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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인 서경식은 2007년이던가, 권교수님이 출연하신 TV 프로그램을 찾아보았다가 알게 되었다. 그때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생각보다 기대보다 너무너무 인상깊게 읽은 뒤부터, 틈틈이 그의 저서를 찾아 읽고 있다.
이분의 글쓰기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아마도 '비관'이 될 듯. 입바른 말로나마 독자들에게 건네는 예의바른 희망의 메세지도 없다. 그러나 절망한 자 특유의 진하게 고아진 독한 광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담담히, 그저 그렇다라고 읊는 듯한 어조로 사실은 깊고 깊어서 얼마나 깊은 지조차 알 수 없는 낙담을 담아낸다.
수많은 시간동안 인류가 있어왔던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벌어져왔던, 인간의 본성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행위들. 게다가 그런 일들이 얼마나 쉽게 잊혀지고 또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인간 사회에 배어 있는가를 알기 시작하게 된다면.. 더 이상 무엇을 해도 바뀔리 없다는 체념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겠지. 어쩌면 차라리 바위를 깨보겠다는 계란의 어리석은 호기보다, 소용없어라는 냉담한 비관이 자신을 위해서는 더 나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를 행동없는 회의주의자, 작지만 소중한 시도를 꺾어버리려 하는 비관주의자라 비꼬는 건 정말 아니다. 오히려, 왠지 다행스럽게도 그는 냉담한 비관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그의 글에서는 따뜻한 숨결이 느껴진다. 분명 단조롭게 쓰인 몇 줄의 이력만 읽어보아도 그의 삶이 얼마나 추웠을까 싶은 사람인데도, 이상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껴진다. 마치 건조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래처럼.
열정적인 어조로 무언가를 촉구하지도, 심지어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동조조차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듯한 작가의 책치고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30, "이 표면상의 쾌활함과는 정반대로 그들은 항상 자신에 대한 절망감과 싸운다. 그리고 결국 일종의 자기 본위로 죽음을 선택한다."
60, 사물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에게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치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120,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신화가 얼마나 공허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142, 나에게 '이편'의 세계는 값싼 모조품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저편'에 바로 인생의 진실이 있다. 나 자신도 '저편'으로 가야 한다. 거기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되든 그것만이 진정으로 살아가는 길인 것이다. 그런 내 내면의 목소리에 반론하지 못하고, 질질 시간만 끌며 '이편'에 눌러앉아 있는 나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156,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은 "강제수용소의 지옥조차 소멸시킬 수 없었던 인간성"의 증인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대에서 '인간'의 척도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은 지상에서 현존한 역유토피아의 살아 있는 증인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나 '문명'과 같은 관념이 파괴된 후에 다시금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는 역할을 짊어진 사람이기도 하다.
231,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괴물이어야 했다. 그 괴물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보통 사람들과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어찌될까..
279, "비극적인 불모성 속에 있는 운명"을 미화하지 않고, "영웅인 양하는 분위기로 장식되는"것도 원치않는
287, 다음 세기도 인류는 스스로 경험하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게 될까? 나의 예견은 비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