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 당신이 백여 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면? 당신은 과연 무사히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안락한 현대문물의 수혜를 누릴 수 없는 시공간으로 이동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매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한다. 당신의 허벅지를 파고들 날카로운 개의 이빨을 막아내야 하고 추적자의 시선을 따돌려야 한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목표는 하나다. 당신이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온(time slip) 이유를 깨닫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 당신에게는 마음 내키는 대로 현재로 돌아올 초능력도, 타임머신도 없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 킨kin은 영어 kindred(일가친척)의 약자로 복잡한 혈연으로 묶인 ‘나’의 숙명을 상징한다. 또 kin은 화자의 가계도를 넘어서, 인류 모두가 여러 방식으로 엮인 공동체를 뜻하기도 한다. 그 공동체는 피부색과 성별, 계급, 민족을 초월한다. kin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복잡다단한 정치 행위가 펼쳐지는 장인 동시에,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 다나는 1976년을 살아가는 흑인 여성이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여성으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다.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는 계층으로서 매순간 자신의 타자성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1815년의 시공으로 끌려 들어간 다나에게 지금까지의 고민은 사치에 가깝다. 채찍질과 강간, 살해당할 위험이 그녀를 위협한다.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야만 앞에서 인간은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현대사회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나는 “노예란 길고 느린 둔화 과정”임을 깨닫는다. 소설은 노예제가 흑인들의 의식과 일상에 파고 들어가 내면화되고 공고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도와 구조가 된 폭력은 인간의 몸뿐 아니라 마음도 예속한다.

작가는 섬세한 시선으로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간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는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나를 핍박하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모든 인간관계에는 필연적으로 다양하고 복잡미묘한 감정이 공존한다. 게다가 지배자들에게도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피지배자의 입장에 동조하는 지배자 역시 찾아볼 수 있다. 식민지 시대, 전쟁 기간 동안 피아간에 싹튼 사랑때문에 사람들은 마음의 갈등을 겪곤 했다.

노예주 루퍼스와 노예 나이절이 주고받는 감정은 우정과 신뢰다. 루퍼스가 노예 앨리스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에 가깝다. 비록 굴절되고 비틀린 형태이긴 하지만 말이다.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느끼는 감정 역시 증오만은 아니어서 존경심과 연민, 우정이 개입한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루퍼스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업신여기면서도 무서워했다....(중략)...그러나 생각해보면 어떤 종류의 예속이든 이상한 관계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이상한 관계란 애증과 그에 따르는 자괴감, 수치심으로 구성된다. 때로 스톡홀름 신드롬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런 감정에 당황하며 죄책감을 느낀다. 자신을 착취하는 대상에게 느끼는 사랑이란 자기모순과 더불어 동족에 대한 배신을 뜻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같은 흑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질투와 반목 역시 세밀하게 보여준다. 앨리스는 같은 노예들에게 미움받는다. 백인 노예주에게 잘 보여 편안하게 생활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앨리스는 루퍼스에게 계속 강간당하는 상태이며, 노예들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나는 글을 읽고 쓸 수 있으며 ‘백인’처럼 말한다는 이유로 “하얀 검둥이” 취급을 받는다. 그런가하면 뼛속까지 노예제도에 동화되어 백인 편에 선 흑인도 있다.

작가는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백인이 존재할 수 없듯이, 단일하고 동질적인 흑인 역시 없다고 말한다. 자유민 흑인은 비록 제한된 자유를 누릴지라도 노예와는 다른 지위를 지닌다. 끝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노예가 있는가 하면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는 노예도 있다. 밭에서 일하는 노예는 집안일을 하는 흑인을 부러워한다. 여성 노예는 남성 노예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다. 노예주에게 성노예로 이용되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나간다.

당대의 상식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야만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떤 이도 그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과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루퍼스의 아버지 와일린은 좋은 인품을 지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딱히 나쁜 인물이랄 수도 없다. ‘평범한’ 노예주는 ‘평범한’ 악을 수행한다. 처음 이 시대로 끌려왔을 때, 다나는 타자를 대하듯 동족을 바라본다. 노예 해방과 흑인 인권 운동이 가져온 변화라는 간극이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다나는 차츰 자신의 조상 격인 그들 흑인에 대해 마음 깊이 이해하고 존경하게 된다. 그들은 얼핏 무력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깊은 인내심과 삶에 대한 의지로 야만의 시대를 버텨왔다. 거대한 폭력과 예속 상태에서 ‘살아남기’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위대하고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닫는다.
이처럼 우리와 다른 시대와 문화권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작가는 우리의 잣대로 다른 이들의 삶을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가에 관해 묻는다.

〈킨〉에 등장하는 폭력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소설처럼 인종 차별의 형태로 드러나거나, 제국주의 혹은 파시즘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젠더, 계급, 민족 등 ‘다름’을 차별로 연결하는 모든 영역에 폭력은 만연한다. 작가는 인간성의 회복과 연대만이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다나의 시간여행에 우연한 동행자가 된 남편 케빈은 비록 백인이지만 흑인의 편에 선다. 케빈은 흑인인 다나와 결혼할 정도로 그녀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공감과 연민은 연대의 시작이다. “어머니는 당신과 이야기를 할 때 눈을 감고 있으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흑인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고 하시지” 루퍼스의 말에서 드러나듯 노예주 역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노예들이 자신과 동등한 인간임을 알고 있다. 약자들과의 연대는 바로 당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kin이란 모든 사람이 얼기설기 엮인 공동체이비 때문이다. 영원한 승자도 약자도 없다. 다음 차례에 허벅지에 날카로운 개의 이빨이 박힐 사람은 당신일지도 모른다.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는 보기 드문 흑인 여성 SF작가이다. <킨>의 화자 다나는 작가의 분신이다. 버틀러 역시 다나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작가가 되기를 바라던 소녀였다. 네블러상과 휴고상을 여러 번 수상했으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작가이다. “80세가 되어서도 계속 글을 쓰기를 꿈꾸는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버틀러는 안타깝게도 58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아프리카 문화와 선진기술을 융합하는 예술 사조인 아프로퓨쳐리즘(afro futurism)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최초의 흑인 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 역시 버틀러에게 빚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연의 생
김운하 지음 / 필로소픽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십여 년 전 나는 어떤 만성 질환을 진단받았다. 대부분의 만성 질환이 그렇듯이 병이 완치될 가능성은 없었다. 치료는 단지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을 뿐이었다. 남은 생애 내내 성가신 추적 검사와 그에 동반한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내 병세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병에 걸릴 가능성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되었으나 그 징후가 발병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1~2%에 불과했다. 노인성 질환으로 흔히 알려진 그 병에 걸리기에는 나는 아직 젊었다. 하루아침에 나는 몹시 불운한 사람이 되었다. 왜 하필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 걸까. 불행과 맞닥뜨린 모든 사람이 그러듯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릴없이 그런 질문을 내게 던졌다. 상심은 곧 깊은 우울증으로 이어졌다. 주변의 어떤 위로나 조언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수면 유도제를 처방받기 위해 가끔 방문하던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했다. 항우울제 처방을 부탁하는 나에게 의사는 몇 가지 충고를 해주었다. 병이 내게 찾아온 이유에는 분명 어떤 뜻이 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에는 어떤 섭리가 개입돼 있으며,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통해 새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 삶을 대하던 태도에서 오만하고 불성실한 면이 있었는지 돌아보십시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병에 걸린 일이 잘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병원을 나섰다. 내가 걸린 병은 현대의학으로도 그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식생활, 흡연, 음주 여부와 같은 생활 습관과의 상관관계 역시 밝혀진 바가 없다. 유전적 소인과 더불어 타고난 몇 가지의 신체적 특성과 관련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 중에는 이 병에 걸린 사람이 없다. 아마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조상 누군가에게서 온 특정 유전자가 내 몸에서 병을 예비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은 우연이지만, 그 유전자로 인해 내가 언젠가 병에 걸릴 것이라는 사실은 필연이었다.
내가 병에 걸린 이유에는 신의 섭리 혹은 형벌이 개입하지 않았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처럼 우연과 필연이 결합해서 일어난 일일 뿐이다. 게다가 나는 딱히 운이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일찌감치 병을 발견한 것은 오히려 행운에 가까웠다. 날마다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 죽어간다. 그들의 죽음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저 이 모든 일이 우연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뜻일 테다. 태풍이나 가뭄, 홍수와 해일, 빙하기처럼 자연 질서에 속한 일이다. 얼마 전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일어난 지진과 그에 따른 비극 역시 전 지구적 규모의 자연 현상이라는 관점에서는 우연일 뿐이다. 비탄과 슬픔, 인간이 흘리는 피와 눈물은 자연과 우주, 시간 앞에서 흔적도 없이 용해되어 버린다.

말본새 나쁜 그 의사가 말한 대로 질병은 내 삶을 반추하고 여생을 새롭게 계획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사건에 부여한 의미이며, 질병의 배후에는 어떤 뜻도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병을 진단받은 뒤, 나는 일종의 결정론적 사고에 빠져있었다. 이 모든 일이 애초에 정해진 내 운명이 아닐까. 알게 모르게 저지른 나의 그릇된 행동이 병을 부른 게 아닐까 하는 마술적 사고가 나를 잠식했다. 나는 서서히 이런 불합리한 생각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갔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내 병은 거의 악화하지 않았다. 병에 걸렸다는 면에서 나는 운 나쁜 사람이었으나, 병에 걸린 뒤에 나는 운 좋은 환자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훨씬 더 심각한 병을 진단받은 내 지인에게는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에게 닥친 불행을 떠올릴 때면 나는 생의 아이러니와 부조리에 전율하고 또 슬퍼한다.

소설가이자 인문학자인 김운하는 한 작품 안에서 소설, 아포리즘, 문화비평, 수필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전작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작가의 경험과 허구가 결합한 소설이다. 뚜렷한 플롯과 서사 구조가 없는 이 소설은 때로 에세이와 문화비평의 양식을 빌어 파편적인 이야기를 펼친다. 제주의 깊은 밤과 풍광을 배경으로 한 각각의 에피소드는 은둔과 그를 통한 자기 대면이라는 주제로 통합된다. 후술하겠지만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의 문학 형식은 글쓰기의 본질에 관한 그의 고민과 철학에서 비롯한다.
작가의 신작 『우연의 생』에서 김운하 작가는 우연과 인간의 운명, 예술, 사랑의 함수관계를 다룬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에세이, 문화비평, 아포리즘, 혹은 소설로도 읽힐 수 있겠다. “존재의 우연성, 벼락처럼, 섬광처럼 폐부를 찌르는 단어”에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이유는 어쩌면 작가가 경험한 비극적 사건에서 연유할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화가를 꿈꾸던 소년은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처지에 놓인다. 성경에 나오는 욥처럼 작가는 신에게 인간의 운명에 관해 질문하며 비탄에 몸부림친다. 그러나 비극적 죽음 역시 우연에 불과하다. 상실에 대한 애도만이 인간의 몫으로 주어질 뿐이다.
우연한 사건은 또 다른 우연으로 이어진다. 어느 날 작가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본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작가가 속해 있던 세계였다. 붉은 석양을 등지고 환히 웃던 아이들의 모습. 훗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찬 엘리베이터를 마주한 순간처럼 작가의 운명을 뒤바꾼 장면이었다. 그 순간은 선형적이고 양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벗어나, 대체 불가능한 사건으로 이루어진 '카이로스'의 시간에 속해 있었다. 물론 그때의 작가는 그 사실을 알수 없었을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미지로 고착된다는 점에서 공간성을 획득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 년이 흐른 뒤 작가는 대학의 정문을 장식한 조형물 앞에 선다. 화가를 꿈꾸던 소년의 앞길에 또 다른 여러 우연이 겹친다. 80년대의 질곡 속에서 작가 역시 시대의 아픔에 휩쓸린다. “거의 스무 살이 되도록, 내가 삶과 세계 나 자신에 관해 백지 상태나 다름없이 무지했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던 작가는 십여 년이 흐른 후,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지식과 앎으로 스스로 얼마나 교조적인 확신에 빠져있었던가”를 부끄러워하는 회의주의자로 거듭난다. 소년은 빛과 그림자, 순수한 색채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에서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다. 한 때, 사람들이 선망하던 “검은 양복을 입은 권력의 세계”에 속했던 일을 작가는 “실패와 어리석음”으로 규정한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로 들어찬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날, 작가는 "영혼의 낙마사고"를 겪는다. 평소와 다름없던 어느 오후였다. 작가는 그날 이후, 일터를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선과 색, 조형 대신 언어라는 표상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를 선택한 작가는 인문학자이자 소설가로 독자 앞에 선다. 입지전적 이야기, 능력주의의 좋은 예로 소비될 법도 한 인생 역정을 작가는 ‘우연의 생’으로 규정한다. 그의 인생에 따른 “노력과 운의 기적 같은 결합” 역시 근본적으로는 우연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삶의 추는 능동과 수동의 양극 사이에서 진동하지만 삶은 근본적으로는 훨씬 더 수동태적인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노력해 역경에서 벗어난 이들이 빠지기 쉬운 오만인 '히브리스'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형벌을 부른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손에 넣은 성취 역시 종국적으로는 우연임을 인정하는 겸양만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한다.

사랑에 빠지기, 글쓰기, 책 읽기 역시 우연이 빚어내는 마술이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고 대중가요는 노래하고 연인들은 이에 동조한다. 연인들을 사랑에 빠지게 한 신비하고 불가해한 과정을 설명하는 단어는 운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다른 일처럼 사랑 역시 몇 번의 우연이 중첩되어 발생한 사건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와 토마시가 만나기 위해서는 여섯 번의 우연이 필요했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테레사가 살던 도시에 급한 환자가 발생하고, 마침 그곳의 의사가 몸이 아파 진료할 수 없게 된다. 그를 대신해 불려온 토마시는 하필 테레사가 일하는 호텔에 묵는다.
토마시가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을 때, 마침 흘러나온 베토벤 음악은 ‘고상하고 교양있는 세계를 동경하던’ 테레사에게는 계시처럼 들렸다. “우리는 때로 기적 같은 우연의 일치를 맞닥뜨”리고 “그런 사건을 필연이나 운명의 징후로 읽곤” 한다. 이런 설정은 얼핏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기 때문에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허구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중첩된 우연은 현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내가 그때 이러이러한 일만 하지 않았어도, 그 장소만 찾지 않았어도....” 우연이 저지른 장난에 대해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흔히 늘어놓는 원망이 아닌가. 카프카와 펠리체 바우어의 만남은 또 어떤가. 카프카가 블라우엔 슈테른 호텔에 찾아갔을 때, 마침 펠리체 바우어가 묵지 않았다면 문학사에 길이 남을 편지는 남지 않았을 것이며 카프카의 문학 세계는 깊이를 잃었을 것이다.
우연이 빚어내는 예측할 수 없고 불가해한 사건들 앞에서 때로 우리는 무력해지며, 삶은 무의미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필연적 연쇄”로 이어진 세계라면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결정론적 세계관, 기독교 신학은 세상에 일어나는 현상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때로는 신의 섭리를 통해, 때로는 이성과 진보, 과학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우연은 인간 지성의 한계를 표현하는 단어”란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아인슈타인 같은 물리학자는 양자역학의 성립에 공헌하면서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런 비결정성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이미 “물리계에도 우연이 개입하여 작동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확률적 인과율이 고전역학의 엄격한 결정론을 대체”함을 밝혔다.

작가는 세 장에 걸쳐 클리나멘이 지닌 신비에 관해 이야기한다. 기계적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클리나멘의 힘은 혁명적이다. 고대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설명한 것처럼 클리나멘은 ‘기울어 벗겨감 혹은 벗어남’을 뜻한다. 이 개념은 현대에 들어 다양한 분야에서 재해석되고 적용된다. 루이 알뛰세르는 클리나멘을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이라 불렀다. 김운하는 클리나멘을 “주어진 운명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힘”으로 규정한다. 과학자와 철학자만이 클리나멘이 적용되는 장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영향의 불안』에서 작가들이 선배 작가들로부터 받는 영향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김운하는 그가 겪은 클리나멘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11월의 어느 날, 탈출하듯 도시를 빠져나온 작가는 ‘청주’라는 이정표에 이끌린다. 클리나멘이 가져온 ‘낯설게 보기’와 매료, 설렘과 흥분은 방황하던 작가에게 선물과도 같았다. 그때의 경험을 담은 작품은 아직 원고 상태로 남아있지만. 작가는 그 또한 인생의 아이러니라 여긴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만난 클리나멘 역시 계획 없이 떠난 여행에서 마주쳤다. 공연장에서 연주를 반복하던 글렌 굴드는 공적인 삶에 지쳐버린다. 무작정 기차에 오른 그는 캐나다를 횡단하는 길고 고독한 여행길에 오른다. “고독으로의 클리나멘 운동.” 우연한 궤도 이탈이 가져온 우연, 곧 클리나멘은 글렌 굴드의 음악을 판이하게 바꿔놓는다. “오랜 고독과 성찰이 빚어낸 섬세하게 정적이면서도 듣는 이의 내면 가장 깊은 곳을 아득히 감싸는 듯한 연주”는 고독과의 대면을 통해 탄생했다.

사랑과 더불어, 우연이란 신비가 가장 많이 개입하는 장은 예술이다. 쓰기, 읽기, 그리기, 춤추기, 연주하기, 어느 하나 우연이 개입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소설 작법을 예로 들어보자.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플롯을 설정한 뒤, 등장인물의 성격을 설정한다.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주제에 맞게끔 유기적으로 배치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소설가는 없다. 섬광처럼 소설가의 머릿속에 찾아온 모티프가 발아한다. 그 모티프는 때로 누군가의 몸짓일 수도, 신문에서 발견한 어느 기사의 일부일 수도 있다. 어느 순간 소설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서로 결합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떠나보내기도 하며 새로운 유기체로 거듭난다.

글은 이제 작가를 더 깊은 사유로 인도해 작품의 골격을 보완하게 하고, 외피를 매끄럽게 손본다. 모든 예술가는 작품이 자기 손에서 떠나 독립성을 획득하는 것을 망연하게 바라본다. 작가의 신체는 그의 경험과 사유, 회상, 고통이 혼연일체가 되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는 장소다. “나 이전에 사건이, 익명적인 사건들이 선행하고 나는 그것을 인칭적으로 표현할 따름이다. 내 살과 영혼에 새겨진 상처 자체가 스스로를 성찰하도록, 표현하도록 하기.” 김운하는 그의 글쓰기를 “우연의 글쓰기”로 명명한다.
문학 형식의 구분은 일종의 질서화 작업이며 작가의 창의력을 틀에 가둔다. 니체와 파스칼, 몽테뉴, 라 로슈코프, 키르케고르, 에밀 시오랑 역시 체계를 혐오했다. 새로운 형식에 대한 고민은 창작의 일부이기도 하다. 많은 예술가가 새로운 양식에 대해 고민해왔다. 문학평론가 김인환은 『형식의 심연』에서 “글을 쓰는 일은 방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방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미리 설정한 방법을 고수하면 글이 탄력성을 상실”한다고 주장한다.

“철자나 단어를 해체하고 재배열하고 다시 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담은 단어를 창조하는” 애너그램이 그렇다. 특별한 줄거리가 없고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의식의 흐름’ 기법 역시 문학 형식에 대한 거부에서 탄생했다.
김운하는 모국어를 버리고 낯선 언어로 글쓰기를 택한 사무엘 베케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조지프 콘래드 같은 작가들을 “언어의 망명자”로 명명한다. “언어, 글쓰기의 클리나멘은 모국어로부터 이탈하는 방향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는 단어들, 문단들, 각 장들이 스스로 고정된 틀에서 미끄러져 나와 자유롭게 마주치고, 충돌하면서 그 틈바구니, 여백에서 자유로운 의미가 탄생하길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쓰기는 몽테뉴적인 하나의 시도Les essais이자 비틀거리며 방황하며 나아가는 탐구일 뿐이다. 나 자신의 삶 자체가 그러하듯이.”

김운하 작가는 에세이라는 장르가 본래 형식에서 벗어난 하나의 시도라는 점에 주목한다. 우연이 작용하는 장에서 “비틀거리며 방황하며 나아가는 탐구”라는 면에서 작가의 작품은 그의 삶을 닮았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글은 “자신의 생과 경험을 발판 삼고, 책들을 길잡이 삼고, 사유를 등불 삼아,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탐구하려는 끊임없는 시도”이다.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 역시 우연과 클리나멘이 개입한다. 감상이란 단지 수동적 행위가 아닐뿐더러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 행위이다. 독자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뿐 아니라 감상을 통해 작품이 지닌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독자의 내면세계는 감상을 통해 새롭고 충격적인 인식에 도달하기도 한다. 감상 역시 일종의 창조행위에 속한다.

철학에 대해 직접 설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작가들은 플롯과 은유, 서사를 통해 그 작업을 수행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철학은 현학이란 누명을 벗고 작품 속에 녹아든다. 《우연의 생》을 통해 김운하가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 역시 철저히 문학의 화법을 따른다. 문장부호와 문장 간의 호흡, 문장을 배열하는 방식마저 작가의 심상을 드러낸다. 우연이란 주제 아래 유기적으로 엮인 45장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어떤 장은 길고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목련” 같은 장처럼 시어로 구성된 짧은 장도 있다. 리듬과 고저, 장단이 작품을 관통하며 음악적 흐름을 부여한다.

첫 장에서 작가는 “운명이란 밀실”에서 길어올린 “본질적 장면”을 길어 올리며 시간의 경첩을 연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신화, 예술가의 삶, 철학의 역사에서 퍼 올린 우연과 운명,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양자 역학과 진화 생물학 등 현대과학이 발견한 우연의 힘은 그의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고대의 자연철학 용어인 클리나멘이 현대에 들어와 어떻게 적용되는지, 미세한 변화가 가져온 무질서, 엔트로피가 어떤 전복적 힘을 지녔는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오해와 착각”에서 비롯된 인간종의 히브리스가 집단적으로 발현될 때, 가져올 전지구적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우연과 노력의 기적 같은 결합이라며 작가는 자신이 빠져나온 절망에 관해 설명한다.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결국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한다. 운 좋은 몇몇은 자신이 역경을 딛고 일어선 과정을 신화화하며, 오만한 인생론을 펼쳐 놓기도 한다. 물론 행운 역시 준비된 이들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오늘날 ‘준비된 우연 혹은 행운’을 의미하는” 단어 ‘세렌디피티’ 역시 ‘세렌디퍼’의 꾸준한 노력과 결합해 일어난다. 엑스레이나 페니실린의 발견 역시 세렌디피티에 해당한다. 김운하 작가는 “우리의 노력이 반드시 세렌디피티로 보상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 역시 이야기한다. 숱한 자기개발서의 달콤한 이야기와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 선 작가는 두 번이나 세렌디피티와 마주한 경험이 있다. “인생을 순전한 운과 우연에만 기대어 살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은 인간의 주체성과 노력이 지닌 힘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작가는 “그 숱한 우연의 축복 혹은 재앙들, 우연과 더불어 아름답게 춤추고 싶었으나, 너무 자주 과잉된 격렬함 속에서 중심을 잃거나 혹은 잘못된 스텝을 밟으며 놓쳐버린 손길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작가는 생의 의미에 짓눌리지 않는다. “이제 생의 의미 따위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생각한다.

"우연의 새들, 저 우연의 새들이 다가와 자신의 어깨 위에 내려앉을 때마다, 자신 속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자아들이 깨어나고, 원자들의 우연한 클리나멘이 새로운 원자의 결합을 낳고 그것이 더 큰 새로운 무언가로 변형되듯 매번 자신의 자아가 변형되고 새로운 삶이 열린다....(중략).....생은 우연을 넘어서는 것이다. 아니, 우연의 새들의 지저귐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

“세계는 우연과 필연의 기묘하고 역동적인 그것이 씨줄과 날줄로 꼬이고 짜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아름다운 문양의 태피스트리”라면, 김운하의 《우연의 생》은 깊은 사유와 아름답고 시적인 문장을 씨줄과 날줄로 정교하게 짜낸 태피스트리라 부를 만하다. 김운하가 만든 태피스트리는 비단결처럼 매끈하지만은 않아 크고 작은 매듭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우리를 매듭 같은 문장 앞에 머물러 오래도록 사유하게 한다. 사고의 확장을 유도해 감상이라는 창조행위에 동참하게 한다.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고 사랑을, 절대적으로 사랑만을 요구하는 고유한 존재들이 있다. 생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생의 한가운데 있다. 지나간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추억하듯, 지금 이 순간을, 다가오는 매 순간들을 맞이할 날들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를 망각하지 않는 지혜에 대한 소망이 있다. 생 자체가 매혹적인, 유일무이한 한 편의 시가 되길 소망하는 연약한 존재들이 있다."

김운하 작가는 소설가로 인문학자로 종횡무진해 왔으며 최근에는 오이코스 인문연구소 활동으로 더 바빠졌다. 작가가 천착해온 주제들은 《우연의 생》에서 더욱 심화하여 미학적 완결성을 획득한다. 작가가 다음 작품에서 보여줄 아름답고 신비한 태피스트리를 기대해본다. 태피스트리에 숨어있는 매듭에 우연히 걸려 넘어져 사유의 강물에 몸을 맡기기를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시작시인선 373
조동범 지음 / 천년의시작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동범 시인의 시집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에서 화자들은 죽어가거나, 이미 죽었거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모든 죽음이 그렇겠지만 그들의 최후는 지극히 외롭고 고독하며 유폐되어 있다. 그들은 먼 우주 공간에 홀로 놓인 우주비행사(<휴스턴>)이며 서늘한 시체공시소에 누운 신원 미상의 시신(<제인 도>)이다. 혹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꼬리를 뒤튼 채, 암석 속에 굳어버린, 오래 전에 사라진 생물(<종의 애도>)이기도 하다.
그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 떠올리는 편린은 "투명하게 담긴 올리브와 햇살이 쏟아지던 체크무늬 커튼"(<휴스턴>)이거나 "냉장고에 두고 온 두부조림"(<입동>)처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러다가도 그들은 문득 "기쁨과 슬픔, 원망과 분노의 문양들을 호명"하는 일들의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현생의 모든 선과 악"이란 살아있는 자들의 도덕이자 당위이며 망자에게 주어진 책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죽어갈 때, 그들이 속한 세계 역시 막을 내려 "모든 애도의 방식은 사라지고"(<종의 애도>), "오래 전의 황폐한 서사는 믿을 수 없는 폐허"가 된다. 죽음이란 거대한 허무는 살아있을 때 천착하던 모든 의미를 쓰나미처럼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앞에 주어진 무채색 세계가 완전한 공허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조동범 시의 세계에서 시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순환한다. 시작과 종말이 있는 시간은 종말을 목표로 진행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존재는 파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조동범의 시 세계는 선형적線形的 시간의 흐름을 거부한다. 이는 수평선, 해안선, 국경선과 같은 시어들을 통해 표상된다.
선線들은 날카로운 끄트머리이자 경계이다. 그러나 시인의 세계에서 선이란 뫼비우스 띠지의 접합선처럼 회귀가 시작되는 지점이며 새로운 융합과 생성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선들은 국경선처럼 때로는 인위적이고 선언적인 경계여서 화자는 그 앞에서 "국가와 민족과 역사의 부질없음을 문득 중얼거"(<John Doe>)린다.
우리가 인식의 한계 때문에 수평선과 지평선 너머 일어나는 일들을 볼 수 없을 때에도 거기서는 첨예한 대립과 소멸, 생성이 일어난다. 일몰과 일출, 삶과 죽음, 종의 출현과 멸망...
시인은 촘촘한 언어의 그물로 무한한 선의 순환 속에서 스러져가는 존재들을 건져낸다. 그들은 "침몰한 전함이나 보물선,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과 전설"(<호라이즌>)이며 "국경 인근의 저수지에서 발견된 익사체에서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영웅담이 아"닌 이야기이다. 누군가 찢어버린 성경의 외전처럼 떠도는 잊혀질 이야기들은 시인의 펜끝을 통해 잠시 생명을 얻는다.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우리 없이 무심한 미래는 우리가 딛고 선 지금에 맞닿아 있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지극한 허무를 마주하고 견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루페*로 들여다본 노년의 초상
-필립 로스 《에브리맨》

재와 다이아몬드

노년과 질병, 그에 따른 최종 부산물인 죽음을 다루는 필립 로스의 문장은 시종일관 담담하고 건조하다. 그의 펜촉은 메스처럼 예리하게 죽음을 앞둔 인간의 먹먹한 심리를 해부한다. 작가는 노년기에 막 접어든 시기에 이 소설을 썼는데, 서늘하게 벼려진 문장을 통해 노년이란 환부를 베고 가른다.
소설의 제목인 에브리맨은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을 뜻한다. 세월의 흐름과 노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고 단지 ‘그’로 불린다.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나서 잠시 이 땅에 머무르다 스러져가는 우리 모두 같은 처지가 아닌가.
소설 속 인물들은 받아들이라는 말을 하릴없이 되뇐다. 받아들이기란 이 소설을 관통하는 깊은 울림이며,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겪는 많은 문제에 대처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수술을 앞둔 그를 걱정하는 딸 낸시에게 그가 건네던 이 말은 이번에는 낸시가 장례식장에서 고인을 위로하는 말이 된다. 받아들이라는 말은 가혹하고도 유용한 삶의 해법으로 부모의 이혼으로 힘들어하던 낸시에게 아버지가 건네준 삶의 처방전이다. 낸시는 그 말을 통해 부모의 이혼과 그녀 자신의 이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극복한다. 불굴의 의지로 삶을 개척해온 소설 속 인물들-그의 아버지, 언론인 제럴드 크레이머, 그의 상사였던 클레런스-역시 죽음이라는 운명만은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에브리맨은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보석상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가 판매하던 다이아몬드는 유한성에 예속된 인간과는 달리 이 땅에 영원히 남아있을 운명이다.

“불멸의 흙 한 조각, 죽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인간이 그걸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다니!”

기이하고 부조리하다. 불멸이란 축복은 울고 웃고 사랑하며 이 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에게가 아니라 무심하고 아름다운 돌덩이에 주어졌다. 세 번째 부인과의 사랑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덧없이 사라졌지만, 그녀의 목에 걸어준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반짝인다. 그가 한 줌의 재로 돌아간 뒤 남은 어둠 속에서도.

육신을 위한 향연

죽음을 앞둔 환자로 전락했으나 한때 그는 잘나가는 뉴요커였다. 그는 태생적 유물론자로 일찌감치 랍비들이 늘어놓는 거짓말에 대해 꿰뚫어 본다. 그에게는 “죽음과 신에 관한 야바위나 천국이라는 낡은 공상”이 통하지 않아 “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인 현실에 발붙이고 살기를 택한다. 그는 선지자가 약속하는 피안의 세계, 이데아와 관념의 늪에서 허우적대기를 거부한다. 그가 믿는 유일신은 감각의 세계에 임하며, 그 세계는 오직 육체로만 숭배할 수 있다. 주어진 세계에 대한 충만한 향유가 그가 믿는 종교의 교리다.
그가 지닌 인생관은 “남성 육체의 삶과 죽음”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문자로 작성한 자서전이 아니라 그가 그린 추상화에 이 제목을 명명하는 행위에서 그가 지닌 감각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는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에 탐닉하며 늘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대상만을 원한다.
아버지가 보석을 감정할 때 쓰던 루페를 통해 들여다보듯 그는 면밀하게 세상을 관찰한다. 보석이 투영하는 맑은 빛은 불멸의 세계에 속하지만, 그의 루페를 통과한 사물과 생명은 끊임없이 소멸하고 생성한다. 그의 루페는 선악善惡이 아닌 미추美醜라는 잣대로 만물을 구분한다.
쾌락을 좇는 그의 본성은 만족스러웠던 두 번째 결혼을 파탄에 이르게 한다. 정치적 공정함과 페미니즘이란 화두가 지배하는 요즘과 달리 그가 전성기를 보낸 80년대는 마초들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성적 일탈과 외도는 여전히 사회적 불명예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 요인이다. 그는 누구나 겪는 중년의 위기에 충동적으로 대응하며 젊은 여성이 지닌 “생물적 특성”에 그의 “생존 본능”을 내어주기 이른다. 그는 자신이 관습적이고 고지식한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다. 사회적 “생존 본능”은 그가 지닌 더 원초적인 생존 본능인 육욕에 자리를 내어준다.
그의 인생은 죽음-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절대무無의 세계-으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여정이다. 탈장 수술을 받기 위해 처음으로 입원했을 때, 옆 병상 소년이 사망한 사건은 어린 그에게 트라우마로 자리매김한다. 첫 수술을 받은 이후 60년 가까이 그가 누려온 수없이 많은 낮과 밤, 아침 식사와 입맞춤으로 점철된 시간은 죽은 소년의 눈앞에서 굳게 닫힌다. 이처럼 죽음은 한 인간 앞에 놓인 시간과 가능성, 무엇보다도 충만한 감각적 대상을 빼앗는 약탈자다.
그의 삼촌을 죽게 하고 그의 아버지마저 위험에 빠뜨렸던 복막염에서 회복됐을 때, 그는 자신이 죽음 아주 가까이 다가섰다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그가 육체적으로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조차 죽음의 가능성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닌다. 죽음이라는 큰 허무는 늘 파도처럼 우리를 덮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죽은 소년은 그의 무의식 속 평행 세계에 존재한다. 그가 속한 세계는 색채와 냄새, 빛과 그림자로 가득한 곳이지만, 소년은 암흑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1989년 관상동맥이 막혔을 때, 그는 소년과 자신의 상태가 역전되었음을 느낀다. “지금까지 긴 세월 동안 그는 살아 있었고 그 소년은 죽은 상태였다-그런데 이제 그가 그 소년이 된 것이다.”

소외된 육체

그 이후로 십 년 가까이 별 탈 없이 지냈으나 이제 그는 진정한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내리막길의 경사는 점점 급격해진다. 필립 로스는 쇠퇴하고 시든 육체가 겪는 고통과 비애를 섬뜩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국부 마취 때 겪은 공황, 가슴 밖으로 불거진 제세동기, 팔뚝에 남아있는 정맥주사 바늘…….
무엇보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각은 육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육체에서 소외되는 기이한 경험은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신체를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무력감과 고립감, 수치심을 느끼며 점점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어간다.
“신체의 변화가 부끄러웠다. 남자의 힘이 줄어든 것이 부끄러웠다. 그를 비틀어버린 오류들과 그를 기형으로 만든 충격들-스스로 가한 것과 외부에서 온 것 모두-이 부끄러웠다. 밀레선트 크레이머가 겪는 축소의 과정에 무시무시한 웅장함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그것과 비교되어 자신의 황량함이 아주 작아 보이게 만드는 것은 물론 그녀가 겪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중략)…이제 통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장결석으로 응급실을 방문했을 때, 소설 속 인물들이 경험한 이질감을 느꼈다. 왼쪽 등에서 퍼져나간 지독한 통증이 온몸으로 뻗어나갔고 통증에 밀려난 내 영혼은 몸 어느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나 자신이 곧 통증이 된 것 같았다. 마약성 진통제가 혈관으로 들어가자 통증에 잠식되었던 내 몸은 서서히 온전한 내 것으로 돌아왔다.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그는 젊은 여성들에게서 관심을 거두지 못한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은 그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지만 땀에 젖은 젊은 육체와 그 육체가 그리는 곡선은 여전히 자극적이다. 해변에서 만난 여인을 유혹하는 행위로 그는 수컷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려 든다.
“그는 그렇게 말하다가 마치 열다섯 살짜리처럼 바지 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법에 걸린 듯 빠르게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그와 더불어 개체화가 이루어지는 숭고한 단독성이 확립되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예기치 못한 발기는 “죽음과 다름없는 비인격화의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질병에 수반하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성적 흥분 역시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통제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성적 흥분 역시 이질감을 불러일으킬 법하다. 그러나 젊은 시절 분명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을 발기는 “숭고한 단독성”으로 승화한다. 이 활기찬 독립은 생명력과 남성성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의 반응 역시 호의적이지만 그녀는 연락해 오지 않았다. 이로써 “마지막으로 크게 한 방 터뜨려보겠다는 그의 갈망”은 꺾인다.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막바지에 선 사람들이 종종 그렇게 하듯 그는 지금껏 살아온 나날을 되돌아본다.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성장했고, 형 하위와는 돈독한 우애를 나누었다. 아버지의 보석상에서부터 다진 감각으로 자본주의의 꽃 광고업계에서 승승장구했다. 평생 많은 여자가 따르는 매력 있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쇄 남편”이라 씁쓸하게 자칭하듯, 세 번의 결혼생활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과정에서 부인들과 자식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한마디로 그는 명암과 부침, 굴곡이 함께 하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

그가 가진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들인 로니와 랜디에게 그는 비열하고 무책임한 가장이었을 뿐이다. 원한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평가할 능력도 의지도 부족한데, 그 대상이 부모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랜디와 로니는 “그의 가장 깊은 죄책감의 근원”이었다. 딸 낸시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느끼는 것과 달리 그 역시 아들들을 증오한다.
그러나 이제 그는 긴 저녁의 외로움 때문에 “사악한 새끼들, 삐지기만 잘하는 씨발놈들, 할 줄 아는 게 비난밖에 없는 이 조그만 똥 덩어리들”에게 전화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는 나약한 노인이다. 그들의 관계는 길고 구구절절한 애증, 피해자와 가해자가 역전되는 상황, 눈물과 용서, 회한과 한숨이 뒤섞여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가족관계가 거의 그렇다.
평생 흠모하던 하위와의 관계 역시 어긋난다. 하위가 지닌 건강과 생명력을 질투했기 때문이다. 질투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마음의 지옥에 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두 아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격언은 개인사에도 적용된다. 개인이 발 디딘 현재는 이음새 없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구조물로 벽돌 몇 장 빼내어 그 성질을 바꿀 수는 없다. 지나간 세월 역시 앞으로 올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이게 내가 한 짓이야! 나는 일흔하나야. 나는 이런 인간이 된 거야. 이게 내가 여기 오기까지 한 일이고, 더 할 말은 없어!”

화목한 가정의 기반이 되는 행복한 부부 관계 역시 어디까지나 우연의 산물이다. 개인이 타고난 기질, 두 남녀의 상성相性, 주변 환경의 영향이 어우러져 그 관계의 성격을 결정한다. 하위는 그와 달리 50년 가까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한다. 하위가 타고난 건강처럼 운이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삶의 모든 파악할 수 없는 우연을 스스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회한에 젖는다. 과거 그가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 인생의 반을 발광 상태에서 살지 않으려” 내린 이혼이란 선택에 “사면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확신”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결혼을 감행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배우자를 선택한다. 부족한 자기인식 때문일 수도 있고 부주의함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도 대개 그렇게 행동하지만, 그는 운이 나빴다. 첫 번째 결혼생활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는 만족스러웠던 두 번째 결혼생활 역시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중년의 위기와 권태로운 부부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해결책은 외도였다. 그가 교활하고 계산적인 인물이라면 가정이 해체되는 위험은 무릅쓰지 않고 적당히 즐겼을 것이다. 두 번째 부인 피비는 남편의 외도를 눈감아줄 수는 있었으나 그의 거짓말을 용서하기에는 너무나 이상주의적이다.
“당신이 나에게 맡기고 나를 묶어놓으려는 그 역할을 견딜 수가 없어. 남편에게 거부당해 원한을 품고, 썩어빠진 질투심에 시달리는 애처로운 중년의 아내! 격분하고! 비위에 거슬리는 짓이나 하고! 아, 무엇보다도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신이 싫어”
육체적 끌림만이 있었던 세 번째 부인과의 결혼은 어떻게도 변명할 수 없는 실수임이 곧 드러난다.

죽음을 앞둔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들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자신이 이제 단지 신체적으로만 전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의 비극은 그저 운 나쁜 패를 집었기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늘 변명으로 일관하는 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으로 행세했으나, 그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이혼하고 재혼했으며, 본능에 충실하다가 소중하게 일군 가정을 잃는다. 그의 딸 낸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 그녀에게는 늘 다른 사람의 욕구가 우선한다.

그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루페의 렌즈는 왜곡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낸시는 그녀가 지니고 태어난 필터를 통해 사람들이 지닌 결점을 보정해 바라본다. 냉혹한 현실주의자는 따뜻한 이상주의자를 낳았다. 그는 딸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접는다. “낸시가 있는 그대로의 그를 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깨달음은 늘 너무 늦게 찾아오며 인생의 모든 비극이 여기 놓여 있다.

“엄마, 아빠, 하위, 피비, 낸시, 랜디, 로니……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만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내말 안 들려? 다 끝났고, 나는 이제 당신들을 모두 다 떠나고 있어!”
그러나 그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예감한다. 자신이 저지른 모든 실수는 “뿌리 깊고 멍청하고 피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생을 산 죄로 외로운 노년을 맞이할 팔자를 타고난 것이다.

세 번의 장례식

소설에서 그는 세 번의 장례식에 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장례식은 그의 부모를 보내는 자리였으며 세 번째 장례식은 그 자신을 위해 마련된다. 장례식이란 주인공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기이한 행사이자 산 사람을 위한 위로의 장이다. 그의 장례식 역시 다른 장례식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장례식에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를 추모한다. 하위와 낸시는 그를 훌륭한 아버지이자 자랑스러운 동생으로 기억한다. 낸시와 하위처럼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진정으로 기뻐”한다.
죽음을 앞둔 그에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은 것은 딸 낸시와의 이별이다. 죽음은 감각의 차단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든 관계와의 단절을 뜻한다. 그는 “기적적으로 아직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인 딸에게서 위로를 얻는다. 그는 대개 사람들이 그렇듯 사랑과 증오, 경멸과 연민, 동정과 의무감으로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맺어왔다. 딸 낸시와의 관계만은 다른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순수한 사랑으로 구성되었다. 남아있는 나날 그를 위안하는 감정 역시 낸시와 나누는 애정이다.

두 번째 경동맥 수술을 앞두고 그는 부모의 묘지를 찾는다. 유골과 대화를 나누며 그는 그들의 선조인 뼈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그 뼈에 가능한 한 바짝 다가가 섰다. 그렇게 가까이 가면 그들과 연결이라도 될 것처럼, 미래를 잃은 데서 생겨난 고립감은 완화되고, 사라진 모든 것과 연결되기라도 할 것처럼.” 뼈들과의 연결은 그가 그의 부모, 더 나아가 그의 기원을 구성하는 뿌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는 계속해서 인부가 무덤을 파는 광경을 목격한다.* 손수 삽을 써서 수행하는 세심하고 꼼꼼한 작업을 보고 그는 감동한다. 새 무덤을 팔 자리를 표시하고, 거기 맞춰 흙을 잘라낸다. 떼를 틀에 맞게 잘라내고 무덤 뒤쪽에 보기 좋게 갖다 놓는다. 이 모든 작업은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끔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마련한 2m 깊이의 구멍은 유족과 사자를 위한 보금자리다. 인부와의 대화를 통해 그는 그가 떠날 때까지 어떤 방식으로건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인류애에서 우러난 깊은 배려와 존중이 그와 함께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뼈들과 연결된 사슬의 한 고리가 되었으며 그런 방식으로 다음 세대의 뼈들과 연결될 것이다. 물론 개인의 고유성과 유한성을 유적類的 존재가 지닌 영속성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형대에 손을 맞잡은 죄수들처럼 잠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위로받는다.
수술실에서 일어난 심장마비로 그는 결국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간다.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한낮의 빛”이었는데 그것은 “눈에 담을 수 있는 엄청나게 크고 귀중한 보물”이었다. 그가 평생 루페로 들여다본 것은 “귀중하고 완벽한 행성”이었으며 그가 경험한 “십억, 조, 천조 캐럿짜리 행성 지구”였다. 한 사람의 죽음과 더불어 이렇게 한 세계가 영원히 저물었다. 그가 들여다보던 루페의 렌즈 역시 그의 시야와 더불어 흐릿해진다.

*루페: 볼록렌즈를 사용한 작업용 확대경

*그는 무덤 파는 인부에게 죽은 이들 중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
무덤 파는 인부가 묘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그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었죠. 일본에서 전쟁포로가 됐어요. 총각 때 부인 될 여자를 만나러 오곤 했던 시절부터 알았죠. "(본문 183-184p)
소설 속 시간적 배경은 비교적 정확한 연대기로 제시된다. 그는 1933년생으로 71세에 죽었으니 소설 속 시간은 2004년 무렵이다. 무덤 파는 인부는 자신이 58세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1940년대 중반에 태어났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은 사람을 전쟁 전에 알고 지냈다기에는 너무 젊다. 혹시 인부가 초월자를 뜻하거나 묘지에서 나눈 대화가 그의 환상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작품이 지닌 주제 의식이 너무 달라진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도 맞지 않는다. 영어 원문을 찾아보고 고민이 해결됐다.
“the gravedigger points at a gravestone and explains that the man buried there fought in World WarⅡ, was a prisoner in japan. the gravedigger used to know him when the man came to visit his wife.”
2차대전에 돌아가신 분을 알고 지낸 게 아니라 2차대전에 참전했던 분을 알고 지냈던 것 같다. '총각때'란 말은 원문에 없고 문맥상 부인의 묘지에 들렀을 때부터 알고지낸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로 동화집 - 우리가 알고 싶은 진짜 동화 01
샤를 페로 지음, 전세철 옮김 / 노블마인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페로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빨간 두건」 등 익숙한 제목만을 보고 이 동화집을 집어 들면 독자들은 충격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 동화집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동화들은 없다. 늑대에게 잡아먹힌 빨간 두건에게 구원은 없으며,「당나귀 가죽」에 등장하는 왕은 어이없게도 자신의 친딸인 공주와 결혼하려 한다. 「푸른 수염」에는 아내들을 차례로 살육하는 남편이 등장하고, 「엄지동자」의 식인귀는 끔찍한 방법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죽인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공주는 잠에서 깨어나 왕자와 결혼하지만 곧 시어머니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게다가 화자는 짓궂게도 공주와 왕자가 결혼한 첫날밤, 두 사람은 잠을 잘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순진한’ 동화를 기대했던 독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이 밖에도 페로는 작품 여기저기에서 인간세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는데, 독자들은 어린이들이 과연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될 것이다. 

이처럼 원전으로 읽는 『페로 동화』는 오늘날의 독자들이 가지고 있던 동화에 대한 통념을 뒤엎는다. 『페로 동화』에는 현대의 동화들이 일반적으로 금기시하고 있는 폭력적인 행위에 대한 묘사와 근친상간의 가능성을 포함한 성(性)과 관련된 암시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페로 동화』는 『그림 동화』를 비롯한 민담을 원형으로 하는 다른 문학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덜 잔인하고, 잔인한 행위에 대한 묘사도 구체적이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로 동화』를 원전으로 읽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를 기대했던 독자들에게는 충격적인 경험일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이 사실은 그림책과 디즈니 만화영화를 통해 변형된 『페로 동화』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생산된 오늘날의 『페로 동화』는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변화하며 구전되는 특성을 지닌 민담의 현대적 변형일지도 모른다.




 민담, 동화의 옷을 입다




『페로 동화』가 이처럼 오늘날의 동화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로 동화』는 민담을 그 원형으로 하는 이른바 전래 동화에 속하는 작품이며, 오늘날의 창작동화와는 전혀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창작동화는 어린이라는 특수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며 이들의 심리적, 정신적 특성을 고려하여 씌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동화는 어린이와 아동기에 대한 이 시대의 보편적인 견해들을 반영한다. 어린이를 천진난만하고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여기며, 제한된 이해력과 판단력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이와 아동기에 대한 오늘날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에 속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동화는 어린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폭력적이거나 부도덕한 내용, 혹은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힘들다고 여겨지는 내용-어른들의 세계에 관한 내용이나 성(性)적인 것을 다룬 -은 다루지 않는다.

그에 비해 전래동화의 원형이 되는 민담은 특정한 대상을 상정하여 창작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세기를 거쳐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지던 이야기였다. 민담을 듣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어린이와 어른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으며,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민담에는 어린이가 듣기에 부적합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설사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어린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위한 배려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필립 아에리스의 『아동의 탄생』에 의하면 16세기와 17세기의 프랑스 사회에서는 어린이 앞에서 상스럽거나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던 아동기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은 근대 이후에 형성된 이데올로기이다. 중세와 근대 초까지 어린이들은 이유기를 지나면 바로 어른들 세계에 편입되었다. 대다수 민중 층의 어린이들은 어른들처럼 고된 노동에 시달렸고 교육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아동기가 인생의 특수한 단계로서 보호가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아직 싹트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민담은 문자와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점차 글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민담은 기록되는 과정에서 채록자의 세계관과 관심사가 반영되기 마련이었다. 『페로 동화』보다 100여 년 늦게 출판된 그림형제의 민담모음집에는 독일인들에게 언어적, 문화적 일치성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어 통일에 도움을 주려하는 정치적 의도가 드러나 있다. 

 페로가 활동했던 고전주의 시대에는 민담을 저급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새로운 이성의 시대에 민담은 비합리적이고 유용하지 못한 것이며 사실과는 거리가 먼 황당한 이야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17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살롱(Salon)을 중심으로 페로나 드 오느와 부인의 작품을 통해, 옛이야기들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청교도들의 지배 하에 있던 영국이 여전히 민담을 배척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후대의 프랑스에서도 장 자크 루소 같은 이들은 민담뿐 아니라 우화마저도 쑬데 없는 것으로 여겼다. 

페로는 1694년에 운문 이야기 3편(Griselidis, Peau d'âne, Les Souhaits ridicules)을 발표하고, 1695년에 4편의 산문체의 이야기를 묶어 『엄마거위 이야기(Contes de ma mère l'Oye)』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어서 1697년에는 『교훈을 붙인 옛날 이야기(Histoire ou Contes du Temps passé, avec des Moralitez)』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페로 동화』라고 알려진 8편의 이야기들이 바로 이 책에 실려 있다. 이 중 「도가머리 리케」만이 페로의 창작물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나머지 작품들은 민담에서 채록한 것이다. 그림동화가 명백한 정치적 의도로 만들어진 민담집이라면 페로의 동화집은 비교적 오락적 가치에 치중했다고 여겨진다.

페로 이전에 나왔던 민담집이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1643년 잠바티스타 바질(Giambattista Basile)의 『펜타메론(Pentameron)』에 실린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는 왕자가 잠자는 공주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공주는 잠자는 상태에서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페로는 전래되던 민담의 내용을 어린이들이 읽어도 될 정도로 순화하고 다듬어 자신의 민담집에 실었다. 적어도 처음 출판되었던 당시의 페로의 민담집은 어린이만을 위한 작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페로의 민담집을 이 시기 처음으로 출현하기 시작했던 동화의 범주에 넣는 것에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페로의 민담집이 출판되었던 근대 초라는 시기는 필립 아에리스에 의하면 유럽사회가 어린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였다. 중세 사회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했고, 따라서 어린이만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관념 역시 없었다. 그러나 근대 초에 이르자 아이들의 세계에서 어른들의 세계로의 이행을 위한 준비기로서의 아동기라는 개념이 싹트고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페로 동화』가 나온 때는 일상생활에서 어린이들에게 걸맞은 훈육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페로 자신이 3남 1녀의 양육을 직접 책임져야 했던 홀아비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의 동화가 일차적으로 그의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한다.




 페로의 시대




페로가 활동했던 17세기의 프랑스는 루이 14세에 의해 절대군주제가 정착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프랑스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집권층은 군주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봉건 귀족의 잔여 세력을 무력화하려고 애썼다. 페로 역시 루이 14세가 정치적 지지를 얻으려는 과정에서 귀족으로 승격한 부르주아지 출신의 법복 귀족이었다. 민족주의와 절대주의를 지향하는 시대정신 역시 이 시기에 싹트기 시작했으며, 루이 14세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에서 예술과 학문이 찬란하게 꽃을 피우기도 했다.

17세기는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에 대한 동경을 이어받은 시기이기도 했다. 당대를 풍미했던 고전주의는 그리스적인 규율과 질서의 세계를 부활시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이 시기에 케플러와 갈릴레오, 뉴턴, 파스칼 등의 과학자들은 발견과 탐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이들의 업적은 사람들에게 이 세계를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한 하나의 조직체로써 이해하게 했다. 또한 이 시기 데카르트를 비롯한 철학자들은 그들의 철학체계를 완성하여 이성과 진보의 시대의 도래를 준비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지성들은 증명할 수 없는 과거의 일이나, 어떤 유형의 것이든 초자연적인 현상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 시기는 프랑스 문학사상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중 하나로 꼽히며, 빼어난 문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라신, 몰리에르, 라 로슈코프 등이 페로의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들이다. 절대 권력의 비호자였던 수상 리슐리에는 왕의 절대권이 학계와 문화계에도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생각은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창설로 이어진다. 샤를 페로 역시 167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고, 이후 페로는 아카데미 안에서 벌어진  ‘신구논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오직 이성의 절대성만을 주장하며, 고대의 권위를 부정하기에 이르자 이런 생각은 당대의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파스칼 역시 인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며 진정한 고대는 현대인에게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고전주의가 지배하던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도 점차 고대인에 대한 맹목적인 모방에 반기를 들며 예술에 있어서의 완전한 자유를 주장하는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페로 역시 고대의 권위를 부정하는 아카데미 안의 ‘신파(新派)’였다.

1687년 병환을 앓고 있던 루이 14세가 완쾌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아카데미의 회원들 앞에서 샤를 페로는 자작시 「위대한 왕 루이의 시대」를 낭송한다. 이 시에서 그는 호메로스를 비난하고, 몰리에르와 드 말레르브 같은 당대의 작가들이 그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칭찬했다. 이는 고전주의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으며 아카데미 안에서는 이를 둘러싸고  논쟁이 시작되었다. 페로는 논쟁이 터지자 『신구비교론』이라는 책을 통해 모든 학문과 예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보되기 마련이며, 루이 14세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고대인들보다 우수할 수밖에 없다는 논지를 전개했다. 페로에 따르면 루이 14세와 같은 훌륭한 군주의 통치 덕분에 이러한 귀결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격렬한 논쟁 끝에 상황은 신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이후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는 고대에 비해 당대가 우수하다고 믿는 관점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페로의 자작시 낭송은 전통의 한계와 진보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편 부르주아 출신의 법복 귀족이었던 페로에게는 자신의 신분적 이익의 유지를 위해 절대 왕권과 손을 잡는 것이 필요하기도 했을 것이다.




원전으로 읽는 『페로 동화』




『페로 동화』에 실린 8편의 이야기들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전래 동화에 속한다. 민담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전래되는 지역의 문화와 사회상을 드러내 주고 있으며, 문자화되는 과정에서 채록자의 세계관이 반영되기도 한다. 우리는 『페로 동화』의 곳곳에서 페로 자신이 덧붙인 교훈과 견해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나름의 견해를 덧붙인 것은 작품을 통해 교육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풍자적인 어조로 전달되는 이러한 메시지는 억지스럽지 않으며 작품이 지닌 문학적 향취를 저해하지 않는 한에서 시도된다.  

「신데렐라」는 다양한 판본을 통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그림형제의 민담집에도 페로의 동화와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한 신데렐라 이야기가 실려 있다. 우리 나라에서 전래되는 민담인 「콩쥐 팥쥐」 역시 비슷한 구조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들에는 공통적으로 마음씨 나쁜 계모와 이복 언니가 등장하며, 착한 심성을 지닌 주인공은 역경을 딛고 왕자와 결혼한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한 원형을 지니고 있는 것이 민담의 특징인 것이다.『그림 동화』판의 「신데렐라」에는 이복언니들이 맞지 않는 구두에 발을 넣기 위해 발을 자르는 장면과, 새들이 이복언니들의 눈을 뽑는 장면이 여과 없이 묘사되어있다. 그에 비해 페로 판에 등장하는 신데렐라는 이복언니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궁에서 함께 살게 한다. 이런 차이는 『페로동화』의 원형이 되는 프랑스 민담이 다른 지역의 민담에 비해 비교적 잔인한 부분이 적고 온건한 내용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데렐라는 매우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신데렐라뿐 아니라 『페로 동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상은 비슷한 특성을 보이는데 이는 당대의 사회가 원했던 대표적인 여성상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왕권의 절대성은 가부장의 권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확립되어 가고 있었으며, 또한 이 시기는 여성과 아이들이 가정이라는 권력 안에 묶여 행동이 통제되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하다. 「신데렐라」는 당시 가부장들이 원했던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당나귀 가죽」은 루이 14세 역시 어린 시절에 즐겨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왕국은 여러 면에서 절대 왕정기의 프랑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 등장하는 왕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강한 왕으로 묘사되며, 왕의 보호 아래 왕국에서는 아름다운 예술이 꽃을 피운다. 사람들은 왕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일이라도 왕이 지시를 내리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왕조차 이성을 잃고 격정에 휩싸이자, 자신의 딸과 결혼하려는 망상을 품게 된다. 공주는 왕을 피해 당나귀 가죽을 쓰고 달아나서 고초를 겪지만 결국은 다른 나라의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된다. 인도 사람들과 무어인들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이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대목에서 당시의 프랑스 사회의 화려한 번영과 그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페로의 창작물로 알려진 「도가머리 리케」는 페로가 인간 정신의 힘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알게 해주는 작품이다.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있던 주인공들은 서로의 사랑을 통해 균형 잡힌 존재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정신적인 능력이 없는 경우가 더 좋을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만, 결국 그들의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지닌 지적인 능력이다.

이 밖에도 『페로 동화』에는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내용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품위 있는 예법을 보여주는 주인공들은 보상을 받는 등, 형식적인 예의의 중요성이 높이 평가된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페로의 통찰은 때로 매우 날카로우며 문학작품을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페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성과 진보의 신봉자였던 페로가 환상과 초자연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민담집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닉하게 느껴진다. 페로 동화에는 요정들이 초자연적인 힘을 행사하고, 동물이 사람보다 영리하게 굴기도 하며, 주인공들은 때로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그렇다면 페로는 이런 이야기들의 가치가 무엇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당나귀 가죽」의 앞머리에서 이렇게 말함으로써 페로는 이 물음에 대답한다.




우리는 왜 우리의 마음을 교묘하게 매혹시키는 식인귀나 요정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감탄해 할까요? 그것도 며칠 밤을 꼬박 새운 탓에, 오히려 잠을 좀 자고 싶은데도 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삶의 가장 올바른 도리와 이치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쓸데없이 사용한다며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여러분들의 당연한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지금부터 당나귀 가죽이란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고자 합니다.




어쩌면 이 말은 민담을 비롯한 허구적인 문학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에 대해 설명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이성과 절대왕정의 수호자이기 이전에 문학가였던 페로는 자신의 동화를 단순히 딱딱한 교훈에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당의를 입힌 것으로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상상력이란 문학이 지닌 본질적인 힘인 것이다. 『페로 동화』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우리를 즐겁게 하며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텍스트이다. 원전을 통해 당시의 사회와 풍습에 대해 음미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어린이들과 함께 읽어도 될지에 대한 것은 당신이 결정할 문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