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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칸토 1
앤 패챗 지음, 김근희 옮김 / 민음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앤 패챗의 '벨칸토'. 특이하게도 '리마 신드롬'을 소설의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
페루의 일본대사관에서 일천황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던 날, 반군 게릴라들이 대사관을 장악하고 넉 달에 걸친 인질극을 벌였던 것이 리마 신드롬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오랜 인질극 와중에 반군 게릴라들과 인질들 사이에 상당한 인간적 공감이 이루어졌고 특히 문명의 세계를 처음 접하다시피 했던 반군 게릴라들이 인질들에 동화되어 인질과 테러리스트의 관계를 떠나 하나의 평화로운 세계를 이루었다고 한다.
책에서는 페루의 부통령 집에서 일본 거대 그룹 회장의 생일잔치를 하는데, 그를 불러오기 위해 세계 최고의 오페라 가수가 동원된다고 설정하여 보다 로맨틱한 스토리를 위한 장치를 갖추었다.
대통령을 인질로 삼아 투옥된 동지들을 석방시키려던 반정부 테러리스트들은 대통령이 마지막 순간에 좋아하는 TV드라마를 보기 위해 파티 참석을 취소하는 바람에 목표를 상실한 채 대규모 인질들을 관리하며 무의미한 인질극을 계속해야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진다.
닫혀진 공간 안에서 새로운 질서들이 생기고 회장 전속 통역사인 겐이 다국적 인질들-테러리스트-국제적십자사 간의 의사소통을 담당하면서 겐을 중심으로 하는 이성과 논리의 세계와 거칠것없는 오페라가수 록산이 지휘하는 음악과 감성의 세계가 공존하게 된다.
겐은 17살짜리 어린 여자 테러리스트와 사랑에 빠지고 록산은 음악에 대한 내밀한 열정을 지닌 일본인 회장과 사랑에 빠진다. 겐은 자연스럽게 탈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같은 인질극의 질서 안에 남는 것을 택한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햇빛을 쬐며 운동을 하고 오페라가수가 어린 테러리스트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소리를 듣고 직접 닭을 손질하여 요리를 하다가 테러리스트 장군과 체스게임을 하고, 밤이면 정원의 수풀 속이나 식기창고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그런 생활이 영원할 것이라 착각했었다. 그 미묘한 균형을 깨뜨릴만한 어떤 일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상적이던 어느날, 갑자기 난입한 특공부대에 의해 테러리스트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그 꼬마가 얼마나 특별한 목소리와 음악적 감수성을 가졌는지, 그 어린 숙녀가 얼마나 우아한 아름다움과 명석한 두뇌를 가졌는지 그런 것은 채 설명될 기회조차 없었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살아남은 인질들에게만 뼈아프게 기억될 것이다.
두권에 걸쳐 느릿하고 우아하게 전개되던 스토리가 불과 두어장에 걸쳐 급작스런 파국을 맞은 것이 나에게도 못잖게 충격적이었다. 겐과 카르멘의 조심스런 사랑, 록산과 회장의 비밀스런 열정, 꼬마 가수의 자랑스러움과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인질들의 따뜻한 시선들을 따라가고 있다가 모든게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그런 식으로 끝날 일이었다. 인질극은 성공률이 극히 낮은 도박이다. 따지고보면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이 그러한 Sudden Death로 끝맺도록 되어있다. 한나절 멍하니 있었다. 묘한 상실감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계층간의 갈등이나 빈곤의 문제, 음악이나 예술이 가진 근본적인 매혹의 힘같은 걸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삶의 다양한 측면들이 언제든 맞닥뜨릴 수 있는 비극을 생각하게 했다. 타의에 의한 sudden death라는...
뭐 책을 읽고 무얼 생각하는 지는 전적으로 내 문제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