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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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버드 스트라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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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가리고 책읽는당



출판업계를 다루는 드라마에서 신박한 마케팅을 보았다. 분명히 새로운데,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아이디어였다. 작가가 누구인지, 어떤 제목과 디자인을 하고 있는지 많은 정보를 주지 않은 채 선물포장하여 ‘나에게 주는 선물’로 등장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비의 ‘눈가리고 책읽는당’을 알게 되었는데 너무 반갑게 느껴졌다. 책에 대한 단서가 될 키워드 몇 가지만 알려주고 출간되기 전까지 알 수 없는, 재밌는 홍보방법이라 생각됐다. 왠지 모를 반가운 마음이 신청했는데, 당첨이 되어 읽어본 소설은 정말 출간되기 전까지 아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눈치 챈 분들은 다른 SNS 속 힌트를 통해 알았다고 하는데, 정말 순수하게 작품만 읽고 알아본 분들도 분명 있을 것 같다. 대단한 독서가들은 알았을 수도 있지만, 그런 의미로 난 게을러 빠져서 아무런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리하고 이번 ‘눈가리고 책읽는당’의 작품의 정체는 바로, 구병모 작가님의 신작소설 『버드 스트라이크』였다.


힌트가 될만한 키워드는 #새인간 #작은날개 #영어덜트소설



공개되고 보니, 그래 한 번 읽어본 문체였어,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그저 뒷북일 뿐.


구병모 작가님의 작품은 여러 매체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아가미』, 그리고『한 스푼의 시간』를 읽은 적이 있다.



작가님의 문체를 뭐라 잘 표현하고 정의할 순 없지만, 10대 소년, 소녀의 섬세하고 예민하면서도 맑은 감성을 작품 속에 잘 묻어내는 강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마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만월의 여름밤 속을 걷는 기분이 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유의 분위기가 마음을 아릿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게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서 여운이 남긴다. 위태로움과 에너지, 다양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는 휴머니즘으로 표현되는 인간다운 것에 대해 다루기도 한다.



처음 프롤로그 장면처럼 보이는 작품의 시작은 낯선 명칭과 인물묘사에 다소 당황스럽게 느껴지고 선뜻 잘 흡수되지 않았지만,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는 순간 몰입을 더하여, 책장을 넘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버드 스트라이크』는 날개를 가지고 태어난‘익인(翼人)’들과 도시 사람들 간의 갈등 속, 태어난 환경 때문에 무리 안에서도 겉도는 듯한 주인공들이 앞으로 닥칠 위기 앞에서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익인과 벽안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비오가 청사에 붙잡혀 심문을 당하는 부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어느 날 고원 지대의 익인들이 도시까지 날아와 시 청사 건물을 습격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고, 작은 날개로 태어나 비행 능력이 부족한 비오는 습격 직후 도시인에게 붙잡혀 청사에 갇히고 만다. 그런 비오에게 루라는 이름의 도시 아이가 찾아오고, 비오는 루를 인질로 삼아 청사 밖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해 루와 함께 고원 지대로 돌아가게 된다.



배다른 형제이기에 늘 휴고와 탄과는 다르게 괄시와 무시를 받던 루는 베풀고 나누는 게 생활인 익인들의 생활터전에서 편견과 차별 없는 평화로운 일상과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미성숙한 소녀이지만, 누구보다 대범하고 세심하며 옳다고 여기는 부분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줄 아는 루. 그로 인해 익인들의 사회에게 태생이 다르다는 이유로 은근히 배척되었던 비오는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한 발 나아가는 의식을 무사히 치러낸다. 운명처럼 엮인 두 사람 앞에는 또 다른 위기와 시련이 닥쳐오지만, 다시 발돋움하여 힘찬 날개를 펼치며 많은 변화를 이끌어내게 된다.



본래 외조부와 같이 살며 평범한 일상을 살던 루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출생의 여파로 인해 도시를 관할하는 시 청사에서 갇혀 살게 된다. 자신과 다른 종족이기에 호기심의 눈으로만 바라봤던 루는 비오를 만나며 편견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직접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소극적이고 불안했던 과거와는 달리 당차고 긍정적인 기질을 맘껏 펼치게 된다.



처음에는 낯설어했지만 비오의 다른 형제 가하와 지요, 그의 어머니 시와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루를 그들의 생활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비슷한 상처를 가진 루와 비오는 그렇게 가까워진다.



자연과 조화된 삶을 추구하며, 주어진 그대로의 생활과 규율로써 살아가는 익인들과 달리 무기 제조, 인공정원 등 발달된 기술력을 토대로 착취와 폭력을 반복하는 도시인들과의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착취도 모자라 그들의 가족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비오의 아버지는 도시에서 실종된 채 발견되지 못한 것처럼. 위기의 씨앗의 전조는 빗나가지 않았고, 가하와 비오를 구해내고자 하는 루의 혈투는 가히 눈물겹다.



자신의 위치를 증명하고자 했던 마이는 방위산업체 무화의 연구소장이지만, 익인을 생포해 실험체로 삼는 무자비한 모습까지 보인다. 불행히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일은 결국 발생되고, 이후의 루와 비오는 각자 선택했던 길을 떠나게 되었지만 결국은 만나게 되고 말 것이란 걸 안다.



다른 익인과는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기에, 작은 날개를 가졌기에 모든 게 불리하다고만 여겼던 비오는 루를 향한 진심어린 마음으로 온힘을 다해 그녀를 치유한다. 그의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감싸 안으며.



비오의 가족들과 대비되는 루의 가족들. 전 시행의 수석 비서로 어머니이지만 자신과 딸을 지키기 위해 냉정하고 사무적일 수밖에 없었던 아마라, 전 시행의 자리를 채우고자 그 압박감에 배다른 동생인 루를 더 괄시하는 시선으로 보았을 휴고와 다정하지만 가진 힘이 없었던 탄까지. 각 인물들이 가진 개성이 탁월하여 입체적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 또 한 번의 폭발과 상처는 너무나도 커서 읽어나가는 게 힘겹게 느껴졌지만.



판타지적 요소와 현실적인 측면을 고루 담긴 이 작품은 여러 색채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여 이야기의 특성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며, 성장과 포용, 그리고 조화로운 삶과 새로운 도약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아직도 세상에는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고 있고 자신의 입장에서 행하는 이기심은 끝이 없다. 루와 비오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느낀 건 이를 가여워할 수 있는, 너른 품을 가진 작가님의 포용력이었다.




버드 스트라이크는 새와 비행기가 충돌하는 걸 말한다. 관심을 두지 않아서 몰랐었다. 자신의 영역에서 날아올랐을 뿐인데 죽음에 가까워지고 만다. 이와 반대로 인간은 기술의 발전을 통해 더 넓은 세계를 나아가게 되었지만, 결국 서로가 부딪히는 순간 각각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비극이 발생되는 것이다.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기술력을 더욱 발전시켜 파장이나, 신호를 통해 새가 피할 수 있게 할 것인가. 보통 이륙이나 착륙할 때 가장 많은 사고가 발생된다고 하니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는 조화를 어떻게 얻어야 할까, 어려운 문제이다.



그리하여 루와 비오의 비행의 어느 극점에서 다시 재회하게 될 것인가. 함께하고 싶었지만 함께 할 수 없었던 마지막 순간 이후, 지요와 주고 받은 편지에서 두 사람의 힘찬 날갯짓을 통해 결국 만나게 될 것이라는 실마리를 남겨준 듯 하여 다행스러웠다. 혼란스러운 현실에 매일 분노만 쌓여가지만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된 건 참으로 기쁜 일이다. 평소 운과는 담 쌓은 삶을 살아왔는데, 어쩌다 한 번씩 찾아오는 이런 당첨운에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안아줄 수 있는 이 작품을 많은 이들이 읽어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 리뷰는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땅에 내려앉아 숨을 고르자 책에서 본 대로 익인의 날개는 천천히 접히는 듯 하다 그것이 견갑골 어디로 들어가는지 살필 새도 없이 눈 한 번 깜박이는 동안 사라졌다. 지금껏 그 어떤 연구자도 캐내지 못한, 익인들 스스로도 원리를 규명하지 못하는 비밀. 태어날 때부터 초원조의 축복을 입고 저마다 새의 영혼이 깃든다는 종족이 눈앞에 있었다. - P50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사람들의 마음을 채운 건 우려가 아니었다. 커다란 공포와 먼저 떠난 이들의 영혼은 우리가 항상 함께 있는데, 그들의 자리를 파헤친 모욕을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 P96

빼앗길 것이 남아 있는 한, 도시가 존재하는 한 완전한 평화란 익인들에게 꿈만 같은 이야기. - P117

"그러니 그 작은 날개로 어디까지 날겠는지 고민하기보다는……."
이제는 날 수 없는 몸으로 초원조의 부름을 기다리는 옛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나." - P122

그것은 개인의 욕망을 다스리고 상대를 존중하면서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그 전까지의 어떤 이야기보다 길고 자세하다. 쾌락에 충실하되 그 어떤 황홀한 경지라도 순간의 섬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 것. 침묵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으며 동의와 거부를 섬세히 구별하여 상대의 상태와 의사를 파악하고 그 무엇도 강제하거나 훼손하지 말 것. 합의 없는 임신은 없도록 할 것. - P159

아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기다리지 말고 원하는 어디든 날아가라. 내가 따라가면 되니까. 너무 너무 높이 날아간 까닭에 이 세상을 벗어났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간격만큼 내가 쫓아갈 것이다. - P299

어서 더 멀리 날아가. 네가 원하는 만큼, 어디까지든.
지금, 내가 가.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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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총총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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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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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삶에서도 빛나는 생의 의지



신 관능파라 불릴 만큼 성애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는 사쿠사기 시노의 『별이 총총』은 훗카이도를 배경으로 한 연작소설집이다. 


황망한 자연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중심에는 주변인들의 시점으로만 등장하는 지하루라는 여성의 생이 중간중간 길게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 사키코로부터 시작된다. 열여덟 살에 처음 사랑에 빠져, 그 첫사랑의 상대가 유부남인 줄도 모르고 아이를 낳았던, 그렇게 시작된 미혼모의 삶을 선택한, 어떻게 보면 마냥 밝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키코는 낙천적인 모습을 보인다. 본가의 어머니께 아이를 맡기고 스낵바에서 일하며 여전히 어리숙하게도 사랑을 믿는, 명랑한 모습을 보인다. 스스로 인생의 내리막길을 선택하는 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두 모녀의 삶은 다른 듯 비슷한 양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지하루의 인생의 서막을 그녀의 어머니가 등장하며 열어주었듯, 주로 중심인물의 내면 심리를 다루기 보다, 주변인의 시점과 다른 인물의 말로 표현되는 구성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형태는 이제 종종 보아 익숙한데,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구도로 진행되기에 자연히 관찰자의 시점으로 지하루라는 여성의 삶의 여로를 따라가게 된다.



아둔해보인다는 표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할 만큼 허술한 인물로 짐작되는 지하루는 한때는 어머니의 정을 그리워하던, 자신이 할 일을 꾸준히 하던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한 명 한 명 다른 인물들을 거쳐 갈수록 좌절과 희망의 격동보다는 무덤덤한 태도로 그저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자포자기한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웃집 대학생과의 하룻밤으로 임신을, 스트립 댄서를 전전하다, 슈퍼 배달원의 잦은 클레임을 걸었던 고객, 모자의 집에 얽혔다가, 재혼해서 얻은 아이를 버리고 도망치는 모습까지. 자신이 아닌 허구의 인물의 삶을 살아내듯 그저 존재하고만 있는 듯 하다. 



사키코의 기질이나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지하루의 외관에 대한 묘사 역시 단순하지만 편견을 심어주기 쉬운 모양새로 그려지고 있다. 울음과 웃음이 구분되지 않은 얼굴 표정에 상냥하지 않다는 표현, 가느다란 어깨와 허리와는 다르게 풍만한 가슴이라든지, 어느 연령대건 그녀가 가진 허술함때문에 남자들이 그녀를 욕망하고 이에 쉽게 응해준다는 묘사가 불편하기만 했다. 



어디 한군데 발 붙이고 정착하여 살아가지 못하면서, 큰 이탈도 없이 훗카이도 안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형태, 그러한 삶은 영역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는 다양한 관계성이 등장하지만 막장에 가깝고, 자주 등장하는 불편한 서사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관계를 넘어선 애증과 욕망이라고 하기에는 그저 음울하다는 느낌만 준다. 이는 여러 인물군상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형태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 남긴 상처를 자조하며 살아가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요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주로 여성들의 시점에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여성임을 떠나 인간적으로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서는 지하루에게 전후 어떻게 다른 태도를 보이는지 보는 것도 흥미롭긴 하지만 그 정도 뿐이었다. 




관능파, 성애문학의 대표작가라 수식되는 만큼 직접적이지 않고 관능적인 서사를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유능할 지 몰라도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여성들의 성향이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이상한 부분에서 도발적으로 표현되어, 그게 매력적으로 읽히지 않았다. 불과 5년 전에 발표된 작품인데, 묘하게 옛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것 같고, 주 배경이 되는 훗카이도라는 지역을 그려볼 때, 눈이 많이 내리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자연이 주는 시린 냉담함에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고자 생의 의지를 다지는 모양새가 이런 형태로 드러나게 된 걸까 감히 짐작만 해볼 뿐이었다.



때문에 지하루의 삶 자체가 그런 형식으로 뭉뚱그려 지나친 게 아쉽기만 했다. 이를 모두 우위에 선 남성과의 관계로 해소해버리는 게(물론 어느 순간엔 도구로 쓰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아쉬움이다. 어머니의 삶이 그대로 그녀의 삶에 유전되어 대물림하듯 반복되는 게 씁쓸하기만 했다. 지난하고 퍽퍽한 삶에 미움받기 쉽상인 인물이 뒤켠으로 밀려나는 듯한 모습이 아프게만 느껴졌다. 누군가 들어서려 노리는 틈이 아니라 그저 휑하니 구멍난, 상실된 형태로 어머니-딸-손녀로 이어지는 게 안타깝기만 했다. 



이렇듯 초중반부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잘 맞지 않아 버거움을 느낄 찰나 새로운 구성이 등장하여 이야기가 가진 힘에 탄력성을 주었다.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사실처럼 묘사되었는데, 지하루의 삶의 작품의 동일한 제목으로 출간되는 형식이 흥미로웠다. 그 후의 이야기에서 사키코는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밝은 모습을 가지고 있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은 딸에 대한 죄스러움에 같이 살고 있던 주지가 그런 사키코를 대신해  딸을 만나고, 지하루가 작품상을 수상하였고, 자체적으로 만든 책을 쥐어 줬을 때 무난한 결말로 마무리 지어지나 싶었지만 불행은 결코 자신의 길을 되돌아가지 않을 듯이 다가왔다. 



대를 이어 얽히는 여러 삶 속에서 가장 많이 흔들렸고, 아팠지만 아픈 줄 몰랐던, 텅 비어 있다고 느껴졌던 지하루이 생이 가여웠다. 마지막 장의 이야기에서 아야코 역시 어딘가 결핍이 있는 듯 하지만 다부지게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데서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과연, 픽션에 기대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마지막 별에 빗대어 생을 말하는 문장을 보며 이 모든 게 흐릿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삶 속에서도 빛나던 순간이 있을 거라는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이 한 구절을 위해 그토록 곤궁하고 지난했던 삶들을 거쳐왔나 싶었다. 끝이 아닌 시작으로, 그렇게 다시  새롭게 시작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아야코의 앞날에는 좀더 빛나는 날들이 많이 이어지기를 바래본다.




몇몇은 흘러가고, 그리고 몇몇은 사라진다. 사라진 별에도 한창 빛나던 날들이 있었다.

어제보다 숨쉬기가 편해졌다.

나 또한 작은 별 중의 하나

(…)

그이도 저이도 목숨 있는 별이었다. 밤하늘에 깜빡이는 이름도 없는 별들이었다. 

328쪽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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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 - 남자 없는 출생
앤젤라 채드윅 지음, 이수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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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이란, 대체 무엇일까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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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조건 없이 자식이란 이유로 무한한 사랑을 주시는 어머니, 내겐 부성보단 모성이 더 직접적으로 와 닿는 게 크다. 때론 부딪힐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어머니의 큰 사랑 덕분에 그나마 사람다운 모양새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로 모성이란 대체 뭘까, 새삼 질문을 던져본다. 생명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비롯된 것일까, 모성이란 본능인 것일까, 여성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것일까.



여기 이 뜻깊은 질문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룬 작품이 있다. 앤젤라 채드윅의『XX』(남자 없는 출생).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여러 유형의 가족 형태가 등장하는데, 어쩌면 무지와 핍박에 감춰져야만 했던 요소들이 이제야 고개를 들게 된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포츠머스대학 난임연구소에서 발표한 난자 대 난자 인공수정 연구에 대한 인터뷰로부터 시작된다. 동물임상실험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고 비로소 인간에게도 직접적인 시술이 이루어질 만한 단계(두 여성의 난자를 채취하고 그중 하나의 난자 핵에서 DNA를 추출한 다음 다른 난자에 주입하여 결합한 세포를 전류로 자극시켜 자연수정과 유사한 작용을 이끌어내는 시술)까지 이르게 되고, 이에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동성 여성 커플들을 임상실험 대상자로 모집하게 된다.



로지와 줄스는 우연스럽게 만나 운명적인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커플이다. 실용주의적인 측면에 뚝심과 인내심으로 무장한 <포스트> 기자 줄스(줄리엣)와 온화하고 맑은 심성을 가진 서점 직원 로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만났던 이 둘은 자신도 몰랐던 성정체성을 깨닫고 아름다운 만남을 지속해왔다. 줄스와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자신들의 아이를 키우고 싶은 소망을 가진 로지와 다르게, 줄스는 회의적인 태도만 보였다. 그런데 포츠머스대학의 난난 임신이 가능하다는 발표를 접하자 이내 생각을 전환하게 된다. 사랑하는 로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이에 대한 제안을 하는 줄스, 로지 역시 기뻐하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빛나는 상상을 더해본다.



여러 커플이 응했지만 최종 두 커플만 임신에 성공하게 되고, 이때부터 줄스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야기는 적정선의 속도로 차분히 진행되지만, 건더더기 없이 팩트만 전달하는 방식으로 몰입감을 더해준다.



언론의 집요한 괴롭힘, 정치판의 쇼, 무지한 연대의 편견과 거짓된 정보를 통한 선동으로 인해 폭력을 배제한 하루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일상이 이어진다. 10년을 넘게 직접 발로 뛰며 느꼈던, 기자로서 언론의 습성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던 줄스는 철저히 무시와 무응답으로 가려 하나, 여론은 사그라들지 않고 파파라치와 실질적인 위협을 가해오는 괴롭힘과 폭력성은 단계를 거치며 점차 심화된다.



처음은 의심과 배신, 그리고 시험으로 이어졌고, 애써 꾹꾹 눌러왔던 고통의 울음이 터지자 분노가 일었다. 그렇게 힘들게 움튼 생명이 로지의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을 때, 전혀 기쁘지 않고 아이를 갖고자 했던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예전으로 돌아가고픈 줄스, 아예 없던 사실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괴물처럼 느껴지고 스스로를 옭아매는 사슬이 된다.



여기서 더 나빠질 게 있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파국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가속이 붙어 두 사람의 관계마저 흔들리게 만든다. 읽는 내내 줄스의 인내심에 감탄해 마지않았는데, 예전에 어떤 영화에서 봤던 대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불행에 있는 걸 더 안정적으로 여긴다는 표현을. 줄스는 계속해서 언론의 관심이 식기만을 기다리지만, 언론이 한 번 잡은 먹잇감을 놓지 않는 법은 없다. 물론 여기서 등장한 ‘언론’이란 진정한 언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기레기들의 향연이다.



동료와의 관계, 직장생활, 아이에 대한 부담감,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갈등 등등을 비롯한 사람들과 연관된 모든 문제들은 하나같이 더 나빠질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 등장인물에 이입하여 읽는 독자라면 현실감 넘치는 서사 진행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에 답답해질지도 모른다.



자연에서 비롯된 습성을 인위적으로 변화하면 안 된다는 이들의 주장과 같은 쪽에서 바라봤던 이들이 행한 배신과 상처, 무지와 편견의 악의적인 관심과 괴롭힘의 언어폭력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현실 악플과 다를 바 없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아둔함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심리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어쩜 저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도가 지나쳐 되레 너무 실감났다.



답답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줄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일자리 하나 구하기 어려운 시대에 자신의 꿈이었던 기자를 포기할 수 없었고,  사랑하는 로지를 지키고도 싶지만 세상을 홀로 상대하기엔 벅차기만 한, 그래서 자꾸 어두운 그늘 아래 숨으려만 했던 줄스는 이내 스스로를 가뒀던 벽을 깨부수고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참지 않고, 숨지 않고서 실천에 옮기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더 이상 참지 않고, 숨지 않고서 실천에 옮기게 된다.



논란이 되는 화두는 명확하다. 여성끼리의, 즉 동성 간의 임신이 가능하다면 더 이상 남성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게 아니냐는 여론과 닫힌 사고방식 위에 선동하는 정치놀음이 이어진다. 생명윤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개인과 단체, 그리고 사회의 신념은 그렇기에 더욱이 두려움이 대상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짐들을 떠안고 힘겹게 한 발 내딛어 가던 두 사람 앞에는 빛나는 존재만이 오롯이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고통과 갈등, 고민, 걱정 모두 한 번에 잠식시킬 만한 감사한 일만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스스로를 짓누르고 있던 자책과 절망 모두 한 번에 사라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모성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확답하기엔 이른...)



출산에 대해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모성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과연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가. 많은 질문거리를 던져주는 문제작인 이 작품은 단순히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떠나서 사회의 이중적인 면모와 반향, 현실 그대로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의 심리묘사 역시 섬세하고 과장되지 않아서 좋았다. 오히려 이입이 너무 잘돼 공감가는게 커서 문제였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각자의 가치관과 신념이 다르듯 그 다름을 받아들일 만한 태도와 자세 역시 개인이 가진 몫인 것이다.



궁금하여 검색해보니, 그저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비슷한 실험이 이루어진 사례가 있었다. 중국의 한 과학연구소에서 암컷 쥐 두 마리에서 제거되더라도 큰 문제가 없는 유전적 영역을 삭제함으로써 살아있는 새끼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유전적 각인이란 DNA에 부착된 작은 화학적 태그(chemical tag)로, 특정 유전자의 스위치를 끄는 역할을 한다. 그런 태그들은 지금껏 약 100개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배아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http://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news&id=298443&SOURCE=6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야기될 여러 사회적 논점은 어쩌면 명확하기도 하다. 물론 아직은 요원한 일이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학계 내 연구자들 입장 역시 각기 상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생명을 다루는 일에는 늘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실존과 근원적 물음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멀지만 오지 않으리란 법도 없기에. 우선은 늘 염두에 둘 논점들에 생각해보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을 가지는 게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결론은 이 작품이 단순한 흥미로운 요소로만 다뤄지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논제거리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는 데서 좋은 소설이란 걸 말하고 싶다. 정말 좋은 소설인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개인의 취향을 떠나서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관심있는 독자들이면 꼭 한 번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이 리뷰는 한스미디어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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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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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닫힌 문』







‘시요일’ 30만 독자가 사랑한 박소란의 신작시집 

닫힌 문을 두드리며 건네는 다정한 인사


 2009년 등단 이후 자기만의 시세계를 지키며 사회의 보편적인 아픔을 서정적 어조로 그려온 박소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사회적 약자와 시대의 아픔을 개성적인 어법으로 끌어안았다”는 호평을 받은 첫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2015)로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단의 주목을 받았고, 시 전문 애플리케이션 ‘시요일’ 이용자들로부터도 특히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출처: 예스24 책 소개)


 

**

 


■ 물기 어린 나날들


삶의 기본 구성요소인 것 같은 ‘슬픔’은 여러 얼굴을 하고서 존재하는 것 같다. ‘울음’이란 것만 해도 힘찬 생의 기운이 실려 있거나, 비통의 무게가 담겨 있듯이, 각기 상황과 주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살아가며 문득 서글퍼지는 순간들은 무수히도 많다. 울컥하고 터지는 슬픔을 애써 억눌러보기도 하고, 또 부러 외면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이 모두를 버텨내고 이겨내고자 하는 건 곧 지금의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 의 처음 문을 여는 시 <벽제화원>만 해도 읽자마자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게 된 순간부터 이 세상에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고, 문득 되살아난 기억에 괴로워하면서도 함께 했던 순간의 행복함이 떠오르기도 하는, 복잡한 심정에 어느 때부터는 그를 만나기 위해 살아간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삶의 시간은 남겨진 자들이 감당해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하여


나는 살아요 나를 죽이고

또 시간을 죽여요

 


11쪽, <벽제화원> 중에서


 

시인의 시 세계에서는 직접적인 단어나 표현이 등장한다 해도 결코 과하지 않다. 차분하고 덤덤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울컥하는 감정과 눈물이 차올라 목이 메이는 걸 ‘목이 자란다’는 것으로 표현하며, 그 사이 등장한 ‘슬픔’은 흩어져 있는 시어들을 한데 엮어주고 서로 잘 맞물리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목>). 


문틈에 새어들어 온 ‘빛’은 곁에 머무르는 듯 싶지만 이내 멀어지고, 어두운 얼굴은 나를 부르고, <검정>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 시적 자아는 <검정>을 버려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끝끝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검정’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다. 내면이 가지는 근원적 고독 혹은 부정적인 마음, 혹은 구멍처럼 뚫려 있는 공허 등등 모두 읽는 이로 하여금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첫 시집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시집에서도 역시 생활을 다루고 있는 시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사람 사는 모습, 살림살이 대체로 다 비슷하단 생각에 특히 공감이 갔다.


우리의 일상과 다를 바 없는 여러 상황들이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계단 오르는 것에 대한 버거움을 ‘발목을 붙잡는 손’이 있다고 말하며, <상추>를 구입하며 ‘좀 건강해지려고’ 하고, ‘남들처럼 잘 살아보려고’하는 것. 또, 추운 겨울에도 <전기장판>만 있다면 ‘어떤 슬픔에도’ 무던히 잘 견뎌낼 수 있고, ‘가스레인지도 보일러도 켜지지 않는 저녁’에 옆집에서 건네준 설익은 감자를 맛있게 먹는 것(<고장난 저녁>)도, <오래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지긋지긋한 먹고 사는 얘기’를 나누는 것 모두 보통의 생활상을 담고 있다. 


 


종일 떨다 돌아온 날에는 온도조절기에 빨갛게 불이 들

어온 것만으로 안심이 된다

세상 끝 옥탑에 보일러가 도는 기분


(…)


전기장판에 누워 겨울을 난다

어떤 슬픔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74-75쪽, <전기장판> 중에서




시적 자아는 서글프고 지난한 생활 속에서도 아름다운 것을 찾고자 한다. 슬픔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는 말은/아름다운 것’이고 ‘그것을 잃고 난 후/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그것을 아주 갖지 않는다는 것’(<잃어버렸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어떤 삶이든 어느 한구석에 자리한 틈이란 게 있을 것이고, 허락하지 않아도 비집고 들어선 존재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순간 마주하면 놀라 비명을 지르게 되기도 한다. 시인은 이처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이 ‘닫힌 문’을 두드린다.


 


말해보세요 당신,

우리가 어떤 슬픔을 저지른 것인지

슬픔은 왜


또 끝끝내 아름다워지려 눈물을 감추는 것인지



67쪽, <말해보세요> 중에서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

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64-65쪽, <감상> 중에서

 


■ 사랑, 다정한 인사



닫혀 있는 공간으로의 진입, 그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여는 행위가 이뤄진 데는 ‘그저 누가 있을 것만 같아서’라는 이유를 바탕으로 한다. 


문을 열고, 손을 잡고 온기를 나누는 것, 혹은 낯설지만 친숙한 누군가에게 막연한 다정한 마음을 가지며 인사를 건네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손잡이가 돌고 도는 사이/손들은 너무 쉽게 뜨거워지고’ 마치 사랑을 하는 사이에 온기를 나누는 것 같지만, 실은 손으로 치환된 손잡이는 본래의 역할로 돌아가는 것. 


휘청거리는 공간에서 붙잡고 중심을 지탱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렇게 ‘손잡이가 돌고 있는 사이’에 화자는 ‘문 저편/그럴듯한 삶을 시작해’(<손잡이>)보자고 제안하기도 하며, 감추고 있는 것을 차마 내보이지 못하지만, ‘양말을 벗어본 적 없는 내가/너의 곤한 맨발을 오래 들여다보는’(<양말>) 것처럼 나의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고 싶고, 너를 향한 고요한 응시를 하고 싶은 것.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삭은 깍두기 접시를 가운데 두고 함께 밥을 먹는 새벽‘(<가발>)의 소박함, 두 개의 뚝배기가 전해주는 온기야말로 진짜라고 말하는 사랑. 서로가 가진 벽을 허무는 일은 ’누가, 그 누가/부른 적 없는 사랑이 쳐들어‘(<벽>) 온 것과 같다.



사랑을 말하는 자아는 골목의 풍경도 모두 살아 있고 빛나는 것들로 보게 되고, <불쑥> 왔다가고 아무런 예고 없이 고백하고 싶기도 한다. 그렇게 갑자기 피어난 마음은 가까이 다가서기를 주저하기 않고, 오히려 더 무방비한 상태 그대로 거리를 좁혀가는 적극적인 태도도 보이고 있다. 그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척박한 삶 속에서도 담아낼 수 있는 고운 마음이 있다는 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려는 의지가 있다는 게. 


혹은 개인이 가지는 고독의 색채가 짙어져서 역으로 그런 빛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양말을 벗을 수 없다

이 속에 죽은 발톱이 있다고


고백할 수 없다

어둡고 습한 것 불길한 것이 있다고

나는 있다고



48쪽, <양말> 중에서

 


 


곁에 없는 당신

지금 당신도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다고, 빈방에 들어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주저앉은 당신은

구겨진 얼굴을 감싸 쥐고서 아무도 모르게 운다

 

그런 당신 곁에 나는 조금씩 있을 수 있다고


 

53쪽, <마음> 중에서

 


우리는 자주 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무방비의 감정에 대해,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활짝 펴 불을 쬐는 시늉을 할 때가 많았다

(…)

 

불을 끄려면

불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고


 

68-69쪽, <불이 있었다> 중에서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번 만난 적도 없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95쪽, <모르는 사이> 중에서 


 

■ 살아있다,는 감각.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또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새기기도 한다.


공중에서 떨어졌지만 부서지지 않는 ‘나’는 ‘벽돌’을 닮았고(<이 단단한>),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고 멈추지 않으며, 숨 쉬고 있‘고, 괜찮아, 라고 답하기 위해, ‘아직 살아 있기 위해’ 아무도 내 시계를 모르게 한다(<시계>).


흔한 웃음소리와 표정을 하고 있지만 텅 비어 있고, 버리는 일에 골몰해있는(<깡통>) ‘나’는 ‘약을 사 들고 달려가는 밤’(<약>)의 숨소리에서, 때로는 ‘걷는 있는’ 것에서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도 한다. ’계속 걸어‘가며 ’모퉁이를 돌아 다시 걸어오‘고 무심코 ’우측보행을 하는 것‘(<천변 풍경>)과 같이 습관처럼 행해지는 것들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은 되살아난다.


때문에 '살아 있다는'는 감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출근하고 일하고, 다시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고. 반복된 일상 속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순간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죽어있는 상태로 살아 있는 척 행세를 했던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아주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웃거나 분노하거나 다시 슬퍼하기도 한다. 어쩌면 생의 감각이 발현될 때는 몸에 밴 습관들처럼 그 찰나에 나타나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무수한 익명의 그리움이 떠올랐다. 상실을 겪게 되었을 때 그가 없는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해 애써 모른 척 해왔던 시간들에 대해, 이를 직면하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시적 자아를 보며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꿈속에서나마 그리운 인사를 건네고, 잊으면 그만이지만 잊을 수 없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과거의 멈춰진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머뭇거렸던 순간들에 대해서도. 더 이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염려하지 않고, 지나간 시간들에 미련 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아직도 모호한 답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모두 괜찮다, 라는 자기 최면을 걸어 살아갈 뿐 정말 괜찮은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답답하지만 아직은 미성숙한 채로 이렇게 살아 있으며, 살아갈테니 말이다.



(…)

 

숨이 터져나온다 골목 곳곳 익은 숨이

밥물처럼 흘러 흘러넘쳐

때 낀 밥그릇을 껴안고 잠든 개들을 깨운다

개들을 향해 헐떡이며 짖어대는 나의

그림자 짙붉은

나는 살아 있구나


나는 살아 있구나

이 활활한 것을 어서 가져다주어야지



72쪽, <약> 중에서

 


고작 감기일 뿐인데 죄송해요

울먹이면서

멀쩡히 잘 살아갑니다, 실없는 꿈속에서


어디야? 전화를 받지 않는 엄머

거기 먼 집

닫지 못한 문이 있고 여태

늦된 겨울을 건너다보고 있을 엄마, 감기 조심해

 


125쪽, <독감> 중에서



잊으면 그만인 것

 

잊을 수 없다

상자는 있는지 아직 여기 있는지, 죽은 엄마라면

알 것 같다 상자의 안과 밖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129쪽, <선물> 중에서



 **


 

이렇게 또 다시 비루한 서평을 쓰려는 시도를 하게 될 줄이야,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듯 싶다. 같은 짓을 반복하게 되는 걸 보니 말이다. 



박소란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어느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다. 시인분들이 직접 나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고, 낭송하고. 이에 디제이 분들이 시 한 편을 골라 노래로 만들어 들려주는. 그렇게 들었던 시인의 목소리가 일단 너무 좋았고, 낭송하는 작품들이 하나같이 마음이 콕콕 와 박히는 듯이 인상 깊었기에 바로 시집을 구해 읽어보았다. 물론 내멋대로 그냥 읽어보는 것이었다. 



잘 설명할 순 없지만 시 속 세계 분위기랄까, 부족한 표현력의 한계를 실감하며 말하지만, 그저 좋다는 느낌 뿐이었다. 실린 시들 하나같이 삶, 그리고 생활과 연관된 것들인데 그 안의 폭은 깊고 또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돼 있었고, 진솔한 느낌을 주었다. 낯설게 느껴지는 시어들이 한데 모인 듯 하지만 오히려 현실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었고, 여운이 남았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되고 슬픈 현실이 서술되는데 공감이 가면서 위로가 되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도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참 뿌듯하고 행복하겠다, 싶은 동경과 함께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덤덤하게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진한 파동을 일게 하였고, 하물며 시집 제목 자체가 『심장에 가까운 말』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 후로 박소란 시인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면 무엇이든 찾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따끈따끈한 신작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이 출간되었다. 『한 사람의 닫힌 문』에는 ‘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존재가 등장한다. 그저 명명되었을 뿐이다. 굳게 닫혀 있는 문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열고 마는, 삶의 진창에서 마냥 아파하는 게 아니라 낯선 이에게 막연한 다정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온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리운 존재를 그리워하며 살아 있다,는 감각을 실감하는. 


물기 어린 슬픔은 여전하지만,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많은 위안이 되어줄 그런 시들로 가득하다. 정말 덤덤하지만 다정한 인사를 건네준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심신에 시의 온기를 나눠주는 고마운 시집을 더불어 나누듯 누군가에 꼭 선물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역시 참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리뷰는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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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 안경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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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 안경』






**



【작품 소개】


‘기억의 작가’ ‘페라라의 작가’로 불리는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숨은 거장 조르조 바사니(Giorgio Bassani, 1916~2000)의 1958년작. 단편집 『성벽 안에서―페라라의 다섯 이야기』, 장편소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과 함께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바사니의 경장편 소설이다. 


『금테 안경』을 두고 이탈리아 작가 엘사 모란테는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의 하나”라 했고,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아마도 바사니의 최고작일 것”이라 극찬했으며, 안드레아 카밀레리는 2000년 바사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페라라의 위대한 작가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았다. 또한 이탈로 칼비노는 이 작품을 읽은 직후 프랑스 세유Seuil 출판사의 프랑수아 발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사니를 “요사이 등장한 이탈리아 작가 가운데 가장 수준 높은 작가 중 하나”로 평가하기도 했다.  (출처: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작품 속 주인공은 페라라의 성공한 의사 아토스 파디가티다. 온화한 성품의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의사이자, 풍족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중년의 신사이다. 페라라 시민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으며 잘 살아가던 이 신사에게 사람들은 문득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이렇게 훌륭한 성품의 인물이 왜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생활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말은 많이 모일수록 점차 사실화가 되는 바 소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예로, 파디가티의 성향이 동성애자라며 수군거리게 되었고, 어느새 납득하게 되었으며, 곧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시대적으로 구속받는 상황이었기에 사람들의 관심도 점차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물론 당사자는 그 어느 하나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반드시 이 선량한 신사에게 모욕을 주고 농락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매력적이지만 오만한 젊은 청년은 고통과 상처만 주는 존재이다. 자신이 대단한 인물인양 착각하는 이기적인 인물에 매혹되는 어리석은 존재가 또 인간이기도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연인이라고 지칭될 수 없는 관계 속에 얽매이고 한줄기 희망도 품었다가 친숙한 사람들 앞에서조차 욕보이게 되고, 종국엔 비참하게 버림받는 인물, 파디가티는 초반에 묘사된 모습과 달리 줄곧 당황하고 상처받고 휩쓸려 끝끝내 비극적인 선택을 남기게 된다.



이런 파디가티에 대해 말하고 있는 화자인 ‘나’는 이 중년 신사에게 연민을 가지게 되고 곧 친구가 된다. 관찰자이자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하던 ‘나’ 역시 페라라에 사는 시민이자, 볼로냐 대학을 다니던 학생이었고, 또 유대인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살았지만 과거의 아픈 역사가 있기에 언제고 불안함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던 나는 반유대주의적 인종법 시행을 앞둔 1930년대 어두운 시대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 절망에 잠긴다. 무솔리니 파시즘 체제가 들어선 1920년대 이후, 체제의 위기의식 없이 안일한 동조를 하며 살아가던 유대인 공동체는 갑작스러운 인종법 시행 발표 관련하여 배신과 당혹에 휩싸인다. 반유대주의라는 반복되는 역사의 불안함에 어두운 밤거리를 헤매는 나와 그리고 홀로 남게 된 쓸쓸한 중년 신사 파디가티,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떠돌이 개 한 마리.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 공간은  페라라와 볼로냐, 리초네, 다시 페라라로 이동하는데 서사를 전개하는데 각각의 전환점이 되어준다. 특히 해변 휴양지 리초네에서는 쌓여있던 갈등과 긴장감이 표출되어진다.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 느끼는 고독감과 외로움은 이야기의 끝을 향해 갈수록 더 짙어지는데, 과연 그들이 그 안에 속해 있었을 때에도 고독하거나 외롭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작품 속 이 두 인물은 얼핏 평화로워 보이는 세계 속에서 위선과 경멸에 휩싸인 시선과 시대상에 맞물려 폭발하는 시점을 마주하고, 이내 버려지고 외면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 모든 서사는 직접적인 사건들로 존재하지만 표현방식은 직유든 비유든, 에둘러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더 유려하고 비극적인 인상을 남기는 듯 하다. 어두운 밤거리, 고독한 두 인물의 배회랄까, 그리고 그 마지막은 매우 쓰기만 하다. 



머릿수로 결정되는 무리의 가치관의 무서운 점은 바로 이런 지점이다. 자신들이 믿는 게 옳다는 신념으로 확신하는 태도,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외면하는 태도 말이다. ‘그들’과는 엄연히 다르고, 더 우월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음. 모든 게 평화롭게 수용하는 세계란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조심스럽게 천천히, 그렇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이렇게 삭막하게 위태로운데 작품 속 시대에는 얼마나 더 숨 막히고 참혹했을지 가히 짐작도 가질 않는다. 


바사니의 작품을 처음 접해보는데, 그렇게나 많은 작가들이 하나같이 좋은 문체라고 칭송하는 데는 이러한 태도가 뒷받침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모순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인 요소와 그가 느꼈을 심리적 요소가 부합되어 특유의 문체가 완성되었을 것 같다. 차분하고 담담하면서도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극과 모순된 태도에서 아름다운 문체가 발현되니 역시 문학은 행복한 삶을 가진 사람이 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슬픔과 아픔이 있고, 좌절과 절망이 있기에 이를 위로하고 위안을 주기 위해 글을 쓰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문득 생각해본다. 



**



빛을 등진 그의 모자는 날벌레 무리에 둘러싸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드높은 가지 위의 거대한 새처럼 걸터앉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카롭고 단호한 목소리로 한 점 한 점 득점 수를 외치며, 경기가 끝날 때까지 공평한 심판이라는 자신의 임무에 몰두한 채 그 위에 머물렀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하루하루 밀려오는 지독한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91쪽 

 


자신을 멸시하는 연인으로 인한 그의 고통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고백하자만 그의 마음을 가늠하는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연민보다 혐오감이었다.   97쪽


 

매우 가까운 장래에 그들, 이교도**들은 칠팔십 년 전에야 마침내 우리가 벗어났던 참담한 중세 구역의 구불구불한 좁은 길에다 또다시 우리를 떼거리로 몰아넣으려 할 것이다. 우리는 겁먹은 많은 짐승들처럼 철책 뒤에 차곡차곡 쌓일 것이고, 거기서 절대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     111-112쪽


**Goi, 유대인 입장에서 비유대인, 이교도를 가리킬 때 쓰는 말. 히브리어로 ‘백성’이라는 뜻으로, 보통은 Goy로 쓴다.


 

(…) “이처럼 자신의 본성을 받아들여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지? 너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 인간에게도 다분히 동물성이 존재하는데, 과연 인간이 복종할 수 있을까? 동물이라는 것을, 단지 한 마리의 동물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123쪽


 

지난 두 달 동안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고독감이 바로 그 순간 한층 더 심해졌다. 총체적이며 결정적이었다. 나는 나의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142쪽




** 덧붙이며

매우 늦은 후기이지만 고마운 이웃 연꽃폴라리스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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