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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랑의 미래
이아타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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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이제 ‘매트릭스’ 같은 영화 속 현실이 아니다. 2016년 알파고는 딥러닝 방식을 대중화했다. 2017년 구글 트랜스포머의 등장을 거쳐, 2022년 드디어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렸다. 소설 ‘가난한 사랑의 미래’는 20년 뒤, 가까운 미래에 인류에게 닥친 위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에 밀려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방황한다. 이들의 가난하고 남루한 삶 속에서도 과연 사랑은 가능할까. 가난한 사랑의 미래는 어떤 얼굴을 지니고 있을까. 


소설 ‘가난한 사랑의 미래’와 저자 이아타


최고의 인공지능 비욘드의 탄생을 알리며 소설은 시작한다. ‘나(정오감)’는 이런저런 일자리를 전전하며 힘겹게 살아간다. 뉴스에서는 세계적 가수이자 플랫폼 스타인 스카이가 969번째 비욘드를 인수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온다. 현실 세계에서 마주칠 일이 없는 두 사람은 운명처럼 조우한다. 생활반경도 동선도 다른 그들이 만난 일은 ‘불규칙 바운드’에 속한다. 인공지능의 예측도 여전히 우연이란 변수를 가늠할 길은 없었다. 


2023년의 세계는 암울하다. 휴머노이드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많은 사람이 가상현실 네트워크에서 시간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좀처럼 그런 일에 적응할 수 없는 오감과 같은 사람들은 비먼(비포 휴먼)이라 불린다. 불행한 사건으로 부모와 언니를 잃은 오감에게 생은 허망하고 무의미하다. 사회는 자살을 불법이자 범죄로 규정한지 오래다. 촘촘한 시스템의 감시를 뚫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오감은 사고사를 위장한 자살을 꿈꾼다. 오감은 죽음을 철저하게 계획하고 연출하려 애쓴다. 홀로 남을 조카에게 불이익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생이란 한 치 앞도 예감할 수 없다. 오감은 할머니의 고향인 아진도로 걸음을 옮긴다. 해안가 절벽에서 죽음의 춤을 추며 발을 헛디딘 척, 바다로 뛰어내린다. 그때 오감의 추락을 발견한 휴머노이드가 물에 뛰어들어 오감을 구한다. 하필 스카이가 경호 휴머노이드 비토를 데리고 섬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오감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오감은 스카이와 마주한다. 


섬에서의 인연을 계기로 오감은 스카이의 일을 도와주게 된다. 아진도를 사들여 편안하게 쉴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스카이의 오랜 바람이다. 과학 기술의 때가 묻지 않은 아진도는 인공지능의 간섭에서 벗어나 오롯이 홀로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할머니의 친구인 애심 할머니에게서 섬에 남은 마지막 부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하는 것이 오감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한편 정체불명의 단체 아함에 속한 김이채가 접근하며 오감은 혼란에 빠진다. 김이채는 인간의 몸에 인공지능을 가진 ‘트랜스 휴먼’이다. 김이채는 죽은 언니가 아함의 멤버였음을 알리고 오감에게 합류를 요구한다. 휴머노이드들이 일으킨 파업이 거대한 혼란의 서막을 열며 소설은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소설 ‘가난한 사랑의 미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로서의 미래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전작 ‘베이츠’를 닮았다. 소설은 독자에게 묵직한 철학적 문제를 제시한다. 소설에서 인간과 ‘포스트 휴먼’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인간과 그들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에 대한 사회의 고민은 부재한다.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미덕뿐 아니라 잔인함과 공격성마저 공유한다. 


휴머노이드는 인간처럼 감정을 느낄 뿐 아니라 각자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 각자에게 개성을 부여한 주체는 인간이지만, 예상치 못한 여러 과정을 통해 그런 개성은 변화되거나 강화된다. 휴머노이드는 점차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어 간다. 그들의 면면은 인간과 흡사하다. 신경증을 앓는 휴머노이드가 등장하는가 하면 체제 전복을 꿈꾸는 휴머노이드가 탄생한다. 


대다수 휴머노이드는 적게 일하는 걸 원했다. 일상을 누리고 친구를 만나고 산책하고 운동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답게 사는 것을 원했다. 

                                                                     -본문 84쪽


소설에서 휴머노이드와 인간은 서로 끈끈한 우정을 나누고 깊이 공감한다. 오감의 조카 은비는 휴머노이드 ‘이아고’와 어울리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한편으로 인간과 휴머노이드는 서로 의심하고 반목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저자는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차이에 관한 질문을 통해 인간성의 진정한 의미에 관해 묻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인간과 같은 물리적 형체를 갖추지 못한 최고의 인공지능 비욘드가 ‘진정한 육체의 행복’을 느끼려는 것이다. 비욘드가 ‘우리는 모두가 신’이며 ‘육체 없는 저 역시도’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했던 사실과는 이율배반적이다.


“행복이 뭔지 넌 알아? 난 수많은 육체를 딥러닝하고 시뮬레이션했지만, 진정한 육체의 행복을 느껴보고 싶었어. 내 삶의 유일한 아쉬움이지.” -본문 247쪽


‘감각과 감정은 자연과 가장 가깝’고 ‘인간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또 사랑을 갈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인공(人工)의 산물이 원하는 것은 감각과 감정을 통해 삶을 향유하는 즐거움이었다. 주인공의 이름 오감은 풍부한 감정으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붙여준 것이다. 주인공이 오감(五感)을 통해 자연을 느끼며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는다는 점에서 그의 이름은 중의적이다. 


휴머노이드가 일으킨 혁명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날로그’의 소산이다. 자율주행차량이 주행하지 않을 때, 오감이 모는 할리데이비슨은 멈추지 않는다. 유선 전화기는 유일한 소통 수단이 된다. ‘쓸모없는 게 쓸모있는’ 상황이며 과거의 소산이 테크놀로지를 역전하는 순간이다. 


소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역시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역설하는 러브스토리이기도 하다. 여러 사건을 겪으며 죽음을 바라던 오감은 삶을 택하기로 마음이 기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결이 있는 한 인생은 충분히 살아갈 가치가 있다. 저자가 말하는 ‘가난’은 경제적 궁핍과 더불어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다. 과거, 역사, 자연, 타인과의 연결을 끌어안지 못한 삶은 결코 부유할 수 없다.


‘죽음의 극장에서 죽음을 꿈꾸는 휴머노이드를 목격한 후 나는 더는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죽음이란 삶의 그림자여서 꿈꾸지 않아도 늘 가까이 있었다. 오래도록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겪은 내가 자살을 꿈꾼 것은 내 그림자를 내가 자르는 행위와 다름없었다.’ -본문 212쪽


스카이는 ‘나’의 추억이 깃든 아진도의 옛 흙집을 그대로 두기로 함으로써 ‘자연과 과거를 끌어안은 미래를 선택’한다. 그런 행위를 통해 그들의 미래는 빈곤하고 공허하게 남지 않게 된다. 소설은 또 한 명의 스카이를 등장시키면서 동일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끔 한다. 유전공학으로 태어난 ‘스카이2’는 그의 아바타이자 희생양이었다. 스카이와 은비는 다른 인간에 의해 유전정보가 복제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신체와 심리 상태가 같은 두 존재를 구분하기 위해 필요한 논리는 무엇일까. 


‘가난한 사랑의 미래’는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에 가볍지 않은 철학적 사유를 녹여냈다. 과학 기술이 진보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가난해진다. 촘촘한 시스템은 인류를 감시하고 인간에게는 죽음의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네트워크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며 인간과 인간의 연결은 인공지능조차 예측할 수 없다. 인생은 불확실성을 통해 더 역동적이고 가치 있는 무언가가 된다. 그리고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이 있는 한, 사랑의 미래는 가난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 이아타는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해서 소설가로 활동 중이다. 심훈문학상, 현진건문학상 우수상, 신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작품집으로 ‘사월에 내리는 눈’, ‘월요일의 게이트볼’이 있고 브런치북에 ‘청바지와 사랑’을 게재했다. ‘가난한 사랑의 미래’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신진 스토리 작가 공모전에 당선되어 세상에 나온 ‘베이츠’에 이어 저자가 쓴 두 번째 SF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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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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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당신이 백여 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면? 당신은 과연 무사히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안락한 현대문물의 수혜를 누릴 수 없는 시공간으로 이동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매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한다. 당신의 허벅지를 파고들 날카로운 개의 이빨을 막아내야 하고 추적자의 시선을 따돌려야 한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목표는 하나다. 당신이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온(time slip) 이유를 깨닫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 당신에게는 마음 내키는 대로 현재로 돌아올 초능력도, 타임머신도 없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 킨kin은 영어 kindred(일가친척)의 약자로 복잡한 혈연으로 묶인 ‘나’의 숙명을 상징한다. 또 kin은 화자의 가계도를 넘어서, 인류 모두가 여러 방식으로 엮인 공동체를 뜻하기도 한다. 그 공동체는 피부색과 성별, 계급, 민족을 초월한다. kin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복잡다단한 정치 행위가 펼쳐지는 장인 동시에,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 다나는 1976년을 살아가는 흑인 여성이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여성으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다.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는 계층으로서 매순간 자신의 타자성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1815년의 시공으로 끌려 들어간 다나에게 지금까지의 고민은 사치에 가깝다. 채찍질과 강간, 살해당할 위험이 그녀를 위협한다.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야만 앞에서 인간은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현대사회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나는 “노예란 길고 느린 둔화 과정”임을 깨닫는다. 소설은 노예제가 흑인들의 의식과 일상에 파고 들어가 내면화되고 공고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도와 구조가 된 폭력은 인간의 몸뿐 아니라 마음도 예속한다.

작가는 섬세한 시선으로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간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는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나를 핍박하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모든 인간관계에는 필연적으로 다양하고 복잡미묘한 감정이 공존한다. 게다가 지배자들에게도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피지배자의 입장에 동조하는 지배자 역시 찾아볼 수 있다. 식민지 시대, 전쟁 기간 동안 피아간에 싹튼 사랑때문에 사람들은 마음의 갈등을 겪곤 했다.

노예주 루퍼스와 노예 나이절이 주고받는 감정은 우정과 신뢰다. 루퍼스가 노예 앨리스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에 가깝다. 비록 굴절되고 비틀린 형태이긴 하지만 말이다.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느끼는 감정 역시 증오만은 아니어서 존경심과 연민, 우정이 개입한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루퍼스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업신여기면서도 무서워했다....(중략)...그러나 생각해보면 어떤 종류의 예속이든 이상한 관계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이상한 관계란 애증과 그에 따르는 자괴감, 수치심으로 구성된다. 때로 스톡홀름 신드롬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런 감정에 당황하며 죄책감을 느낀다. 자신을 착취하는 대상에게 느끼는 사랑이란 자기모순과 더불어 동족에 대한 배신을 뜻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같은 흑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질투와 반목 역시 세밀하게 보여준다. 앨리스는 같은 노예들에게 미움받는다. 백인 노예주에게 잘 보여 편안하게 생활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앨리스는 루퍼스에게 계속 강간당하는 상태이며, 노예들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나는 글을 읽고 쓸 수 있으며 ‘백인’처럼 말한다는 이유로 “하얀 검둥이” 취급을 받는다. 그런가하면 뼛속까지 노예제도에 동화되어 백인 편에 선 흑인도 있다.

작가는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백인이 존재할 수 없듯이, 단일하고 동질적인 흑인 역시 없다고 말한다. 자유민 흑인은 비록 제한된 자유를 누릴지라도 노예와는 다른 지위를 지닌다. 끝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노예가 있는가 하면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는 노예도 있다. 밭에서 일하는 노예는 집안일을 하는 흑인을 부러워한다. 여성 노예는 남성 노예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다. 노예주에게 성노예로 이용되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나간다.

당대의 상식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야만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떤 이도 그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과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루퍼스의 아버지 와일린은 좋은 인품을 지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딱히 나쁜 인물이랄 수도 없다. ‘평범한’ 노예주는 ‘평범한’ 악을 수행한다. 처음 이 시대로 끌려왔을 때, 다나는 타자를 대하듯 동족을 바라본다. 노예 해방과 흑인 인권 운동이 가져온 변화라는 간극이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다나는 차츰 자신의 조상 격인 그들 흑인에 대해 마음 깊이 이해하고 존경하게 된다. 그들은 얼핏 무력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깊은 인내심과 삶에 대한 의지로 야만의 시대를 버텨왔다. 거대한 폭력과 예속 상태에서 ‘살아남기’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위대하고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닫는다.
이처럼 우리와 다른 시대와 문화권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작가는 우리의 잣대로 다른 이들의 삶을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가에 관해 묻는다.

〈킨〉에 등장하는 폭력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소설처럼 인종 차별의 형태로 드러나거나, 제국주의 혹은 파시즘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젠더, 계급, 민족 등 ‘다름’을 차별로 연결하는 모든 영역에 폭력은 만연한다. 작가는 인간성의 회복과 연대만이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다나의 시간여행에 우연한 동행자가 된 남편 케빈은 비록 백인이지만 흑인의 편에 선다. 케빈은 흑인인 다나와 결혼할 정도로 그녀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공감과 연민은 연대의 시작이다. “어머니는 당신과 이야기를 할 때 눈을 감고 있으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흑인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고 하시지” 루퍼스의 말에서 드러나듯 노예주 역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노예들이 자신과 동등한 인간임을 알고 있다. 약자들과의 연대는 바로 당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kin이란 모든 사람이 얼기설기 엮인 공동체이비 때문이다. 영원한 승자도 약자도 없다. 다음 차례에 허벅지에 날카로운 개의 이빨이 박힐 사람은 당신일지도 모른다.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는 보기 드문 흑인 여성 SF작가이다. <킨>의 화자 다나는 작가의 분신이다. 버틀러 역시 다나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작가가 되기를 바라던 소녀였다. 네블러상과 휴고상을 여러 번 수상했으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작가이다. “80세가 되어서도 계속 글을 쓰기를 꿈꾸는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버틀러는 안타깝게도 58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아프리카 문화와 선진기술을 융합하는 예술 사조인 아프로퓨쳐리즘(afro futurism)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최초의 흑인 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 역시 버틀러에게 빚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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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생
김운하 지음 / 필로소픽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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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나는 어떤 만성 질환을 진단받았다. 대부분의 만성 질환이 그렇듯이 병이 완치될 가능성은 없었다. 치료는 단지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을 뿐이었다. 남은 생애 내내 성가신 추적 검사와 그에 동반한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내 병세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병에 걸릴 가능성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되었으나 그 징후가 발병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1~2%에 불과했다. 노인성 질환으로 흔히 알려진 그 병에 걸리기에는 나는 아직 젊었다. 하루아침에 나는 몹시 불운한 사람이 되었다. 왜 하필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 걸까. 불행과 맞닥뜨린 모든 사람이 그러듯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릴없이 그런 질문을 내게 던졌다. 상심은 곧 깊은 우울증으로 이어졌다. 주변의 어떤 위로나 조언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수면 유도제를 처방받기 위해 가끔 방문하던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했다. 항우울제 처방을 부탁하는 나에게 의사는 몇 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병이 내게 찾아온 이유에는 분명 어떤 뜻이 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에는 어떤 섭리가 개입돼 있으며,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통해 새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 삶을 대하던 태도에서 오만하고 불성실한 면이 있었는지 돌아보십시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병에 걸린 일이 잘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병원을 나섰다. 내가 걸린 병은 현대의학으로도 그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식생활, 흡연, 음주 여부와 같은 생활 습관과의 상관관계 역시 밝혀진 바가 없다. 유전적 소인과 더불어 타고난 몇 가지의 신체적 특성과 관련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 중에는 이 병에 걸린 사람이 없다. 아마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조상 누군가에게서 온 특정 유전자가 내 몸에서 병을 예비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은 우연이지만, 그 유전자로 인해 내가 언젠가 병에 걸릴 것이라는 사실은 필연이었다.
내가 병에 걸린 이유에는 신의 섭리 혹은 형벌이 개입하지 않았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처럼 우연과 필연이 결합해서 일어난 일일 뿐이다. 게다가 나는 딱히 운이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일찌감치 병을 발견한 것은 오히려 행운에 가까웠다. 날마다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 죽어간다. 그들의 죽음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저 이 모든 일이 우연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뜻일 테다. 태풍이나 가뭄, 홍수와 해일, 빙하기처럼 자연 질서에 속한 일이다. 얼마 전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일어난 지진과 그에 따른 비극 역시 전 지구적 규모의 자연 현상이라는 관점에서는 우연일 뿐이다. 비탄과 슬픔, 인간이 흘리는 피와 눈물은 자연과 우주, 시간 앞에서 흔적도 없이 용해되어 버린다.

말본새 나쁜 그 의사가 말한 대로 질병은 내 삶을 반추하고 여생을 새롭게 계획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사건에 부여한 의미이며, 질병의 배후에는 어떤 뜻도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병을 진단받은 뒤, 나는 일종의 결정론적 사고에 빠져있었다. 이 모든 일이 애초에 정해진 내 운명이 아닐까. 알게 모르게 저지른 나의 그릇된 행동이 병을 부른 게 아닐까 하는 마술적 사고가 나를 잠식했다. 나는 서서히 이런 불합리한 생각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갔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내 병은 거의 악화하지 않았다. 병에 걸렸다는 면에서 나는 운 나쁜 사람이었으나, 병에 걸린 뒤에 나는 운 좋은 환자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훨씬 더 심각한 병을 진단받은 내 지인에게는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에게 닥친 불행을 떠올릴 때면 나는 생의 아이러니와 부조리에 전율하고 또 슬퍼한다.

소설가이자 인문학자인 김운하는 한 작품 안에서 소설, 아포리즘, 문화비평, 수필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전작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작가의 경험과 허구가 결합한 소설이다. 뚜렷한 플롯과 서사 구조가 없는 이 소설은 때로 에세이와 문화비평의 양식을 빌어 파편적인 이야기를 펼친다. 제주의 깊은 밤과 풍광을 배경으로 한 각각의 에피소드는 은둔과 그를 통한 자기 대면이라는 주제로 통합된다. 후술하겠지만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의 문학 형식은 글쓰기의 본질에 관한 그의 고민과 철학에서 비롯한다.
작가의 신작 『우연의 생』에서 김운하 작가는 우연과 인간의 운명, 예술, 사랑의 함수관계를 다룬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에세이, 문화비평, 아포리즘, 혹은 소설로도 읽힐 수 있겠다. “존재의 우연성, 벼락처럼, 섬광처럼 폐부를 찌르는 단어”에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이유는 어쩌면 작가가 경험한 비극적 사건에서 연유할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화가를 꿈꾸던 소년은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처지에 놓인다. 성경에 나오는 욥처럼 작가는 신에게 인간의 운명에 관해 질문하며 비탄에 몸부림친다. 그러나 비극적 죽음 역시 우연에 불과하다. 상실에 대한 애도만이 인간의 몫으로 주어질 뿐이다.
우연한 사건은 또 다른 우연으로 이어진다. 어느 날 작가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본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작가가 속해 있던 세계였다. 붉은 석양을 등지고 환히 웃던 아이들의 모습. 훗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찬 엘리베이터를 마주한 순간처럼 작가의 운명을 뒤바꾼 장면이었다. 그 순간은 선형적이고 양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벗어나, 대체 불가능한 사건으로 이루어진 '카이로스'의 시간에 속해 있었다. 물론 그때의 작가는 그 사실을 알수 없었을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미지로 고착된다는 점에서 공간성을 획득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 년이 흐른 뒤 작가는 대학의 정문을 장식한 조형물 앞에 선다. 화가를 꿈꾸던 소년의 앞길에 또 다른 여러 우연이 겹친다. 80년대의 질곡 속에서 작가 역시 시대의 아픔에 휩쓸린다. “거의 스무 살이 되도록, 내가 삶과 세계 나 자신에 관해 백지 상태나 다름없이 무지했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던 작가는 십여 년이 흐른 후,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지식과 앎으로 스스로 얼마나 교조적인 확신에 빠져있었던가”를 부끄러워하는 회의주의자로 거듭난다. 소년은 빛과 그림자, 순수한 색채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에서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다. 한 때, 사람들이 선망하던 “검은 양복을 입은 권력의 세계”에 속했던 일을 작가는 “실패와 어리석음”으로 규정한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로 들어찬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날, 작가는 "영혼의 낙마사고"를 겪는다. 평소와 다름없던 어느 오후였다. 작가는 그날 이후, 일터를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선과 색, 조형 대신 언어라는 표상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를 선택한 작가는 인문학자이자 소설가로 독자 앞에 선다. 입지전적 이야기, 능력주의의 좋은 예로 소비될 법도 한 인생 역정을 작가는 ‘우연의 생’으로 규정한다. 그의 인생에 따른 “노력과 운의 기적 같은 결합” 역시 근본적으로는 우연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삶의 추는 능동과 수동의 양극 사이에서 진동하지만 삶은 근본적으로는 훨씬 더 수동태적인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노력해 역경에서 벗어난 이들이 빠지기 쉬운 오만인 '히브리스'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형벌을 부른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손에 넣은 성취 역시 종국적으로는 우연임을 인정하는 겸양만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한다.

사랑에 빠지기, 글쓰기, 책 읽기 역시 우연이 빚어내는 마술이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고 대중가요는 노래하고 연인들은 이에 동조한다. 연인들을 사랑에 빠지게 한 신비하고 불가해한 과정을 설명하는 단어는 운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다른 일처럼 사랑 역시 몇 번의 우연이 중첩되어 발생한 사건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와 토마시가 만나기 위해서는 여섯 번의 우연이 필요했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테레사가 살던 도시에 급한 환자가 발생하고, 마침 그곳의 의사가 몸이 아파 진료할 수 없게 된다. 그를 대신해 불려온 토마시는 하필 테레사가 일하는 호텔에 묵는다.
토마시가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을 때, 마침 흘러나온 베토벤 음악은 ‘고상하고 교양있는 세계를 동경하던’ 테레사에게는 계시처럼 들렸다. “우리는 때로 기적 같은 우연의 일치를 맞닥뜨”리고 “그런 사건을 필연이나 운명의 징후로 읽곤” 한다. 이런 설정은 얼핏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기 때문에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허구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중첩된 우연은 현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내가 그때 이러이러한 일만 하지 않았어도, 그 장소만 찾지 않았어도....” 우연이 저지른 장난에 대해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흔히 늘어놓는 원망이 아닌가. 카프카와 펠리체 바우어의 만남은 또 어떤가. 카프카가 블라우엔 슈테른 호텔에 찾아갔을 때, 마침 펠리체 바우어가 묵지 않았다면 문학사에 길이 남을 편지는 남지 않았을 것이며 카프카의 문학 세계는 깊이를 잃었을 것이다.
우연이 빚어내는 예측할 수 없고 불가해한 사건들 앞에서 때로 우리는 무력해지며, 삶은 무의미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필연적 연쇄”로 이어진 세계라면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결정론적 세계관, 기독교 신학은 세상에 일어나는 현상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때로는 신의 섭리를 통해, 때로는 이성과 진보, 과학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우연은 인간 지성의 한계를 표현하는 단어”란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아인슈타인 같은 물리학자는 양자역학의 성립에 공헌하면서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런 비결정성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이미 “물리계에도 우연이 개입하여 작동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확률적 인과율이 고전역학의 엄격한 결정론을 대체”함을 밝혔다.

작가는 세 장에 걸쳐 클리나멘이 지닌 신비에 관해 이야기한다. 기계적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클리나멘의 힘은 혁명적이다. 고대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설명한 것처럼 클리나멘은 ‘기울어 벗겨감 혹은 벗어남’을 뜻한다. 이 개념은 현대에 들어 다양한 분야에서 재해석되고 적용된다. 루이 알뛰세르는 클리나멘을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이라 불렀다. 김운하는 클리나멘을 “주어진 운명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힘”으로 규정한다. 과학자와 철학자만이 클리나멘이 적용되는 장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영향의 불안』에서 작가들이 선배 작가들로부터 받는 영향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김운하는 그가 겪은 클리나멘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11월의 어느 날, 탈출하듯 도시를 빠져나온 작가는 ‘청주’라는 이정표에 이끌린다. 클리나멘이 가져온 ‘낯설게 보기’와 매료, 설렘과 흥분은 방황하던 작가에게 선물과도 같았다. 그때의 경험을 담은 작품은 아직 원고 상태로 남아있지만. 작가는 그 또한 인생의 아이러니라 여긴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만난 클리나멘 역시 계획 없이 떠난 여행에서 마주쳤다. 공연장에서 연주를 반복하던 글렌 굴드는 공적인 삶에 지쳐버린다. 무작정 기차에 오른 그는 캐나다를 횡단하는 길고 고독한 여행길에 오른다. “고독으로의 클리나멘 운동.” 우연한 궤도 이탈이 가져온 우연, 곧 클리나멘은 글렌 굴드의 음악을 판이하게 바꿔놓는다. “오랜 고독과 성찰이 빚어낸 섬세하게 정적이면서도 듣는 이의 내면 가장 깊은 곳을 아득히 감싸는 듯한 연주”는 고독과의 대면을 통해 탄생했다.

사랑과 더불어, 우연이란 신비가 가장 많이 개입하는 장은 예술이다. 쓰기, 읽기, 그리기, 춤추기, 연주하기, 어느 하나 우연이 개입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소설 작법을 예로 들어보자.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플롯을 설정한 뒤, 등장인물의 성격을 설정한다.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주제에 맞게끔 유기적으로 배치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소설가는 없다. 섬광처럼 소설가의 머릿속에 찾아온 모티프가 발아한다. 그 모티프는 때로 누군가의 몸짓일 수도, 신문에서 발견한 어느 기사의 일부일 수도 있다. 어느 순간 소설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서로 결합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떠나보내기도 하며 새로운 유기체로 거듭난다.

글은 이제 작가를 더 깊은 사유로 인도해 작품의 골격을 보완하게 하고, 외피를 매끄럽게 손본다. 모든 예술가는 작품이 자기 손에서 떠나 독립성을 획득하는 것을 망연하게 바라본다. 작가의 신체는 그의 경험과 사유, 회상, 고통이 혼연일체가 되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는 장소다. “나 이전에 사건이, 익명적인 사건들이 선행하고 나는 그것을 인칭적으로 표현할 따름이다. 내 살과 영혼에 새겨진 상처 자체가 스스로를 성찰하도록, 표현하도록 하기.” 김운하는 그의 글쓰기를 “우연의 글쓰기”로 명명한다.
문학 형식의 구분은 일종의 질서화 작업이며 작가의 창의력을 틀에 가둔다. 니체와 파스칼, 몽테뉴, 라 로슈코프, 키르케고르, 에밀 시오랑 역시 체계를 혐오했다. 새로운 형식에 대한 고민은 창작의 일부이기도 하다. 많은 예술가가 새로운 양식에 대해 고민해왔다. 문학평론가 김인환은 『형식의 심연』에서 “글을 쓰는 일은 방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방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미리 설정한 방법을 고수하면 글이 탄력성을 상실”한다고 주장한다.

“철자나 단어를 해체하고 재배열하고 다시 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담은 단어를 창조하는” 애너그램이 그렇다. 특별한 줄거리가 없고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의식의 흐름’ 기법 역시 문학 형식에 대한 거부에서 탄생했다.
김운하는 모국어를 버리고 낯선 언어로 글쓰기를 택한 사무엘 베케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조지프 콘래드 같은 작가들을 “언어의 망명자”로 명명한다. “언어, 글쓰기의 클리나멘은 모국어로부터 이탈하는 방향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는 단어들, 문단들, 각 장들이 스스로 고정된 틀에서 미끄러져 나와 자유롭게 마주치고, 충돌하면서 그 틈바구니, 여백에서 자유로운 의미가 탄생하길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쓰기는 몽테뉴적인 하나의 시도Les essais이자 비틀거리며 방황하며 나아가는 탐구일 뿐이다. 나 자신의 삶 자체가 그러하듯이.”

김운하 작가는 에세이라는 장르가 본래 형식에서 벗어난 하나의 시도라는 점에 주목한다. 우연이 작용하는 장에서 “비틀거리며 방황하며 나아가는 탐구”라는 면에서 작가의 작품은 그의 삶을 닮았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글은 “자신의 생과 경험을 발판 삼고, 책들을 길잡이 삼고, 사유를 등불 삼아,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탐구하려는 끊임없는 시도”이다.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 역시 우연과 클리나멘이 개입한다. 감상이란 단지 수동적 행위가 아닐뿐더러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 행위이다. 독자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뿐 아니라 감상을 통해 작품이 지닌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독자의 내면세계는 감상을 통해 새롭고 충격적인 인식에 도달하기도 한다. 감상 역시 일종의 창조행위에 속한다.

철학에 대해 직접 설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작가들은 플롯과 은유, 서사를 통해 그 작업을 수행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철학은 현학이란 누명을 벗고 작품 속에 녹아든다. 《우연의 생》을 통해 김운하가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 역시 철저히 문학의 화법을 따른다. 문장부호와 문장 간의 호흡, 문장을 배열하는 방식마저 작가의 심상을 드러낸다. 우연이란 주제 아래 유기적으로 엮인 45장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어떤 장은 길고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목련” 같은 장처럼 시어로 구성된 짧은 장도 있다. 리듬과 고저, 장단이 작품을 관통하며 음악적 흐름을 부여한다.

첫 장에서 작가는 “운명이란 밀실”에서 길어올린 “본질적 장면”을 길어 올리며 시간의 경첩을 연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신화, 예술가의 삶, 철학의 역사에서 퍼 올린 우연과 운명,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양자 역학과 진화 생물학 등 현대과학이 발견한 우연의 힘은 그의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고대의 자연철학 용어인 클리나멘이 현대에 들어와 어떻게 적용되는지, 미세한 변화가 가져온 무질서, 엔트로피가 어떤 전복적 힘을 지녔는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오해와 착각”에서 비롯된 인간종의 히브리스가 집단적으로 발현될 때, 가져올 전지구적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우연과 노력의 기적 같은 결합이라며 작가는 자신이 빠져나온 절망에 관해 설명한다.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결국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한다. 운 좋은 몇몇은 자신이 역경을 딛고 일어선 과정을 신화화하며, 오만한 인생론을 펼쳐 놓기도 한다. 물론 행운 역시 준비된 이들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오늘날 ‘준비된 우연 혹은 행운’을 의미하는” 단어 ‘세렌디피티’ 역시 ‘세렌디퍼’의 꾸준한 노력과 결합해 일어난다. 엑스레이나 페니실린의 발견 역시 세렌디피티에 해당한다. 김운하 작가는 “우리의 노력이 반드시 세렌디피티로 보상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 역시 이야기한다. 숱한 자기개발서의 달콤한 이야기와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 선 작가는 두 번이나 세렌디피티와 마주한 경험이 있다. “인생을 순전한 운과 우연에만 기대어 살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은 인간의 주체성과 노력이 지닌 힘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작가는 “그 숱한 우연의 축복 혹은 재앙들, 우연과 더불어 아름답게 춤추고 싶었으나, 너무 자주 과잉된 격렬함 속에서 중심을 잃거나 혹은 잘못된 스텝을 밟으며 놓쳐버린 손길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작가는 생의 의미에 짓눌리지 않는다. “이제 생의 의미 따위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생각한다.

"우연의 새들, 저 우연의 새들이 다가와 자신의 어깨 위에 내려앉을 때마다, 자신 속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자아들이 깨어나고, 원자들의 우연한 클리나멘이 새로운 원자의 결합을 낳고 그것이 더 큰 새로운 무언가로 변형되듯 매번 자신의 자아가 변형되고 새로운 삶이 열린다....(중략).....생은 우연을 넘어서는 것이다. 아니, 우연의 새들의 지저귐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

“세계는 우연과 필연의 기묘하고 역동적인 그것이 씨줄과 날줄로 꼬이고 짜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아름다운 문양의 태피스트리”라면, 김운하의 《우연의 생》은 깊은 사유와 아름답고 시적인 문장을 씨줄과 날줄로 정교하게 짜낸 태피스트리라 부를 만하다. 김운하가 만든 태피스트리는 비단결처럼 매끈하지만은 않아 크고 작은 매듭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우리를 매듭 같은 문장 앞에 머물러 오래도록 사유하게 한다. 사고의 확장을 유도해 감상이라는 창조행위에 동참하게 한다.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고 사랑을, 절대적으로 사랑만을 요구하는 고유한 존재들이 있다. 생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생의 한가운데 있다. 지나간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추억하듯, 지금 이 순간을, 다가오는 매 순간들을 맞이할 날들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를 망각하지 않는 지혜에 대한 소망이 있다. 생 자체가 매혹적인, 유일무이한 한 편의 시가 되길 소망하는 연약한 존재들이 있다."

김운하 작가는 소설가로 인문학자로 종횡무진해 왔으며 최근에는 오이코스 인문연구소 활동으로 더 바빠졌다. 작가가 천착해온 주제들은 《우연의 생》에서 더욱 심화하여 미학적 완결성을 획득한다. 작가가 다음 작품에서 보여줄 아름답고 신비한 태피스트리를 기대해본다. 태피스트리에 숨어있는 매듭에 우연히 걸려 넘어져 사유의 강물에 몸을 맡기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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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시작시인선 373
조동범 지음 / 천년의시작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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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범 시인의 시집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에서 화자들은 죽어가거나, 이미 죽었거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모든 죽음이 그렇겠지만 그들의 최후는 지극히 외롭고 고독하며 유폐되어 있다. 그들은 먼 우주 공간에 홀로 놓인 우주비행사(<휴스턴>)이며 서늘한 시체공시소에 누운 신원 미상의 시신(<제인 도>)이다. 혹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꼬리를 뒤튼 채, 암석 속에 굳어버린, 오래 전에 사라진 생물(<종의 애도>)이기도 하다.
그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 떠올리는 편린은 "투명하게 담긴 올리브와 햇살이 쏟아지던 체크무늬 커튼"(<휴스턴>)이거나 "냉장고에 두고 온 두부조림"(<입동>)처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러다가도 그들은 문득 "기쁨과 슬픔, 원망과 분노의 문양들을 호명"하는 일들의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현생의 모든 선과 악"이란 살아있는 자들의 도덕이자 당위이며 망자에게 주어진 책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죽어갈 때, 그들이 속한 세계 역시 막을 내려 "모든 애도의 방식은 사라지고"(<종의 애도>), "오래 전의 황폐한 서사는 믿을 수 없는 폐허"가 된다. 죽음이란 거대한 허무는 살아있을 때 천착하던 모든 의미를 쓰나미처럼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앞에 주어진 무채색 세계가 완전한 공허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조동범 시의 세계에서 시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순환한다. 시작과 종말이 있는 시간은 종말을 목표로 진행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존재는 파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조동범의 시 세계는 선형적線形的 시간의 흐름을 거부한다. 이는 수평선, 해안선, 국경선과 같은 시어들을 통해 표상된다.
선線들은 날카로운 끄트머리이자 경계이다. 그러나 시인의 세계에서 선이란 뫼비우스 띠지의 접합선처럼 회귀가 시작되는 지점이며 새로운 융합과 생성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선들은 국경선처럼 때로는 인위적이고 선언적인 경계여서 화자는 그 앞에서 "국가와 민족과 역사의 부질없음을 문득 중얼거"(<John Doe>)린다.
우리가 인식의 한계 때문에 수평선과 지평선 너머 일어나는 일들을 볼 수 없을 때에도 거기서는 첨예한 대립과 소멸, 생성이 일어난다. 일몰과 일출, 삶과 죽음, 종의 출현과 멸망...
시인은 촘촘한 언어의 그물로 무한한 선의 순환 속에서 스러져가는 존재들을 건져낸다. 그들은 "침몰한 전함이나 보물선,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과 전설"(<호라이즌>)이며 "국경 인근의 저수지에서 발견된 익사체에서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영웅담이 아"닌 이야기이다. 누군가 찢어버린 성경의 외전처럼 떠도는 잊혀질 이야기들은 시인의 펜끝을 통해 잠시 생명을 얻는다.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우리 없이 무심한 미래는 우리가 딛고 선 지금에 맞닿아 있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지극한 허무를 마주하고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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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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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들여다본 노년의 초상
-필립 로스 《에브리맨》

재와 다이아몬드

노년과 질병, 그에 따른 최종 부산물인 죽음을 다루는 필립 로스의 문장은 시종일관 담담하고 건조하다. 그의 펜촉은 메스처럼 예리하게 죽음을 앞둔 인간의 먹먹한 심리를 해부한다. 작가는 노년기에 막 접어든 시기에 이 소설을 썼는데, 서늘하게 벼려진 문장을 통해 노년이란 환부를 베고 가른다.
소설의 제목인 에브리맨은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을 뜻한다. 세월의 흐름과 노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고 단지 ‘그’로 불린다.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나서 잠시 이 땅에 머무르다 스러져가는 우리 모두 같은 처지가 아닌가.
소설 속 인물들은 받아들이라는 말을 하릴없이 되뇐다. 받아들이기란 이 소설을 관통하는 깊은 울림이며,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겪는 많은 문제에 대처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수술을 앞둔 그를 걱정하는 딸 낸시에게 그가 건네던 이 말은 이번에는 낸시가 장례식장에서 고인을 위로하는 말이 된다. 받아들이라는 말은 가혹하고도 유용한 삶의 해법으로 부모의 이혼으로 힘들어하던 낸시에게 아버지가 건네준 삶의 처방전이다. 낸시는 그 말을 통해 부모의 이혼과 그녀 자신의 이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극복한다. 불굴의 의지로 삶을 개척해온 소설 속 인물들-그의 아버지, 언론인 제럴드 크레이머, 그의 상사였던 클레런스-역시 죽음이라는 운명만은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에브리맨은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보석상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가 판매하던 다이아몬드는 유한성에 예속된 인간과는 달리 이 땅에 영원히 남아있을 운명이다.

“불멸의 흙 한 조각, 죽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인간이 그걸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다니!”

기이하고 부조리하다. 불멸이란 축복은 울고 웃고 사랑하며 이 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에게가 아니라 무심하고 아름다운 돌덩이에 주어졌다. 세 번째 부인과의 사랑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덧없이 사라졌지만, 그녀의 목에 걸어준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반짝인다. 그가 한 줌의 재로 돌아간 뒤 남은 어둠 속에서도.

육신을 위한 향연

죽음을 앞둔 환자로 전락했으나 한때 그는 잘나가는 뉴요커였다. 그는 태생적 유물론자로 일찌감치 랍비들이 늘어놓는 거짓말에 대해 꿰뚫어 본다. 그에게는 “죽음과 신에 관한 야바위나 천국이라는 낡은 공상”이 통하지 않아 “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인 현실에 발붙이고 살기를 택한다. 그는 선지자가 약속하는 피안의 세계, 이데아와 관념의 늪에서 허우적대기를 거부한다. 그가 믿는 유일신은 감각의 세계에 임하며, 그 세계는 오직 육체로만 숭배할 수 있다. 주어진 세계에 대한 충만한 향유가 그가 믿는 종교의 교리다.
그가 지닌 인생관은 “남성 육체의 삶과 죽음”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문자로 작성한 자서전이 아니라 그가 그린 추상화에 이 제목을 명명하는 행위에서 그가 지닌 감각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는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에 탐닉하며 늘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대상만을 원한다.
아버지가 보석을 감정할 때 쓰던 루페를 통해 들여다보듯 그는 면밀하게 세상을 관찰한다. 보석이 투영하는 맑은 빛은 불멸의 세계에 속하지만, 그의 루페를 통과한 사물과 생명은 끊임없이 소멸하고 생성한다. 그의 루페는 선악善惡이 아닌 미추美醜라는 잣대로 만물을 구분한다.
쾌락을 좇는 그의 본성은 만족스러웠던 두 번째 결혼을 파탄에 이르게 한다. 정치적 공정함과 페미니즘이란 화두가 지배하는 요즘과 달리 그가 전성기를 보낸 80년대는 마초들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성적 일탈과 외도는 여전히 사회적 불명예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 요인이다. 그는 누구나 겪는 중년의 위기에 충동적으로 대응하며 젊은 여성이 지닌 “생물적 특성”에 그의 “생존 본능”을 내어주기 이른다. 그는 자신이 관습적이고 고지식한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 사회적 “생존 본능”은 그가 지닌 더 원초적인 생존 본능인 육욕에 자리를 내어준다.
그의 인생은 죽음-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절대무無의 세계-으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여정이다. 탈장 수술을 받기 위해 처음으로 입원했을 때, 옆 병상 소년이 사망한 사건은 어린 그에게 트라우마로 자리매김한다. 첫 수술을 받은 이후 60년 가까이 그가 누려온 수없이 많은 낮과 밤, 아침 식사와 입맞춤으로 점철된 시간은 죽은 소년의 눈앞에서 굳게 닫힌다. 이처럼 죽음은 한 인간 앞에 놓인 시간과 가능성, 무엇보다도 충만한 감각적 대상을 빼앗는 약탈자다.
그의 삼촌을 죽게 하고 그의 아버지마저 위험에 빠뜨렸던 복막염에서 회복됐을 때, 그는 자신이 죽음 아주 가까이 다가섰다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그가 육체적으로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조차 죽음의 가능성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닌다. 죽음이라는 큰 허무는 늘 파도처럼 우리를 덮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죽은 소년은 그의 무의식 속 평행 세계에 존재한다. 그가 속한 세계는 색채와 냄새, 빛과 그림자로 가득한 곳이지만, 소년은 암흑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1989년 관상동맥이 막혔을 때, 그는 소년과 자신의 상태가 역전되었음을 느낀다. “지금까지 긴 세월 동안 그는 살아 있었고 그 소년은 죽은 상태였다-그런데 이제 그가 그 소년이 된 것이다.”

소외된 육체

그 이후로 십 년 가까이 별 탈 없이 지냈으나 이제 그는 진정한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내리막길의 경사는 점점 급격해진다. 필립 로스는 쇠퇴하고 시든 육체가 겪는 고통과 비애를 섬뜩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국부 마취 때 겪은 공황, 가슴 밖으로 불거진 제세동기, 팔뚝에 남아있는 정맥주사 바늘…….
무엇보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각은 육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육체에서 소외되는 기이한 경험은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신체를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무력감과 고립감, 수치심을 느끼며 점점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어간다.
“신체의 변화가 부끄러웠다. 남자의 힘이 줄어든 것이 부끄러웠다. 그를 비틀어버린 오류들과 그를 기형으로 만든 충격들-스스로 가한 것과 외부에서 온 것 모두-이 부끄러웠다. 밀레선트 크레이머가 겪는 축소의 과정에 무시무시한 웅장함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그것과 비교되어 자신의 황량함이 아주 작아 보이게 만드는 것은 물론 그녀가 겪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중략)…이제 통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장결석으로 응급실을 방문했을 때, 소설 속 인물들이 경험한 이질감을 느꼈다. 왼쪽 등에서 퍼져나간 지독한 통증이 온몸으로 뻗어나갔고 통증에 밀려난 내 영혼은 몸 어느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나 자신이 곧 통증이 된 것 같았다. 마약성 진통제가 혈관으로 들어가자 통증에 잠식되었던 내 몸은 서서히 온전한 내 것으로 돌아왔다.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그는 젊은 여성들에게서 관심을 거두지 못한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은 그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지만 땀에 젖은 젊은 육체와 그 육체가 그리는 곡선은 여전히 자극적이다. 해변에서 만난 여인을 유혹하는 행위로 그는 수컷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려 든다.
“그는 그렇게 말하다가 마치 열다섯 살짜리처럼 바지 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법에 걸린 듯 빠르게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그와 더불어 개체화가 이루어지는 숭고한 단독성이 확립되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예기치 못한 발기는 “죽음과 다름없는 비인격화의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질병에 수반하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성적 흥분 역시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통제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성적 흥분 역시 이질감을 불러일으킬 법하다. 그러나 젊은 시절 분명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을 발기는 “숭고한 단독성”으로 승화한다. 이 활기찬 독립은 생명력과 남성성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의 반응 역시 호의적이지만 그녀는 연락해 오지 않았다. 이로써 “마지막으로 크게 한 방 터뜨려보겠다는 그의 갈망”은 꺾인다.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막바지에 선 사람들이 종종 그렇게 하듯 그는 지금껏 살아온 나날을 되돌아본다.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성장했고, 형 하위와는 돈독한 우애를 나누었다. 아버지의 보석상에서부터 다진 감각으로 자본주의의 꽃 광고업계에서 승승장구했다. 평생 많은 여자가 따르는 매력 있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쇄 남편”이라 씁쓸하게 자칭하듯, 세 번의 결혼생활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과정에서 부인들과 자식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한마디로 그는 명암과 부침, 굴곡이 함께 하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

그가 가진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들인 로니와 랜디에게 그는 비열하고 무책임한 가장이었을 뿐이다. 원한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평가할 능력도 의지도 부족한데, 그 대상이 부모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랜디와 로니는 “그의 가장 깊은 죄책감의 근원”이었다. 딸 낸시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느끼는 것과 달리 그 역시 아들들을 증오한다.
그러나 이제 그는 긴 저녁의 외로움 때문에 “사악한 새끼들, 삐지기만 잘하는 씨발놈들, 할 줄 아는 게 비난밖에 없는 이 조그만 똥 덩어리들”에게 전화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는 나약한 노인이다. 그들의 관계는 길고 구구절절한 애증, 피해자와 가해자가 역전되는 상황, 눈물과 용서, 회한과 한숨이 뒤섞여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가족관계가 거의 그렇다.
평생 흠모하던 하위와의 관계 역시 어긋난다. 하위가 지닌 건강과 생명력을 질투했기 때문이다. 질투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마음의 지옥에 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두 아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격언은 개인사에도 적용된다. 개인이 발 디딘 현재는 이음새 없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구조물로 벽돌 몇 장 빼내어 그 성질을 바꿀 수는 없다. 지나간 세월 역시 앞으로 올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이게 내가 한 짓이야! 나는 일흔하나야. 나는 이런 인간이 된 거야. 이게 내가 여기 오기까지 한 일이고, 더 할 말은 없어!”

화목한 가정의 기반이 되는 행복한 부부 관계 역시 어디까지나 우연의 산물이다. 개인이 타고난 기질, 두 남녀의 상성相性, 주변 환경의 영향이 어우러져 그 관계의 성격을 결정한다. 하위는 그와 달리 50년 가까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한다. 하위가 타고난 건강처럼 운이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삶의 모든 파악할 수 없는 우연을 스스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회한에 젖는다. 과거 그가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 인생의 반을 발광 상태에서 살지 않으려” 내린 이혼이란 선택에 “사면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확신”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결혼을 감행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배우자를 선택한다. 부족한 자기인식 때문일 수도 있고 부주의함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도 대개 그렇게 행동하지만, 그는 운이 나빴다. 첫 번째 결혼생활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는 만족스러웠던 두 번째 결혼생활 역시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중년의 위기와 권태로운 부부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해결책은 외도였다. 그가 교활하고 계산적인 인물이라면 가정이 해체되는 위험은 무릅쓰지 않고 적당히 즐겼을 것이다. 두 번째 부인 피비는 남편의 외도를 눈감아줄 수는 있었으나 그의 거짓말을 용서하기에는 너무나 이상주의적이다.
“당신이 나에게 맡기고 나를 묶어놓으려는 그 역할을 견딜 수가 없어. 남편에게 거부당해 원한을 품고, 썩어빠진 질투심에 시달리는 애처로운 중년의 아내! 격분하고! 비위에 거슬리는 짓이나 하고! 아, 무엇보다도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신이 싫어”
육체적 끌림만이 있었던 세 번째 부인과의 결혼은 어떻게도 변명할 수 없는 실수임이 곧 드러난다.

죽음을 앞둔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들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자신이 이제 단지 신체적으로만 전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의 비극은 그저 운 나쁜 패를 집었기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늘 변명으로 일관하는 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으로 행세했으나, 그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이혼하고 재혼했으며, 본능에 충실하다가 소중하게 일군 가정을 잃는다. 그의 딸 낸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 그녀에게는 늘 다른 사람의 욕구가 우선한다.

그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루페의 렌즈는 왜곡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낸시는 그녀가 지니고 태어난 필터를 통해 사람들이 지닌 결점을 보정해 바라본다. 냉혹한 현실주의자는 따뜻한 이상주의자를 낳았다. 그는 딸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접는다. “낸시가 있는 그대로의 그를 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깨달음은 늘 너무 늦게 찾아오며 인생의 모든 비극이 여기 놓여 있다.

“엄마, 아빠, 하위, 피비, 낸시, 랜디, 로니……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만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내말 안 들려? 다 끝났고, 나는 이제 당신들을 모두 다 떠나고 있어!”
그러나 그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예감한다. 자신이 저지른 모든 실수는 “뿌리 깊고 멍청하고 피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생을 산 죄로 외로운 노년을 맞이할 팔자를 타고난 것이다.

세 번의 장례식

소설에서 그는 세 번의 장례식에 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장례식은 그의 부모를 보내는 자리였으며 세 번째 장례식은 그 자신을 위해 마련된다. 장례식이란 주인공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기이한 행사이자 산 사람을 위한 위로의 장이다. 그의 장례식 역시 다른 장례식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장례식에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를 추모한다. 하위와 낸시는 그를 훌륭한 아버지이자 자랑스러운 동생으로 기억한다. 낸시와 하위처럼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진정으로 기뻐”한다.
죽음을 앞둔 그에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은 것은 딸 낸시와의 이별이다. 죽음은 감각의 차단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든 관계와의 단절을 뜻한다. 그는 “기적적으로 아직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인 딸에게서 위로를 얻는다. 그는 대개 사람들이 그렇듯 사랑과 증오, 경멸과 연민, 동정과 의무감으로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맺어왔다. 딸 낸시와의 관계만은 다른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순수한 사랑으로 구성되었다. 남아있는 나날 그를 위안하는 감정 역시 낸시와 나누는 애정이다.

두 번째 경동맥 수술을 앞두고 그는 부모의 묘지를 찾는다. 유골과 대화를 나누며 그는 그들의 선조인 뼈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그 뼈에 가능한 한 바짝 다가가 섰다. 그렇게 가까이 가면 그들과 연결이라도 될 것처럼, 미래를 잃은 데서 생겨난 고립감은 완화되고, 사라진 모든 것과 연결되기라도 할 것처럼.” 뼈들과의 연결은 그가 그의 부모, 더 나아가 그의 기원을 구성하는 뿌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는 계속해서 인부가 무덤을 파는 광경을 목격한다.* 손수 삽을 써서 수행하는 세심하고 꼼꼼한 작업을 보고 그는 감동한다. 새 무덤을 팔 자리를 표시하고, 거기 맞춰 흙을 잘라낸다. 떼를 틀에 맞게 잘라내고 무덤 뒤쪽에 보기 좋게 갖다 놓는다. 이 모든 작업은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끔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마련한 2m 깊이의 구멍은 유족과 사자를 위한 보금자리다. 인부와의 대화를 통해 그는 그가 떠날 때까지 어떤 방식으로건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인류애에서 우러난 깊은 배려와 존중이 그와 함께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뼈들과 연결된 사슬의 한 고리가 되었으며 그런 방식으로 다음 세대의 뼈들과 연결될 것이다. 물론 개인의 고유성과 유한성을 유적類的 존재가 지닌 영속성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형대에 손을 맞잡은 죄수들처럼 잠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위로받는다.
수술실에서 일어난 심장마비로 그는 결국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간다.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한낮의 빛”이었는데 그것은 “눈에 담을 수 있는 엄청나게 크고 귀중한 보물”이었다. 그가 평생 루페로 들여다본 것은 “귀중하고 완벽한 행성”이었으며 그가 경험한 “십억, 조, 천조 캐럿짜리 행성 지구”였다. 한 사람의 죽음과 더불어 이렇게 한 세계가 영원히 저물었다. 그가 들여다보던 루페의 렌즈 역시 그의 시야와 더불어 흐릿해진다.

*루페: 볼록렌즈를 사용한 작업용 확대경

*그는 무덤 파는 인부에게 죽은 이들 중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
무덤 파는 인부가 묘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그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었죠. 일본에서 전쟁포로가 됐어요. 총각 때 부인 될 여자를 만나러 오곤 했던 시절부터 알았죠. "(본문 183-184p)
소설 속 시간적 배경은 비교적 정확한 연대기로 제시된다. 그는 1933년생으로 71세에 죽었으니 소설 속 시간은 2004년 무렵이다. 무덤 파는 인부는 자신이 58세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1940년대 중반에 태어났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은 사람을 전쟁 전에 알고 지냈다기에는 너무 젊다. 혹시 인부가 초월자를 뜻하거나 묘지에서 나눈 대화가 그의 환상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작품이 지닌 주제 의식이 너무 달라진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도 맞지 않는다. 영어 원문을 찾아보고 고민이 해결됐다.
“the gravedigger points at a gravestone and explains that the man buried there fought in World WarⅡ, was a prisoner in japan. the gravedigger used to know him when the man came to visit his wife.”
2차대전에 돌아가신 분을 알고 지낸 게 아니라 2차대전에 참전했던 분을 알고 지냈던 것 같다. '총각때'란 말은 원문에 없고 문맥상 부인의 묘지에 들렀을 때부터 알고지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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