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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 -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6월
평점 :
격이 다르다. 분해해서 감상을 남기는 것조차 저어될 정도로 나보다 몇 단계는 위에 있는 사람이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의 유일한 단점은 전개가 내 취향이 아니란 거. 전개가 어느 부분이 별로냐면 어울리지 않는 장르를 섞어놓은 어색함이 별로였다. 비정한 누아르 물에 갑자기 도라에몽이 섞인 느낌?
스포일러 주의 ▼
만능 슈퍼 해커 여주인공이 만든 전략무기 ‘악마’. 이 악마를 완성하기 위해선 살인을 해야 하고, 완성을 위한 마지막 조건은 개발자인 여주인공을 살해하는 것. 그렇게 깨어난 정보 통합체 - 휴먼 간 인터페이스 ‘악마’는 전산 시스템에서 신과 같은 힘을 발휘한다.
깨어난 ‘악마’는 흑막에 손에 들어간다. 하지만 주인공은 죽은 여주인공이 남긴 마음에 도움을 받아 ‘악마’를 파괴하고 END
딱 옛날 만화 같은 플롯이잖아? 나는 이런 것도 좋아하지만, 하드보일드한 분위기에서 이런 소년만화 같은 전개가 나오니 이질감이 들었다.
근데 장점이 너무 커서 이 정도로는 점수가 5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취향 따위는 압살하는 압도적인 격의 차이를 느꼈음 ㅋㅋ
먼저 깊이. 소재에 대한 깊이가 장난 아니다. 딱 이야기에 필요한 만큼만 들어내는데, 이 ‘필요한 만큼’을 정확히 재단하는 점에서 소재에 대한 이해도가 엿보인다. 읽고 있으면 내가 절로 똑똑해지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스포일러 주의 ▼
중의적 의미를 가진 다양한 장치들. 그 중 특히 ‘기울기’가 인상 깊었다. 범위 조건만 만족하면 세부 디테일은 달라도 같은 결과가 유도되는 것을 작중 진행에 따라 기울기로 표현하면서 흑막이 설계한 결말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90°. 마지막엔 수직까지 기울여지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여기서 더 기울여져 135°까지 기울어지지만 마지막 무댄 그런 기울기가 별다른 의미가 없어지는 무중력 공간! 캬~ 이걸 또 이렇게 써먹네. 감탄, 그저 감탄만 나온다.
스포일러 주의 ▲
근데 전개부분도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진 않다. 오히려 다른 속성을 이만큼 자연스레 융합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줘야했다. 다만 내가 배명훈 작가 책 중 최근작인 ‘첫숨’과 ‘고고심령학자’를 먼저 봤다보니 이것과 자연스레 비교하게 되면서 더 까탈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은닉을 보면서 확신이 들었다. 난 배명훈 작가 글 스타일이 너무너무 좋다. 이런 스타일의 글은 다른 곳에서 찾기가 너무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아껴 볼 거다. 아직 안 읽은 구작들이 많지만 방심하면 순식간에 다 읽고 없어져 버릴 테니까 ㅋㅋ
"내 안에 깃든 악마가 당신 안에 깃든 악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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