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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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세스페데스의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이탈리아 로마를 배경으로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성년이 된 두 아이를 둔 43세의 발레리아가 반년동안 기록한 일기장 형식의 소설이다.

1950년대의 발레리아는 부유한 친구들의 동정의 눈길을 받는 직장인이었고 동시에 살림을 빈틈없이 해내고 있는 슈퍼맘이었다. 그런 그녀의 삶을 흔들만한 사건(?)이 생기는데 그녀가 충동적으로 일기장을 샀다는 것이다. 가계부라면 모를까, 당시 여성이 일기를 쓴다는 행위 자체가 사회나 가정에서 통용되는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일기장을 숨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쓰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발레리아는 일기를 쓰며 가족과 외부로만 향하던 시선이 점점 내면을 향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질수록 일기장 밖의 그녀도 과감해지지만 해방감과 죄책감이 뒤얽힌 채로 혼란스러워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감히 발레리아의 인생 통틀어 가장 진실된 순간이라고 느꼈다.

나는 16살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자취방을 여러번 옮기면서도, 결혼 후 잦은 이사를 하면서도 이고지고 다니던 일기장이 올해로 벌써 스물세권이 있고 스물네번째 일기장을 쓰고 있는 참이다. 어쩌다 한번씩 들춰보는 일기장은 아리송하다. 풀 수 없는 암호 같기도, 도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나는 내가 왜 두루뭉실한지 잘 안다. 발레리아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일에 대한 나의 반응을 세세히 기록하면서 매일 나의 깊은 내면을 알아간다. 자기 자신을 알면 알수록 발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반대로 나를 알면 알수록 혼란스러웠다. 사실 이토록 꾸준하고 냉혹한 분석 앞에 어떤 감정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불안에 취약한 나는 혼란스러움을 극도로 피한다. 그건 나의 감정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발레리아는 그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일기를 쓸 때면 점점 또렷이 자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기장 속에 진짜 발레리아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 나는 어떤가. 내 스물세권의 일기장 속에는 내가 있던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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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모임에서는 '일기와 나', '엄마 발레리아', '여자 발레리아'를 소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21세기의 우리는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쓰는지, 일기를 쓸 때면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는지 대화하며 자연스럽게 발레리아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발레리아에게 일기장이 갖는 의미, 남편과 귀도/아들과 며느리, 딸과의 관계를 살피며 발레리아가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나눌수록 서글퍼지기도 짠하기도 했다(때때로 발레리아가 무섭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쓰는 존재는 멈추지 않는다고, 쓸수록 내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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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누군가의 딸이고, 아내이며, 엄마이기 때문일까. 모든 관계에서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화끈거리면서도 속수무책으로 걸려 넘어지는 문장들 앞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의 감정이 어쩌면 보편적인 걸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어떤 말보다도 진한 위로가 되는 부분이었는데 혼자 전전긍긍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관대해지자고, 그래서 조금 더 솔직해지로 다짐했다.

이 책을 연초에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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