 김우창 선생께서도 시의 언어와 철학적인 언어의 차이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주시지요.


: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아까 유종호 선생께서 말씀하신 대로, 로쉬코프처럼 단편적인 종류로 쓴 철학과 체계적인 철학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조금 덧붙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사람이 쓰는 철학도 아니고 문학도 아닌 글쓰기 가운데에서 중요한 것이 우화인 것 같습니다. 농부에게 두 마리 소 중에서 어느 소가 더 좋은 소냐 라고 물으니까, 귓속에다 대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물이라도 함부로 남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얘기하면 안된다는 것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자상스럽게 생각하면서 느낌을 가지고 사물을 대해야 된다는 우화가 들어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만년에 쓴 이야기들에도 그런 글들이 있습니다. 우화라는 게 상당히 원형적인 글의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철학도 포함하고, 문학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얘기들도 우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딱 부러지게 좋은 우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가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할 때, 얘기이긴 하지만 얘기 안에 도덕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는데, 사실 이것이 상당히 원형적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얘기를 하는 것은 얘기 재미로도 하지만, 그 다음 단계에 있어서는 뭔가 사는 데 보탬이 될만 하니까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천적인 교훈을 가진 얘기를 전달해 주는 게 우화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화의 힘이라는 게 굉장히 큽니다. 이솝 우화를 지금도 읽고 있고, 성경을 가지고 신학도 만들어 내고, 신앙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성경에 들어 있는 여러 우화적인 것이 중요하고, 동양에 있어서도 사실 그렇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쓴 글이라는 것이 전부 우화는 아니지만, 아까 퇴계 이야기를 했지만, 퇴계 같은 사람이 쓴 글에도 중국 어디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했습니다 라는 식으로 사례를 들고 교훈을 끄집어냅니다. 그걸 계속 끌고 나가면서 철학 논의를 전개하고, 임금님께 간하는 상소도 합니다. 그래서 우화라는 것이 얘기이면서 도덕적 내용을 가진 중요한 장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어느 문화나 전통에서도 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우화는 도덕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을 철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철학적이라고 할 때의 철학은 윤리학적인 관심을 가진 실천 철학입니다.


그러나 현대 철학의 관심은 실천적인 것보다는 진리의 문제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에 참여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고,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은 이차적인 관심밖에 되지 않습니다. 니체의 경우에 잠언적인, 경구적인 것도 많이 있지만, 실천적인 내용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리에 관련된 발언이 간접적으로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없다, 진리는 다 거짓말이다, 진리는 다 권력의 편이다, 진리는 엉터리다 라는 얘기까지도 진리에 관한 발언입니다. 현대 철학이라는 것이 진리에 관한 관심을 증대시키면서 우화적인 전통으로 연결해서 생각하면 철학으로 바뀌게 되었고, 진리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강하지 않은 채로 실천적인 관심을 가진 것이 우화로 남았고, 또 거기에서 진리라든지 도덕이라든지와는 거리가 먼 감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 것이 문학적인 언어로서 성립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문학이라는 것은 대개 그러한 부분에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역사적으로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니체도 그렇고, 로쉬코프도 그렇고, 잠언적인 것이 철학이냐 문학이냐 하는 것은 길고 짧은 것도 물론 관계가 있고, 논리적으로 하나를 가지고 계속 전개해 나가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리에 대한 발언에 관계되어 있느냐, 실천적인 내용만을 가지고 있느냐, 또는 감각적인 경험에 관계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진리에 관계된 내용이 들어 있으면 그것은 철학적인 것이 되고, 주로 감각적인 것, 실천적인 것에 관계되어 있으면, 윤리학이나 문학의 도덕적인 영역에 대한 발언으로 간주하게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또 우화를 다시 생각할 때, 우화에서는 어떤 교훈을 끄집어냅니다, 옛날에 어떤 유명한 점쟁이가 있었는데, 뭐든지 안 보이는 것을 척척 잘 맞춰서 쥐를 통에다 넣어서, 쥐가 몇 마리냐고 원님이 불러서 물었더니, 다섯 마리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세 마리밖에 넣지 않았는데, 점쟁이가 다섯 마리라고 얘기하니까 '이놈 고약한 놈이다' 라고 해서 결국은 점쟁이에게 형벌을 주게 됩니다. 그런데 점쟁이를 죽이고 나서 문득 생각이 들어서 쥐의 배를 갈라 보니, 새끼가 두 마리 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성급하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만들면서 교훈을 만드는 것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냐 하면, 도덕적인 교훈도 있지만, 사람 머리의 재치에 대해서 상당히 감탄을 하게 됩니다. 잠언 같은 것을 보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거기에 들어 있는 예지 때문에도 좋아하지만, 재치가 있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사람 마음의 반짝 빛나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철학하는 사람은 거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문학하는 사람은 재치가 번뜩이는 것, 사실이 맞든지 안 맞든지 간에 농담이라도 기발한 농담을 하면, 그런 마음의 번뜩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줄여서 얘기하면, 진리에 관심을 많이 가져서 진리병에 걸린 사람들이 철학하는 사람들이고, 진리가 없어도 그럭저럭 살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학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 저는 명료하게 논의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시를 쓰는데, 시를 쓰면서는 억지로 말이 안되는 것을 쓰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한편 수상 같은 수필, 하이데거의 [숲속의 오솔길] 같은 것을 보면 그것이 문학인지 철학인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한편으로는 투명하게 해서 세상을 알고 느끼는 것이 전제가 될 때, 그것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철학적인 요청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산다는 것, 경험한다는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시를 쓰면, 철학에서 담지 못하는 개인적인 경험, 느낌, 생각 등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도 아니고, 시도 아닌 것이 있을 텐데, 그래서 다른 수필 같은 것, 가령 몽테뉴 식이나 하이데거 식의 수필을 써보려고 노력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도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명상의 공간} 같은 글을 썼습니다. 거기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못한 경우가 있어서 칼럼 같은 것도 많이 쓰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 하는 것 같지만, 한 장르로는 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의 추상화된 텍스트 속에서 벗어나서 하고 싶은 얘기들이 시적인 언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 여기에 계신 분들이 대개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분들인데, 문학을 공부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철학책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떤 책을 권고해 주고 싶으신지요.


: 일률적으로 얘기하기는 어려운데, 데리다가 대표적이고 적극적으로 차이가 없다, 다 똑같다고 얘기합니다. 마찬가지로 문학이냐 시냐 소설이냐 하는 구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데리다가 뒤죽박죽이라고 말하지만, 그 사람이 틀린 것은 기혼자나 미혼자의 구별은 눈에 보이는 구별이 아니라, 제도적인, 관념적인 구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책을 도서관에 정리할 때, 문학 서고에 넣느냐, 철학 계통의 서고에 넣을 것인가 라고 할 때, 그때 그때의 판단에 따라서 구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뭘 읽어야 될지 얘기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문학하는 사람은 문학적 감성으로 쓰는 게 좋고, 쓸데없는 관념을 가지고 조작을 하게 되면, 생경하게 되어서 작품 자체가 나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관념을 없애버리고, 선입견을 없애버리고, 경험 자체에 충실하도록 해야 되기 때문에 문학하는 사람이 철학책에 관심을 가지면 오히려 해롭다 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늘 그랬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현대 문학 작품에 있어서는 철학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적인 감성에 호소할 수 있게 되려면, 철학적인 내용이 있어야 된다는 느낌이 듭니다. 서양 문학의 기준에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또는 세계 문학의 기준에서 얘기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노벨상이라도 받으려면, 철학적인 뭔가가 들어 있는 작품을 쓸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철학적인 내용이라는 것은 개념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지성 자체가 철학적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헨리 제임스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고 철학적인 사람인데, 문장도 어렵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다 생각이 들어있는 문장입니다. 그 생각이라는 것이 아주 깐깐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제임스의 철학적인 관심을 두고, 엘리엇이 말하기를 '개념이 범할 수 없는 지성을 가진 사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개념에 의해서 뒤틀리지 않는 지성, 굉장히 지적이고 철학적인 사람인데, 또 동시에 개념에 의해서 뒤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숨은 철학적 관심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같은 작품도 숨은 철학적 관심이 있지만, 표면에는 그것이 안 나타나 있습니다. 프루스트라는 사람이 철학적이라고 하지만, 표면에는 안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깐깐하게 생각하고 꼼꼼하게 쓰는 기술로서 철학적인 의식이라는 것이 쿤데라 같은 가벼워 보이는 작가에게도 들어 있고, 프루스트 같이 더 심각해 보이는 작가에게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또 요즘은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너무 깐깐하게 생각해서 쓴 작품이라는 것은 한물 갔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래서 깐깐하게 쓰는 것보다 규칙을 어기면서 쓰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마술적 리얼리즘,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원리가 없는 예술 작품을 얘기하기 위해서 나온 말인데, 그런 경우도 니체가 진리라는 것은 다 자기 기만이다 라고 하면서 진리에 대해서 얘기한 것처럼, 깐깐한 것은 다 엉터리다 라고 하면서 깐깐하지 않은 얘기를 해야 통하게 되어 있는 것이 요즘의 문학 작품의 실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소설이나 시를 읽으면서, 특히 시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 과학적인 사실에 대한 존중이 별로 없습니다. 시가 과학이 아니기는 하지만, 과학적인 사실을 존중하면서, 우리의 심금을 울려야 됩니다. 시는 감정을 얘기하되, 감정을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안됩니다. 과학적인 사실을 존중하면서, 사실적인 세계도 존중하면서, 거기에서 감정을 보이지 않게 짜내야지, 내놓고 눈물을 마구 짜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냥 사실적인 얘기를 했는데, 눈물이 나오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숨은 과학적 인식, 숨은 철학적 원리, 숨은 의식의 통일성 등에 대한 관심이 문학 속에 들어있어야 되고, 그것을 무시하는 작품도 그것을 무시한다는 의식이 있으면서 그것을 무시해야지, 그냥 순진한 상태에서 무시해서는 별로 먹혀들어가지 않는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사실 문학하는 사람들도 철학을 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철학적인 원리를 가진 책들, 그런 소설들도 읽어야 되지만, 철학책도 읽어야 합니다. 옛날 고전도 읽는 것이 좋겠지만, 요즘 박이문 선생님의 글 같은 것들도 읽고, 심지어는 분석철학도 읽으면서, 작품을 쓸 때에는 다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작품에다가 표현하면 안됩니다. 안 보이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대적인 관심이 있는 책들을 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데리다도 읽는 게 좋고, 포스트모더니즘도 읽는 게 좋지만, 그것을 문학에다 표현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숨은 것으로 남아 있어야 됩니다.


: 훌륭한 예술가(시인, 작가)들이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가까운 예를 들자면, 셰린느도 깡패 같이 살았던 사람이고, 장 쥬네 라는 사람도 못된 짓은 다 하고, 감옥에서도 살고, 사생아였습니다. 장 쥬네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지만, 프랑스에서는 그 사람의 작품이 이미 고전 속에 들어 있습니다. 아주 무식한 사람이고, 문장도 형편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꼭 체계적인 철학서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체험으로 얻는 것이 좋습니다. 아까 김우창 선생이 얘기한 것처럼, 체계적인 것이 아니라도 철학적인 생각,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가는 경험, 사물을 보고 느끼더라도 철저하게 하는 안테나를 달고 태어난 사람이면 철학적인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밤낮 상투적인 얘기, 달콤한 얘기, 구름 같은 얘기를 하면 안됩니다. 철학에서는 남의 것을 정리하는 것도 철학이라고 하지만, 예술에서는 새로워야 합니다. 생각이나 감성도 혁명적인 것으로 무장해야 됩니다. 기술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러한 감성의 세련도와 혁명성은 혼자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가에 대해서 사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거름을 얻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것을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영 딴판으로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문과를 졸업해서 위대한 사람이 된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경험들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고,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의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 상투적인 작품을 쓰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문학 작품에 긍정적인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인생이 찬란하다고 하는 작품이 많은데, 정말 찬란한가를 물은 다음에 찬란하다고 해야지, 그냥 찬란하다고 하면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묻는다'는 것이 철학과 문학의 공통점일 것 같습니다. 단지 철학은 겉에 내놓고 묻는 것이고, 문학은 묻는 것을 속에다 감추어놓고 있는 것이 문학입니다. 그러나 물음으로써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문학이나 철학이 공통된다고 생각합니다.


 - 질의 응답 -


질문자 1 : 박이문 선생님의 [나의 길, 나의 삶] 같은 수필을 보면, '나는 새를 좋아한다' 라고 시작하는데, 지금도 좋아하시는지요.


박 : 제가 시골뜨기입니다. 벽촌에서 살았는데, 집에서 새장을 직접 만들어서 그 안에 새들을 기르곤 했습니다. 겨울이면 참새를 잡아서 사랑 부엌에서 구워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함께 웃음) 개를 좋아해서 개에게 프랑스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삐에르' 라고 붙였는데, 하루는 오후에 들어오니까 개를 잡으려고 하는데, 그것을 개가 알고서는 대청마루 밑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결국은 동네 앞 개천에 끌려가서 저녁 때 잡아 끓여서 멍석을 펴놓고, 보신탕을 해먹는데, 저는 맛있어서 더 달라고 했었습니다.(함께 웃음)


질문자 1 : 새와 개에 대한 호감 얘기가 나오고, 앎에 대한 지적 갈증 때문에 프랑스로 가서 소르본느 대학에서 공부하고, 보스턴에도 유학을 갔었다는 글을 봤습니다. 유종호 선생님께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금요일의 문학 이야기'에 그동안 많은 명사분들을 뵈면서 저서나 프로필을 보면 수상 경력이 많은데, 박이문 선생님의 약력에는 수상 경력이 안 나와 있어서, 그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유 : 박이문 선생은 일찌감치 프랑스에 가셨습니다. 1957년에 만났는데, 이 분은 프랑스 간다고 의기양양해서 왔다갔다 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오셔서 다시 이화여대에서 잠깐 가르치다가, 그야말로 지적 갈증을 느끼셔서 프랑스로 다시 갔다가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가셔서 오랫동안 계셨기 때문에 돌아오신 지 얼마 안 됩니다. 사실 미국 사람들이나 프랑스 사람들이 더 가까울 겁니다. 오랫동안 한국에 안 계셔서 상을 탈 기회가 없었던 겁니다.


박 : 저는 상을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습니다.


유 : 박이문 선생께서 여기에 오래 계신 적이 없고, 여름 방학이면 두어 달 정도 부모님을 뵌다는 핑계를 대서 왔다가 갔기 때문에, 보통 철새라고 얘기했었습니다.(함께 웃음) 우리 사회에서는 정처가 없는 철새에게 사회적 명예나 보상을 안해 주는 것 같습니다. 보통 65세가 되면 명예퇴직을 하게 되는데, 이 분은 포항공대에서 70세까지 근무하시고, 요즘 연세대학에서 또 교수직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다 보상을 받는 거지요.


질문자 2 : 유종호 선생님 마지막 시간이어서 여쭙고 싶은데, 아까 두 분 선생님께서는 문학을 어떻게 접하셨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유종호 선생님께서는 문학을 어떻게 접하시게 되셨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유 : 박이문 선생께서 아까 시골 분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박이문 선생보다 더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충북 증평에서 다녔는데, 증평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녔습니다. 옛날에는 시골에 놀이감도 없고 그래서, 또 저희가 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의무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시골에 가보면 나이가 많은 학생들이 많았는데, 제가 학교를 들어가보니까 제일 꼬마였습니다. 자연히 동기생들과 나이가 한 서너 살 차이가 나니까 친구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재미를 붙인 것이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다양한 관심을 가져야 되는데, 제가 좀 미련해서 여러 가지 관심을 못 가지다 보니까 나중에 책을 좋아하게 되어서 문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어릴 때에는 책이 많지 않아서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습니다. 책을 좋아하다가 그냥 문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고, 책을 읽자면 외국어 하나는 마스터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외국문학과를 선택해서 오늘에 이르른 셈입니다.


질문자 3 :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어떻게 문학적인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겠는지요. 책을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을 텐데, 국어 사전 같은 것을 놓고 보도록 하는 것이 좋을는지요.


유 : 사전 같은 것에 아이들이 재미를 붙여서 찾아보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좋은 공부일 겁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대학생들도 사전을 안 찾습니다. 사전에 다 있는데, 안 찾습니다. 영어 사전도 안 찾고, 우리말 사전도 안 찾습니다. 그러니까 기회를 줘서 하면 좋겠지만, 과연 아이들이 사전 찾는 것을 즐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놀이감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어릴 적에 모르는 말이 있어서 사전을 찾아보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옛날에 노천명의 시가 교과서에 실려 있었는데, '대추 방울 돈 사야 추석을 차렸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돈 사야' 라는 말을 찾아 보면 안 나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사전이 잘 되어 있어서 물건을 파는 것을 황해도 같은 곳에서 '돈 사다' 라고 한다는 것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전을 찾아보는 것이 재미있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사전을 잘 안 찾아보는 것은 자습서가 너무 잘 되어 있어서 그렇지요. 사전 찾아보는 풍습이 생긴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질문자 4 : 20년도 훨씬 넘게 두 분 선생님을 참으로 많이 존경하고 흠모해왔었는데, 특히나 박이문 선생님께서는 20년도 더 된 과거에 {노장 사상}이라는 책을 쓰셨었는데, 그때 제가 그 책을 보면서 이렇게 독자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도록 필자가 자신의 논리를 아주 세밀하게 정리해가면서 쓸 수도 있구나 하면서 경이로움을 경험했었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문학적인 표현을 통해서 빚어진 철학이라든가 양상을 제 경우에 있어서는 소위 말하는 고전이라고 불리우는 문학을 통해서 접했었습니다. 사실은 어렵고 딱딱한 철학책보다도 문학 속에 녹아 있는 철학의 정수를 접했는데, 그게 젊은 날에 서양 고전만을 섭렵하다 보니까, 저의 가치관이나 사고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 문학을 관심 갖고 많이 읽게 된 것은 참으로 늦은 시기였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번역된 서양 작품만 많이 읽었고, 철학의 줄거리 같은 것들은 주로 서양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국 문학과 관련해서 문학과 철학의 관계는 어떻게 얘기할 수 있고, 논의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한국 문학에서 논의할 수 있는 철학이 있을까 라고 생각했을 때, 저는 모르겠습니다. 유종호 선생님이나 김우창 선생님께서 한국 문학을 전공하셨으니까, 한국 문학 속에서 표현된 철학이라든가 끌어낼 수 있는 철학이 있는지, 전통이 있는지, 그리고 소위 현재 동시대에 한국 문학에 있어서의 철학의 부재라는 측면에 대해서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김 : 그것은 철학을 뭐라고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을 겁니다. 한국에도 철학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의미에서 개인적인 체취를 느끼게 하는 철학, 서양 철학의 경우에 아무리 무미건조한 것 같아도 개인적인 철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있어서 그것이 조금 드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철학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용운 같으면 불교적인 명상이 많이 들어 있고, 다른 현대시를 쓰는 분들은 철학적인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시적 체험이라는 것이 세계에 대한 철학적인 인식을 갖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시라는 것은 세계, 또는 자연의 원초적인 체험에 접하는 하나의 통로로서 생각되었습니다. 가령 퇴계의 한시에도 맑은 호수를 그린 시가 있는데, 맑은 호수에 그림도 비치고, 새가 날아가는 것도 비치는데, 자신은 새가 물을 차고 올라가다가 수면이 깨질 것을 걱정한다 라는 종류의 간단한 4행시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조용한 자연의 체험을 얘기한 것이지만, 또 동시에 늘 맑게 있어야 한다는 것, 움직이면서 혼란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에 움직임을 경계해야 된다는 것,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라는 것은 맑은 상태를 유지해야 된다는 것 등의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시는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한시에 그런 내용들을 가진 시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상투화되어서 사람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을 명경지수라고 표현해서 밝은 거울 같고, 움직이지 않는 물과 같이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식으로 자연에서 따온 체험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그게 도덕적인, 정신적인 교훈을 차지하는데, 많은 시들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한국 전통에서 한시라는 것은(물론 시조도 그렇지만) 정신적 경지에 이르는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했고, 정신적 경지에 이르는 데에는 자연적 체험이 상당히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은 앞으로 많이 밝혀지고, 또 다른 주제들이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서 얘기를 하게 될 겁니다.


박 : 제 생각에는 동양적인 전통에서는 철학과 문학을 전통적으로 확실히 구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노장이라고 하는 도덕경을 사상이라고 하지, 서양적인 관점에서 철학이나 문학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시도 결국은 사상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전통에서는 철학적이고 분명하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의 전통, 비판적인 언설 등이 희랍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특수한 의미에서의 철학적인 전통입니다. 철학을 세계관, 우주관, 가치관으로 생각한다면, 어느 사회에서나 어느 개인이나 누구나 조금의 철학은 갖고 있습니다. 한국 작품에도 중국과 다른 세계관이 있을 것이고, 얼마만큼 다르고, 얼마만큼 독창적이고 깊이 있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유 : 아까 김우창 선생께서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 대해서 T.S. 엘리엇이 개념에 의해서 왜곡되거나, 개념에 의해서 범해지지 않는 지성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시나 소설에도 찾아보면, 철학적인 요소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개념적이고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요소가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하는 면이 드물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과거의 지적인 전통에서 우리가 그런 쪽에 조금 취약하지 않았는가, 또 과거에 우리나라에서 소설을 쓰고 시를 쓰는 분들이 대개 사춘기에 쓰다가 안 썼습니다. 그러니까 정신의 성숙에 발맞춰서 작품세계를 꾸려나간다는 면이 매우 드물어서 철학적으로 빈약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겨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가령 최근에 미당 같은 시인이 있는데, 그 분이 많은 시편을 썼고, 거기에 그 분 나름대로의 깊이나 지성에 의한 면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함께 박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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