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 폭력과 여성 인권
정희진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랫동안 인권이라는 말을 잊고 지냈다. 대학시절 여성해방이야말로 진정한 인간해방이라는 말들을 듣곤 했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일상을 영위해 가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하며....관성처럼 그저 직장과 집을 오가며 살아왔다.

그런데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를 읽는 내내 놀라움과 분노.....그리고 너무 무지하게 살았다는 인식이 숨을 가쁘게 했다.

"아내 폭력"이 의외로 너무나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으며, 그 잔인함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고, 피해 여성이 많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사회 구조라서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너무 깊숙히 얽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흔이 "아내 폭력"이라고 하면, 일탈적인 몇몇 남성들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나와는 관계없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더욱 심하게는 '맞을 짓을 했으니까',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 등 이러한 문제를 극히 개인적인 일로 돌려 왔다는 것이다.

가정이란 남편과 아내가 성(차)별화된 역할을 분담하는 사적인 공간이라는 인식, 아내와 남편은 한 몸이고 특히 아내는 그 남편에게 속한 소유물이라는 인식, 가정에서의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훈육이라는 인식,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가정은 결코 파괴되어서는 안된다는 인식 때문에 "아내 폭력"은 가정을 유지하는 남편의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게 했고 "아내 폭력"을 발생시키고 재생산시키는 구조로 작용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아내 역시 남편의 폭력을 부부생활의 일부로 수용하면서 사소화하거나 질병 등 다른 종류의 문제로 치환하여 인식함으로써, 폭력을 견디는 근거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가족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가족 내 성 역할 수행이 여성의 인권보다 우선시되면서 어머니, 아내로서의 "도리"는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맞지 않을 권리"를 유보시키가나 사소화하여 피해여성이 가족을 유지하고자 아내 역할에 더욱 충실함으로써 폭력을 해결하려고 하지만 가족이라는 권력 관계의 폐쇄회로 속에서 폭력 발생 지점을 이동, 순환시킬 뿐 폭력 그자체를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피해여성의 공포심, 자기방어, 저항 행동은 한국 사회 전반의 성별 규범에 의해 인정되지 않았다. 결국 현재의 가족제도 아래서는 남편의 폭력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 저항 모두가 "아내 폭력"을 재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뿐더러 아내가 남편의 폭력을 피해 탈출하고자 하면 아내, 어머니 역할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에 회귀함으로써 폭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의 인권이 설 자리는 없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서술된 이유이기도 하며, "아내 폭력"의 문제를 철저하게 여성 인권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여성의 인권차원에서 접근할 때 가정은 사회를 위해 무조건 유지되어야 할 단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은 아내 혼자서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참고 견디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내 폭력의 문제는 개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흔들임 없는 가부장제가 지탱하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폭력당하는 아내가 가정에서 어머니, 아내이기 이전에 사회적 개인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아내 폭력"이 인권의 문제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사회의 기본질서에 대한 문제 제기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내 폭력"의 원인과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하기 보다는 폭력당하는 아내의 가족 내 성별 정체성을 문제화함으로써 "아내 폭력" 문제를 인권의 시각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또한 한국사회의 주류 가치인 가족주의와 경합할 때 " 아내 폭력"은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이제껏 숨겨져 왔고 무시되어 왔는데 여성의 폭력당한 경험이 수치심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남성 중심사회가 강요하고 희망하는 해석체계의 산물임을 재해석하여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 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란 책에서 인용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만큼 느낄 수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됐다.

우리 삶에 만연해 있는 남성중심의 공동체적 질서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우리들 여성을 규제해 왔는지를, "아내 폭력"은 바로 내가 당하고 있는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 완전범죄가 있다면, 그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더구나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행위는 문화와 미풍 양속으로, 전통으로, 가족주의나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미화되기까지 한다. 때문에 가해자는 피해의식을, 피해자는 죄의식을 갖게 된다"고 한다.

"여성 폭력"을 여성의 시각에서 해석하지 못할 때 우리가 자주 겪은 일이면서도 그것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여성 폭력"은 생활 곳곳에서 "여성 폭력"을 재생산할 것이다.

다음 세대의 우리 딸들에게 남성과 동등한 인권을 가진 여성이 되는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서 지금부터, 나부터 자신의 경험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재해석, 재발견함으로써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아닌 생존자로 거듭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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