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두는 여자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아직도 가슴이 아리다. 한 일본장교와 한 중국소녀의 극단적인 사랑의 결말... 잊을수가 없는 엄청난 충격이다. 영화에서라면 어쩌면 무척이나 뜬금없는 결말일수도 있는데 오랜만에 만난, 놀라운 이 소설의 글맛은 내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감정분출을 맘껏 부추겼다. 처음엔... 조금 어지럽다. 일본천황을 위해 목숨 바쳐 전장에서 총을 겨누는 충직한 일본장교의 창녀이야기와 드넓은 광장에서 자신의 바둑실력을 뽐내기 위해 누군가를 기다리는 한 소녀의 이야기가 엇갈리면서, 도대체 이 두 사람이 만나기는 하는걸까, 아니면 이 두 사람의 주변 인물 중 한사람인걸까... 마음이 야금야금 긴장으로 조려진다.

하지만, 처음에 얘기한것처럼 두 사람의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가 아니다. 마치 제작년 한때 전국의 연인들을 사로잡은 일본소설 <냉정과 열정사이> 처럼 이번엔 한 챕터씩 서로의 이야기를 건네는데, 진정 '바둑을 두듯' 서로의 마음을 읽어나가는 건 한참 후반부다. 그 전엔 그 장교의 사생활, 제국주의에 대한 짙어져가는 회의, 가식적 충성, 냉정한 타향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 중국소녀가 첫 경험과 사랑에 대한 정의, 가부장적인 제도안에서의 분노 그리고 바둑에 대한 애정을 그리는데 그 솜씨가 정말 '이창호 9단'이다.

그렇게 서로 국적도 다르고, 사상도 다른, 물론 나이차도 엄청난 두 남녀는 그렇게 드넓은 광장에서 우연히, 정말 우연히 바둑을 두게 되고,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가로세로 19줄, 총 361개의 작지만 세상보다 더 넓은 바둑판 아래서 서로를 탐색한다. 장고 끝에 놓인 한 수에서 백가지 감정의 변화와 미묘한 흔들림을 읽어낸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의 글솜씨다.

중국여인들은 기가 세다. 그녀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부장적인 시스템을 딛고 일어선, 가장 부드러운 남자들이다. 젊은 중국출신의 소설가 산샤는 프랑스어를 배운지 7년만에 세 번째 소설 <바둑두는 여자>를 프랑스어로 출간했다. 그녀의 야망과 대담성, 조잡하지 않으면서도 기교적인 감정의 묘사. 중국여인들만이 가진 독특한 혈통의 글쓰기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더 이상 요시모토 바나나나, 야마다 에이미 등에 신세를지지 않아도 되겠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진심으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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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의 역사
크리스토프 르페뷔르 지음, 강주헌 옮김 / 효형출판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고흐, 고갱, 피카소, 모딜리아니, 마네, 르누아르, 보들레르, 랭보, 헤밍웨이, 지오느, 사르트르... 이들의 삶과 예술과 사랑이 싹트고 무르익었던 곳'

책의 앞표지에 쓰인 글은, 카페가 어떤 곳이라는 걸 한눈에 알게 한다. 소설가, 시인, 화가, 그리고 음악가들이 손끝에서, 머리에서, 그리고 가슴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달구는 그이들이 쉬고, 논쟁하고, 영감을 받는, 또한 그들의 특별한 사랑과 고뇌를 품은 곳.. 카페는 그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들이 있었기에 '역사'를 이룰 수 있었으리라. 물론, 카페가 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루의 일과를 카페에서 마치며, 몰래 그들을 지켜보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오브제가 되어주었다.

이 책이 소중한 건, 저자가 프랑스 방방곡곡을 다니며 찍은 풍부한 사진들이다. 시골의 작은 비스트로에서, 대도시의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고급스럽고 화려한 인테리어의 카페까지, 그리고 카페 로고에서 내부 바(bar) 위의 재떨이 하나까지 그리고 그 카페를 스쳐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담아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른 카페의 풍경을 보여준다.(그래서.. 책값이 좀 비싸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어느땐 야외 테라스의 한구석에서 노동이 끝난 후의 피로를 한잔의 압생트로 풀고있고, 어느땐 작은 구석방에 앉아 글을 끄적이고 있다. 거긴, 서울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형체인형태의 커피숍이나 소주방 등에선 느낄 수 없는 '취향'이 있다. 어떤 고급스러운 안도감을 주는, 또는 단순한 오아시스(물통) 형태의 긴요함도 역시 분수를 넘어버렸다. 물론, 생활의 질이 만든, 트렌드가 만든 삶의 자세탓도 있겠지만, 책을 보며 아쉬움을 느낀 건 어쩔 수 없다.

저자의 기록들 중 아쉬운 부분들은 뒷부분에 조금 언급되어있는, 각 지방의 술의 별명들과 카페에 여성들이 드나든 시절의 이야기들, 그리고 웨이터들에 대한 관련 자료들이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여성들은 카페의 퇴폐성 조장에만 일조한 것 같은 자료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 카페를 쥐고 흔들던, 통 큰 여주인들!의 이야기들이 분명 어딘가 전해져올텐데, 앞으로 카페를 가꾸고픈 내게 그녀들의 이야기들이 빠진 건 참으로 아쉽다.

저자의 이력으로 보아서 무리한 기록일수도 있으나, 그래놓고 책 제목이 <카페의 역사> 라는 것도 안타깝다. 그저 '카페에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임으로. 그래도 이 정도의 자료를 모아놓은 것도 그리 많지 않음을 알면, 이렇게 만나게 된 것만도 다행이다. 조금 비싸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생생히 느낄 수 있다는 건, 무척 행복한 책읽기다. 오늘 이렇게 프랑스의 카페를 만났으니, 내일부턴 <베네치아의 카페 플로리안으로 가자>!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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