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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의 밤
라이너 쿤체 지음, 전영애.박세인 옮김 / 열음사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막막하기만 한 시집 리뷰를 쓰는 이유는 입소문을 내지 않으면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좋은 시집과의 만남에 대한 감사의 마음 때문이다.
한 손에 딱 잡히는 분량의 이 시집은 외형적으로 완벽한 모습의 시집이다. 고급스런 양장과 녹색의 커버가 '보리수'라는 제목의 자연친화성을 몸소 표현해주고 있다. 얇은 종이 띠지에는 독일 서정시의 거목, 라이너 쿤체가 "한국을 노래하다"라고 선전한다. 사실, 몇 해전에 출판된 쿤체의 <시>라는 시집을 읽어본 독자라면 아마 이 시집을 다시 집어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좋다. 서정시라고는 하지만, 깊이있는 절제가 눈에 띈다. 우리가 그동안 서정시라고 잘못 생각했던 '감정의 과잉'은 어쩌면 우리의 편견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집은 말 그대로 시인이 깎을 만큼 깎고, 줄일만큼 줄인 시어의 절약이 빛난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는 장인정신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좋은 시, 서정 시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원론적으로 시는 언어의 압축을 통해 궁극적인 삶의 깨달음을 전해주는 이미지적 메시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원론에 가장 적합한 시를 쓰는 사람이 바로 라이너 쿤체이다.
전작 시보다 한껏 언어를 절약한 그의 시들은 한껏 성숙한 느낌이다.
시의 한 페이지에 글씨보다 여백이 많아졌다. 여유롭고, 한가롭다. 하지만, 그 시에 담긴 참 의미를 하나하나 되새기려면 한가하게, 게으름을 부릴 시간이 없다. 곱씹고 또 곱씹어봐도 그 여백을 다 채우지 못할 이미지의 깊이와 섬세한 숨결을 느낀다.
언어에 대한 깊은 사랑, 죽음에 대한 성찰과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의 고독한 모습, 가난한 유년 시절의 기억을 되새기는 노년의 삶 등이 진득하게 묻어있다. 이 시집 속에서 시인의 세상에 대한 관점은 지극히 보편적이고, 객관적이지만 무미건조하거나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시선의 깊이가 과잉의 정서 대신 이미지의 산뜻함과 담백한 관조의 맛을 살린 시들을 잉태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이 시집의 가장 큰 매력은, 독자가 얼마나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느냐에 따라서 느껴지는 감동의 차이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시집을 하루만에 다 읽을 수도 있지만, 재독을 하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이 시집은 두고두고, 묵상하듯이 성경의 한 구절을 읽어나가듯이 그렇게 읽어야 참 맛을 알 수 있도록 쓰여졌다. 어쩌면 시집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그런 일이 아닐까.
각종 실용서적과 처세술, 정보와 지식을 담은 책들을 읽기에도 바쁜 현대인들에게 "시"라는 문학의 본령은 우리에게 잠시 쉬어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쉬어가는 시간은 경쟁에서 밀려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쉬어감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과 조우한다. 그렇게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 자신을 담그고, 삶에 대한 긍정과 여유로 자신을 조율할 수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시 읽기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이 시집과의 만남은 하나의 독서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자신을 복돋워주고, 삶의 의미를 찾게해주는 성찰의 시간이 되리라 믿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