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아메리카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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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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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시대배경은 이러하다. 1990년 초반 에너지 고갈에 대한 문제로 인해 미합중국의 붕괴 이후 생긴 인구급증 문제,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대규모 기후 제어를 시도하게 되고, 이러한 계기로 인해 아메리카 대륙의 기후는 격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역시 뚜렷하게 드러나는 시선은 시대적 배경을 배제할 수 없음을 뜻한다. 지금은 다르게 볼 수 있는 측면이지만 이전에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던 요소들에 대하여. 에너지 고갈의 문제점을 논할 때 개발도상국들의 산업화를 특징적으로 거론하는 걸 보면 특히 그러하다. 지금은 그 개념과 보는 관점도 달라졌지만, 이를 원인으로 보고 결과를 분석하는 방식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독법이 될 것 같다.)



강대한 산업국의 몰락, 생명력을 잃어버린 듯한 미국이란 나라의 시민들은 안전한 농촌으로, 대서양을 건너 이주하기 이른다. 2030년에 이르자 미국은 완전히 버려진 땅이 되었고, 정부와 국체가 모두 소멸되어 버린다. 



한때는 강력하고 비옥했던 땅이자 찬란하게 빛났으나, 10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엔 허황된 금빛 모래사막의 세계로 변해버린,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떠나는 아폴로호. 선장인 스타이너와 기술자 맥네어, 정치장교 오를롭스키와 원정대의 주목적인 방사능 수치를 조사하기 위해 올라 탄 앤 서머스 교수와 리치 박사, 그리고 출생의 비밀과 친부와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밀항한 젊은 청년 웨인까지. 



이렇듯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각 인물의 시선이 다른 인물로 향할 때 시점이 변환되어 스스로 자신의 욕망에 대해 서술하는 처음과 달리 이후에는 주로 웨인의 시점으로 모든 상황이 전개된다. 폐허가 된 도시의 차기 대통령이 되길 원하는, 허무맹랑한 꿈을 진실로 믿고 출생의 자부심을 가지는 청년 웨인의 시선으로.



황량한 모래 사막으로 변해버린 뉴욕 거리와 헛된 환상과 오해들의 민낯 앞에, 이들의 여정의 본격적인 시작은 탐사대가 대사막을 건너가면서부터 비롯된다. 모래밖에 보이지 않는 도시 위에 펼쳐지는 탐사대의 여정의 첫 시작은 다소 산뜻하게(?) 표현되는 듯 했으나, 이내 그 풍경도 치열한 욕망 뒤에 생존 본능이 앞선 정신착란적 세계의 장면 묘사로 이어진다. 



도망간 선원들을 대신해 물 배급등 탐사대의 중요 보급품을 맡게 된 웨인은 마이웨이로 자신의 길을 가는 스타이너 선장과 자주 부딪히게 된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힘들게 적응해가려 했지만 끝내 낙오된 신세로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들까지. 그리고 신기루로 그려지는 여러 양상들. 점점 그 혼란한 세계에서 갈피를 잡기 쉽지 않고, 너무나도 허망한 이야기 전개에 언제 진짜 정체를 드러낼지 인내하고 기다리며 책장을 넘기게 한다.  


관료, 우주비행사, 갱단, 게이, 이혼자 등 인디언 부족으로 지칭되는 공동체들이 등장하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친부로 보이는 과학자 플레밍 박사도 등장하고, 찰스 맨슨이 대통령으로서 군림하는 세계로의 진입에도 거침이 없다.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가 1981년임을 감안한다면 작가가 상상한 미래 세계와 현재와 어떤 점을 비교하여 살펴보면 좋을지, 이것 또한 훌륭한 독서 포인트가 될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는 지독히도 인물을 한계까지 밀어붙이지만, 끝까지 중심은 잃지 않도록 한다는 점이 다. 미치광이의 머릿속을 들여본 듯한 느낌마저 준다. 



허상의 세계이지만, 그 상상력이 가진 힘이 강력하고 꽤나 현실적이기도 하면서도 핀트가 어긋나는 측면도 있다. 마치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서사의 힘에 하나씩 이야기의 벽을 무너뜨리며 돌진하기에 무심코 따라가게 되지만, 그리하여 눈앞에 보고 느낄 수 있는 진실이 무엇인가, 하고 질문만 덩그러니 남겨진다. 



웨인의 꿈처럼, 희대의 살인마가 대통령으로서 묘사되는 세상에서 미치광이를 물리치고 차기 대통령을 꿈꾸기도 했지만, 이내 새로운 현실 속 꿈을 그린다. 과연, 허황된 세계 속 환상일지라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의지와 힘이 있다면 이는 곧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토록 치열한 욕망의 실현을 말이다. 마치 이기적이고 정복하고자 하는 지배자적 욕구를 실현함에 있어서 필요충분 조건같은. 



어지러운 소용돌이 틈에서 빠져나와 현실에 발을 내딛고자 하니 현기증이 난다.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의 구현을 이처럼 실존했던 인물을 호명하고, 가상인물과 함께 한 공간에서 존재하게 하며 세밀한 세계를 구축한 작가의 필력이 가히 대단하다. 그만큼 서사가 가진 힘도 강력하다. 이에 독자는 중심을 잘 잡고 읽어야 할 것 같다. 난 당시 미국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도 무지했고, 그저 이야기로만 읽으려고 하니 한계가 빨리 왔던 것 같다. 다 부족한 독자 탓이다.



편견이란 이렇게 무서운 게, SF에 대한 알레르기 같은 거부반응으로 몇 번이나 책장을 열었다가 덮었건만, 어느 순간 술술 읽히더니 과연 내가 읽고 있는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어 주긴 했으나 결국 손안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어 허망하다. 그런데 이야기의 끝은 활기있고 발랄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니...도통 영문을 모르겠다. 



신비하지만 그로스테스크하고 파괴적면서도 새로이 재탄생되는 이 세계 속에서 해체된 문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과연 무엇인가.


20세기 후반에 근원을 둔 미국 신화의 탐사 여정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던가.


그리하여 넷플렉스 영화화를 앞둔 이 작품이 영상매체로써 구현되어 화면을 통해 접하게 된다면 상상력이 부족한 독자는 이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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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 케이블이 상당수 끊어진 채 녹청으로 뒤덮여 은은한 구릿빛을 머금은 거대한 건조물은 마치 무심한 바다를 향해 마지막 연주를 마치고 그대로 자리에 몸을 누인 하프처럼 보였다. 

10쪽



언제나 평원의 주민이나 우주비행사의 혈통이 아니라는 사실에 남몰래 좌절하며 살아온, 피닉스와 패서디나의 내과 의사들의 후손인 자신의 힘으로, 이제 자신의 나라로 돌아왔으니 다시 말을 몰 때가 되었다. 한쪽 발은 대지의 등자를 딛고, 다른 한쪽 발은 우주를 향한 운에 맡긴 채로.   47쪽



라스베이거스에서 들어온 마지막 보고에 따르면 세계 도박의 수도였던 도시는 폭풍우가 만든 호수에 반쯤 잠겨 버렸으며, 룰렛은 모두 멎었고, 호텔의 꺼져 가는 불빛이 물에 잠긴 사막의 초록빛 수면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미국의 실패와 수치를 모두 담아내는 가혹한 거울처럼. 75쪽



웨인도 이내 깨닫게 되었다. 미 대륙 횡단 계획을 세운다는 핑계를 대며, 그들은 제각기 자기네 두개골을 한 바퀴 두르는 훨씬 긴 사파리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115쪽



이번 탐사의 진짜 목적에 대해 리치와 대화를 나누려 시도해 봤다. 우리 각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특별한 '아메리카'를 찾아내기 위한 시도였다. 맥네어가 죽기 몇 주 전에 아폴로호의 갑판에서 봤던 바로 그 모습을 말이다.  148쪽




웨인은 자신감 있게 페달을 밟으면서 청명한 하늘 속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가볍지만 배는 더 불붙기 휘운 아세테이트 날개를 단 열성적인 이카로스처럼. 자신의 차림새를 차분히 살핀 다음-어쨌든 이제 조금만 날아가면 미합중국 대통령의 거처에 도착하는 셈이었으니까-그는 동체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한때 데저트인 컨트리클럽의 골프 코스였던 호수를 향해 하강했다. 252-253쪽



"알다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질병이니 말이다. 그 질병은 '타인'이라는 이름이지. 머지않아 이곳에 도달할 게야. 지금까지보다 훨씬 큰 원정대를 이루고, 이 땅을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고 열의에 가득차서……"  

281쪽



하지만 왜 이런 식으로 무력으로 대응하는 걸까? 대통령이 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권위를 세우고 싶다면, 또한 새로운 아메리카의 최고 통치권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면 괴짜 군벌처럼 구는 것은 완벽하게 잘못된 대처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289쪽




맨슨과 미키 마우스와 메릴린 먼로는 모두 과거의 아메리카에,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증발해 버릴 예정인 고대 도박꾼들의 도시에 속한 존재일 뿐이다. 새로운 꿈을, 진짜 미래에 어울리는 꿈을 꿀 때가 되었다. 선라이트 플라이어 편대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꿈을.   364쪽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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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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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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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가리고 책읽는당



출판업계를 다루는 드라마에서 신박한 마케팅을 보았다. 분명히 새로운데,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아이디어였다. 작가가 누구인지, 어떤 제목과 디자인을 하고 있는지 많은 정보를 주지 않은 채 선물포장하여 ‘나에게 주는 선물’로 등장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비의 ‘눈가리고 책읽는당’을 알게 되었는데 너무 반갑게 느껴졌다. 책에 대한 단서가 될 키워드 몇 가지만 알려주고 출간되기 전까지 알 수 없는, 재밌는 홍보방법이라 생각됐다. 왠지 모를 반가운 마음이 신청했는데, 당첨이 되어 읽어본 소설은 정말 출간되기 전까지 아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눈치 챈 분들은 다른 SNS 속 힌트를 통해 알았다고 하는데, 정말 순수하게 작품만 읽고 알아본 분들도 분명 있을 것 같다. 대단한 독서가들은 알았을 수도 있지만, 그런 의미로 난 게을러 빠져서 아무런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리하고 이번 ‘눈가리고 책읽는당’의 작품의 정체는 바로, 구병모 작가님의 신작소설 『버드 스트라이크』였다.


힌트가 될만한 키워드는 #새인간 #작은날개 #영어덜트소설



공개되고 보니, 그래 한 번 읽어본 문체였어,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그저 뒷북일 뿐.


구병모 작가님의 작품은 여러 매체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아가미』, 그리고『한 스푼의 시간』를 읽은 적이 있다.



작가님의 문체를 뭐라 잘 표현하고 정의할 순 없지만, 10대 소년, 소녀의 섬세하고 예민하면서도 맑은 감성을 작품 속에 잘 묻어내는 강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마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만월의 여름밤 속을 걷는 기분이 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유의 분위기가 마음을 아릿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게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서 여운이 남긴다. 위태로움과 에너지, 다양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는 휴머니즘으로 표현되는 인간다운 것에 대해 다루기도 한다.



처음 프롤로그 장면처럼 보이는 작품의 시작은 낯선 명칭과 인물묘사에 다소 당황스럽게 느껴지고 선뜻 잘 흡수되지 않았지만,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는 순간 몰입을 더하여, 책장을 넘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버드 스트라이크』는 날개를 가지고 태어난‘익인(翼人)’들과 도시 사람들 간의 갈등 속, 태어난 환경 때문에 무리 안에서도 겉도는 듯한 주인공들이 앞으로 닥칠 위기 앞에서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익인과 벽안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비오가 청사에 붙잡혀 심문을 당하는 부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어느 날 고원 지대의 익인들이 도시까지 날아와 시 청사 건물을 습격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고, 작은 날개로 태어나 비행 능력이 부족한 비오는 습격 직후 도시인에게 붙잡혀 청사에 갇히고 만다. 그런 비오에게 루라는 이름의 도시 아이가 찾아오고, 비오는 루를 인질로 삼아 청사 밖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해 루와 함께 고원 지대로 돌아가게 된다.



배다른 형제이기에 늘 휴고와 탄과는 다르게 괄시와 무시를 받던 루는 베풀고 나누는 게 생활인 익인들의 생활터전에서 편견과 차별 없는 평화로운 일상과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미성숙한 소녀이지만, 누구보다 대범하고 세심하며 옳다고 여기는 부분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줄 아는 루. 그로 인해 익인들의 사회에게 태생이 다르다는 이유로 은근히 배척되었던 비오는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한 발 나아가는 의식을 무사히 치러낸다. 운명처럼 엮인 두 사람 앞에는 또 다른 위기와 시련이 닥쳐오지만, 다시 발돋움하여 힘찬 날개를 펼치며 많은 변화를 이끌어내게 된다.



본래 외조부와 같이 살며 평범한 일상을 살던 루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출생의 여파로 인해 도시를 관할하는 시 청사에서 갇혀 살게 된다. 자신과 다른 종족이기에 호기심의 눈으로만 바라봤던 루는 비오를 만나며 편견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직접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소극적이고 불안했던 과거와는 달리 당차고 긍정적인 기질을 맘껏 펼치게 된다.



처음에는 낯설어했지만 비오의 다른 형제 가하와 지요, 그의 어머니 시와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루를 그들의 생활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비슷한 상처를 가진 루와 비오는 그렇게 가까워진다.



자연과 조화된 삶을 추구하며, 주어진 그대로의 생활과 규율로써 살아가는 익인들과 달리 무기 제조, 인공정원 등 발달된 기술력을 토대로 착취와 폭력을 반복하는 도시인들과의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착취도 모자라 그들의 가족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비오의 아버지는 도시에서 실종된 채 발견되지 못한 것처럼. 위기의 씨앗의 전조는 빗나가지 않았고, 가하와 비오를 구해내고자 하는 루의 혈투는 가히 눈물겹다.



자신의 위치를 증명하고자 했던 마이는 방위산업체 무화의 연구소장이지만, 익인을 생포해 실험체로 삼는 무자비한 모습까지 보인다. 불행히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일은 결국 발생되고, 이후의 루와 비오는 각자 선택했던 길을 떠나게 되었지만 결국은 만나게 되고 말 것이란 걸 안다.



다른 익인과는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기에, 작은 날개를 가졌기에 모든 게 불리하다고만 여겼던 비오는 루를 향한 진심어린 마음으로 온힘을 다해 그녀를 치유한다. 그의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감싸 안으며.



비오의 가족들과 대비되는 루의 가족들. 전 시행의 수석 비서로 어머니이지만 자신과 딸을 지키기 위해 냉정하고 사무적일 수밖에 없었던 아마라, 전 시행의 자리를 채우고자 그 압박감에 배다른 동생인 루를 더 괄시하는 시선으로 보았을 휴고와 다정하지만 가진 힘이 없었던 탄까지. 각 인물들이 가진 개성이 탁월하여 입체적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 또 한 번의 폭발과 상처는 너무나도 커서 읽어나가는 게 힘겹게 느껴졌지만.



판타지적 요소와 현실적인 측면을 고루 담긴 이 작품은 여러 색채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여 이야기의 특성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며, 성장과 포용, 그리고 조화로운 삶과 새로운 도약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아직도 세상에는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고 있고 자신의 입장에서 행하는 이기심은 끝이 없다. 루와 비오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느낀 건 이를 가여워할 수 있는, 너른 품을 가진 작가님의 포용력이었다.




버드 스트라이크는 새와 비행기가 충돌하는 걸 말한다. 관심을 두지 않아서 몰랐었다. 자신의 영역에서 날아올랐을 뿐인데 죽음에 가까워지고 만다. 이와 반대로 인간은 기술의 발전을 통해 더 넓은 세계를 나아가게 되었지만, 결국 서로가 부딪히는 순간 각각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비극이 발생되는 것이다.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기술력을 더욱 발전시켜 파장이나, 신호를 통해 새가 피할 수 있게 할 것인가. 보통 이륙이나 착륙할 때 가장 많은 사고가 발생된다고 하니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는 조화를 어떻게 얻어야 할까, 어려운 문제이다.



그리하여 루와 비오의 비행의 어느 극점에서 다시 재회하게 될 것인가. 함께하고 싶었지만 함께 할 수 없었던 마지막 순간 이후, 지요와 주고 받은 편지에서 두 사람의 힘찬 날갯짓을 통해 결국 만나게 될 것이라는 실마리를 남겨준 듯 하여 다행스러웠다. 혼란스러운 현실에 매일 분노만 쌓여가지만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된 건 참으로 기쁜 일이다. 평소 운과는 담 쌓은 삶을 살아왔는데, 어쩌다 한 번씩 찾아오는 이런 당첨운에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안아줄 수 있는 이 작품을 많은 이들이 읽어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 리뷰는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땅에 내려앉아 숨을 고르자 책에서 본 대로 익인의 날개는 천천히 접히는 듯 하다 그것이 견갑골 어디로 들어가는지 살필 새도 없이 눈 한 번 깜박이는 동안 사라졌다. 지금껏 그 어떤 연구자도 캐내지 못한, 익인들 스스로도 원리를 규명하지 못하는 비밀. 태어날 때부터 초원조의 축복을 입고 저마다 새의 영혼이 깃든다는 종족이 눈앞에 있었다. - P50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사람들의 마음을 채운 건 우려가 아니었다. 커다란 공포와 먼저 떠난 이들의 영혼은 우리가 항상 함께 있는데, 그들의 자리를 파헤친 모욕을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 P96

빼앗길 것이 남아 있는 한, 도시가 존재하는 한 완전한 평화란 익인들에게 꿈만 같은 이야기. - P117

"그러니 그 작은 날개로 어디까지 날겠는지 고민하기보다는……."
이제는 날 수 없는 몸으로 초원조의 부름을 기다리는 옛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나." - P122

그것은 개인의 욕망을 다스리고 상대를 존중하면서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그 전까지의 어떤 이야기보다 길고 자세하다. 쾌락에 충실하되 그 어떤 황홀한 경지라도 순간의 섬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 것. 침묵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으며 동의와 거부를 섬세히 구별하여 상대의 상태와 의사를 파악하고 그 무엇도 강제하거나 훼손하지 말 것. 합의 없는 임신은 없도록 할 것. - P159

아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기다리지 말고 원하는 어디든 날아가라. 내가 따라가면 되니까. 너무 너무 높이 날아간 까닭에 이 세상을 벗어났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간격만큼 내가 쫓아갈 것이다. - P299

어서 더 멀리 날아가. 네가 원하는 만큼, 어디까지든.
지금, 내가 가.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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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총총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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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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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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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삶에서도 빛나는 생의 의지



신 관능파라 불릴 만큼 성애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는 사쿠사기 시노의 『별이 총총』은 훗카이도를 배경으로 한 연작소설집이다. 


황망한 자연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중심에는 주변인들의 시점으로만 등장하는 지하루라는 여성의 생이 중간중간 길게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 사키코로부터 시작된다. 열여덟 살에 처음 사랑에 빠져, 그 첫사랑의 상대가 유부남인 줄도 모르고 아이를 낳았던, 그렇게 시작된 미혼모의 삶을 선택한, 어떻게 보면 마냥 밝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키코는 낙천적인 모습을 보인다. 본가의 어머니께 아이를 맡기고 스낵바에서 일하며 여전히 어리숙하게도 사랑을 믿는, 명랑한 모습을 보인다. 스스로 인생의 내리막길을 선택하는 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두 모녀의 삶은 다른 듯 비슷한 양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지하루의 인생의 서막을 그녀의 어머니가 등장하며 열어주었듯, 주로 중심인물의 내면 심리를 다루기 보다, 주변인의 시점과 다른 인물의 말로 표현되는 구성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형태는 이제 종종 보아 익숙한데,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구도로 진행되기에 자연히 관찰자의 시점으로 지하루라는 여성의 삶의 여로를 따라가게 된다.



아둔해보인다는 표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할 만큼 허술한 인물로 짐작되는 지하루는 한때는 어머니의 정을 그리워하던, 자신이 할 일을 꾸준히 하던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한 명 한 명 다른 인물들을 거쳐 갈수록 좌절과 희망의 격동보다는 무덤덤한 태도로 그저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자포자기한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웃집 대학생과의 하룻밤으로 임신을, 스트립 댄서를 전전하다, 슈퍼 배달원의 잦은 클레임을 걸었던 고객, 모자의 집에 얽혔다가, 재혼해서 얻은 아이를 버리고 도망치는 모습까지. 자신이 아닌 허구의 인물의 삶을 살아내듯 그저 존재하고만 있는 듯 하다. 



사키코의 기질이나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지하루의 외관에 대한 묘사 역시 단순하지만 편견을 심어주기 쉬운 모양새로 그려지고 있다. 울음과 웃음이 구분되지 않은 얼굴 표정에 상냥하지 않다는 표현, 가느다란 어깨와 허리와는 다르게 풍만한 가슴이라든지, 어느 연령대건 그녀가 가진 허술함때문에 남자들이 그녀를 욕망하고 이에 쉽게 응해준다는 묘사가 불편하기만 했다. 



어디 한군데 발 붙이고 정착하여 살아가지 못하면서, 큰 이탈도 없이 훗카이도 안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형태, 그러한 삶은 영역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는 다양한 관계성이 등장하지만 막장에 가깝고, 자주 등장하는 불편한 서사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관계를 넘어선 애증과 욕망이라고 하기에는 그저 음울하다는 느낌만 준다. 이는 여러 인물군상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형태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 남긴 상처를 자조하며 살아가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요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주로 여성들의 시점에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여성임을 떠나 인간적으로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서는 지하루에게 전후 어떻게 다른 태도를 보이는지 보는 것도 흥미롭긴 하지만 그 정도 뿐이었다. 




관능파, 성애문학의 대표작가라 수식되는 만큼 직접적이지 않고 관능적인 서사를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유능할 지 몰라도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여성들의 성향이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이상한 부분에서 도발적으로 표현되어, 그게 매력적으로 읽히지 않았다. 불과 5년 전에 발표된 작품인데, 묘하게 옛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것 같고, 주 배경이 되는 훗카이도라는 지역을 그려볼 때, 눈이 많이 내리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자연이 주는 시린 냉담함에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고자 생의 의지를 다지는 모양새가 이런 형태로 드러나게 된 걸까 감히 짐작만 해볼 뿐이었다.



때문에 지하루의 삶 자체가 그런 형식으로 뭉뚱그려 지나친 게 아쉽기만 했다. 이를 모두 우위에 선 남성과의 관계로 해소해버리는 게(물론 어느 순간엔 도구로 쓰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아쉬움이다. 어머니의 삶이 그대로 그녀의 삶에 유전되어 대물림하듯 반복되는 게 씁쓸하기만 했다. 지난하고 퍽퍽한 삶에 미움받기 쉽상인 인물이 뒤켠으로 밀려나는 듯한 모습이 아프게만 느껴졌다. 누군가 들어서려 노리는 틈이 아니라 그저 휑하니 구멍난, 상실된 형태로 어머니-딸-손녀로 이어지는 게 안타깝기만 했다. 



이렇듯 초중반부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잘 맞지 않아 버거움을 느낄 찰나 새로운 구성이 등장하여 이야기가 가진 힘에 탄력성을 주었다.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사실처럼 묘사되었는데, 지하루의 삶의 작품의 동일한 제목으로 출간되는 형식이 흥미로웠다. 그 후의 이야기에서 사키코는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밝은 모습을 가지고 있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은 딸에 대한 죄스러움에 같이 살고 있던 주지가 그런 사키코를 대신해  딸을 만나고, 지하루가 작품상을 수상하였고, 자체적으로 만든 책을 쥐어 줬을 때 무난한 결말로 마무리 지어지나 싶었지만 불행은 결코 자신의 길을 되돌아가지 않을 듯이 다가왔다. 



대를 이어 얽히는 여러 삶 속에서 가장 많이 흔들렸고, 아팠지만 아픈 줄 몰랐던, 텅 비어 있다고 느껴졌던 지하루이 생이 가여웠다. 마지막 장의 이야기에서 아야코 역시 어딘가 결핍이 있는 듯 하지만 다부지게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데서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과연, 픽션에 기대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마지막 별에 빗대어 생을 말하는 문장을 보며 이 모든 게 흐릿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삶 속에서도 빛나던 순간이 있을 거라는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이 한 구절을 위해 그토록 곤궁하고 지난했던 삶들을 거쳐왔나 싶었다. 끝이 아닌 시작으로, 그렇게 다시  새롭게 시작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아야코의 앞날에는 좀더 빛나는 날들이 많이 이어지기를 바래본다.




몇몇은 흘러가고, 그리고 몇몇은 사라진다. 사라진 별에도 한창 빛나던 날들이 있었다.

어제보다 숨쉬기가 편해졌다.

나 또한 작은 별 중의 하나

(…)

그이도 저이도 목숨 있는 별이었다. 밤하늘에 깜빡이는 이름도 없는 별들이었다. 

328쪽




(이 리뷰는 현대문학 출판사의 '문학독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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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 - 남자 없는 출생
앤젤라 채드윅 지음, 이수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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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이란, 대체 무엇일까



『XX』










**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식이란 이유로 무한한 사랑을 주시는 어머니, 내겐 부성보단 모성이 더 직접적으로 와 닿는 게 크다. 때론 부딪힐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어머니의 큰 사랑 덕분에 그나마 사람다운 모양새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로 모성이란 대체 뭘까, 새삼 질문을 던져본다. 생명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비롯된 것일까, 모성이란 본능인 것일까, 여성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것일까.



여기 이 뜻깊은 질문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룬 작품이 있다. 앤젤라 채드윅의『XX』(남자 없는 출생).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여러 유형의 가족 형태가 등장하는데, 어쩌면 무지와 핍박에 감춰져야만 했던 요소들이 이제야 고개를 들게 된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포츠머스대학 난임연구소에서 발표한 난자 대 난자 인공수정 연구에 대한 인터뷰로부터 시작된다. 동물임상실험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고 비로소 인간에게도 직접적인 시술이 이루어질 만한 단계(두 여성의 난자를 채취하고 그중 하나의 난자 핵에서 DNA를 추출한 다음 다른 난자에 주입하여 결합한 세포를 전류로 자극시켜 자연수정과 유사한 작용을 이끌어내는 시술)까지 이르게 되고, 이에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동성 여성 커플들을 임상실험 대상자로 모집하게 된다.



로지와 줄스는 우연스럽게 만나 운명적인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커플이다. 실용주의적인 측면에 뚝심과 인내심으로 무장한 <포스트> 기자 줄스(줄리엣)와 온화하고 맑은 심성을 가진 서점 직원 로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만났던 이 둘은 자신도 몰랐던 성정체성을 깨닫고 아름다운 만남을 지속해왔다. 줄스와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자신들의 아이를 키우고 싶은 소망을 가진 로지와 다르게, 줄스는 회의적인 태도만 보였다. 그런데 포츠머스대학의 난난 임신이 가능하다는 발표를 접하자 이내 생각을 전환하게 된다. 사랑하는 로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이에 대한 제안을 하는 줄스, 로지 역시 기뻐하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빛나는 상상을 더해본다.



여러 커플이 응했지만 최종 두 커플만 임신에 성공하게 되고, 이때부터 줄스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야기는 적정선의 속도로 차분히 진행되지만, 건더더기 없이 팩트만 전달하는 방식으로 몰입감을 더해준다.



언론의 집요한 괴롭힘, 정치판의 쇼, 무지한 연대의 편견과 거짓된 정보를 통한 선동으로 인해 폭력을 배제한 하루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일상이 이어진다. 10년을 넘게 직접 발로 뛰며 느꼈던, 기자로서 언론의 습성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던 줄스는 철저히 무시와 무응답으로 가려 하나, 여론은 사그라들지 않고 파파라치와 실질적인 위협을 가해오는 괴롭힘과 폭력성은 단계를 거치며 점차 심화된다.



처음은 의심과 배신, 그리고 시험으로 이어졌고, 애써 꾹꾹 눌러왔던 고통의 울음이 터지자 분노가 일었다. 그렇게 힘들게 움튼 생명이 로지의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을 때, 전혀 기쁘지 않고 아이를 갖고자 했던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예전으로 돌아가고픈 줄스, 아예 없던 사실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괴물처럼 느껴지고 스스로를 옭아매는 사슬이 된다.



여기서 더 나빠질 게 있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파국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가속이 붙어 두 사람의 관계마저 흔들리게 만든다. 읽는 내내 줄스의 인내심에 감탄해 마지않았는데, 예전에 어떤 영화에서 봤던 대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불행에 있는 걸 더 안정적으로 여긴다는 표현을. 줄스는 계속해서 언론의 관심이 식기만을 기다리지만, 언론이 한 번 잡은 먹잇감을 놓지 않는 법은 없다. 물론 여기서 등장한 ‘언론’이란 진정한 언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기레기들의 향연이다.



동료와의 관계, 직장생활, 아이에 대한 부담감,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갈등 등등을 비롯한 사람들과 연관된 모든 문제들은 하나같이 더 나빠질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 등장인물에 이입하여 읽는 독자라면 현실감 넘치는 서사 진행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에 답답해질지도 모른다.



자연에서 비롯된 습성을 인위적으로 변화하면 안 된다는 이들의 주장과 같은 쪽에서 바라봤던 이들이 행한 배신과 상처, 무지와 편견의 악의적인 관심과 괴롭힘의 언어폭력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현실 악플과 다를 바 없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아둔함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심리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어쩜 저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도가 지나쳐 되레 너무 실감났다.



답답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줄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일자리 하나 구하기 어려운 시대에 자신의 꿈이었던 기자를 포기할 수 없었고,  사랑하는 로지를 지키고도 싶지만 세상을 홀로 상대하기엔 벅차기만 한, 그래서 자꾸 어두운 그늘 아래 숨으려만 했던 줄스는 이내 스스로를 가뒀던 벽을 깨부수고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참지 않고, 숨지 않고서 실천에 옮기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더 이상 참지 않고, 숨지 않고서 실천에 옮기게 된다.



논란이 되는 화두는 명확하다. 여성끼리의, 즉 동성 간의 임신이 가능하다면 더 이상 남성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게 아니냐는 여론과 닫힌 사고방식 위에 선동하는 정치놀음이 이어진다. 생명윤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개인과 단체, 그리고 사회의 신념은 그렇기에 더욱이 두려움이 대상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짐들을 떠안고 힘겹게 한 발 내딛어 가던 두 사람 앞에는 빛나는 존재만이 오롯이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고통과 갈등, 고민, 걱정 모두 한 번에 잠식시킬 만한 감사한 일만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스스로를 짓누르고 있던 자책과 절망 모두 한 번에 사라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모성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확답하기엔 이른...)



출산에 대해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모성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과연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가. 많은 질문거리를 던져주는 문제작인 이 작품은 단순히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떠나서 사회의 이중적인 면모와 반향, 현실 그대로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의 심리묘사 역시 섬세하고 과장되지 않아서 좋았다. 오히려 이입이 너무 잘돼 공감가는게 커서 문제였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각자의 가치관과 신념이 다르듯 그 다름을 받아들일 만한 태도와 자세 역시 개인이 가진 몫인 것이다.



궁금하여 검색해보니, 그저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비슷한 실험이 이루어진 사례가 있었다. 중국의 한 과학연구소에서 암컷 쥐 두 마리에서 제거되더라도 큰 문제가 없는 유전적 영역을 삭제함으로써 살아있는 새끼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유전적 각인이란 DNA에 부착된 작은 화학적 태그(chemical tag)로, 특정 유전자의 스위치를 끄는 역할을 한다. 그런 태그들은 지금껏 약 100개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배아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http://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news&id=298443&SOURCE=6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야기될 여러 사회적 논점은 어쩌면 명확하기도 하다. 물론 아직은 요원한 일이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학계 내 연구자들 입장 역시 각기 상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생명을 다루는 일에는 늘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실존과 근원적 물음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멀지만 오지 않으리란 법도 없기에. 우선은 늘 염두에 둘 논점들에 생각해보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을 가지는 게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결론은 이 작품이 단순한 흥미로운 요소로만 다뤄지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논제거리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는 데서 좋은 소설이란 걸 말하고 싶다. 정말 좋은 소설인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개인의 취향을 떠나서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관심있는 독자들이면 꼭 한 번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이 리뷰는 한스미디어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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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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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닫힌 문』







‘시요일’ 30만 독자가 사랑한 박소란의 신작시집 

닫힌 문을 두드리며 건네는 다정한 인사


 2009년 등단 이후 자기만의 시세계를 지키며 사회의 보편적인 아픔을 서정적 어조로 그려온 박소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이 출간되었다. 시인은 “사회적 약자와 시대의 아픔을 개성적인 어법으로 끌어안았다”는 호평을 받은 첫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2015)로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단의 주목을 받았고, 시 전문 애플리케이션 ‘시요일’ 이용자들로부터도 특히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출처: 예스24 책 소개)


 

**

 


■ 물기 어린 나날들


삶의 기본 구성요소인 것 같은 ‘슬픔’은 여러 얼굴을 하고서 존재하는 것 같다. ‘울음’이란 것만 해도 힘찬 생의 기운이 실려 있거나, 비통의 무게가 담겨 있듯이, 각기 상황과 주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살아가며 문득 서글퍼지는 순간들은 무수히도 많다. 울컥하고 터지는 슬픔을 애써 억눌러보기도 하고, 또 부러 외면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이 모두를 버텨내고 이겨내고자 하는 건 곧 지금의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 의 처음 문을 여는 시 <벽제화원>만 해도 읽자마자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게 된 순간부터 이 세상에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고, 문득 되살아난 기억에 괴로워하면서도 함께 했던 순간의 행복함이 떠오르기도 하는, 복잡한 심정에 어느 때부터는 그를 만나기 위해 살아간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삶의 시간은 남겨진 자들이 감당해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하여


나는 살아요 나를 죽이고

또 시간을 죽여요

 


11쪽, <벽제화원> 중에서


 

시인의 시 세계에서는 직접적인 단어나 표현이 등장한다 해도 결코 과하지 않다. 차분하고 덤덤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울컥하는 감정과 눈물이 차올라 목이 메이는 걸 ‘목이 자란다’는 것으로 표현하며, 그 사이 등장한 ‘슬픔’은 흩어져 있는 시어들을 한데 엮어주고 서로 잘 맞물리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목>). 


문틈에 새어들어 온 ‘빛’은 곁에 머무르는 듯 싶지만 이내 멀어지고, 어두운 얼굴은 나를 부르고, <검정>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 시적 자아는 <검정>을 버려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끝끝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검정’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다. 내면이 가지는 근원적 고독 혹은 부정적인 마음, 혹은 구멍처럼 뚫려 있는 공허 등등 모두 읽는 이로 하여금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첫 시집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시집에서도 역시 생활을 다루고 있는 시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사람 사는 모습, 살림살이 대체로 다 비슷하단 생각에 특히 공감이 갔다.


우리의 일상과 다를 바 없는 여러 상황들이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계단 오르는 것에 대한 버거움을 ‘발목을 붙잡는 손’이 있다고 말하며, <상추>를 구입하며 ‘좀 건강해지려고’ 하고, ‘남들처럼 잘 살아보려고’하는 것. 또, 추운 겨울에도 <전기장판>만 있다면 ‘어떤 슬픔에도’ 무던히 잘 견뎌낼 수 있고, ‘가스레인지도 보일러도 켜지지 않는 저녁’에 옆집에서 건네준 설익은 감자를 맛있게 먹는 것(<고장난 저녁>)도, <오래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지긋지긋한 먹고 사는 얘기’를 나누는 것 모두 보통의 생활상을 담고 있다. 


 


종일 떨다 돌아온 날에는 온도조절기에 빨갛게 불이 들

어온 것만으로 안심이 된다

세상 끝 옥탑에 보일러가 도는 기분


(…)


전기장판에 누워 겨울을 난다

어떤 슬픔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74-75쪽, <전기장판> 중에서




시적 자아는 서글프고 지난한 생활 속에서도 아름다운 것을 찾고자 한다. 슬픔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는 말은/아름다운 것’이고 ‘그것을 잃고 난 후/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그것을 아주 갖지 않는다는 것’(<잃어버렸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어떤 삶이든 어느 한구석에 자리한 틈이란 게 있을 것이고, 허락하지 않아도 비집고 들어선 존재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순간 마주하면 놀라 비명을 지르게 되기도 한다. 시인은 이처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이 ‘닫힌 문’을 두드린다.


 


말해보세요 당신,

우리가 어떤 슬픔을 저지른 것인지

슬픔은 왜


또 끝끝내 아름다워지려 눈물을 감추는 것인지



67쪽, <말해보세요> 중에서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

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64-65쪽, <감상> 중에서

 


■ 사랑, 다정한 인사



닫혀 있는 공간으로의 진입, 그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여는 행위가 이뤄진 데는 ‘그저 누가 있을 것만 같아서’라는 이유를 바탕으로 한다. 


문을 열고, 손을 잡고 온기를 나누는 것, 혹은 낯설지만 친숙한 누군가에게 막연한 다정한 마음을 가지며 인사를 건네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손잡이가 돌고 도는 사이/손들은 너무 쉽게 뜨거워지고’ 마치 사랑을 하는 사이에 온기를 나누는 것 같지만, 실은 손으로 치환된 손잡이는 본래의 역할로 돌아가는 것. 


휘청거리는 공간에서 붙잡고 중심을 지탱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렇게 ‘손잡이가 돌고 있는 사이’에 화자는 ‘문 저편/그럴듯한 삶을 시작해’(<손잡이>)보자고 제안하기도 하며, 감추고 있는 것을 차마 내보이지 못하지만, ‘양말을 벗어본 적 없는 내가/너의 곤한 맨발을 오래 들여다보는’(<양말>) 것처럼 나의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고 싶고, 너를 향한 고요한 응시를 하고 싶은 것.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삭은 깍두기 접시를 가운데 두고 함께 밥을 먹는 새벽‘(<가발>)의 소박함, 두 개의 뚝배기가 전해주는 온기야말로 진짜라고 말하는 사랑. 서로가 가진 벽을 허무는 일은 ’누가, 그 누가/부른 적 없는 사랑이 쳐들어‘(<벽>) 온 것과 같다.



사랑을 말하는 자아는 골목의 풍경도 모두 살아 있고 빛나는 것들로 보게 되고, <불쑥> 왔다가고 아무런 예고 없이 고백하고 싶기도 한다. 그렇게 갑자기 피어난 마음은 가까이 다가서기를 주저하기 않고, 오히려 더 무방비한 상태 그대로 거리를 좁혀가는 적극적인 태도도 보이고 있다. 그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척박한 삶 속에서도 담아낼 수 있는 고운 마음이 있다는 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려는 의지가 있다는 게. 


혹은 개인이 가지는 고독의 색채가 짙어져서 역으로 그런 빛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양말을 벗을 수 없다

이 속에 죽은 발톱이 있다고


고백할 수 없다

어둡고 습한 것 불길한 것이 있다고

나는 있다고



48쪽, <양말> 중에서

 


 


곁에 없는 당신

지금 당신도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다고, 빈방에 들어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주저앉은 당신은

구겨진 얼굴을 감싸 쥐고서 아무도 모르게 운다

 

그런 당신 곁에 나는 조금씩 있을 수 있다고


 

53쪽, <마음> 중에서

 


우리는 자주 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무방비의 감정에 대해,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활짝 펴 불을 쬐는 시늉을 할 때가 많았다

(…)

 

불을 끄려면

불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고


 

68-69쪽, <불이 있었다> 중에서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번 만난 적도 없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95쪽, <모르는 사이> 중에서 


 

■ 살아있다,는 감각.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또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새기기도 한다.


공중에서 떨어졌지만 부서지지 않는 ‘나’는 ‘벽돌’을 닮았고(<이 단단한>),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고 멈추지 않으며, 숨 쉬고 있‘고, 괜찮아, 라고 답하기 위해, ‘아직 살아 있기 위해’ 아무도 내 시계를 모르게 한다(<시계>).


흔한 웃음소리와 표정을 하고 있지만 텅 비어 있고, 버리는 일에 골몰해있는(<깡통>) ‘나’는 ‘약을 사 들고 달려가는 밤’(<약>)의 숨소리에서, 때로는 ‘걷는 있는’ 것에서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도 한다. ’계속 걸어‘가며 ’모퉁이를 돌아 다시 걸어오‘고 무심코 ’우측보행을 하는 것‘(<천변 풍경>)과 같이 습관처럼 행해지는 것들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은 되살아난다.


때문에 '살아 있다는'는 감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출근하고 일하고, 다시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고. 반복된 일상 속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순간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죽어있는 상태로 살아 있는 척 행세를 했던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아주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웃거나 분노하거나 다시 슬퍼하기도 한다. 어쩌면 생의 감각이 발현될 때는 몸에 밴 습관들처럼 그 찰나에 나타나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무수한 익명의 그리움이 떠올랐다. 상실을 겪게 되었을 때 그가 없는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해 애써 모른 척 해왔던 시간들에 대해, 이를 직면하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시적 자아를 보며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꿈속에서나마 그리운 인사를 건네고, 잊으면 그만이지만 잊을 수 없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과거의 멈춰진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머뭇거렸던 순간들에 대해서도. 더 이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염려하지 않고, 지나간 시간들에 미련 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아직도 모호한 답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모두 괜찮다, 라는 자기 최면을 걸어 살아갈 뿐 정말 괜찮은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답답하지만 아직은 미성숙한 채로 이렇게 살아 있으며, 살아갈테니 말이다.



(…)

 

숨이 터져나온다 골목 곳곳 익은 숨이

밥물처럼 흘러 흘러넘쳐

때 낀 밥그릇을 껴안고 잠든 개들을 깨운다

개들을 향해 헐떡이며 짖어대는 나의

그림자 짙붉은

나는 살아 있구나


나는 살아 있구나

이 활활한 것을 어서 가져다주어야지



72쪽, <약> 중에서

 


고작 감기일 뿐인데 죄송해요

울먹이면서

멀쩡히 잘 살아갑니다, 실없는 꿈속에서


어디야? 전화를 받지 않는 엄머

거기 먼 집

닫지 못한 문이 있고 여태

늦된 겨울을 건너다보고 있을 엄마, 감기 조심해

 


125쪽, <독감> 중에서



잊으면 그만인 것

 

잊을 수 없다

상자는 있는지 아직 여기 있는지, 죽은 엄마라면

알 것 같다 상자의 안과 밖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129쪽, <선물> 중에서



 **


 

이렇게 또 다시 비루한 서평을 쓰려는 시도를 하게 될 줄이야,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듯 싶다. 같은 짓을 반복하게 되는 걸 보니 말이다. 



박소란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어느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다. 시인분들이 직접 나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고, 낭송하고. 이에 디제이 분들이 시 한 편을 골라 노래로 만들어 들려주는. 그렇게 들었던 시인의 목소리가 일단 너무 좋았고, 낭송하는 작품들이 하나같이 마음이 콕콕 와 박히는 듯이 인상 깊었기에 바로 시집을 구해 읽어보았다. 물론 내멋대로 그냥 읽어보는 것이었다. 



잘 설명할 순 없지만 시 속 세계 분위기랄까, 부족한 표현력의 한계를 실감하며 말하지만, 그저 좋다는 느낌 뿐이었다. 실린 시들 하나같이 삶, 그리고 생활과 연관된 것들인데 그 안의 폭은 깊고 또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돼 있었고, 진솔한 느낌을 주었다. 낯설게 느껴지는 시어들이 한데 모인 듯 하지만 오히려 현실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었고, 여운이 남았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되고 슬픈 현실이 서술되는데 공감이 가면서 위로가 되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도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참 뿌듯하고 행복하겠다, 싶은 동경과 함께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덤덤하게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진한 파동을 일게 하였고, 하물며 시집 제목 자체가 『심장에 가까운 말』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 후로 박소란 시인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면 무엇이든 찾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따끈따끈한 신작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이 출간되었다. 『한 사람의 닫힌 문』에는 ‘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존재가 등장한다. 그저 명명되었을 뿐이다. 굳게 닫혀 있는 문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열고 마는, 삶의 진창에서 마냥 아파하는 게 아니라 낯선 이에게 막연한 다정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온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리운 존재를 그리워하며 살아 있다,는 감각을 실감하는. 


물기 어린 슬픔은 여전하지만,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많은 위안이 되어줄 그런 시들로 가득하다. 정말 덤덤하지만 다정한 인사를 건네준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심신에 시의 온기를 나눠주는 고마운 시집을 더불어 나누듯 누군가에 꼭 선물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역시 참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리뷰는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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