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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 동화집 - 우리가 알고 싶은 진짜 동화 01
샤를 페로 지음, 전세철 옮김 / 노블마인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페로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빨간 두건」 등 익숙한 제목만을 보고 이 동화집을 집어 들면 독자들은 충격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 동화집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동화들은 없다. 늑대에게 잡아먹힌 빨간 두건에게 구원은 없으며,「당나귀 가죽」에 등장하는 왕은 어이없게도 자신의 친딸인 공주와 결혼하려 한다. 「푸른 수염」에는 아내들을 차례로 살육하는 남편이 등장하고, 「엄지동자」의 식인귀는 끔찍한 방법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죽인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공주는 잠에서 깨어나 왕자와 결혼하지만 곧 시어머니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게다가 화자는 짓궂게도 공주와 왕자가 결혼한 첫날밤, 두 사람은 잠을 잘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순진한’ 동화를 기대했던 독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이 밖에도 페로는 작품 여기저기에서 인간세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는데, 독자들은 어린이들이 과연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될 것이다. 

이처럼 원전으로 읽는 『페로 동화』는 오늘날의 독자들이 가지고 있던 동화에 대한 통념을 뒤엎는다. 『페로 동화』에는 현대의 동화들이 일반적으로 금기시하고 있는 폭력적인 행위에 대한 묘사와 근친상간의 가능성을 포함한 성(性)과 관련된 암시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페로 동화』는 『그림 동화』를 비롯한 민담을 원형으로 하는 다른 문학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덜 잔인하고, 잔인한 행위에 대한 묘사도 구체적이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로 동화』를 원전으로 읽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를 기대했던 독자들에게는 충격적인 경험일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이 사실은 그림책과 디즈니 만화영화를 통해 변형된 『페로 동화』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생산된 오늘날의 『페로 동화』는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변화하며 구전되는 특성을 지닌 민담의 현대적 변형일지도 모른다.




 민담, 동화의 옷을 입다




『페로 동화』가 이처럼 오늘날의 동화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로 동화』는 민담을 그 원형으로 하는 이른바 전래 동화에 속하는 작품이며, 오늘날의 창작동화와는 전혀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창작동화는 어린이라는 특수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며 이들의 심리적, 정신적 특성을 고려하여 씌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동화는 어린이와 아동기에 대한 이 시대의 보편적인 견해들을 반영한다. 어린이를 천진난만하고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여기며, 제한된 이해력과 판단력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이와 아동기에 대한 오늘날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에 속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동화는 어린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폭력적이거나 부도덕한 내용, 혹은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힘들다고 여겨지는 내용-어른들의 세계에 관한 내용이나 성(性)적인 것을 다룬 -은 다루지 않는다.

그에 비해 전래동화의 원형이 되는 민담은 특정한 대상을 상정하여 창작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세기를 거쳐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지던 이야기였다. 민담을 듣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어린이와 어른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으며,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민담에는 어린이가 듣기에 부적합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설사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어린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위한 배려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필립 아에리스의 『아동의 탄생』에 의하면 16세기와 17세기의 프랑스 사회에서는 어린이 앞에서 상스럽거나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던 아동기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은 근대 이후에 형성된 이데올로기이다. 중세와 근대 초까지 어린이들은 이유기를 지나면 바로 어른들 세계에 편입되었다. 대다수 민중 층의 어린이들은 어른들처럼 고된 노동에 시달렸고 교육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아동기가 인생의 특수한 단계로서 보호가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아직 싹트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민담은 문자와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점차 글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민담은 기록되는 과정에서 채록자의 세계관과 관심사가 반영되기 마련이었다. 『페로 동화』보다 100여 년 늦게 출판된 그림형제의 민담모음집에는 독일인들에게 언어적, 문화적 일치성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어 통일에 도움을 주려하는 정치적 의도가 드러나 있다. 

 페로가 활동했던 고전주의 시대에는 민담을 저급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운 이성의 시대에 민담은 비합리적이고 유용하지 못한 것이며 사실과는 거리가 먼 황당한 이야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17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살롱(Salon)을 중심으로 페로나 드 오느와 부인의 작품을 통해, 옛이야기들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청교도들의 지배 하에 있던 영국이 여전히 민담을 배척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후대의 프랑스에서도 장 자크 루소 같은 이들은 민담뿐 아니라 우화마저도 쑬데 없는 것으로 여겼다. 

페로는 1694년에 운문 이야기 3편(Griselidis, Peau d'âne, Les Souhaits ridicules)을 발표하고, 1695년에 4편의 산문체의 이야기를 묶어 『엄마거위 이야기(Contes de ma mère l'Oye)』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어서 1697년에는 『교훈을 붙인 옛날 이야기(Histoire ou Contes du Temps passé, avec des Moralitez)』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페로 동화』라고 알려진 8편의 이야기들이 바로 이 책에 실려 있다. 이 중 「도가머리 리케」만이 페로의 창작물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나머지 작품들은 민담에서 채록한 것이다. 그림동화가 명백한 정치적 의도로 만들어진 민담집이라면 페로의 동화집은 비교적 오락적 가치에 치중했다고 여겨진다.

페로 이전에 나왔던 민담집이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1643년 잠바티스타 바질(Giambattista Basile)의 『펜타메론(Pentameron)』에 실린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는 왕자가 잠자는 공주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공주는 잠자는 상태에서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페로는 전래되던 민담의 내용을 어린이들이 읽어도 될 정도로 순화하고 다듬어 자신의 민담집에 실었다. 적어도 처음 출판되었던 당시의 페로의 민담집은 어린이만을 위한 작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페로의 민담집을 이 시기 처음으로 출현하기 시작했던 동화의 범주에 넣는 것에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페로의 민담집이 출판되었던 근대 초라는 시기는 필립 아에리스에 의하면 유럽사회가 어린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였다. 중세 사회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했고, 따라서 어린이만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관념 역시 없었다. 그러나 근대 초에 이르자 아이들의 세계에서 어른들의 세계로의 이행을 위한 준비기로서의 아동기라는 개념이 싹트고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페로 동화』가 나온 때는 일상생활에서 어린이들에게 걸맞은 훈육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페로 자신이 3남 1녀의 양육을 직접 책임져야 했던 홀아비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의 동화가 일차적으로 그의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한다.




 페로의 시대




페로가 활동했던 17세기의 프랑스는 루이 14세에 의해 절대군주제가 정착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프랑스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집권층은 군주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봉건 귀족의 잔여 세력을 무력화하려고 애썼다. 페로 역시 루이 14세가 정치적 지지를 얻으려는 과정에서 귀족으로 승격한 부르주아지 출신의 법복 귀족이었다. 민족주의와 절대주의를 지향하는 시대정신 역시 이 시기에 싹트기 시작했으며, 루이 14세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에서 예술과 학문이 찬란하게 꽃을 피우기도 했다.

17세기는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에 대한 동경을 이어받은 시기이기도 했다. 당대를 풍미했던 고전주의는 그리스적인 규율과 질서의 세계를 부활시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이 시기에 케플러와 갈릴레오, 뉴턴, 파스칼 등의 과학자들은 발견과 탐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이들의 업적은 사람들에게 이 세계를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한 하나의 조직체로써 이해하게 했다. 또한 이 시기 데카르트를 비롯한 철학자들은 그들의 철학체계를 완성하여 이성과 진보의 시대의 도래를 준비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지성들은 증명할 수 없는 과거의 일이나, 어떤 유형의 것이든 초자연적인 현상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 시기는 프랑스 문학사상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중 하나로 꼽히며, 빼어난 문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라신, 몰리에르, 라 로슈코프 등이 페로의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들이다. 절대 권력의 비호자였던 수상 리슐리에는 왕의 절대권이 학계와 문화계에도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생각은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창설로 이어진다. 샤를 페로 역시 167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고, 이후 페로는 아카데미 안에서 벌어진  ‘신구논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오직 이성의 절대성만을 주장하며, 고대의 권위를 부정하기에 이르자 이런 생각은 당대의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파스칼 역시 인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며 진정한 고대는 현대인에게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고전주의가 지배하던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도 점차 고대인에 대한 맹목적인 모방에 반기를 들며 예술에 있어서의 완전한 자유를 주장하는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페로 역시 고대의 권위를 부정하는 아카데미 안의 ‘신파(新派)’였다.

1687년 병환을 앓고 있던 루이 14세가 완쾌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아카데미의 회원들 앞에서 샤를 페로는 자작시 「위대한 왕 루이의 시대」를 낭송한다. 이 시에서 그는 호메로스를 비난하고, 몰리에르와 드 말레르브 같은 당대의 작가들이 그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칭찬했다. 이는 고전주의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으며 아카데미 안에서는 이를 둘러싸고  논쟁이 시작되었다. 페로는 논쟁이 터지자 『신구비교론』이라는 책을 통해 모든 학문과 예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보되기 마련이며, 루이 14세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고대인들보다 우수할 수밖에 없다는 논지를 전개했다. 페로에 따르면 루이 14세와 같은 훌륭한 군주의 통치 덕분에 이러한 귀결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격렬한 논쟁 끝에 상황은 신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이후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는 고대에 비해 당대가 우수하다고 믿는 관점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페로의 자작시 낭송은 전통의 한계와 진보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편 부르주아 출신의 법복 귀족이었던 페로에게는 자신의 신분적 이익의 유지를 위해 절대 왕권과 손을 잡는 것이 필요하기도 했을 것이다.




원전으로 읽는 『페로 동화』




『페로 동화』에 실린 8편의 이야기들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전래 동화에 속한다. 민담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전래되는 지역의 문화와 사회상을 드러내 주고 있으며, 문자화되는 과정에서 채록자의 세계관이 반영되기도 한다. 우리는 『페로 동화』의 곳곳에서 페로 자신이 덧붙인 교훈과 견해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나름의 견해를 덧붙인 것은 작품을 통해 교육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풍자적인 어조로 전달되는 이러한 메시지는 억지스럽지 않으며 작품이 지닌 문학적 향취를 저해하지 않는 한에서 시도된다.  

「신데렐라」는 다양한 판본을 통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그림형제의 민담집에도 페로의 동화와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한 신데렐라 이야기가 실려 있다. 우리 나라에서 전래되는 민담인 「콩쥐 팥쥐」 역시 비슷한 구조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들에는 공통적으로 마음씨 나쁜 계모와 이복 언니가 등장하며, 착한 심성을 지닌 주인공은 역경을 딛고 왕자와 결혼한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한 원형을 지니고 있는 것이 민담의 특징인 것이다.『그림 동화』판의 「신데렐라」에는 이복언니들이 맞지 않는 구두에 발을 넣기 위해 발을 자르는 장면과, 새들이 이복언니들의 눈을 뽑는 장면이 여과 없이 묘사되어있다. 그에 비해 페로 판에 등장하는 신데렐라는 이복언니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궁에서 함께 살게 한다. 이런 차이는 『페로동화』의 원형이 되는 프랑스 민담이 다른 지역의 민담에 비해 비교적 잔인한 부분이 적고 온건한 내용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데렐라는 매우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신데렐라뿐 아니라 『페로 동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상은 비슷한 특성을 보이는데 이는 당대의 사회가 원했던 대표적인 여성상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왕권의 절대성은 가부장의 권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확립되어 가고 있었으며, 또한 이 시기는 여성과 아이들이 가정이라는 권력 안에 묶여 행동이 통제되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하다. 「신데렐라」는 당시 가부장들이 원했던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당나귀 가죽」은 루이 14세 역시 어린 시절에 즐겨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왕국은 여러 면에서 절대 왕정기의 프랑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 등장하는 왕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강한 왕으로 묘사되며, 왕의 보호 아래 왕국에서는 아름다운 예술이 꽃을 피운다. 사람들은 왕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일이라도 왕이 지시를 내리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왕조차 이성을 잃고 격정에 휩싸이자, 자신의 딸과 결혼하려는 망상을 품게 된다. 공주는 왕을 피해 당나귀 가죽을 쓰고 달아나서 고초를 겪지만 결국은 다른 나라의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된다. 인도 사람들과 무어인들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이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대목에서 당시의 프랑스 사회의 화려한 번영과 그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페로의 창작물로 알려진 「도가머리 리케」는 페로가 인간 정신의 힘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알게 해주는 작품이다.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있던 주인공들은 서로의 사랑을 통해 균형 잡힌 존재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정신적인 능력이 없는 경우가 더 좋을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만, 결국 그들의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지닌 지적인 능력이다.

이 밖에도 『페로 동화』에는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내용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품위 있는 예법을 보여주는 주인공들은 보상을 받는 등, 형식적인 예의의 중요성이 높이 평가된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페로의 통찰은 때로 매우 날카로우며 문학작품을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페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성과 진보의 신봉자였던 페로가 환상과 초자연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민담집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닉하게 느껴진다. 페로 동화에는 요정들이 초자연적인 힘을 행사하고, 동물이 사람보다 영리하게 굴기도 하며, 주인공들은 때로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그렇다면 페로는 이런 이야기들의 가치가 무엇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당나귀 가죽」의 앞머리에서 이렇게 말함으로써 페로는 이 물음에 대답한다.




우리는 왜 우리의 마음을 교묘하게 매혹시키는 식인귀나 요정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감탄해 할까요? 그것도 며칠 밤을 꼬박 새운 탓에, 오히려 잠을 좀 자고 싶은데도 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삶의 가장 올바른 도리와 이치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쓸데없이 사용한다며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여러분들의 당연한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지금부터 당나귀 가죽이란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고자 합니다.




어쩌면 이 말은 민담을 비롯한 허구적인 문학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에 대해 설명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이성과 절대왕정의 수호자이기 이전에 문학가였던 페로는 자신의 동화를 단순히 딱딱한 교훈에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당의를 입힌 것으로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상상력이란 문학이 지닌 본질적인 힘인 것이다. 『페로 동화』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우리를 즐겁게 하며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텍스트이다. 원전을 통해 당시의 사회와 풍습에 대해 음미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어린이들과 함께 읽어도 될지에 대한 것은 당신이 결정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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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허기 랜덤 시선 35
전동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아파트 앞을 지나는 택시 안 우는 여자의 얼굴이 시인의 마음에 오래 머무른다. 시인에게 세상의 모든 사물은 수도원의 수사(修士)와도 같은 존재이다. 삶은 봉쇄수도원처럼 단절되고 고독한 공간이며, 그 안에서 존재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수행한다. 그러나 수도원의 성스러움이 구석구석 미치기에 현실이라는 공간은 너무나 누추하고 비루하다. 시인은 그 남루한 삶 속에서 구도와 구원을 꿈꾼다.
  시인에게는 죄의식이 많다. 세속에서 구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시인의 양심은 늘 시인을 몰아붙인다. 그것은 세속과 출가에 마음을 하나씩 걸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회한일 수도 있고, 삶과 수행이 생각처럼 나란히 가지 못 하는 것에 대한 죄의식일 수도 있다. 시인은 문학에 대해, 삶에 대해 결벽하기를 바란다. 삶의 한결같음을, 몸과 마음의 일치를, 삶에 대해 늘 깨어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세계는 필연적으로 불화(不和)할 수밖에 없고, 수행은 현실의 방해를 받으며, 언어는 사물을 온전히 포착할 수 없기 마련이다. 시인은 삶과 세계의 합일을 위한 고독한 투쟁을 벌인다. 시인은 “얼마나 더 싸우고 얼마나 더 가난해져야 지복의 저 풍경 속에 가 닿을 수 있을지” 궁금해 하며 “나는 나를 믿지 못하고 이 세상을 믿지 못하고 내 영과 혼은 자꾸 나를 떠나려고” 하고 “몸은 마음을 멀리하고 마음은 또 저를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힘이 든다.  

삶속에서 구도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에게 일상에서의 각성은 때로 자욱한 피비린내처럼 찾아온다. 치열한 사색 속에서 얻어진 시인의 언어는 절제되어있고 담백하다.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고요하고 진지하고 정갈하다 못해 오히려 성스럽다. 수도자처럼 묵언하고 싶은 욕망 속에서 벼려진 결벽의 언어이다.

삶과 수행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유난히 맑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기에 결벽이란 말을 썼지만, 여기서 쓴 결벽이란 말이 그와 반대되는 것에 대한 혐오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에게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함께 수행해나가는 도반(道伴)이며, 연민의 대상이다.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이 없다. 특히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들, 가려진 존재들, 눈에 띄지 않는 사물들이 시인의 마음을 흔든다. 

새로 나온 푸른 이파리들보다도

그 뒤에 숨어 있는

뒤틀리고 구부러진 나뭇가지들에게

더 자주 눈길 건너가고

가슴 먹먹해지나니




이 서러운 묵언의 나뭇가지들

꼭 쥐고

어루만지나니 그 누구의

몸인 듯 마음인 듯

                               「 나뭇가지를 꼭 쥐고」끝부분

 

시인은 이처럼 가려진 사물을 들춰내고 보듬어주고 싶어 한다. 눈에 띄지 않는 존재에 대한 연민은 출가하고 싶은 시인의 발목을 붙잡는다. 홀로 해탈을 구하지 말라고 한다. 시인의 세계에서 지고한 것에 대한 갈구는 미천한 존재에 대한 연민과 맞닿아 있다. 시인에게 신(神)은 산 밑 작은 호숫가에서 마주친 “철없는 황갈색 영혼의 몸”에도, “몇 줌 시린 햇볕에도 한없이 떨며 깊어지는 극빈의 그늘 속에”도 편재한다. 그러나 이런 사물이 단지 작고 힘없는 존재만은 아니다. 「대물(大物)들」의 물고기들은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음험하고 알 수 없는 존재인데 이들은 때로 “자진하듯이” 빈 낚시를 물고 나오며 삶의 불가해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검은빛 본다」에서 이런 존재들은  “삶도 죽음도 다 떠나버린 것 같은” 곳에서 “죽음을 살아낸 메마르고 풍성한 빛”을 보이는 지극한 경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은 또한 시인을 위무하며 함께 아픈 세상을 견디는 존재이기도 하다. 시인이 힘들어 할 때 “어느 새 내 곁에서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보다 더 공손하게 절을 올리”며 대속(代贖)하는 존재이다. 시인에게 밥상머리에서 마주하는 “은산철벽”을 견디게 해주는 존재들인 셈이다.

자신이 불러낸 이름 없는 존재들에게 시인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치유와 사랑이다. 시인은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고 고뇌했던 존재들의 “아프게 금이 가는 가슴 한쪽을 오랫동안 쓸어주”고 “그 끝에 반짝이는 검은 우물을 들여다보”려 한다.
 결벽이 세계를 대할 때 시인이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자세라면 이처럼 시인이 이 세상에 바라는 것은 화합이다. 결벽과 화합이라는 두 가지 명제가 모순 없이 시인의 시 속에 녹아 있다. 거기 이르는 과정이 경건한 기도처럼 진실하고 절절해서 우리를 깊이 공감하게 한다.

이제 40대를 살고 있는 시인은 다른 존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삶도 너그럽게 포용하려 한다.

살아남은 한쪽 가지에 어린 꽃망울들

수줍게 매단 살구나무의 저녁은

멀고도 깊어라, 그곳에는

가출한 고양이들도 살고

시골 병원 6인실에서 만난 아버지의 죽음도 살고

오늘 하루도 헛살았구나, 입술 깨문

후회도 살고 있으니

나는 그 옆에 이복형제처럼 앉아

담배 연기를 맛있게 내뿜곤 하지




                                        「살구나무의 저녁은」 부분




잔바람에도 파르르

몸을 떠는

흰 꽃잎 한 장 만나러

세상에 왔구나




겨우내 얼음장 하늘을 쩡, 쩡 깨뜨리던

새들의 핏멍 든 날갯짓 소리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이 시리디시린 빛의 여울목에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더러는

상처를 핥듯

더운 혀의 사랑을 나누고

숨 막히는, 숨 막히는 울음 끝에 목청을 틔워

나지막한 노래 한 자락

펼치며




먼 길을 돌아 왔구나

어느새 젖가슴 봉긋한 아이의 손을

부적처럼 꼭 쥐고

왔구나

 

                                         「앵두나무 아래 중얼거림」전문

 살구나무 아래에는 시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시인은 자신의 과거를 긍정하는데 이는 “제 울음을 환히 밝힌 사랑의 빛들 전등하듯” 삶과 죽음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앵두나무 아래 중얼거림」에서 삶에 대한 긍정과 화해는 더욱 두드러진다. 먼 길을 돌아 왔으나 시인은 결국 스스로가 걸어온 길이 자신이 바라던 삶의 길과 통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부적처럼” 꼭 쥔 손이 있어서 더디지만 더욱 의미 있는 길이다.

예술에 대한 허기는 작곡가 윤용하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고, 시인에게 시를 불사르게도 한다. 시인은 그 허기를 “거룩한 허기”라 명명했다. 자신의 시를 앞에 두고 또다시 시인은 결연해진다.

자신의 시를 불태우는 결연함 끝에 시인이 마주친 것은 사랑처럼 견딜 수 없는 허기, 허기처럼 견딜 수 없는 사랑이다. 시인에게 시를 쓰게 하는 거룩한 허기이다.

한밤을 새우고 술 마시러 가는 이여

한밤을 꼬박 앓고 술 마시러 가면서

현관에 흩어진 크고 작은 신발들

가지런히 모아두는 이여




이제 곧 사랑이 찾아오리라

세상에 나와

마음껏 울음 한번 울어보지 못한 자의

크나큰 울음과도 같이

그 울음 뒤의 못 견디는

못 견디는

허기와도 같이

                     「국화꽃 졌으니 」끝부분

개인적인 아픔 때문에 시를 쓸 수 없던 몇 년 동안 시인의 가슴 속에서 자라난 시가 농익은 과일처럼 터져 나왔다. 시인을 허기지게 했던 시는 이제 우리를 허기지게 한다. 고독과 슬픔, 그 너머에 있는 아름다움과 진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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