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아버님께 진경문고 1
안소영 지음, 이승민 그림 / 보림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다산 정약용.

그 이름을 부르면 몇 가지가 함께 떠오른다.

천재, 절망, 무불통지, 유배, 엄청난 저작…….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 태어나, 모든 분야에 막힘이 없었던 그는

조선 정조 시대를 선두에서 이끌었던 全人이었다.

정조 시대가 어떠했는가?

조선의 문화가 꽃을 피웠으며, 천재들이 오히려 흔했던 시대이지 않은가?

그러한 시대에 정조와 함께 정치를 생각했던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한 가지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후에 그를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었던 서학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학문을 얼마든지 빨아들일 수 있었던 당시의 유연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조선의 사회를 발전시킬 의무가 있는 당시 지식인들의 건강한 호기심을 보여준다.

만일 그들의 뜻이 펼쳐졌다면, 조선의 역사는 전혀 새롭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생명줄은, 정약용을 위시한 천재들의 꿈은

정조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아직도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이 위대한 군주의 죽음 이후,

조선과 조선의 천재들은

사적인 영달에만 관심이 있었던 반동세력, 권력자들에 의해 처참하고 완벽하게 몰락한다.

독재 권력을 휘둘렀던 노론이 들이 민 칼날은 바로 ‘서학’이었다.

이미 새로운 학문에서 자생적으로 종교로 자리잡고 있었던 서학(=천주교)은

새로운 조선을 꿈꾸는 조선의 지식인과 정약용을 위시한 진보세력을 치기에 너무나 좋은 양날의 칼이었다.





사실 정약용은 일찍이 서학과의 관계를 끊은 상태였다.

그가 정조에게 올린 상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젊은 날, 새로운 학문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서학 공부는 그가 성균관에 들어가

정조의 가르침을 받게 되면서 자연히 중단하게 된다.

정조는 군주이면서 스승인, 성리학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철인군주에 가까운 왕이었는데, 그가 미래의 조선을 이끌어갈 성균관의 젊은 지식인에게 요구하는 학문 수준은 굉장히 높았다.

그는 유생들에게 주제를 내려 논문을 쓰게 하고,

친히 수십 개의 질문을 내려 답하게 하는 등 강도 높은 학문 수련을 요구했던 것이다.

임금에게 답해야 하는 질문이 100여 개에 가깝고,

그것도 짧은 시간에 해야 한다면 그 숙제만으로도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최고의 학자였던 정조는 서학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성리학이 정학이라고 믿었지만, 그것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모든 물길을 열어주면 자연히 주된 줄기가 생기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치세에도 서학을 탄압하자는 노론의 주장이 거셌지만,

정조는 절대 조선의 새로운 가능성을 자르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희망은 정조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고,

정약용도 삶과 죽음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이십 대 초반 잠시 서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꼬투리 삼아

노론세력은 진보의 싹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정조가 죽은 다음 해,

정약용의 집안은 말 그대로 멸문지화에 이른다.

이미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셋째 형 정약종과 그 아들이 처형을 당한다.

둘째 형 정약전과 그 자신이 유배를 당한다.

큰형 정약현의 맏사위 황사영이 능지처참 당하고, 그 아내인 큰조카딸 정명련이 노비가 되어 제주도로 부처되었으며, 두살배기 아들도 노비가 된다.

처남인 이승훈이 처형당하고, 함께 처형당한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숙부이니 정약용과도 먼 친척이라 할 수 있다.

한 집안에 같은 죄목으로 죽거나 유배간 이들만 이 정도이니, 살아남은 가족이라 할 지라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를 당하게 된다.



정조와 함께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정약용의 절망이 어떠했을까?

죽고 헤어진 형제자매들에 대한 애달픔, 한시도 잊지 않았던 꿈이 하루아침에 스러진 절망, 앞날을 꿈꿀 수 없는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

고문과 떠도는 생활로 인한 육신의 고통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유배를 당한 초기, 머물 곳이 없어 주막의 봉놋방에서 머물기도 했다고 하니

당시의 삼엄한 정국과 사나운 인심을 짐작하고도 남겠다.



그러나 다산에 정착한 그는 제자들을 키우며

깊은 대나무 숲 속의 초당을 학문의 집으로 만들어간다.

읽기와 사색과 토론과 쓰기…….

그가 남긴 저술만 500여 권에 이른다.

그 하나하나가 깊고 진실한 학문의 경지를 보여준다고 하니, 그에게는 천재라는 말이 오히려 경박해 보인다.

천재적 재능만으로도 우직한 노력만으로도 이룰 수 없는 업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읽은 그의 글은 유배초기 네살배기 아들이 죽은 것을 슬퍼하며 쓴 글이었다.

그 다음은 굶고 학대받는 백성들을 슬퍼하며 쓴 <파리를 조문하는 글>…….



“순조 10년(1810) 경오년 여름에 파리가 극성하여 온 집안에 가득차고 점점 번식하여 산골에까지 득실거렸다. 고루거각(高樓巨閣)에서도 일찍이 얼어죽지(凍死) 않더니 술집과 떡가게에 구름처럼 몰려들고 윙윙거리는 소리가 우레 같았다. 노인들은 탄식하며 괴변이라 하고, 소년들은 성을 내며 파리 소탕전을 펴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혹은 파리 통발을 설치하여 거기에 걸려 죽게 하고, 혹은 독약을 쳐서 그 약기운에 어질어질하게 하여 섬멸하려 했다.

나는 말하였다.

아아! 이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는 굶주려 죽은 자의 변한 몸(轉身)이다. 아아! 기구하게 사는 생명이다. 애처롭게도 지난해 큰 기근을 겪고 또 겨울의 혹한을 겪었다. 그로 인해서 염병이 돌게 되었고 게다가 또 다시 가혹한 징수까지 당하여 수많은 시체가 길에 널려 즐비하였고, 그 시체를 버린 들것은 언덕을 덮었다. 수의도 관도 없는 시체에 훈훈한 바람이 불고 기온이 높아지자, 그 피부와 쌀이 썩어 문드러져 옛 추깃물(송장이 썩어서 흐르는 물)과 새 추깃물이 괴어 엉겨서 그것이 변해 구더기가 되어 항하(恒河:인도 갠지스강의 한자이름)의 모래보다도 만배나 많았는데, 이 구더기가 날개를 가진 파리로 변해 인가로 날아드는 것이다.

아아! 이 쉬파리가 어찌 우리 인간의 무리(類)가 아니랴. 너의 생명을 생각하면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에 음식을 만들어 널리 청해 모여들게 하니 서로 연락해 모여서 함께 먹도록 하라.”



조문의 글 앞에 쓴 글만으로도

그의 눈물이 느껴진다.



유명한 학자로만 알았던 그의 넘치는 감성과 진솔함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아직도 그의 저작을 제대로 읽어본 바 없지만,

그의 삶을 알아가며 그의 굳센 의지, 그리고 그것보다 더 진한 오기와도 같은 심정에 동감한다. 아니 솔직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살아서 그처럼 오래 죽음 이후를 생각했던 이가 또 있었을까?

자찬묘지명-自讚墓誌銘.

그가 스스로 묘지에 새길 글을 쓴 이유는,

자신의 뜻과 삶이 잘못된 권력에 의해 잘못 기록되어

자신과 비명에 간 형제, 벗들의 삶이 그것만으로 기억될까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자신의 삶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이 정확하게 판단해주기를 기다리며, 그는 유배 이후의 삶을 살았다.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그는 살아있는 하루하루 옷깃을 여몄을 것이다.



"내가 너의 착함을 기록했으니 여러 장이 되었도다. 너의 감춰진 사실을 죄다 기록했기에 이 이상의 기록이 없으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육경을 안다라고 하였으나 그 실천한 바를 생각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야 명예를 널리 퍼뜨리고 싶겠지만 그러나 찬양이야 할게 없다. 몸소 실행하여 증명시켜 주어야만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게 된다. 너의 뜻 섞여 어지러운 것을 거두어들이고 너의 분별없이 함부로 날뜀을 그쳐서 부지런히 실천하기에 힘쓴다면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라. "



그가 만년에 썼던 사암俟菴이라는 호는 ‘훗날을 기다린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살아있으되, 죽은 이후를 생각하며 살았던 삶.



정약용, 세상에는 이렇게 살아간 사람도 있다.

이 사람으로 인해,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자신의 존엄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어떤 어려움에도 쉽게 불평하거나 핑계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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