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
이소영 지음 / 래빗홀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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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한때 우리는 '정의'라는 단어를 믿었다.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약자의 삶에 분노하고 기업의 비리에 함께 분노했다. 방송에 등장한 단 한 장의 문서가 사람을 매장하고, 또 하나의 세상을 바꾸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그때보다 훨씬 복잡하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흐려지고, '정의'는 때로 이익의 언어로 번역된다.
소설 『통역사』는 바로 그 모호한 경계 위에 선 한 통역사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능력 있는 통역사이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생계를 위해 마트에서 와인을 팔고, 치료비를 걱정해야 하는 평범한 여성이다. 그녀에게 어느 날 어느 네팔여인의 통역을 허위로 해달라는 제안이 들어온다. 단 한 번의 거짓 통역이면 나의 생계는 구원받고, 동시에 한 여인의 인생이 끝난다.

여신으로 추앙받던 네팔의 여인은 네팔에서도, 그리고 타국인 한국에서도 약자였다. 살아 있는 여신 ‘쿠마리’는 걷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 존재는 신성하지만 동시에 가장 갇힌 존재다. 결혼이민으로 한국에 와서도 그녀는 여전히 한 발자국도 자유롭게 내딛지 못했다. 같이 데려온 동생은 끈에 묶여 지냈고, 그녀의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한 소원은 곧 자신에게 그만큼의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주인공은 통역이라는 언어의 힘을 손에 쥔 사람이다. 그러나 그 힘이 정의의 편에 설 수 있을지는 오직 그녀의 선택에 달려 있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 누군가는 파멸한다. 거짓을 말하는 순간, 자신의 신념이 무너진다. 통역이라는 단어는 결국 인간의 윤리와 권력의 문제로 확장된다. 언어는 중립적이지 않으며, 말은 언제나 누군가의 생존을 지배한다.
핵페기물, 불법노동자등의 무거운 주제를 흡인력 있게 풀어냈다.사회고발적 소재임에도 문장은 간결하고 리듬감 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우리는 ‘이것이 단순한 허구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작가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의 숨겨진 이면을 통해 거짓과 진실, 생존과 윤리의 흔들리는 인간의 얼굴을 그려낸다.

정의가 사라진 사회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타협하는지를 보여주면서도, 마지막까지 주인공의 존재를 통해 희망을 놓지 않는다. 통역사의 결단이 빛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어떤 용기를 요구하는지 절실하게 느낀다.

책후면에 장일호 기자의 추천서가 마음을 울렸다. “좋은 이야기는 세상에 맞서는 용기를 준다.”
타협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며, 정의로운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을 향해—
인간의 존엄이 결코 누락되지 않기를 바라는, 단단한 목소리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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