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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추석 연휴가 이틀 지난 목요일 아침이었다. 밖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날은 밖으로 나가기가 참 꺼려진다. 무심결에 어제 배송된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사도세자의 고백….. 제목과 책 소개가 마음에 들어 구입했지만 추석탓이었는지 배송이 늦어져 연휴 때 차 한잔하며 여유롭게 독서를 즐기려 했던 내 계획을 무산시킨 그 책이었다.
비가 거칠게 몰아치고 있는데다가 왠지 음산한 기운마저 드는 오늘 같은 날에 역사 미스테리물이라…그것도 괜찮은 그림이라고 생각이 들어 이내 책을 펼쳤고 반나절이 넘는 시간동안 8부작 대하드라마가 펼쳐질지 짐작도 못한 채 책 속에 깊이 빠져들었다.
드라마는 주인공 사도세자의 출생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사도세자 사건의 뿌리가 되는 숙종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은 정처로부터 자식이 없어 후궁 장희빈의 소생인 균을 세자로 명했다. 노론은 장희빈의 죽음에 관여한 사실 때문에 균의 즉위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지만 숙종이 승하하고 균은 재위에 오른다.
경종 시대는 드라마 전체적으로 볼 때 소론의 짧은 반격기였다.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승하함에 따라 그 동생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고 그것은 잠시나마 누렸던 소론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다행히 당파 싸움에 염증을 느낀 영조가 탕평을 추구함에 따라 소론이 정치일선에서 완전히 소외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정국의 주도권은 노론이 쥐고 있었고 호시탐탐 소론 탄압에 골몰했다. 그 와중에 비극의 주인공인 사도세자가 태어나고 그는 성장하면서 언행에 있어서나 학문에 있어서 제왕으로서 갖추어야할 자질을 충분히 보여주어 영조와 주변을 흡족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세자도 노론과 소론이라는 당시 대립구도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정치적 운명을 피할 수 없었으며 바로 여기서 비극은 잉태된다. 나주 벽서 사건으로 인해 영조는 그 동안의 균형감각을 잃어버리고 노론과 함께 소론에 대한 정치탄압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사도 세자는 소론을 감쌌다. 그것은 노론으로 하여금 사도세자는 소론과 같은 쪽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때부터 영조 노론과 사도세자 소론의 갈등은 증폭되었고 멈출 줄 모르던 양측의 갈등은 관서미행과 나경언의 고변을 계기로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속에서 가둬 죽이는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빚어냈다. 노론의 승리였고 권모술수의 승리였으며 정의의 실종이었다. 이 장면에 이르러서는 나도 슬픔과 분노에 눈시울이 붉어져왔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사도세자 사건으로 완전히 정권을 장악한 노론도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의 등극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영조 승하 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시대가 열렸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현장에서 목격한 세손, 노론의 집요하디 집요한 견제를 참고 참고 또 참아온 세손.. 그런 세손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재위 첫날 그는 그의 가슴뿐만 아니라 그 동안 관객으로 드라마를 보아온 나의 답답했던 가슴마저 뻥하고 뚫어주는 감동적인 일갈을 했고 그 한문장의 외침은 내 가슴속에서 한참동안 울려왔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 말을 시작으로 반전은 시작되었다. 그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처벌하면서 사도세자의 한을 풀었다. 또한 한 세기 가까이 소외받았던 남인을 적극 등용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에 매진했다. 재위 24년이 되는 해 등에난 종기로 인해 정조가 승하함으로써 조선사 마지막 불꽃이라는 정조시대는 막을 내렸고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이 드라마 역시 막을 내렸다.
책을 덮을 때 즈음 밖의 빗줄기도 현저히 약해져 있었다. 마치 억울하게 뒤주 속에서 죽어간 사도세자를 애도하듯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레 한줄기 한줄기 떨어져 내렸다..
E.H 카는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 규정했다. 상식적인 의미에서 대화는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고 나의 말을 들려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책의 제목을 ‘사도세자의 고백’으로 명명한 것은 의미 있어 보인다. ‘과거를 사는’ 사도세자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구체적인 사료에 기반한 역사 추리소설의 형태로 전달한 책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백미는 단연 그 극적 긴장감에 있다. 노론과 사도세자는 각각 갈등의 한 축을 형성해 서로 대립하고 충돌한다. 양자의 갈등은 책의 페이지수가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계속해서 절정으로 치닫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게되는 사건을 정점으로 ‘펑’하고 터져버린다. 이렇듯 책의 긴장감은 근본적으로 소설 속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대화와 사건을 그 진원지로 한다. 그 점을 작가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교과서적 소설 구조로 충실하게 구현해놓았다. 문체상으로도 긴장감을 추구하는 현대소설이 대체로 그렇듯 긴 호흡의 만연체보다는 짧은 호흡의 간결체를 쓰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쳤다면 <사도세자의 고백>은 흥미로운 역사 소설에 하나임에는 분명하나 반나절 동안 독자를 붙들만한 흡입력을 가진 ‘드라마’로 승화 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갈등이 심화되는 동안 작가는 시종일관 전지적 시점으로 책 속에 적극 개입한다. 인물들이 겪는 심리적 변화와 내적 갈등을 조금 과장하면 맥박 뛰는 것도 느낄 수 있을만큼 자세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인물의 행동이나 사건 중에 그 사실이나 이유 여부가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것이나 작가 자신이 이상하게 여기는 점, 혹은 독자들이 의문스러워 할만한 것들을 대함에 있어서는 작가 특유의 추리로 풀어나간다. 바로 이 추리력이 책의 긴장감에 흡입력이라는 생명을 불어넣는 실체인 것이다. 결코 작가는 독자들이 공감할 수 없는 추리를 늘어놓지 않는다. 제한적이지만 실존하는 사료를 바탕으로 그 당시의 앞뒤 정황을 다 재어본 뒤 논리적인 추론과정을 거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다. 그것이 갖는 강한 설득력으로 인해 독자들은 책의 내용에 공감하게 되고 작가가 안내하는대로 책의 긴장감있는 이야기에 빠져드게 되는 것이다.
앞서 서술했듯 <사도세자의 고백>은 단순히 재미라는 측면만 보더라도 충분히 별다섯개 만점에 세개를 먼저 줘도 아깝지 않다. 다만 지금까지는 책의 내부적인 요소를 중점적으로 분석했는데 논의를 좀더 진전 시켜 독자론적 관점에서 우리가 책에서 읽어내야할 교훈이 과연 무엇인지 파악해 볼 필요성도 있다.
금세기 최고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사회를 창조적 소수자와 비창조적 다수자로 이분했다. 기존의 지배 소수자에게 창조적 소수자가 도전하고 비창조적 다수자인 대중이 그들을 지지(※’미메시스’라고 하지만 논의의 편의상 지지라고 칭하겠다)함으로써 역사가 발전해나간다는 견해를 폈다. 대중의 지지를 받은 창조적 소수자는 새로운 지배 소수자가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 역시 새로운 창조세력에게 도전을 받는다. 그것이 반복되면서 역사는 한발 한발 나아간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항상 창조적 소수자들이 지배소수자에게 승리를 거두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어쩌면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지배 소수자는 가능한한 새로운 창조적 소수자의 등장을 가로막고 그들을 억압한다. 그런 뒤에는 그들이 행했던 억압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의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 역사서 저술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을 대할 때 비판적인 시각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단 역사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어떤 사실을 판단할 때는 항상 자신의 건전한 상식과 논리에 비추어 보는 습관이 필요하고 미심쩍은 부분은 의문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내용의 숨겨진 이면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 역시 요구된다. 책머리에 나오듯 저자가 책을 저술하게 된 계기도 그동안 사도세자 사건을 판단하는 데 주로 의존했던 사료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대해 의구심을 품으면서였다. 그 의구심은 상당 부분 합리적인 것이었고 그것을 발판으로 다른 사료들을 살펴 보면서 그가 품었던 의구심은 사실로서의 여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비판정신과 관련해 책 속에서 눈여겨서 살펴볼만한 부분이 있다. 바로 나주 벽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사도세자의 태도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인 영조와 노론의 주장에 논리적인 맹점이 있다고 판단하고 나주 벽서 사건이 소론에 대한 정치탄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노력을 다했다. 비록 그 것이 훗날 비극을 부르긴 했지만 그의 용기있는 비판정신은 마땅히 군중심리에 휩쓸리기 쉬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한다
한가지 더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금언에서 찾을 수 있다. 숙종 이후 조선시대 정치상황은 그야말로 복수의 연속이었다. 정치보복이 또 다시 다른 정치보복을 불렀고 한번 정권을 놓치면 그것은 곧 자신들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도 치열하게 정권을 잡으려고 했고 잡으면 반대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치를 견고히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번만 그들이 반대당에 대하여 포용과 용서의 정신을 발휘했더라면 조선 정치의 후반이 그렇게까지 비정상적인 권력투쟁으로 점철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것은 우리나라의 현대 정치 역사와 닮은 점이 무척이나 많다. 정치보복이 일어난 것도 매한가지다. 다만 조선후반 정치사와 차이가 있는 점은 그 동안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정치일선에서 소외받고 탄압받았던 민주 인사들이 집권을 하면서 정치보복을 하지않고 과거를 용서한 점이다. 그 자신이 군사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김대중 (煎)대통령께서 집권초창기 대국민 화합이라는 모토를 내건 것도 이런 과거사에 대한 용서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우리나라 정치사나 언론에서는 ‘정치보복’이라는 단어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집권을 노렸던 권모술수의 정치도 많이 사라졌고 반대당과의 토론과 합의를 중시하는 정치풍토가 어느정도 자리잡았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그 와중에 진보도 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과거를 반복하는데 그칠 것이냐 반복을 하면서 진일보 할것이냐 하는 것은 결국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바람직한 태도를 규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역사 관련서를 대할 때는 항상 그것이 현재 우리의 삶과 어떤 공통점이 있고 또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할지에 대한 목적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비슷한 상황이 닥쳤을 때 보다 현명하게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사도세자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그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시나 작가의 그 디테일함에 있다. 동양화에서는 여백의 미가 작품의 완성도를 평하는데 중요시 되는데 이는 그림이 아닌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다빈치 코드>는 글 중간 중간에 결말에 대한 암시와 힌트를 깔아 놓고 책 후반부에 강한 반전을 심어놓았다. 그리고 잔잔한 여운을 남기면서 책을 마무리함으로써 책의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렸다고 평가된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비록 이미 ‘알고있는 결말’이라는 한계를 가진 역사물이긴 하지만 독자에게 충분히 생각의 공간으로 남겨둘 수 있는 부분마저도 작가가 차지 하고 있음을 심심 찮게 찾아볼 수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면 정조의 영여 운구장면이 나오면서 ‘부교행’이라는 장시로 마무리 되고 있다. 이는 정조를 통해 사도세자의 혼을 겹쳐 떠올리게하고, 추모의 뜻을 드러내는데 시를 도입함으로써 독자들의 감상을 이끌어내는데 적절한 방식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작가는 정조 승하에 따른 백성들의 슬픔을 일일히 서술한데다 책의 마무리를 스스로 언급하는 사족을 달면서 책의 마지막 여운을 크게 반감시켰다. 때로는 열문장의 말보다 한 점의 마침표가 독자에게 더욱 더 강한 인상을 남기는 법이다. 작가가 <사도세자의고백>을 전개해 나가는 데 있어 설명할 건 설명하되 암시할 건 암시하고 생략할건 생략하는 참을성을 발휘했더라면 책의 소설적 색채를 강화하면서 전체적인 완성도도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 틈틈히 서평을 써 마무리하게 된 오늘까지 사도세자는 내게 많은 것을 고백했고 나도 많은 것을 얘기했다. 그와 대화하면서 같이 분노하고 같이 슬퍼하는 내내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고 또 배울수 있었다. 내게는 참 의미있고 즐거운 대화였다. 이 서평을 읽는 분들도 짬을 내어 사도세자와 대화 해보길 권하고 싶다. 혹여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는 분들이라면 집 근처 도서관을 이용해도 되고 아니면 가까운 대형서점에서 반나절 정도 꿋꿋이 그 자리에서 읽어버리는 센스를 발휘해도 무방하다. 사도세자는 아마 그와 대화를 원한다면 그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자신의 고백을 들려줄 것이다.
서평을 끝맺는 지금 밖의 날씨는 매우 따사롭다. 햇볕도 흐붓이 쏟아지는 더없이 좋은 날씨이다. 뜨겁지도 않고 눈부시지도 않게 따스이 내려쬐는 저 햇볕이 이름모를 한 후손과의 대화를 통해 가슴속 한을 깨끗이 씻어낸 사도세자가 짓는 평온한 미소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p.s 책의 오타가 있어 지적한다. 374p에 "남인이 폐해"(X) → "남인이 패해"(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