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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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때였나. 도서관에서 정해진 책 없이 이 책 저 책을 훑어보다가 황석영씨의 광주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을 집어들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갈증이 한창일 때였다. 그 책을 읽을 때의 내 느낌을 일종의 패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나라에서, 내가 태어난 다음 해, 군인이 같은 국민을 이유 없이 총검으로 겨누었다는 것은 생생한 증언과 기록에도 불구하고 믿기 힘든 것이었다.

이후 임철우씨의 광주항쟁을 배경으로 한 5부작 장편 소설 <봄날>을 읽으면서도 정신적인 패닉은 계속되었다. 충격과 부끄러움과 분노는 뚜렷한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스무 살의 대학생을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 정체를 깊이 밝혀내지도 못하고서 90년대 말, 2000년대 초 대학생의 일상적 삶으로 매몰되어갔다.

그리고 2002년 내 손으로 처음 뽑는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읽으면서 역사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부박함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발딛고 살고 있는 지금, 여기가 어떠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20여 년을 살아올 수 있었을까. 처음으로 내 안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내가 뚜렷한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반 년. 2003년, 경제 불황을 겪고 있는 이 나라, 대한 민국에서 취업 준비생의 일상적 삶에 다시 매몰되어 버린 나는 과연 언제쯤, 이 나라의 역사와 내 자신의 전 존재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88년 서울 올림픽 대회, 더 어렴풋이는 86년 아시안 게임까지가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전부지만 그래도 80년대는 내 유년 시절이 존재했던 시간이다. 교과서에서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민감한 현대사이기도 하다. 유년의 온실 같은 공간과 외면되어온 시대의 진실 속에서 내게 80년대는 일종의 진공 상태였던 것이다.

이 80년대를 강준만 교수의 성실한 증언과 사회 각 분야의 세밀한 관찰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국내에서 최초로 실명 비판을 시도하고 '금기와 성역에 도전하는' 그야말로 왕성한 활동을 통해서 안티조선을 비롯한 현대 한국의 다양한 논쟁을 주도하거나 참여한 학자. 인터넷을 통한 네티즌들의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논쟁과 인물 비판이 상당 부분 그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로 지금 강준만 교수가 한국 사회에서, 적어도 논쟁의 장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크다.

그런 그가 매일매일의 한국 사회가 아니라 가깝기는 하지만 7, 80년대라는 과거로 눈을 돌린 것 역시 역사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부박함을 계몽하기 위한 것일 테고, 작금의 여러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의 근원이 바로 이 시기에 잉태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그러한 증거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1권은 '광주 학살' 의 고증에 거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저자가 80년대의 주제어로 삼고 있는 광주학살과 올림픽, 둘 가운데 하나이니 당연한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광주 사람들로 대표되는 호남인들의 입장에서 발언하는 대목이 많다는 것과, 그로 인해 '관객의 부재' 로 인해 받았던 광주 사람들의 이중 고통을 강조할 수 있었던 점, 그리고 역시 거기에서 당시 언론의 역할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철저한 반성을 강조한 점이다.

아직까지도 한국 정치를 병들게 하고 있는 지역감정의 불씨가 처음 시작된 시기이고 게다가 그것이 노골적으로 조작된 것임을 폭로하고 있기도 하다. 진공 상태였던 80년대와 장벽 너머의 세계였던 광주가 드러나는 순간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비판하고 바꾸기 위한 노력도 시작될 것이다.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도 말하지 않았는가. 기억하는 것이 곧 응징의 시작이라고. 이 지점에서 강준만 교수의 현대사 서술은 그가 이제껏 계속해 왔던 사회비판활동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40년대사로 계속될 것이라는 그의 성실한 저술 활동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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