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꽃 위픽
정이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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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에 적힌 한 단어 짜리 유서와 인도행 티켓. 내 여행의 유일한 이유였다.
무국적자가 되고 싶던 나날을 기억한다. 너와 나에게 흑백논리에 불과한 분류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국적도, 성별도, 어쩌면 이름까지도. 우린 인지적 편의를 위한 라벨들을 거부했다. 영혼을 위한 이름은 아니었으니까. 단 한 가지로도 표현할 수 있는 존재 양식이란 없기에 우린 초라한. 명칭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정이담의 <환생꽃>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논 바이너리로, ‘너’는 트랜스젠더로 이 세상을 살았고, ‘나’는 ‘너’를 사랑해왔다. 그런 너의 죽음으로 나는 그의 죽음을 추적해 나간다. 이 글은 내가 너를 추모하기 위해 떠나는 인도행이었다. 이 글을 읽으며 나 또한 그 애가 생각이 났다. 그 애가 자주 하던 말들이 정이담의 <환생꽃> 곳곳에 퍼져있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해할 수 없는 그 애의 심경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조금은 볼 수 있었다.

글은 넘치게 화려했다. 주인공 ‘나’는 무채색을 좋아하고 죽음을 택한 연인인 ‘너’는 화려한 색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를 추모하는 그의 심경은 무채색보단 짙고 화려한 색감의 꽃과 같았다. 십 대에 내가 나의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북받쳐 오르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글들처럼, 그를 추모하는 ‘나’의 글은 그렇게 넘치고 넘치다 못해 환각상태에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만약에 마약을 하는 사람의 뇌를 추적할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이 들 수 있겠다. 십 대에 내가 나의 꿈에 도취되었던 것처럼.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그 사람이 돌연 죽음을 맞이할 때의 마음이 이와 같을까.

보고 싶다.
긴 꿈이 이어졌다.
총천연색의 꽃이 건물을 무너뜨린다.
그 사이…… 네가 서 있었다. 꽃으로 만든 면사포가 드레스를 입고 나를 향해 웃는 너.
꽃에 짓눌려 질식하는 사람들 사이,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오직 너만 사랑을 고백했다. 종교, 자본, 편견, 혐오, 무지가 사랑을 대처하기 이전의 역사를, 네가 고백했다.
세상이 우리의 고백을 금지한다면 어디에도 없는 결혼식을 올리자. 주례는 노숙자에게 부탁하고, 청첩장은 죽어버린 연인들의 이름만 적자. 가장 낯선 결혼식을 올리자. 침수되는 꽃들이 우리의 하객. 주례사는 창백한 혀들을 갈가리 찢을 때 들린다. 당신들의 꽃, 그 꽃을 죽이고 괴물을 움켜쥘 거야 날개 뽑힌 천사가 힘을 보태겠지 아니 키스한 후 죽이고 싶다 이런 숭고한 감정 우주 속의 사랑 거름들이 마침내 바람 속을 기는 밤, 그 밤의 말미에, 꽃은 불탈수록 신선한 냄새가 난다 태초부터 축복이던 연인들의 향기를 알아차리면 꽃은 새벽으로 돌아오겠지 수없이 환생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꽃을 겨누는 동안.



글을 읽으며 슬픈 마음이 들었다. 예민하고 나의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받고 휘청이던 그 작고 여리면서도 악을 쓰는 그 애가 떠올랐다. ‘여자가 대체 뭔데?’ 난 그 애의 그런 말들이 가엾으면서도 꼭 그렇게 저항을 해야 해? 꼭 세상에 인정받아야 해? 생각하면서도. 그 애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 이후 알게 된 여러 작품들과 유튜브 속 그들을 살펴보며, 그 애의 생각들을 조금씩 이해했다. 지금 이 책처럼. 그들의 입장이 한 번이라도 되어보지 않았다면 과연 이런 책을 쓸 수 있었을까. 그런 슬픔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저울대에 올라가야 하면서도 그렇게 올라가길 마침내 자처하는. 귀찮게 저항하고 소리를 지르는 그들의 무지갯빛을. 그들에겐 성이 이슈겠지만, 누구나 각자 이 세상의 저울과 라벨로 분류되는 것에 저항하는 것 하나쯤은 있지 않나. 우리가 얼마나 사회에 제대로 소속되었기에 의기양양하게 그들의 존재를 다름으로 분류하나. 우리또한 저나름의 소수자로 살고 있으면서. 사회에 소속되기 위해 소의 귀에 박힌 플라스틱 라벨처럼. 학교, 직장, 성별, 나이, 국적, 종교, 자본, 출신…….


‘보호’란 ‘가해자’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중략)
만약 우리의 다양성을 남김없이 드러내도 존중받는 사회라면, 성향과 지향을 이유로 공격하거나 추행하지 않는 사회라면, 타인의 입장에서 다양한 경계를 상상할 수 있는 사회라면 모두의 숨통이 트일 텐데, 더위에도 앉지 못하는 남자들과, 그들의 접근을 막는 성벽처럼 둥글게 좌석을 둘러싸고 창밖만 바라보는 여자들 속에 하릴없이 실려 이동했다. 그들은 내 이방인 다운 헤어스타일에 시선을 몇 번 주었다. 그건 차라리 한 가지 특징을 과도하게 오독하는 일보단 나았다. 난 점점 삶을, 이 여행을 판단할 수 없었다.


제3의 성, 작가는 그 자신을 제3의 성이라고 불렀다. 글이 좀 과격하고 낭만적이고 넘치는 낱말들로 범벅이 되어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분명하다. 세상은 사람을 그들의 편의로 분류하고 주된 분류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인정하지 않지만. 사실 이 세상을 제대로 분류하려고 하면 남성, 여성이란 간편한 말들로는 그들을 제대로 분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 보호의 울타리 어디에도 두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다.

“ “사람의 몸은 언젠가 노쇠하며 수만 가지로 변한다. 우리의 몸은 필연적으로 경계를 건넌다. 자연은 원래 혼란하다. 그걸 이분법 안에 두고 정상이라 부르는 일은 인간의 오만이다. 통제를 위해서만 발명된 구분을 숭상하는 건 우습다. 세상엔 100만 개의 신, 100만 종류의 여성, 100만 분류의 남성이 필요하다. 제3, 제4, 제5와 제6의 성이 발생하고, 제11의 성과 제13의 성이 동반자가 되어 ‘남성’같은 개념 따위 가장 작고 초라해질 때에야 영혼엔 자유가 찾아올지도.”

그가 여행하는 인도라는 지리의 문화적 특성상 특히나 여성의 인권이 바닥에 있기에 좀 더 적나라하게 여성이란 존재가 존재만으로도 불온할 수밖에 없는 현실. 거기에 성 정체성마저 내려놓고 그에 목소리를 내며 분개한다.

인도 여행 중 그가 발견한 인도에서 신에게 바치는 푸자 꽃처럼. 연약하고 부드럽기보다 눈이 아플 만큼 쨍한 노랑, 자주, 주황…… 불꽃처럼 강렬한 마리골드. 현란하고 극적인 꽃 더미 같은 건 이 글도 마찬가지라 여겨졌다. 변두리에도 걸쳐 있지 못한 배척되는 소수자이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한 색채를 띠는. 그래서 이 회색 도시에 그들이 배척되는 걸까, 그들이 뒤섞일 수 없는 화려한 색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글이 역시나 화려하고 극적이고 또 시적이다.


본색을 드러낸 꽃들이 세상을 활보한다. 바닥의 검은 것들이 꽃인지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우박처럼 쏟아재는 꽃이 전봇대를 무너뜨린다. 그림자마저 꽃의 색으로 찬란하다. 배가 아팠다. 강한 본능을 간직한 장이 꿈틀거리며 몸부림친다. 난 왜 아직도 살고 싶을까. 살고 싶어도 되나. 이미 지옥이나 다름없는 이승에서 무엇을 위해 생명을 이어야 하나. 눈물은 증발했다. 인간에게 눈물은 사치다. 인간은 신에 가까운 것들을 수없이 죽였다. 그 결과 더 많은 신들이 태어났다. 아마 너도 저 너머에서 꽃의 신이 되었을 테지. 경계와 차원을 넘나들고, 더 많은 사랑을 피우는 존재로 진화했겠지.


그가 인도행을 선택한 이유는 그 사람이 인도에 오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인도는 제3의 성을 인정한 나라였다. 여행을 하면서 그는 ‘히즈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히즈라는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환경에서 생식기를 제거한다. 생식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그 대신 타인에게, 특히 새로 태어난 아기와 그 가정에 축복을 내리는 능력이 생긴다. 히즈라가 기도하면 불임이던 곳에 아기가 태어나기도 한다. 그게 바로 바후차라 마타의 신성을 물려받은 히즈라의 숙명이다. 인도의 신들은 여러 인격을 가졌고, 대부분은 양성적이다. 그 신격을 물려받은 존재가 바로 #히즈라 다.

그는 히즈라가 죽으면 어떤 식의 장례를 치르는지, 히즈라가 죽으면 그들이 영세에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알고자 한다. 난 아마도 이 대목이 히즈라의 운명이 그 자신과 그녀의 운명과 비슷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히즈라의 신성을 그들이 물려받은 것은 아니지만, 신성을 제외하곤 그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3억의 신과 공존하는 인도에서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좀 더 이해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왜냐면 이해할 수 없는 건 계속해서 머리에 남아있기 마련이고.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선, 제대로 그를 추모하기 위해선 몸을 비행기에 실어 인도로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에 정확한 대답을 해줄 거라고 믿었던 그루는 이미 죽었다. 그녀의 유골이 담겨있던 병은 실수로 깨트려 강가로 흩어졌다. 히즈라가 거짓말을 했고 그녀는 그 도중에 방황한다.

강가에서 팔려나가듯 늙은 남자에게 결혼을 강매당하는 어린 소녀를 바라봤다. 어린 소녀의 언니가 급사하게 되었는데, 인도에는 신부의 지참금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돈을 갚을 여력이 되지 않으니 어린 나이에도 팔리듯 결혼할 처지에 놓였다. ‘나(차이)’는 이 장면을 보며 분개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너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실패했고, 갠지스강에 머리를 담가 보았지만, 그저 비릿하고 역겹게 오염된 물에 불과하다. 그 강가에서 힘없이 팔려나가는 소녀를 바라보다가, ‘나’ 차이는 그녀가 몰래 이 결혼에서 도망갈 수 있게 노를 건넨다.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족쇄같이 목을 휘감던 꽃목걸이와 장신구를 벗어던지며 그 결혼으로부터 탈출한다. 소녀의 해방을 도운 건 마치 ‘내’가 이 세상에 여성의 육신으로 태어나 얻은 부조리로부터 벗어나고픈 그의 소망이 담긴 것이 아닌가. 죽음을 함부로 선택할 수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후를 이해할 수도 없지만. 소녀를 탈출시키며 세상이 부여한 여성성에서 벗어나고픈 그녀만의 의식이 아니었을까.

위픽의 다른 시리즈였던 조예은의 <만조를 기다리며>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떠나는 추모의 여행. 하지만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도, 어투도, 모든 것이 사뭇 달랐다. 글이란 낱말이 500여 쪽이나 되게 모여있다고 해서 괜찮은 서사나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란 걸 위픽과 근래에 읽었던 책을 통해서 여실히 느꼈다. 처음엔 위픽 시리즈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분량은 너무 작고, 책도 작고, 이게 과연 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이젠 좀 알 것 같다. 기간과 분량이 제한된 상황에서 작가들이 펼칠 수 있는 역량의 다양성을 관찰하는 것이 하나의 유희가 되었다. 짧은 시와 열댓 권의 대서사가 담긴 책을 두고 무엇이 더 훌륭한가 운운하기 어려운 것처럼. 아 글의 가치란,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란 쪽수나 분량의 문제가 아니구나. 시간의 제약 때문에 완성도를 더 올리지 못한 게 아쉬울 수 있지만. 그동안 작품이 될 수 있지만 작품이지 못했던 이런 작은 단편들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만약에 내가 작가라면, 이 위픽 시리즈에 도전한다는 것이 작가로서 큰 의미를 가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두꺼운 책의 정가와 이 책의 정가가 같다는 것에 나는 더 이상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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