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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서의 겨울
엘리자 수아 뒤사팽 지음, 이상해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10월
평점 :

혼란스러운 정체성에 관한 성찰의 기록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마지막 장을 읽고나서 동공지진이 오고말았다.
작가의 뛰어나고 독특한 표현력은 진귀한 보석과도 같았다. 헌데 분명, 훌륭하고 매끈한 한국어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난해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친절한 이상해 번역가가 남겨주신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서야, 이 글을 어떤 방향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어렴풋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속초에서의 겨울' 은 단숨에 읽으면 안 된다. '프랑스인' 케랑은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리게 하고,
엘리자 수아 뒤사팽의 글쓰기는 우아하고 간결한 뒤라스의 영향을 엿보게 한다.
엘리자 수아 뒤사팽이 고른 낱말들은 조금씩 음미해야 한다.
- 에릭 에소노 (소설가)
이 추천사를 읽고 나서야, 내가 너무 단숨에 읽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다시 한 번 그녀의 책의 첫 장을 펼쳐 단어들을 음미하기 시작한다. 처음 읽었던 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읽히는 것 같았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더 깊이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곧 이어…
그 잔잔하고 서늘한 공기가, 바닷바람에 실려 온 비릿한 내음이, 온 몸을 축축하게 적시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걷는 곳을 나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케랑이 있는 속초 해변에서도, 휴전선에도, 설악산 국립공원에도, 낙산사에도, 어시장에도…
서서히 냄새와 촉감과 온도가 느껴진다.
나는 펜션 옥상에 오른다.
그리고 불현듯 속초의 곳곳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속초의 겨울에 서 있다.


속초에서 태어나지 않고는, 그곳에서 겨울을 나보지 않고는, 그 냄새들과 문어를 모르고는 그곳을 안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그 외로움을 겪어보지 않고는. (p.25)
나는 때수건으로 발, 다리, 엉덩이, 배, 팔, 어깨, 가슴을 오랫동안 문질러 쌓인 때를 벗기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앉았다. 근육과 지방 덩어리를 싸고 있는 피부가 허벅지에 남은 흉터처럼 발그스레하게 익을 때까지. (p.42)
※ 이 작가 한국사람 맞네. 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나는 그 여자가 케랑 앞에서 우리 언어로 대답하지 않은 데서 오는 굴욕감을 애써 삼켰다. (p.48)
※ 아마도 분명 작가는 한국에서 한국말로 말을 걸었는데 영어로 대답이 돌아오는 경험을 했을거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나, 작가의 삶에서나 '한국어'는 모국어인데, 정확한 한국어를 듣고도 어째서 영어로 답변을 하는걸까.
나는 보통 영어로 길을 묻는 것이 아닌 이상은 외국인이어도 한국어로 대답을 하는 편인데, 이유인즉 외국인이 모두 영어권 사람이 아닐테고 불분명한 한국발음으로 질문을 한다면 으레 한국어로 답해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어서다.
내가 외국에 나간다고 상상해보자. 덴마크어를 배워서 언어를 사용해 보고 싶은 마음에 덴마크로 갔는데, 어눌한 덴마크어로 질문하니까 영어로 답변이 되돌아온다면 속상하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는 길을 묻는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한국어로 대답해주면 되겠다. 필요하다면 적절한 바디랭귀지와 함께.
영어 울렁증때문에 이러는거 절대 아니고요. ㅋㅋㅋ
엄마가 새 한복을 사주겠다고 성화를 부리는 통에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설이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는 나더러 때가 때인 만큼 여자다운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다. 웃기시네. 내가 설날에 한복을 입지 않은 게 벌써 몇 해짼데. 엄마가 난리를 치는 것은 올 설날에 내려 오겠다고 연락이 온 서울 큰이모 때문이었다. 엄마는 때 빼고 광내려고 날 들볶을 터였다. (p.57)
※ 나도 까치까치 설날엔 한복 입고 싶다.
"노르망디의 해변들, 전쟁은 그 위를 지나갔어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긴 해도 삶은 계속되고 있죠. 이곳 해변들은 아직도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기다림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결국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믿게 된 거예요. 그래서 호텔도 짓고 반짝이 전등 장식도 하죠. 하지만 그것들 다 가짜예요. 그건 두 절벽 사이에 길게 늘어져 있는 줄 같아요. 언제 끊어질지 알지 못한 채 몽유병환자가 되어 그 위를 걷는 거죠. 이곳 사람들은 둘 사이에서 살고 있어요.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 겨울 같은!" (p.101)
※ 나는 이 부분에서 엘리자의 외국인 면을 읽었다. 이 시선은 한국에 살아보지 않는 외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시선 아닐까.
그는 내 눈길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마음은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못하는, 단지 명석한 머리에서 나온 차갑고 잔인한 진실처럼.
나는 그 명석함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나를 그려주길 바랐다. (p.150)


그러나 여전히 나는 유럽에서는 아시아인이고, 아시아에서는 서양인이다. 어디에 있든, 아버지나 어머니의 나라에서 나의 일부는 낯선 이방인으로 남아 있다.
- 한국어판 서문 中 -
어디에도 소속되었다고 느끼지 못한 채 보내는 청소년기는, 그녀에게 암흑과 같던 혼돈의 시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에게 그 혼란은 단순한 혼돈에서 벗어나 글을 쓰는 동력이고, 원초적인 영감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엘리자의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똑같이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에게 태어났지만 엘리자와는 다르게 속초에서 자라나 한국을 벗어난 적 없는 한국의 이방인이다. 프랑스의 이방인이었던 자신과 다르게, 소설 속 그녀는 속초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 아버지의 고향 '노르망디'와 몹시도 닮아 보였다는 '속초'. 엘리자는 그렇게 자신의 거처를 창조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소설 속에 풀어 내렸다.
소설 속의 속초는 대한민국 강원도의 속초시가 아닌, 엘리자 수아 뒤사팽의 속초다. 혹한으로 모든 것이 느려지는 어둡고 추운 노스탤지어. 그녀의 개체들이 대화를 주고 받는 마음 속 안식처.
누구든 힘든 시간이 찾아온다.
그 지독하게 고독하고 칠흑같이 깜깜한 밤으로 뒤덮인 시간, 자신의 힘으로 그 안개를 걷어내며 발을 내딛지 않으면 끝없이 빨려들어가는 빨대구멍 속에 빠지고 마는 것 같다. 그 안에서 한 발자국만 밖을 향해 힘주어 밀고 나가면 구멍난 빨대는 나를 빨아들이는 압력을 잃고 마는 것을 모른 채.
빨대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기 위해, 오늘도 힘주어 한 걸음 걸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