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직톤의 초상 이승우 컬렉션 1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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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두 얼굴, 무수한 에리직톤들과 그를 위한 변명




『에리직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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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인간의 역사는 왜 폭력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



소설의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는 1980년대 초에 쓰인 1980년대 초의 이야기이고, 2부는 1980년대 말이 쓰인 1980년대 말의 이야기이다.


병욱은 신학대학 출신이나 목회자의 길을 걷지 않은 인물이다. 신문기자가 된 그는 교황저격사건과 관련한 취재로 인해 은사인 정교수를 찾아가게 된다.


폭력과 자유에 대한 주제로 시작된 강의에서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어떻게 하여 인간의 역사가 탄생되었는지, 폭력의 탄생과 변명에서 비롯한 항의 등,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관계성에서 세상을 이루는 배경요소들의 탄생비화를 들려준다. 


모든 것은 굴절하고 왜곡되며, 결국 폭력의 기원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모든 폭력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것이다. 완전한 에덴을 허문 것은 뱀이었고, 폭력 또한 뱀과 함께 들어온 것이며, 유전자를 통해 우리영혼 속에 보존되어 있다고 말한다. 


병욱이 사랑했던 연인인 혜령은 그가 목회자의 길을 걷지 않음을 알게 된 후, 이별을 고했다. 형석이라는 다른 남자와 유학을 떠난 혜령에게 미련이 남아있던 병욱에게, 정교수는 혜령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혜령과의 새로운 시작을 기대한 병욱과 달리 많이 지쳐보이는 모습을 한 혜령은 단호하게 지친 마음의 안식을 얻고자 신앙생활에 집중하려 한다. 아쉬움에 뒤돌아서 병욱에게 독일에 남은 형석이 편지를 보내온다.


중학교 시절 받은 기묘한 체벌 방식으로 인한 어떤 트라우마의 잔재가 남은 듯한 형석.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한 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했던 혜령과 겉보기에는 잘 맞는 상성같았지만, 어딘가 늘 불안해보이는 형석은 결국 홀로 남게 된다.


형석은 어린 시절의 허물어진 가정에서 받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하찮게 여겨지거나 부정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때문에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탈피하고자  추크슈피체 산을 오른다. 우연히 들린 사격장에서 키작은 서양인 델브루케를 만나게 된다.


병욱의 미련과 달리 혜령은 수녀가 된다. 새로이 접점을 찾지 못해 어긋난 인연은 이로써 종결되는 듯 했다. 


정교수의 설교에서 언급되는 에리직톤이란 인물은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신성을 부정하고 여신 시어리어스가 아끼는 참나물 베어버렸기에 굶주림의 저주에 걸리게 된다. 먹을수록 허기가 지는 이 저주로 인해 재산도 탕진하고 하나 뿐인 딸까지 팔아버리는 등 분별력과 인간으로서의 도리마저 빼앗기게 되고, 종국에는 자신의 육신마저 뜯어먹음으로써 파멸에 이른다.



# 에리직톤을 위한 변명



혜령이 수녀원이 들어간 후, 교황 저격사건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병욱은 지금 만나고 있는 희수와 결혼을 생각해보지만, 자의에 의한 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수동적이다. 희수의 압박에 못이겨 주례를 부탁한다는 핑계로 찾아간 정교수에서 다시금 혜령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신학대학 동기였던 태혁과 뜻밖에도 수녀원에서 재회하게 된 혜령은 자신의 삶, 그리고 그에 임하는 태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수직이 전제되지 않은, 모든 수평적인 것은 부정하고 수직의 절대성을 지원하는 예화로 인용됐던 에리직톤은, 태혁이 행하는 노동운동의 방법(폭력, 방화와 같은)에 대해 반대하며 말하는 혜령에 의해 다시금 인용된다.  


하지만 권력 앞에서 성역은 존재치 아니하게 되고, 박신부와 수녀들은 힘에 의해 끌려가야 했다. 태혁은 자해라는 표면적 이유로 입원하였으나, 고압적이고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눈과 입마저 틀어 막혀 버린다. 젊은 한 사람의 존재가 지워져 버릴 수도 있는, 무서운 힘이 작용되는 시대인 것이고, 슬프고 아프다.


지금도 별반 다를 것은 없는 것 같다. 되레 다른 방식의 억압이 심화되고 있으니 말이다. 



혜령의 손에 겨우 남겨진 태혁의 노트에는 그는 말한다. 보통 가지고 있는 생각과 달리 신화는 객관적이지 않고, 세계상을 제시하는 모형도 아니면서. 신화는 탄생된 특정시대의 사고와 세계관과 언어로 이뤄지므로, 있는 그대로가 아닌 읽는 이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재해석하는 비신화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때문에 에리직톤은 정말 어떤 인물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신화 속 그대로 저속한 인물이었을지, 신성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한 구조를 개혁하고자 싸움을 벌인 의인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신에게 반기를 든 에리직톤의 시도는 실패로 끝이 났고, 신성모독의 죄를 가진 저속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반면, 파라오의 권력 앞에서 이집트 노예들을 구원하려 한 모세는 끝내 성공하였고, 그 과정에서 행한 살인은 정당화되기까지 했다. 에리직톤은 신화와 권력에 도전했지만, 실패함으로써 신화를 계속 유지하고 강화해준다. 반면 모세는 신화와 권력에 도전하여 성공함으로써 신화를 종결시킨다. 


이로 인해 신화에 기댄 권력은 사실상 붕괴되고 안정과 질서의 신화는 자유와 해방의 삶으로 대치된다. 모세에게 와서 비로소 에리직톤은 명예를 회복한다. 고로 모세는 비신화화한 에리직톤이다.


태혁은 에리직톤의 신화를 부수기 위한 더 많은 에리직톤이 필요하며, 그 순간 얻게 될 이름은 바로 모세라고 말한다. 즉, 해방자이자 구원자인 인물인 것이다.



# 구원과 폭력의 관계



형식과 개혁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억압으로 변한 굳은 형식과 삶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잘못된 개혁에 대한 경계이다. 형식은 개혁을 요청하고 개혁은 형식을 지향한다. 


소설 속 시대를 가리켜 병욱의 동료기자인 최는 한 사회심리학자를 인용하며 인간을 지배하는 두 가지 경향성에 대해 말한다. 바이오필리아는 생명을 사랑하는 정열이고, 네크로필리아는 생명을 파괴하는 정열이다. 생명을 사랑하고자 하는 정열이 성장을 멈추면 생명을 파괴하는정열이 증식한다는 것이다. 즉,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게 된 자아가 고립될 때, 유일한 대안은 생명 파괴로 나타나게 된다.


인간의 역사에서 폭력은 오래된 층에 속한다.


피에 대한 욕구가 신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시초에 산에 바쳐진 제물이 피였다는 사실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오래전, 사람들은 금방 죽인 양이나 비둘기의 피를 제단에 뿌렸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피의 상징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성례를 치른다고 한다. 


이처럼 피와 생명력은 맞닿아 있다. 형석은 자신의 살아있는 인간이며, 붉은 피가 가진 생명력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욕구를 실행한다. 단지 생에 대한 집착으로, 가축이 아니고, 굼벵이도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확인하고자 하는 모든 부분에서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온다. 내가 겪은 통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릿해온다. 



고독한 어린 시절, 버림받았던 형석은 올바른 양육과 애정을 느껴보지 못했다. 피의 생동감을 확인하고자 첫 자살시도를 한 나이가 아홉살이었다. 자신의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내고, 특별한 인연의 델브루케가 또다시 실패의 저격으로 붙잡혔을 때도 마찬가지다.


공교롭게도 살고자 하는 열망이 강할수록 죽음의 흔적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 형석은 이내 그 그림자에 잠식당하고 만다. 제일 아픈 손가락같은 인물 같다. 


지속된 관계가 드물었고,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병욱에게 자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친밀함과 적의가 한데 뒤섞인 모양새다.


사람은 어떤 위치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인간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살인자인 동시에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상대적인 속성을 지닌다. 세상과 종교에서 받지 못한 구원을 버림받은 아이들로부터 받는 혜령. 살아있음을 인정받고자 했던 형석, 권력이 행사하는 그릇된 형식과 개혁을 바로잡고자 했던 태혁, 표현을 하기 이전에 자기검열을 해야만 했던 병욱. 먼길을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원점으로 복귀한 것 같다. 다시 시작할 일만 남은 것 같다. 학생들의 지지에 의해 학장이 된 정교수는 어느새 권력의 위치에 서 있단 이유로 퇴진을 요구받는다. 위치와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종교와 신화의 관점에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무관심과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이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작용될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는 없다. 다만 보지 못한 부분을 슬쩍 엿보게 된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폭력의 근원, 인간의 역사, 구원 등. 


고로, 슬픔으로 점철된 생이 조금은 줄어들었으면...하고 바라본다.




( 이 리뷰는 위즈덤하우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우리 영혼의 습지 한쪽에 독성의 혀를 날름거리는 뱀을 한 마리씩 키우고 있는 것이다. / 23쪽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아니면, 보아야 할 것만 본다. / 88쪽

지나친 빛 또한 어둠만큼 끔찍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빛 또한 소리와 같아서 수용할 수 있는 밝기에 제한 있는 것일까. 어떤 식으로 그 밝음을 표현하든, 우리가 느끼고 수용할 수 있는 밝음에는 한계가 있는 것일까. / 151쪽

뉴스는 뉴스를 덮는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뉴스가 만들어진다는 것. 새로운 뉴스들이 다투어 교황과 아그자를 잊게 했다. / 165쪽

모든 신화는 권력으로부터 나온다. 권력만이 신화를 생산할 자격을 가진다. 권력 구조의 신성화. 그것이 신화의 참된 기능이다. / 243쪽

구원은 이처럼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희생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폭력이다. 그리고 그 둘은 한 몸이다. / 269쪽

인간은 근본에 있어서 미친놈이며 범죄자이며 동시에 순교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개인의 특별한 정서를 악의적으로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내면이야말로 개인에게 고유한 영역이다. 모든 일이 그곳으로부터 비롯한다.
/ 279쪽


개개인의 고유한 정열에 대해 그것의 합당함과 부당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든 정열은 하나다. 오직 삶에 대한 열정만 있을 뿐이다. (…) 우리는 개인에게 자신의 고유한 삶에 대응하는 그만의 정열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권을 인정해야 한다.
/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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