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오백이건 오십이건, 다산은 다산 아닌가?


얼마 전에 창비 겨울호를 뒤적뒤적 하다가 박석무의 <풀어 쓰는 다산 이야기>(문학수첩)이란 책에 대해 도종환이 쓴 "서평"에서 문득 다음과 같은 대목을 발견했다.
- 다산은 5백 권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남겼으나, 모두 한문으로 기록된 책이라서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314쪽)
그런데 나는 여기 나온 "5백 권"이라는 표현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문득 의문이 생겼다. 나로선 다산이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저술이 "5백 권"에 달한다는 구체적인 숫자는 미처 들은 바가 없었(거나, 혹은 들었더라도 까먹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야 한문학이나 역사학, 혹은 서지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아니고, 사실 한문 해독에 있어서도 까막눈이나 다름없으니 감히(!) 다산학 분야의 전문가가 쓴 책에 나왔음직한 내용(하긴 그러니까 서평자도 권수를 구체적으로 인용한 게 아니었겠는가)을 반박한다거나 하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나는 예전부터 우리나라나 중국 등의 한문 자료에 대한 서지를 간혹 접할 때마다 종종 혼동을 느꼈던 대목, 즉 "권(券)"과 "책(冊)"의 구분에 있어 뭔가 좀 더 엄격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느꼈을 뿐이다. 쉽게 말해 다산의 "500권"은 분명히 "500권"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생각하는 권수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단행본 한 권, 두 권의 "권"은 다산의 저서 500"권"의 그 "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권"은 한문 자료에 있어 "책"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우리 귀에 익숙한 고전들로 바꿔 말해보자면 <삼국사기>는 모두 50권(9책)이며, <삼국사기>는 5권(2책), <고려사>는 139권 101책, <성호사설>은 30권 30책, <신증동국여지승람>은 55권 25책, <증보문헌비고>는 250권 50책이다. 여기서 "권"은 volume, 즉 지금과 같이 "넘기는 책"이 아닌 "두루마리 책"이 대세였던 과거에 사용하던 구분으로,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어디까지나 책의 내용이나 분량에 따른 구분단위일 뿐이다. 반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한 권 한 권은 "책"이라는 단위로 계산했다. 따라서 우리가 교과서에서나 제목을 달달 외웠을 뿐, 실제로 볼 일이 거의 없는 이런 책들의 경우, 무지막지해 보이는 "권"과 "책"의 수에 비해 정작 요즘 책의 형태로 번역 출간된 양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가령 50권이나 되는 <삼국사기>는 기껏해야 단행본 한두 권 분량이고, 5권짜리 <삼국유사>는 짤 없이 달랑 한 권, 139권짜리 <고려사>는 원문 없이 북역 리프린트 본으로 총 열한 권, <성호사설>은 재편집본 <성호사설유선> 10권 10책짜리를 토대로 한 국역본이 총 열두 권, 55권짜리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원문 축쇄 영인 부분 포함 일곱 권, 250권짜리인 <증보문헌비고>는 원문 축쇄 영인 및 색인 3권을 포함해서 모두 마흔 권으로 국역되었다.
위의 예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한문본의 "권"이라는 것은 딱 정해진 분량이 아니다. 쉽게 말해 <삼국사기>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시 "권수"에서는 별 차이가 없지만, 책수에서는 벌써 세 배 가까이 차이가 나고, 실제로 국역본의 분량으로 치면 세 배에서 최고 일곱 배는 너끈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위에서 말한 "다산의 저서 500권"은 쉽게 말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단행본 500권"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지금의 단행본 분량으로 계산하자면 그보다 훨씬 분량이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결코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다산의 위대함이나, 다산의 가치를 무작정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500권이면 어떻고, 요즘 책으로 쳐서 50권밖에 안 된다면 또 어떤가? 500이건 50이건 간에 다산은 다산이다. 그렇지 않은가? 다만 혹시나 있을 선의의 "오해"를 피해 보자는 거다. 한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기자들(설마?)로선 "몇 권 몇 책"이라는 한문본의 권수 따지기에 익숙한지 몰라도, 그걸 읽거나 듣는 일반인들로서는 오히려 "단행본 500권"을 딱 떠올리게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다산의 업적을 단순히 숫자로만 표현한다는 것은 편리하기는 할 망정, 솔직히 좀 품위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꼬치꼬치 따져가면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오늘 우연히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이번에 정민이 펴낸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김영사)이라는 책에 관한 신문 서평에서 그놈의 "다산의 저서 500권"이라는 문구가 여전히 합창되고 있음을 보고 짜증이 팍 솟구쳤기 때문이다. 물론 그 책을 못 본 상태에서 함부로 말하기는 곤란하고, 또한 그런 기사를 쓴 기자들이 과연 보도자료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답습했는지, 아니면 이른바 다산의 "500권"이 요즘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500권"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쓴 것인지는 나도 모를 일이며, 혹은 그 기사를 본 일반 독자들이 각자 알아서 "그래, 하지만 그 500권과 이 500권은 좀 다르지" 하고 혼잣말을 하며 제대로 알아들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솔직히 "다산"과 "지식경영법"이라는 약간은 생소한 조합이 그처럼 주목을 받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어째서 그놈의 "500권"이 꼭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다는 거다. 뭐 남이야 다산을 삶아먹든, 데쳐먹든, 튀겨먹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그놈의 "지식" 때문에 늘그막에 유배지를 전전하며 타향살이 온갖 설움을 받아야 했던 다산의 "경영법"이 뭐 얼마나 대단했으랴 하는 비뚤어진 심사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번에는 "과연 그 500이 정말 500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겨서 이것저것 관련 자료를 뒤적여 보았는데, 막상 지금 나와 있는 <여유당전서>의 권수는 500권이 아니라 154권인 거다. 다산연구소에서 인터넷에 올려놓은 <여유당전서> 영인본 해제(송재소 지음)에 따르면 그 전후 사정은 이렇다.
- 필사본으로 전해 오는 다산 정약용의 저술이 처음으로 간행된 것은 1936년이었다. 이 해에 다산서거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신조선사에서 다산의 저작을 154권 76책으로 재편집하고, 이를 활자본으로 출판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여유당전서>이다. 이후 1960년에 문헌편찬위원회에서 신조선사본을 4책으로 축쇄영인앴으며, 1969년에 경인문화사에서 6책으로 다시 축쇄영인한 바 있다. 1985년에는 여강출판사에서 신조선사본을 실물대의 크기로 영인하여 20책으로 간행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다산의 저작"이라는 글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http://www.edasan.org/menu2/main.php?mode=content3)
- 다산의 저술은 1922년에 문집에 넣기 위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자찬묘지명의 집중본을 기준으로 할 때, 육경사서의 연구서인 경학집 232권과 일표이서를 포함한 경세학서 138권에 시문집과 기타 저술을 포함한 문집 260권을 합하여 총 492권이다.
그런가 하면 을유문화사의 <한국학대백과사전>(1989 재판) 제2권의 "서지" 항에는 "정다산전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원래 자찬묘지명 집중본의 목차에 없는 민보의 3권, 풍수집의 3권, 문헌비고간오 3권을 가하면 도합 508권의 대저서이나, 지금은 1936년 신조선사에서 정인보, 안재홍이 교열하고 <여유당전서>라 하여 활자본 전질 154권 67책으로 간행한 것이 전한다. 그런데 이 <여유당전서>는 그 편찬의 체재와 분권 등이 원고본과 같지 않고 삭제된 부분이 있어 원본 그대로 전해지지 않고... (이하 생략) (244쪽)
결국 다산의 저서가 "500권"이라고 계산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찬 묘지명", 즉 다산 스스로가 생전에 쓴 자기 비문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했다는 이야기인데, 그것도 492권이니 508권이니 해서 세는 사람에 따라 권수가 막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 그렇다면 혹시나 다산 스스로의 계산이 틀렸을 가능성은 없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많은 "권수"를 자랑했던 다산의 저술도 나중에 교정 교열을 거쳐 활자화되면서부터는 <여유당전서> 154권 67책, 현재는 영인본 20권으로 대폭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오늘날 이 영인본이 다산 연구의 기본자료로 각광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판본의 충실성에 대한 시비는 없지 않나 싶다. 즉 어쩌면 지금 다산의 저술 권수에 대해 굳이 언급하려면, 차라리 현재 유통되는 <여유당전서>에 따라 154권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물론 500권이 편집 과정에서 154권이 되었지만, 특별히 그 와중에 크게 누락된 것이 없어 보이니 500이나 154나 "질적"으로는 똑같을지 몰라도, 분명 "양적"으로는 다른 숫자이니 말이다.
아니, 나는 차라리 이제부터는 다산의 위대성, 혹은 탁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500권"이니 "154권"이니 하는 "숫자 놀음"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산이 위대하다면 그것은 그가 단순히 "방대한 저서"를 남겨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출한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단지 책 권수로 따지자면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상 최대는 다산이 아니라 혜강 최한기라고 할 수 있다.
- 그 최대한 것은 최한기(혜강)의 <명남루집> 1000권이니, 아마 이것이 진역 저술상에 있는 최고기록이요, 또 신구학을 강통한 그 내용도 퍽 재미있는 것이지마는, 다만 그 대부분이 미간으로 있고, 원본조차 사방에 산재하여 장차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태에 있음은 진실로 딱한 일입니다.
현재 전하지 않는 책이야 500권이건 1000권이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강 최한기의 경우는 오늘날 가장 각광받는 고전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비록 <기측체의>나 <인정> 같은 책의 권수나 분량은 다산이나 다른 유명 사상가들에 비해 적지만, 그의 사고방식이나 사상체계 자체가 무척이나 독특하기 때문이다. 결국 최한기야말로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임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인물은 아닐까? 물론 그의 1000권 저술이 모두 전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원래 말이 많아지면 허언도 많아지는 법이니, 그의 저술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을 성취했으리라는 보장은 또 없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한 번, 어디까지나 "심심풀이"로 다산의 "500권" 저술이 요즘 기준으로 하면 대략 "단행본 몇 권"쯤 될런지 계산해 보자. 우선 위의 인용문 가운데 <여유당전서>본 154권 가운데 "시문집"에 해당하는 22권은 현재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다산시문집>이란 이름으로 총10권(색인 1권 포함)으로 간행되어 있다. 그 책의 해제에서는 거기 번역된 분량이 <여유당전서>의 약 7분의 1에 해당한다고 했으니, 단순계산을 해 보면 <여유당전서> 전체의 국역본은 색인까지 제대로 갖추었다고 상정해도 요즘 단행본으로 70권 가량 될 것이다. 그리고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나온 492권을 기준으로 해 볼때, 우선 "일표이서"에 해당하는 <경세유표> 48권, <목민심서> 48권, <흠흠신서> 30권은 원문까지 모두 포함한 상태의 번역본이 현재 각각 3권, 6권, 3권으로 출간되어 있다. 결국 "한문본 126권"이 "국역본 12권"에 해당하는 셈이니, 여기서 대략 네 배 가량 되는 492권의 국역본은 약 50여 권에 달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요즘 신국판 단행본 기준으로 보아도 최소한 50-1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이며, 이는 솔직히 "만화가"나 "무협지" 혹은 "판타지" 작가들을 제외하면 웬만한 요즘 현대 저술가들조차도 따라잡기 힘든 분량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막대한 분량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다산의 "개성"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