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계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 지음, 임도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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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내가 수탉 한 마리를 인형처럼 두 팔로 안고 가던 중 닭의 배가 터져버렸는데, 그때 나는 그 아저씨들, 어찌나 마초인지 닭에게 상대 닭을 반으로 쪼개버리라고 소리 지르고 부추기던 그 아저씨들이 죽은 닭의 창자와 피와 닭똥을 보고는 구역질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 두 손과 무릎과 얼굴을 그 창자와 피와 똥으로 범벅이 되게 했고, 그랬더니 더 이상 키스나 멍청한 짓거리로 나를 엿 먹이지 않았다. 그들은 아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 딸은 괴물이야.” p10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 『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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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지만 가부장제 아래에 놓인 '집'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서 은폐되기 일쑤고 방관되기도 쉽다. 그뿐만 아니라 한가지 더, 자본주의 시대의 폭력의 방식이다. 가난과 혐오가 웃음거리로 소비되거나 계급의 불평들이 일상에 스민 장면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물론 읽기 쉬운 책도 아니다.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이 기묘하다 못해 기괴할 정도이다. 추천사를 쓴 김혜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다고 하지만 이 소설은 현실보다 더하다. 전쟁보다 더하고, 돼지우리보다 더하고, 범죄 현장보다 더하고, 배가 갈라진 닭보다 더하다. 여자의 상처가 폭발할 때 비유는 필요없다. 삶의 내용들이 압도해 올 때 문학 교실도 필요없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읽는 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첫편부터 강렬하다. 투계장에서 자란 소녀가 성인이 되어 경매장에 납치되었을 땐 유년시절에 익힌 방법으로 상황을 모면한다. 똥과 오줌으로 자기 몸으로 범벅하며 미친듯이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다. 그녀는 괴물이라 불리지만 그럼으로써 자신을 지켜낸다. 처절한 생존의 방식은 다른 이야기속에서, 다른 여성들도 마찬가지이다. 성스러운 성인조차 가족은 건드리지 못하지만 언니는 오빠의 끔찍한 학대와 폭력으로부터 동생을 구하고, 일상적인 폭력에 길들여진 소녀는 사랑을 갈구하면서 또 다른 소녀에게 괴롭힘을 가하고 남자들에게는 굴복한 듯 항상 '네'라고만 대답한다. 그녀들이 스스로 괴물이 되고자 자처한 것은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다. "피투성이 폭력의 한가운데에서도 지독하고 끈질기게 삶을 붙들고 어떻게든 살아내는(이라영 추천사 중에서)" 인물들을 보며 유독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 공포영화를 보고 악마나 뱀파이어 같은 존재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열두 살의 소녀에게 겨우 두 살 많으면서 인생은 4백 번은 산 사람 같은 가사노동자 나르시사의 말이다. 이제 진짜로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고. "인생은 장난이 아니"라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안 그래? 사람들을 겉모습만 보고는 그들의 집 문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알 수는 없는 법이니까.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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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의 첫 소설집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언론인이기도 한 그녀는 시사평론은 모은 책을 출간했고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중요한 목소리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이 외에도 소설집과 에세이집이 더 있는데 아직 국내엔 번역본이 없다. 단언컨데 『투계』 를 완독한 직후부터 그녀의 신간 소식을 목빠지게 기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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