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물방울 1
아기 타다시 지음, 오키모토 슈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회사는 직원 천삼백명의 그리 작지 않은 회사이다. 우리 회사의 사장님은 나이 예순을 넘기신 대기업 임원 출신의 베태랑 경영인이시다. 그리고 내가 우리 회사에서 존경하는 몇 분 중에 외유내강의 훌륭한 리더이시다. 나는 운좋게 그런 사장님을 자주 뵐 수 있는 조직과 위치에 있고, 그러다보니 사장님실을 자주 들락거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사장님 책상에서 의외의 책을 발견했다. 만.화.책. 손주를 위한 선물용인가? 평소에 경영서적을 주로 보시는 사장님께서 뜸금없이 만화책이라니. 사장님, 이거 사장님께서 보시는 겁니까? 어, 그거 누가 보라고 추천해 주셨는데 사다놓고도 볼 시간이 없네, 허허허. 사장님께서 주로 만나시는 분들을 추정해 보면 틀림없이 다른 기업의 임원이나 사장님이실텐데, 사장님들끼리 서로 추천해 주는 만화책이라니.

그 후 자리에 와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이 책 '신의 물방물'의 인기가 모니터 화면을 뒤덮고 있었다. 특히 사회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계신 나이가 넉넉한 분들에게도 필독서로 꼽히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왜 일까?

서로 추천되고, 대중에 널리 읽히는 만화책들의 공통점은 그 분야 박사들보다 더 전문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런 기반이 없다면 배울 것도 호기심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그런 책이될 것이다. 슬램덩크는 농구, 식객은 조리, 초밥왕은 초밥, 고스트 바둑왕은 바둑, 타짜는 도박에 대한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들을 풀어놓는다. 이런 전문성이 만화책의 나이를 결정하는 것이다. '신의 물방울' 역시 이런 고도의 전문성에 기초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위해 엄청난 포도주를 매주마다 먹어대고(책 끝의 아기 타디시의 주말 와인 코너가 증명하듯), 테스트하고, 공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중에 그 많은 주제들의 만화책들을 뒤로 하고 '신의 물방울'이 이토록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를 포도주라는 소재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를 우리 나라의 사회적 변화라는 틀에서 다시 들여다 보면 더 재미있다.

경제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면서, 저 위쪽의 극소수의 큰 부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산층의 문화의 향유 수준이 거의 같아졌다. 또 기업 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고급품의 가격이 떨어진 이유도 있고, 또는 마케팅 전략으로서 기업들이 매스티지를 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매스티지란 대중 mass와 명품 prestige라는 말의 합성어로 대중적인 명품을 의미한다.

인간의 간사한 이중성은 남과 다르지 않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남과 구별되기를 바란다. 특히 최근 한국사회는 기존의 단결, 융화, 왕따안되기의 문화에서 독특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개성과 별종, 괴짜의 문화로 이동하고 있다. 비슷한 문화 향유를 거부하고 비슷한 남들과 구별되고자 하는 이런 상중산층의 욕구는 전에 보지 못한 다양한 문화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포도주 문화가 아닌가 한다.

사실 내가 아는 포도주는 80년대 명절이면 가족들이 모여 한 잔 할 때 술을 못하는 어머님들을 위해 마련한 알콜이 약하고 달작지근한 음료일 뿐이었다. 그땐 나도 옆에서 달달한 맛 때문에 홀짝였던 기억이 있다. 당연히 대부분 국내 포도농장에서 설탕을 팍팍 넣어서 바로 찍어낸 그냥 포도주였다. 맥주잔에 콸콸 따라 먹는 써니텐의 대체품일뿐인 것이다. 감히 와인이라는 말을 붙이기 민망한 그런 것이었다. 나의 이런 기억과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이 새로운 풍조는 포도주 문화라기보다는 와인 문화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현재의 와인 문화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고자 하는 중산층과 그 상위층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그냥 소리가 챙챙 나는 근사한 잔에 먹는 붉은 음료가 아니라, 향과 맛을 음미하고, 어디 몇 년 산이 어떠며, 빈티지가 어떻고, 테루아르니 보르도를 떠들어대며 먹는 것이어야 한다. 일반인들이 덥석 들어올 수 있는 진입장벽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류의 문화코드로 외제차와 오페라의 유행을 들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진입장벽을 돈으로 치고 있다. 그냥 중형차가 아니라 더 비싼 외제차, 그냥 영화나 뮤지컬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몇 시간에 몇 십만원을 주고 보는 근사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오페라. 이런 문화에는 '넌 이런거 비싸서 못하지?' 하는 심리가 숨어있다. 외국에서는 대중 스포츠인 골프가 한국에서는 귀족문화로 퍼져가는 것도 역시 이런 문화현상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와인은 다르다. 괜찮은 와인 한 병의 가격은 5만원 내외고, 어느 정도 마신다해도 10만원에서 왔다갔다 하는 가격이다. 따라서 먹을라치면 어느 정도 월수입이 된다면 사먹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와인을 즐기는 사람의 심리는 돈에 의한 우월감(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보다는 지식과 경험에 대한 우월감이다. 지식과 경험은 돈으로 뚝딱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배우고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어떻게 배우지? 개인사사? 학원? 맨땅에 해딩? 그나마 기초지식을 배우기에는 책만한 것이 없고, 재미있게 익힐 수 있는 건 만화책만한 것이 없다. 이것이 이 책 '신의 물방울'의 가치이다. 고도의 전문지식과 흥미의 결합.

난 너희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난 돈이 많지 않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와인에 탐닉해 보자. 옆에 두고 볼 필독 입문서는 사장님들도 보시는 책, 우아한(?) 만화책, '신의 물방울'.

무엇보다 이 책의 진수를 느끼게 하는 것은 책을 읽다 말고, 롹 그룹 퀸을 느끼게 한다는 '샤토 몽페라'를 인터넷 쇼핑몰에서 뒤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다. 참고로 '샤토 몽페라'는 1권에서 나온 가장 싼 와인이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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