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타임워프 - 페미니즘이 한국 사회를 기억하는 방법
김신현경.김주희.박차민정 지음 / 반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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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트스 타임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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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타임워프』 는 버닝썬, 강남역 살인 사건, 낙태죄, 유영철, 88올림픽, 박근혜, KTX 등등 과거의 사건들로부터 현재 뜨거운 화두로 충격과 경악스러운 한국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 사건들까지, 기억의 '병치'를 통해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다각도로 바라보고 있다. 


저자들은 성 산업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여성학을 전공하며 가르치고 있는 교수와 연구자이다. 다수의 연구와 논문, 강의을 통해 여성학 문제를 다뤄왔던 사람들이다. 생각보다는 읽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어서 여성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접하게 된 사람에게도 훌륭한 입문서가 될 것 같다. 일단 큰 틀에서 다루고 있는 사례(사건들)가 전체적인 맥락에서 대부분 알만한 주요 사건들을 다뤘기 때문이다. 


작금의 여혐 전쟁과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목소리가 하나 둘씩 터져 나오는게 한편으로는 조금 생경하고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상황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고 변화는 어려운 것이며, 아주 멀고 희박한 지점에 있을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점차 모여 외치는 목소리가 반갑기만 하다. 물론 이와중엔 본질을 오염시키는 종자들 때문에 애꿎은 피해자와 편견이 더해지고 폄훼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지만 신념과 소신으로 무게 중심을 잘 가지고 가는 이들이 있기에 앞으로 나아가는 힘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저자들이 다루는 주제에 관해서도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젠더, 군대내 동성애를 어떻게 인식하고 다뤄왔는지에 대한 지점 역시 흥미로웠다. 이는 사실 크게 의식하지 않고 관심두지 않았던 부분이기에 폐쇄적인 조직내 엄격한 규율이 존재할 거라 짐작은 했었지만 그렇게 폭력적인 방식과 단순화로 행해졌는지는 미처 알지 못했었다.



또한 방송계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폐는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 손에 쥔 권력을 내려놓지 못하고 마치 신처럼 군림하고 있는 검찰세력과 언론, 소위 윗선들이 행하는 부조리, 행패에 분노가 치민다. 성범죄자들은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집행유예를 받고 사회에 나와 있으며,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들에겐 온갖 조작과 가설로 함부로 씌운 프레임에 가둬두려 하고 있다. 이런 행태가 길거리의 시장 잡배의 폭력과 무엇이 다른지 모를 정도이다. 왜 가해자에게 가야 할 화살이 오로지 피해자로 향하는 것인지, 피해 입은 사실을 왜 스스로 증명해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지러운 판결의 여러 사례 중 황당한 것 중 하나가 왜 그런 일을 당했을 때 거부하지 못했고, 피하지 못했냐는 지적이다. 무지몽매함에서 오는 답답한 벽을 어떻게 깨부셔야 하는지 막막할 뿐이다. 


지금도 해결되지 못하고 어영부영 흩어져 있는 사건들은 현재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있어 알고 있었지만, 과거 88올림픽이나 변소에 대한 이야기, 유영철 사건에서 그가 했던 발언들에게 대해서는 새롭게 알아가는 부분이 있었다. 또한 양공주에서 원정녀라 칭하며 혐오하는 발언을 일삼는 그들이 성매매 자체를 소비하는 자들이라는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여성은 땀을 흘리며 뛰는 모습도, 단장이 덜 된 모습도 보이면 안 됐으며, 미적인 요소로 존재해야 했다. 또다른 신분사회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여성 인권이 이제와 제자리를 찾아보려는게  왜 불만과 혐오로만 받아들이는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그러하다. 그동안은 민족주의적으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잘못을 지적해왔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자국 내에서도 피해를 입은 사실 자체가 족쇄처럼, 주홍글씨처럼 여겨져 바깥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를 감추고 또 감춰야만 했기 때문이다. 


생명 존중과 사회의 성문란이란 잣대로 낙태의 선택과 권리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죄라 칭하였다. 판단하기 무척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나, 왜 이런 문제를 다루는 주체가 당사자가 아닌 그 고통을 알지 못할 완전한 타인인 것인지도 황망한 현실이다. 묻지마 살인, 사이코패스 등 매체에서 다루는 이유 모를 범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으나, 유독 성범죄 관련해서 많이 갖다붙이는 논제이기도 하다. 그저 여성과 약자이기에 살인과 폭력을 행한 범죄가 있었음에도 묻지마 살인이었다며, 정신감정을 통한 감형 등 병증에 집착하며 그에 따른 합당한 사유를 찾으려는 방식도 다소 강압적으로 느껴진다. 


읽는 내내 분노하고 안타까웠으며 때론 공감하기도 또,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어떤 텍스트를 읽어도, 아주 잘 읽어내야 한다는 주의문이 붙어도 '박근혜'를 말하는 텍스트에서는 역시나 거부감이 든다. 그가 '여성' 대통령으로 실패가 아닌 여성 '대통령'으로서 실패했다고 말하는 부분에는 공감하지만, 여성이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어떠한 여지라도 주는 부분에서는 공감할 수가 없다. 물론 이 책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박정희라는 더러운 권력 아래 편안히 살아온 생에서 '여성'이라고 무얼 더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게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일 따름이다.


핸디북 같은 작은 책자 속에 다루는 내용은 거대하고 깊으며 무궁무진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나에게 여성학 입문서처럼 다가왔다. 그것도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를 살펴봤기 때문에 더더욱이 그러하다. 페미니즘이라고 말할 때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아주 많다. 관련된 서적도 조금 읽어보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상상을 더해 재탄생된 문학작품도 읽어보았으나, 아직도 손에 잘 잡히지 않는 부분도 있다. 중심을 잡기 어려울 때도 더러 있다. 자꾸만 '나'의 자리로 겹쳐보여 아프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게 더 큰 게 사실이다. 우선 이렇게 점차 모이는 목소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해갈 수 있다는 그 시작점이 보이기를 바랄 뿐이다. 고통을 끊어낼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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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병치시킨 사건들에 현재 진행형인 사건들을 창조적으로 병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최근 헌법재판소의 낙태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명랑한 수술'과 겹쳐 본다면 여성의 섹슈얼리티 권리에 대한 언어와 세계가 더 풍부해질 수 있지 않을까? 서울올림픽에서 수행된 여성들의 환대 역할은 평창동계올림픽에서의 북한 여성들에 대한 집중적인 재현과 은밀한 관련을 맺고 있지는 않은가? 10 · 26의 여성연예인들이 고 장자연 사건뿐 아니라 김학의 사건과 버닝썬 사건을 해석하는 새로운 단초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또 일본군 '위안부' 기억 활동을 현재의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성폭력 부정의 담론장과 병치시킨다면 앞선 기억 활동은 낯설게 응시될 수 있을 것이다.   202-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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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해자들에게 - 학교 폭력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그들과의 인터뷰
씨리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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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해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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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회피형 인간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나 기억에서 도망치고 외면하기 바쁘다. 그게 나에게는 일종의 생존방식이었던 것 같다. 모른 척 덮어두면 시간이 지나 쌓인 두꺼운 먼지 속에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은 보지 않아도 됐고, 그러면 그럭저럭 살만해진 듯 했다. 찌질하고 창피한 지난 날의 나는 그렇게 어두운 구멍 속에 쳐 넣어두면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때는 사회성이 부족했고,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으며 수동적이기만 했다. 지금이라고 많은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보다는 나아진 듯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희석되어 괜찮아졌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제목에서부터 나를 콕콕 찌르는 이 책과 담고 있는 주제에서 나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나의 상처와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왕따"라는 문제는 복합적인 측면이 있다. 피해를 당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절실하지만 여기엔 같은 반 학생들부터 선생님까지 방관자가 존재하고 이미 형성된 깨트릴 수 없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이를 깨고서라도 용기내 손을 내밀어 줄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했다면, 피해를 당한 학생들은 자신을 스스로 자책하지도, 무기력하게 고통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을 거란 말에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게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할 거란 말이 이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가정을 덧붙이게 되지만.


왕따를 당한 기억을 인터뷰로 풀어내, 여자반 남자반 나눠 이야기를 한다. 언어폭력부터 물리적인 폭력까지. 그 범위와 정도는 지나치고 유해하다. 그리고 가해자들은 하나같이 그런 자각이 없는 게 태반이다. 가해자들에겐 가해자들이란 인식이 없고, 이를 오로지 피해입는 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이다. 학창시절 학교는 살아가는 세계 그 자체, 즉 전부와도 같다. 그곳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당하게 되는 순간 손발이 묶인 듯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보면 그토록 힘든 시간에 반드시 학교에 가야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를 깨닫고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도움을 청할 어른도 없고, 부모님께도 말할 수 없어 혼자서 끙끙 앓아야 하는 것뿐 세뇌당하듯 들어온 폭력적인 말에 갇혀 자신의 잘못으로 몰고 가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할 수밖에 없기도 한 것이다. 



강인한 사람이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신체적으로 힘을 기르는 것이 아닌 강한 멘탈과 자존감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학교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가정폭력에 노출되기도 쉽다. 그러니 그 시간을 견디고 버텨내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용기를 내어 인터뷰를 한 어른이 된 왕따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읽고 보며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당했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종종 스스로를 혐오하며 파괴하는 힘으로 살아가는 것도 사는 것이라 믿었는데, 사실은 용기가 부족했던 것만 같다. 지나친 엄살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되돌아보면 난 왜 그토록 유리멘탈이었고, 강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원망스러웠다. 내가 당한 고통보다 나의 가족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더 괴로웠었다. 나만 당하면 그만이지 싶은 고통이 다른 부분에서 나의 형제도 같이 겪고 있었구나 싶으면 속이 너무 상했다. 밝은 빛만 전해주고 싶었는데 필요없는 어둠까지 떠안고 있었구나 싶어서. 



그래서 이들이 용기를 내어 왕따를 당했던 과거의 기억, 당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그 전엔 어떤 학생이었는지, 방관자와 가해자에 대한 생각 등 고백하고 이야기하는게 지금도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 이들에게, 혹은 겪었던 이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는 듯했다. 



그저 텍스트로만 봤을 때도 가슴이 너무 아팠는데, 육성으로 말하는 걸 보고 들으니 울컥한 심정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은 이렇게 선동과 같은 정치질에 휩쓸리지 않을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고, 솔직한 속내를 들어줄 이가 필요하다. 스쳐 지나가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도 견뎌낼 용기와 힘을 주는 것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그건 꼭 행운과도 같다. 이런 일들이 없었다면 오히려 그저 무난하게 학교생활을 잘 지냈을 것이고, 오히려 밝고 쾌할하게 보냈을 수도 있었다. 자존감이 바닥치지 않았을 것이고 무기력하게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이 덕분에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는 이는 정말 심지가 굳건한 사람같아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해보다는 인정이란 말이 있다. 어차피 나와는 다른, 완전한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나조차도 스스로의 본질의 근원과 어디서오는지 알 수 없는 의식, 생각들을 일일이 짚어보기 힘든데,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그냥 인정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구나 하는 수밖에. 아직 가해자들까지 이해할 수 있는 관용을 가지기엔 속이 너무 좁아서. 그저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튜브라는 매체가 새로운 소통의 창구가 되어  시간이 지난 뒤에 다양한 반응이 오고 있다는 후기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꿈꿔보게 된다. 불안정하고 알 수 없기에 더욱 잔혹하고 정도를 모르는 폭력이 난무한 그 시절에 대해. 어떤 부분에서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의 흔적들에 대해.



 때문에 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 같다. 절대 너의 잘못이 아니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버텨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참고 견디면 시간은 지나가겠지만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으니, 도움을 청하고 소리쳐야 한다고. 너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트라우마란 결국 스스로를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는 일이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아직도 용기가 부족한 내겐 다소 버거운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던하게 지나칠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잊고 싶으니까 조금씩 흐려지는 것일 수도 있다. 단순해지는 건 기질 탓이 크지만. 



어쨌든 개인적인 얘기를 제외하고서 리뷰를 써야 하는데 그저 감정만 나열한 부끄러운 글만 남기게 되어 부끄럽지만...


상처받은 모든 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본다. 그래서 소중한 그들의 삶이 더욱더 찬란히 빛나고, 아름다운 기억들만 새겨지길 바란다.









(이 리뷰는 RHK 북클럽1기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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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읽다, 쓰다 - 세계문학 읽기 길잡이
김연경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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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읽다,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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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 작가가 정리한 고전문학 읽기에 대하여-



이 책은 각각의 작품속 특화된 주제나 성격에 따라 총 7개의 장으로 분류되어 있다. 근대, 야망을 다루거나 문학 이상의 역할을 한다거나 소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거나, 일상을 속속들이 보여준다거나 성장과 청춘을 말한다거나, 실존과 부조리를 다룬다거나, 문학과 정치,메타픽션을 분석한다거나 해서 말이다.


여러 시대를 걸쳐 고전문학이 여전히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데는 일단 가장 먼저 작품성을 들 수 있겠다. 몇 세기가 지나도 읽히는 작품이라면 읽는 이로 하여금 매혹적인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게 분명하며, 마음을 잡아 끌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신뢰가 은연중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시대에 쓰인게 신통방통할 정도로 지금 현실에서의 고민을 담고 있을 때도 있으니 결국은 삶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이렇듯 여러 특장점에도 불구하고, 고전문학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이유 또한 간단히 짐작할 수 있다. 첫째로 번역의 문제가 들 수 있다. 작품이 써진 언어의 뉘앙스나 행간을 번역을 통해 전부 전달받기에 한계가 있으며, 특유의 번역체 문장이 가독성을 갖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번역 작업을 통해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잘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지만 현실이다. 그 다음으로는 작품이 써진 배경이 되는 나라나 문화 등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특히 길게 나열된 이름이나 복잡한 명칭, 사회적 분위기 등이 걸린다면 소화시키기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고전문학에 대한 입문서, 안내서 같은 설명이나 감상이 담긴 에세이나 산문집이 참 다양한 것 같다. 고전문학을 읽고 싶지만 이에 어려움을 겪는 나와 같은 일반독자라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는 해설보다는 부드럽고 친절한 안내서들을 통해 도움을 얻기 좋을 것이다. 그것도 직접 번역하고 공부하고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가 쓴 글이라면 더더욱이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저자 김연경은 소설가이자 문학과 창작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노어노문학을 전공했고, 관련 러시아 문학 작품 여럿을 번역한 경력이 있다. 앞선 서문에서 느낀 인상으로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쉽게 전달해주는 발화 방식에서 일단 신뢰가 간다. 단정하고 성실한 느낌을 준다. 더 넓은 문학을 읽기 위한 노력을 했고, 이 책은 이러한 자신만의 독법과 생각을 정리한 독서에세이로 보면 될 것 같다. 책이 써진 배경, 주전부리같은 지식과 어떻게, 어떤 지점을 중점적으로 짚어 가며 읽어냈는지에 대한 포인트를 삼아 공략하듯 읽어가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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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독법을 서술한 이 독서에세이는 고전문학을 읽을 때 겪고 느꼈던 것들에 큰 도움을 준다. 작가의 성장배경이나 그가 삶속에서 추구하려 했던 가치나 열망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요소들은 물론, 작품을 읽으면서도 해소되지 않았던 궁금증이나 물음에 대해 나 혼자만 갖던 호기심은 아니었구나, 이런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 더 알기 위해 읽었던 것이구나, 이런 갈증은 당연한 것이었구나, 하는 공감도 얻게 된다.


이를테면 괴테의 대표적인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과 『파우스트』 를 보며 가졌던 의문이 다소 해결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인간의 끊임없는 방황과 갈구, 욕망 등이 그의 인생 자체에서 드러났다는 걸 새삼 그의 삶의 배경에서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당대 문학가들이 문제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에 대해 갖는 견해가 각기 다른게 매우 흥미로웠다. 꼭 자신의 작품세계와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해석하였다는 걸 보는 게 또 다른 재미였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 을 두고 논하는 부분이 그러했다. 이전까지 햄릿이라는 인물에 대해 가진 어렴풋한 인상도 다소 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다양한 해석을 읽는 묘미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문학사에서도 워낙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이고, 지금까지도 당연스럽게 회자되는 작품을 쓴 주역인데 글을 잘 쓴 것도 모자라,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는 대중적 인지도와 풍요로운 삶으로 백년해로까지 했다니 너무 부러운 삶이라 배가 다 아플 정도였다.


반복되는 표현이지만, 어쩜 그렇게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의 성향이랄까, 특성이 맞닿아 있는지 새삼 글은 곧 창작을 하는 작가를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신으로 평생 살았지만 여성의 삶은 곧 결혼이라는 명제하에서만 존중받을 수 있었던 시절 속에서 구혼에 관한 소설을 써왔던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의 성향에 따라 전혀 다르게 창작된 작품들 속 인물의 성격과 특징, 동화의 위치를 굳건히 했지만, 정작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고자 열과 성을 다해 아부하는 삶을 살았던 안데르센, 빅토리아 시대 하층 계급에서 시작해 전형적인 신사의 삶을 이어갔던 동화같은 디킨스의 삶, 어설프고 촌스러운 매력의 체호프처럼 말이다.


일개 독자에겐 작품의 성격에 맞닿아 있는 작가의 삶의 형태가 재밌는 배경지식처럼 느껴져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곁들여진 저자의 생각이 구절구절 공감가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부분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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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숭고의 절정을 맛본다. 죄악을 비껴 가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 그것을 조롱하는 야비한 운명의 테러, 그럴수록 더욱더 거세지는 앎과 자유를 향한 열망, 끝으로 크나큰 죄악 앞에서 행해진 잔혹한 자기 단죄…… 인간 삶의 이 비극적인 아이러니 앞에서 연민과 고통을 나아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52-53쪽



과연, 모든 모순과 갈등을 신에게로 환원시킬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할 것인가. 어떤 경우든 분명한 것은, 인간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모종의 해법이, 적어도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 난해한 작품을 읽고 또 읽는 이유, 아무리 읽어도 좀처럼 정복의 쾌감을 얻지 못하는 '원한'을 풀어 보려고 노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74쪽



“꺼져라, 짧은촛불!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 버리는 것,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은 건데 소음, 광기 가득하나

의미는 전혀 없다”

84쪽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신의 존재, 선악의 무게,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 등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그 무게를 거부하며 자유를 쟁취한 후 '아이'의 정신으로 영원히 회귀하기 위해 표효했던 '사자'는 곧 니체가 아니었을까.  94쪽



우리는 모두 마지못해, 적어도 엉겹결에 태어난다. 이것도 억울한데, 태어나는 순가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죽는 순간도 알지 못한다. ( …) 고전들이 경고하듯 문제는 단순히 창조가 아니라 창조 이후, 즉 조물주(신/아비)와 피조물(인간/아들)의 관계이다. 자연-신의 입이 적어질수록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도 커질 것임을 명심해야겠다.  101쪽



이 소설의 사상을 대변하는 이반은‘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입장에서 출발, 만약 신이 인간을 자신의 닮은꼴로 창조했다면 왜 이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3차원(유클리드)’의 지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모순 앞에서 그는‘조화’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아이들의 고통과 희생을 근거로‘반역’을 선언한다.“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23쪽



빅토리아조의 19세기 영국, 여성은 오직 여자-암컷의 삶을 통해서만 인간일 수 있었다. 간단히 결혼, 출산, 육아, 살림 등이다. 물론, 제인이 추구했고 또 손에 넣은 가치도 그것이다. 단, 그녀에게는 그럴듯한 집안도 미모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분수’를 똑똑히 알고서 세상의 법칙과 당당히 맞섰다. 인간으로서의 최소치의 존엄은 이런 식으로 유지된다. 148쪽



작가는 작기이기에 앞서 현실이라는 토양에 뿌리를 둔 생활인이라는 것, 문학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 전제이다.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에게는 물질적 토대, 즉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166쪽



마땅히 우화도, 그림 동화도, 그렇다고 소설도 아닌 이 매력적인 책의 장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분명하다.『어린왕자』는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장르다. 247쪽



이렇듯『변신』은 장밋빛 진보를 약속한 근대의 몽상에 , 안일한 인간관과 세계관에 물음표를 찍고 진화 대신 퇴화(인간에서 동물, 심지어 벌레로!), 상승 대신 전락, 성공 대신 실패, 축조 대신 해체를 얘기한다. 죽음의 순간에 삶이 조망되듯 인간이 인간이길 멈출 때 비로소 그 본질이 밝혀진다. 266쪽



눅눅한 농담(희극)과 찝찝한 진담(비극), 즉‘체포’와‘처형’, 그사이에 위치한‘소송’은 물론,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은유이다. 덧붙여 존재와 존재함 자체가 죄이다. 271쪽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글쓰기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하는, 무력한 행위이지만, 그러나 그것은‘인간의 산물’이다. 이보다 더 숭고한 실존이 있을까. 

306-307쪽



이 세상의 눈물과 웃음의 총합은 동일하다는 식의 말도 덧붙인다. 과연 웃지 않고서야 이 당연한 부조리를 어떻게 견뎌 내랴. 311쪽



“이따금 나는 좋은 독자들은 좋은 저자들보다 더욱더 난삽하고, 독특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따라서 읽기는 쓰기 후에 일어나는 행위이다. 보다 체념적이고, 보다 문학적이고, 보다 지적인 행위.”(『불한당들의 세계사』) 3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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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생뚱맞지만, 지금 이토록 어지럽지만 혼란한 이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게 참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여전히 부와 계급 차이는 존재하지만, 과거 모든 유구한 역사를 지나 빛났던 작품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빛을 내며 생명력을 가지며, 많은 이들이 찾아 읽고 또 사유思하게 한다. 문학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이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당장 밥 벌어 먹고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내가 살아가는데 갖는 물음과 생각에 아주 작은 실마리만 제공해주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와중에 내 삶은 여전히 퍽퍽하고 나아지는게 하나 없는 것 같을지라도. 이와중에 문학마저 몰랐다면 더 회의적인 태도와 허무함에 몸서리 쳤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흥미로운 것들이 참으로 많다.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고 잘 쓰는 것도 참 중요하다. 그러나 돈을 버는 주체인 나는 과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의문이 과연 무의미하고 살아가는데 불필요한 것일까.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기 때문에 무지하기도 하며 인간이기 때문에 의문을 갖고 방황하며 욕망도 하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바로 그런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다른 작품보다 우선적으로 셰익스피어 작품은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읽고 싶은 작품이 더 많아졌다. 막연히 가졌던 어려움도 다소 해소되었다. 마냥 어려운 것이 아닌거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물론 이런 생각들은 이전에 했던 숱한 다짐들에 묻혀 사라질 수도 있다. 실행력은 매우 더디겠지만. 일단 실천에 옮기는 걸로, 가지고 있는 텍스트 먼저 일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이 리뷰는 출판사 민음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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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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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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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 브렉시트, 폴린보티, 의식의 흐름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인 앨리 스미스의 글쓰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 인물의 기억 속을 오가는 장면 전환이 차분한 어조로 서술되지만, 때론 연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며 때론 모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계절 4부작 중 첫 번째로 출간된 이 작품은 '최초의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십대 소녀 엘리자베스와 그 이웃인 팔십 노인 대니얼과의 특별한 우정을 다루는데 등장하는 현실의 면면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이 곳곳에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으며, 그 여백의 틈으로 현실이 등장할 때면 차가운 바람을 맞은 듯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여권을 재발급 받는 것 하나에도 쓸데없이 복잡하고 번거로운 행정 절차가 소모적인 관행처럼 불편함만 남기며, 혼란스러운 사회의 맨얼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대니얼에 대해 혐오와 편견을 일삼던 엘리자베스의 엄마가 마지막엔 자신이 사회의 차별과 소외를 받게 된 입장에서 그에 따른 변화를 이룬 것이 생각치 못한 반전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이웃을 인터뷰해야 하는 숙제를 통해 시작된 대니얼과의 우정으로 인해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서른두 살의 미술사 강사가 되었고, 대니얼은 백한 살이 넘어 요양원에 누워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과거의 그들의 우정이 시작된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고 가는 대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로 인해 피어나는 창의성과 온정이 잘 드러나게 표현되고 있다. 깊고 너른 사고 방식을 심어주듯이. 


그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폴린 보티'라는 인물이 매우 흥미롭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팝 아티스트는 당시에는 당연했을지도 모를,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편견과 무식하기 이를데 없는 수식어로 폄하되었기에 때때로 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 스스로는 본인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지성적인 나체에 대한 언급, 크리스틴 킬러라는 여성의 스캔들을 다룬 작품, 시선의 폭력성에 맞서는 당당함이 좋았다. 어쩌면 모든 걸 다 가진 사기 캐릭터가 아닌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예술가이니 뭐 하나 흠집을 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못난 이들의 어리석은 치부와 같은 공격이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의 우정에는 있는 그대로의 특별함을 간직한 채 두고 싶다. 대니얼이란 역할은 내게는 한 번쯤 꿈꿔왔던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내가 엘리자베스처럼 영민하고 자신만의 감성을 가진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나에게도 있었을지도 모를 특별함을 이끌어 줄 좋은 어른 사람과의 우정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마음 한 켠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이다. 늘 수동적이었고, 가지고 있는 게 딱히 없었으므로 그런 인연이 없는게 당연한 게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들기도 한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창작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진 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표현 방식이 다소 모호하게 느껴졌고, 여백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백을 가진 호흡은 소설보다 시적인 특성으로 표현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섬세한 묘사가 아름답다, 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 소설은 여러 번 음미하듯이 반복해 읽어야 하니씩 그 의미를 아로새긴다는 느낌으로 접하기에 좋고, 오랜 여운도 남길 것 같았다.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두 인물간의 우정, 그 사이에 끼여든 혼란한 현실, 그리고 무의식과 기억을 오가는 지점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관계성, 계절의 변화 등 한 편의 가을 그림동화같기도 하다. 




특히 인종차별이 심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히는 영국이란 나라가 배경에 있다. 동성애자라는 소문에 휩싸인 이웃에 대해 편견과 차별없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다가가는 엘리자베스가 무척 사랑스러웠고, 그가 항상 무언갈 읽고 있길 바란다는 대니얼의 바람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동시대성의 공감을 자아낼 거라는 언급이 있었지만, 물론 이와 같은 차별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저쪽의 낡은 행정 절차와 혼란함보단 지금의 한국 사회의 면면이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전히 사회 곳곳마다 썩은 고인 물들이 많고, 적폐는 자신이 적폐인 줄 모르고 깨인 지식인마냥 지껄이지만, 우리 사회에는 평화로운 촛불 시위를 통해 얻은 민주주의가 있으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로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돌리게 된다.




문장이 아름다운 작품을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 단순히 표현하는 방식이, 그 수식이 아름답다는 것뿐 아니라 현실 사회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온기가 느껴지기에 이러한 말을 반복하게 된 것 같다.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이라는 표현은 묘하게 거대 장벽처럼 느껴져서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기대보다 걱정이 먼저 들었지만, 막상 책장을 열어보니 유려한 문체와 서사를 진행하는 방식이 좋아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앨리스미스의 사계절 연작의 첫 작품이라 무척 다행이다. 다음을 기다리고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명명높은 여러 상들에 종종 후보에 올랐다고 하니 언젠가 꼭 수상 소식이 전해진다면 참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앨리 스미스라는 작가 역시 믿고 읽는 작가가 되었기에, 스스로는 결코 먼저 찾아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이 작품을 민음북클럽을 통해 알게 되어 정말 감사한 마음뿐이다. 북클럽의 순기능이 아닐까. 앞으로도 이렇게 좋은 작품을 하나씩 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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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 - 쉽게 읽고 깊게 사유하는 지혜로운 시간 하룻밤 시리즈
토마스 아키나리 지음, 오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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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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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보통 철학에 가지는 편견의 벽을 부시고, 철학을 배우는 목적이 삶의 고민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고, 유사시 대비할 수 있는 마음의 안전장치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깊게 고민할 때 그 고민을 잘 살필 수 있는 거울, 해결할 수 있는 도구 같은 철학을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방향성임을 아주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주춤거리며 한 발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대개의 철학자들이 교양시간에 한 번쯤은 언급되며 배웠던 이름들이지만, 그들의 사상이랄까 관련된 모든 지식과 사고가 소 귀에 경 읽기마냥 그저 흘러가기 일쑤였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한 번쯤 던져보는 질문들에 스스로 골머리 앓다 속을 끓이는 순간이 들면 떠오르는 학문이기도 하다. 여러 학자들이 호명 되었지만 그중에 기억에 남아 다시 자세히 찾아 읽어보고 싶었던 인물은 실존에 대해 말한 키르케고르와 극한의 상황에서 '초인'을 찾았던 니체 그리고 언어구조학자들 비트겐슈타인,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등이다. 


시대별로 차례대로 읽어나가다 보니 앞선 체계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전복시키며 자신의 신념을 구축하는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다. 절망이라는 질병은 반드시 앓을 수밖에 없으며, 존재와 있다의 깊은 굴 속에서 내가 읽고 있는게 한국어가 맞는지 아득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양한 예시가 등장하며 한 번 쓱 훑어보기가 가능한 게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그래서 제목은 다소 비약적이지만 실은 절대 하룻밤에 다 읽을 수 없는 철학에 대해 이렇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 또한 대단한 능력인 게 분명하다. 이런 부분에서 저자의 정리 능력에 존경을 표한다.



삶에 철학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아날로그 감성을 찾는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고 고된 일상이 지속될수록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찾기 위해 과거에 비슷한 고민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우리의 현실이 담긴 작품에서 위안을 얻는다. 과거에도 이와 같은 무거운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이건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의문을 가졌지만 풀리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다. 나의 삶이 존재하는 이유, 내가 여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실존이란 무엇인가. 문득문득 낯선 감각이 일 때마다 궁금하였지만 잘 해소시키지는 못하였다. 이번 기회에 살짝 맛만 보게 된 철학에 대해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소화시킬 수 있도록 해야겠다. 




1장 사색하는 사람의 기원_고대, 중세 사상



1. 소크라테스: 윤리적 주지주의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어떤 테마에 대해 대화(질문과 대답)를 해나가면 반드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옳은 것'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로고스(논리,이상,언어 등 근원적 질서)를 구사하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보면 최종적으로 모두가 똑같은 하나의 결론(객관적, 보편적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이성을 신뢰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이성 중시'입장은 이후의 유럽 철학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24쪽



'지식과 행동은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덕에 대해 논의하고 음미하는', 즉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6쪽



옳지 않은 행동을 저질렀을 때 파괴되는 내면의 존재란 아마 '양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0쪽



철학은 혼을 보살피는 것이며, 이는 죽음에 대한 훈련이라는 것.



2.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르케는 세계의 원리, 시원, 근거 등의 의미를 지닌 단어다. 변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로 자연현상이나 물질 등을 아르케로 정의했다. 그중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을 모두 포섭한 주장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플라톤이다. 32쪽



플라톤에 의하면 현상세계 안에 있는 빨간색이 사라져도 다른 빨간색이 나타나는 것은, 빨간색의 근원이 되는 존재가 현실에 떨어진 다른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빨간 색에서 좀더 사고를 확장해보자. 색뿐만 아니라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는 원형이 있다. 그 원형이 있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이 되풀히나는 이 세계에 일정한 유지가 유지돤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34쪽



이데아, 영혼의 환생, 상기이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철학인 형이상학이란 사실 존재 전반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42쪽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에 따르자면, 주어가 되고 술어가 되지 않는 개체가 바로 실체가 된다. 현실에 있는 개체로서의 실체는 그 자신은 변화하지 않고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술어를 받아들이는 존재인 것이다. 43쪽


질료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를 말하며, 그 가능성이 실현된 상태를 '현실태'라고 한다. 예를 들면 나무의 '가능태'는 종자고, 현실태는 생장한 나무다. 이미 최고도의 현실성을 갖고 있는 것을 '순수형상'이라고 하며, 이것은 '신'이라고도 불린다. 44쪽


그렇다면 세상 전체는 항상 목적을 갖고 완성하고자 하는 작용으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세상은 대체 무엇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걸까?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일까? 46쪽



3. 예수 그리스도, 바울



'세상은 봉사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의 원리란 이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상대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으려는 행위는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59-60쪽


4.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시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찰은 유명하다. 그는 시간은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여겼다. 시간 밖에 있는 신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신은 '영원'하다. 69쪽



물체는 자신의 무게에 따라 자기 자리로 향하려고 합니다. (…) 물체는 정해진 자리에 있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정해진 자리에 놓이면 안도합니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입니다. 나는 사랑에 의해 어디서나 사랑이 가는 곳으로 옮겨 갑니다.   -≪ 고백록  ≫ 제13권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피조물은 존재 그 자체인 신에게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눈부시게 신의 완전성과 신비를 반영한 모습이다. 피조물 세계의 모든 존재자는 신의 선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것을 반영하는 최선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76쪽



2장 신을 파헤치는 사람들_근대 사상




5. 데카르트



절대 확실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의심하는 일에 철저하게 매진했다. 이러한 의심을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아무리 의심을 하고 또 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절대 확실한 것'이다. 85쪽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단 한 가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지금 나는 의심하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도저히 의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의심하고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한 순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저절로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86쪽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존재한다. 나란 대체 무엇일까? 사회적인 지위로도 이름으로도 정의내릴 수 없다. 이 육체도 아니다. 나란 '생각하는 것' 자체, 즉 사유뿐인 존재다. 89쪽



고대철학에서 절대 진리로 통하는 필연적인 존재 신에게서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참된 것을 판단할 수 있다는 '이성의 독립선언'으로 그 체계의 중심이 인간으로 돌아갔다. 



데카르트는 스콜라 철학에서 수도 없이 거론되는 실체를 신과 물체, 정신으로 한정했다. 그중 물체의 속성의 연장, 정신의 속성은 사유라고 봤다. 이로 인해 공간이 균질해지고 역학적 · 기계론적 세계관이 가능해졌다. 데카르트가 창시한 해석기하학과 더불어 이러한 사상들은 근대 이후의 과학의 특징인 자연의 수량화를 실현했다. 90쪽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신이 가진 성질로서의 불변성에서 운동량의 항존성을 확인한다. 마찬가지로 신의 불변성에서 물체의 관성의 법칙 등 자연법칙을 도출해내어 물리학의 체계를 구축해나갔다.  95쪽


자기 자신의 내적 감정, 지적인 감정의 힘에 의해 우리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우리 인생에서 커다란 지침으로 삼기 좋다. 100쪽


6.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은 같다고 생각했다. 신은 오로지 존재할 뿐이고, 그 존재가 드러난 모습이 '자연'이다. 따라서 현실을 떠난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신은 생각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신인 것이다. 정신과 물체라는 두 속성은 서로 독립해 있다. 물체적인 것은 물체적인 것밖에 원인으로 가질 수 없고 정신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밖에 원인으로 가질 수 없다. 정신과 물체와의 사이에는 완전한 일치를 찾을 수 있다. 107쪽


신은 구원을 하거나 재판을 하지 않는다. 순수한 원리이고 자연 자체이다. 신은 '산출하는 자연'임과 동시에 '산출된 자연'이다. 110쪽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것보다는 모든 것이 필연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안심하기 좋다. 세계를 '영원한 상의 토대'로 인식하고 필연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생각한 진정한 자유였다. 112쪽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는 변하지 않고 계속 본질을 유지하려는 의지, 경향이 있다고 봤다. 이를 코나투스라고 한다. '노력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이 말은 사물이냐, 인간이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존재에게 코나투스는 본능적인 것이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113쪽


[정리3] 수동적인 감정은 우리가 그 감정에 대한 명료 · 분명한 관념을 형성하면, 순식간에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게 된다. - ≪에티카≫ 제5부


불행하다는 수동적인 감정은 고귀한 능동적 감정으로서의 '신에 대한 지적 사랑(신을 영원한 것으로 인식하는, 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 극복된다. 이는 자신이 세계의 일부이며 신神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이 세상과의 일체감이 생기고 지복이 찾아온다. 116쪽


7. 로크, 버클리, 흄


로크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주장을 부정하고 인간은 경험에 의해 관념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났을 때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마치 백지 상태와도 같다고 설명했다. 120쪽


제1성질은 실제로 물체 안에서 존재하지만, 제2성질은 인간만이 느기는 것이고, 마음속에만 있는 주관적인 관념이다. 122쪽


이렇게 버클리는 어떤 물체도 '지각되는'것을 떠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하며, 이를 토대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라는 정식을 완성했다. 125쪽


인상과 관념은 모든 인식의 기원은 인상에 있다는 경험론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다. 흄은 '관념의 관계'에 관한 지식과 '사실'에 관한 지식으로 구별한다. '관념의 관계'에 관한 지식은 수학이고 흄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혹은 논증적으로 확실한 지식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고 한다. '사실'이라는 것은 경험에 의지하고 있어 잘못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126쪽


8. 칸트



이 세상은 우리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성과 이성의 기능이 능동적으로 세계를 완성한 결과 덕분이다. '인식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에 따르는' 것이다. 칸트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이것을 칸트는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칭했다. 134쪽


도덕적 자유란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거나 구속되지 않고 자기의 실천생활을 스스로 규제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름 아닌 바로 인간의 존엄이다. 인간은 어디로부터랄 것도 없이 들려오는 무조건의 명령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140쪽


9. 헤겔


철학의 역할은 착각을 타파하고 더욱 커다란 사고로 고양시켜가는 방식을 제공하는 데 있다. 145쪽


변증법이란 헤겔이 감각적 확신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방식으로, '존재 및 구체적인 현실의 운동 · 변화를 지배하는 윤리'다. 동시에 '모순과 대립, 그리고 그것을 지양함으로써 발전하는 운동과 변화를 파악하는 사고'이기도 하다. 148쪽


세계는 착각의 총체다. 인간은 그 안에서 단련되고 힘을 늘려가도록 만들어졌다. 149쪽


모든 현상은 ① 아직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은 안정된 단계(정, 즉자), ② 모순이 드러나는 단계(반, 대자) ③ 모순이 해소되고 고양되어 보존되는 단계(정이나 합, 즉자)를 거치며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 151쪽



3장 인간에게 존재를 묻다_현대 사상


10. 키르케고르


헤겔 철학은 근대 사상의 종말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키르케고르, 니체 등 현대 사상가로부터 총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대 사상은 근대 사상의 거인인 헤겔을 극복하는 데서 출발했다. 162쪽


실존이라는 개념은 이미 셸링이 주장했지만 키르케고르는 여기에 '자기 자신의 생에 대해'라는 뉘앙스를 추가했다. 실존이란 가능한 존재도 추상적 존재도 객관적 존재도 아닌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현실적, 구체적, 주체적인 나의 존재를 말한다. 163쪽


인간은 자신의 본성이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을 갖고 있다. 그 불안은, 인간은 자유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시킬지는 결국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해야만 한다는 부자유)는 상황에서 비롯된다. 166쪽



인간은 계속 스스로와 마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결정할까, 저렇게 행동할까 등으로 생각해보면서 자기라는 것에 대한 의식을 심화해나간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이대로는 안 된다'는 초좜과 절망감이 깊어진다. 다시 말해 자기의식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절망의 정도가 늘어난다. 166쪽



절망이라는 질병. 인간이기에 걸리는 질병이며, 걸리지 않는 존재는 오히려 불행할 수 있다는 게 역설적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 혹은 부조리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정열적으로 믿는 태도는 우리를 절망에서 구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인생은 늘 부조리로 가득 차 있지만, 뭔가를 올곧게 믿음으로써 미래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170쪽




11. 니체




과거의 철학은 진실을 추구하고 세계와 인생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해왔다. 그러나 니체에 의해 그런 것들은 '힘에의 의지'에 따른 해석이라는 것, 나아가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이 진리가 없음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과거의 철학은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다. 모든 것이 부정당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거기에 있는 것은 무無뿐이다. 

니체는 철학을 니할리즘으로 이끌었다. 니할리즘이란 목표나 의의가 상실된 상태를 말한다. 인류가 오래도록 믿어온 최고의 가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는 무목적 · 무의미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나체는 이처럼 최고의 가치가 상실된 상태를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했다. 

182쪽




어떤 일에도 등 돌리지 않고 견디며 상황을 원망하지 않고 운명을 사랑하는 강한 인간. 이러한 '힘에의 의지'순수하게 발휘해 강인하게 살아가는 인간이야말로 '초인'이다. 니체에 의하면 '초인'의 사상은 니할리즘을 극복하고 인생의 위대한 긍정으로 향하는 매우 적극적인 것이다. 

183쪽



괴로울 때도 변명을 하거나 순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극한 상황으로 쫓기는 심정이 된다.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다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두 형편없는 자신의 모습과 마주해야만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 괴로움을 지그시 참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자신을 괴로운 상황으로 몰아치는 것이, 즉 자신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86쪽



12.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인격이 '에스(ES, 이드Id와 같음)' '자아' '초자아' 세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에스'는 무의식이고 본능적인 에너지의 저장고이며 쾌락원칙에 따라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성질을 가졌다. 이를 억압하는 것이 바로 방어기제다. 자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무의식적, 자동적으로 기능하는 적응반응 가운데 하나로, 본래 자아의 힘으로 합리적인 문제 해결을 통해 욕구를 채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192쪽


13. 후설, 하이데거



현상학은 우리 눈앞에 나타난 현상을 중심에 두는 철학으로 현상의 구조를 통해 실재하거나 상상 속에 있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다. 창시자인 후설은 철학은 주관과 상대성 대신 수학적 법칙과 과학적 논리에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4쪽


존재론적 차이는 존재 자체와는 구별된다. 존재자는 세계 안에 각각 존재하는 것이며 '사물이 어떻게 존재할까(존재론적 물음)'는 다르다. 213쪽


하이데거는 존재가 작용하는 장이 되고 있는 인간을 두고 '현존재'라 불렀다. '현존재(인간)'가 존재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알면 존재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214쪽



하이데거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대상(세계)에 과학적 인식을 매개로 하여 외부로부터 파고든다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신 이미 자신이 일정한 방식으로 세계 안에 있음을 기정사실로서 발견하는 것이라고 봤다. 216쪽


하이데거는 시간을 살아가는 현존재(인간)가 미래에는 이미 어떤 가능성도 없는, 궁극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그 가능성의 끝은 죽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은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다. 죽음은 확실하며, 먼저 체험할 수도 없고,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나보다 앞서 있는' 가능성이다. 222쪽



14.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자신이란 항상 자신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슬퍼해야 할 일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어떠한' 존재라고 정해진 게 아니라 이 세계에 내던져져 스스로를 만든다고 봤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표현했다. 228쪽


인간관계란 이렇게 서로에게 '시선'을 주고받는, 자유로운 주체끼리에 의한 불가피한 상극의 상태이다. 229쪽


인간의 행위는 그것과 행함과 동시에 즉시 타자의 음미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즉 '시선'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인간관계가 자유로운 주체끼리의 연결인 이상, '시선'이라는 둘 사이의 공간에서 타자로부터의 승인을 얻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232쪽


메를로퐁티는 내가 살 수 있는, 지각한 상태의 현실 세계를 '현상야'라고 불렀다. '현상야'를 살아가는 주체는 '자기의 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몸이야말로 다른 누구와도 대체시킬 수 없는 '실존'이며,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자아의 표현'이로 봤다. 234쪽




15.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은 각각의 생활 가운데 일정한 규칙을 토대로 언어 게임을 하고, 언어의 의미는 그 문장이 사용되는 문맥이나 그 문장이 속한 게임 규칙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언어의 의미는 사물과의 대응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언어가 촉발시킨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의 철학 작업은 언어의 용법이 야기시킨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고, 그 열쇠는 일상 언어의 분석에 있다. 251쪽



16.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소쉬르가 언어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세 가지 개념이 있다. 먼저 시니피앙은 음성의 청각적인 영상으로서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시니피에는 언어 기호인 시뉴가 그 내부에 지니는 개념(의미)을 의미한다. 256쪽


물건과 일을 말을 통해 구별하는 것은 곧 언어에 의해 현실세계를 구분 짓는(분절화) 것이다. 그 반대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구분지어진 세계에 말을 적용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59쪽



세계는 언어였다. 언어가 늘면 세계가 확장된다. 그렇다면 언어와 언어의 관계를 분석하면 세계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었다. 260쪽


구조주의는 언어학에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문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등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언어는 우리 생각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도구이며, 문화를 지배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구조주의를 활용하는 것이 의미있는 이유다. 265쪽



17. 마르크스, 알튀세르



이처럼 노동이란 본래 자신을 표현하는 즐거운 자기실현의 수단이지 괴로운 것은 아니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것이 바로 노동의 참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노동은 괴로운 것,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것으로 치부하는 걸까? 272쪽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사회적으로 생산함으로써 생산관계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 전체의 존재 방식인 토대가 되고 그 위에 계층에는 법률 제도나 이데올로기가 상부구조로서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즉 먼저 경제적 토대가 있어야 비로소 그에 맞는 정치 · 법률 · 문화가 성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77쪽



우리는 사회가 인간이라는 주체의 총체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의사를 초월한 구조가 지닌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전쟁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고 개인과는 전혀 관계없이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는 주체의 힘이 미치지 않는 구조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282쪽



18. 데리다, 들뢰즈




지금까지는 대화언어, 그리고 그로 인해 자기 내면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며 예크리튀르는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사실은 에크리튀르가 어떤 언어들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것이다. 288쪽



'지금 여기'의 시간적, 공간적 제약에서 떠나 확산되어 가는 에크리튀르를 내포하는 사물의 존재방식을 두고 데리다는 '다르다'와 '연기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differer을 이용하여 차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차연'으로서의 나는 '지금 여기'의 구속에서 해방됨으로써 무거운 자의식이나 이기적인 사고로부터 해방된다. 290쪽


쓰인 텍스트는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철학자들의 텍스트에 '차연'적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읽어도 무방하다. 오히려 그것이 바로 텍스트를 실천적으로 읽는 행위일 것이다. 이처럼 탈구축이란 단순한 부정이나 파괴가 아니라, 대상의 내면에 머무르면서 대상을 그 내부부터 스스로 파괴시키고 거기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전략이다. 291쪽



서양 철학은 그리스 이후로 자기동일적인 존재(이데아, 신, 이성, 진리 등)를 강조해왔다. 들뢰즈는 자기동일성은 배제의 논리로서 기능하는 것이며 이것은 이성의 폭력이라고 설명한다. 292쪽



애당초 차별의식이란 이러한 이데아적 발상에서 탄생한 것은 아닐까? 인종차별, 성차별, 연령차별, 집단 따돌림 등의 가장 밑바닥에는 서로 차이와 다양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 본래 있지도 않은 실체를 절대시하는 왜곡된 사고법이 있다. 293쪽


우리의 경제를 구성하는 자본 · 화폐 · 상품 · 노동은 정치적, 법적, 문화적인 모든 요인을 포함하며 모든 것이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화폐는 그 욕망을 교환 · 순환시키는 장치다. 295쪽



자본주의는 욕망이 사상으로 구현된 것이다. 그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는 그 점을 절감하고 있다. 보고 싶은, 먹고 싶은, 채우고 싶은 다양한 욕망의 수요에 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형성된다. 예컨대 편의점은 온갖 욕망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견본 시장이다. 295쪽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스키조에 머물면서 파라노는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그들은 노마드라 불렀다. 297-298쪽



노마드는 자기동일적인 것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방기한다. 그들은 닫힌 것, 굳어진 것을 잇달아 파괴하고 '도주'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한다. 298쪽



19. 제임스, 듀이, 로티



프래그머티즘의 사고법은 실제적인 결과와 총계가 모든 일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딱딱하다'라는 것은 다른 물건으로 할퀴어도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무겁다'라는 것은 받쳐주지 않으면 낙하한다는 의미와 다름이 없다. 이처럼 개념의 의미 내용을 대상이 초래하는 실제 결과로 생각하고자 하는 원칙을 프래그머티즘의 준칙(실용주의의 격률)이라고 한다. 304-305쪽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관계없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 자체가 진실이다. '회사는 지겨운 곳'이라는 당신의 생각은 진리다. 그리고 '학교는 지겨운 곳'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김없는 진리다. 당신이 세상의 모습을 창조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부정적인 발상이라면 당신이라는 신은 스스로 시시한 세상을 창조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307쪽







(이 리뷰는 RHK 북클럽1기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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