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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한민국에 사는 많은 어른들, 심지어 젊은 학생들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하는 길은 서울법대→사법시험→판검사의 라인을 밟아 나가는 것이라고 으레 생각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전국의 수재라는 수재는 모두 학벌의 정덤을 서울법대라고 생각하고 그 곳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법률가는 부모들이 자식에게 바라는 최고의 직업이자 가치였고 자식들이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는 것은 곧 한국사회가 여기는 가장 이상적인 젊은이 상이자 효도였다. 그렇게 길러진 법률가들이 과연 진정한 헌법정신을 지니고 민주주의와 정의 실현에 이바지 했는가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법에 의한 통치(Rule of law)를 채택하고 있는 현대 법치주의 국가에서 유일하게 법률적 지식과 법리 해석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법률가들에게는 고도의 도덕성과 공익적 자세가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의 대다수 법률가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기에 주어지는 특권과 특혜를 향유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설사 공익의 실현이나 인권보호를 법률가로서의 목표로하였다 하더라도 폐쇄적이고 수직적이며 보수적인 우리나라 법조 구조 속에 그러한 첫 마음 가짐을 잃기 십상이었다.
헌법의 풍경은 그러한 법조 사회를 정면으로 응시해서 그 실체를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는 비판 서적이다.고대법대를 나와 법무관→서울지검 검사→법학부 교수를 거치면서 겪은 저자의 생생한 법조계 경험담과 비판은 특권의식과 엘리트 의식으로 무장한 우리네 법률가들의 비뚤어진 자화상을 잘 보여준다. 서장 '법학과의 불화'에서는 저자가 법조계의 길로 가게 된 경위과 그 과정에서 알게 된 법조계의 당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들어 아는 '전관예우', '리갈마인드(Legal Mind)'등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서장에서 언급된 법률가들의 법리적 판단은 1장에 가서 철저히 부정된다. 항상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되는 법리적 결론이 사실은 상당부분 법률가들의 개인적 가치관에 따라 좌우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에게 익숙한 음란물을 소재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어 보다 이해하기 용이했다. 2장에서는 잘못된 국가 통치의 수단으로 법률가들이 악용된 사례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었다. 여기에는 영화로 유명한 "실미도" 사건과 "제주도 4.3"사건을 실례로 들고 있었다. 또한 2장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예일대학교의 스탠리 밀그램 박사에 의해 행해진 인간심리에 관한 일련의 실험들이었다.실험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고 시스템에 의해서 행해지는 무의식적 순종이 심각한 범죄행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3장 "법률가의 탄생"에서는 힘든 사법시험을 치르고 탄생한 법률가들이 그 시작 동기의 순수 여부를 떠나 어떻게 특권의식에 젖어들어가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마담뚜에 관한 얘기, 사법시험 이후 연수원에서도 판검사 임용자와 변호사 개업자로 법률가들의 계층이 분화되는 현상,군법무관 훈련소에서 저자가 겪었다는 믿어지지 않는 훈련 경험등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들의 모습에 실망스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러나 저자가 법조계에 대한 불신과 실망만을 나타내고 있었던건 아니었다. 4장 "똥개 법률가의 시대"에 가서는 최근 법조계에 불고 있는 희망의 바람을 긍정적으로 읊조리고 있었다. 90년대 후반 대전 법조 비리 사건에 의해 법조계의 관행적 비리가 그 실체를 드러냈고 몇 년 전 불법 대선 자금 문제로 법조인들이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존경해 마지 않던 (前)고법 부장판사 서정우 변호사가 구속됨으로써 법조 비리가 누구 몇 사람을 탓할 일이 아니라 법조계에 뿌리깊게 만연된 현상이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사법시험 합격자 1000명 시대가 도래하면서 소수였기에 가졌던 법률시장 독점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2008년부터는 획일적인 현행 법조인 양성체제에서 법학전문대학원(Law School) 도입을 통한 법조인력의 다양화를 꾀하는 등 법조 내외적으로 혁명에 가까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갑작스러운 변화로 법조내부의 반발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저자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우리 법조계가 연수원 기수와 인맥으로 법조인이 평가 받던 기존체제에서 실력과 노력을 기반으로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법조인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시대로 전환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었다. 5장 "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검사가 가지는 역할과 현실을 다루고 있었다. 대한민국 검사가 가지는 권한이 얼마나 큰 것인지 거기에는 얼마나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더불어 검사 권력의 원천인 '기소 독점주의'와 '기소 편의주의'에 대해서도 법리적인 개념설명보다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어 한결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6장부터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헌법 정신과 헌법에 명시된 권리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6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헌법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남용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헌법의 취지와 그러한 자유를 국가에서 제한할 때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해야 할 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역시 국내외의구체적인 사례와 각종 판례를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7장 "말하지 않을 권리, 그 위대한 방패"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묵비권, 곧 진술 거부권에 대한 법리적 해설과 그 역사, 진술 거부권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못하고 있는 국민적 현실과 그에 대한 방안이 논의되어 있었는데 묵비권이 생각보다 더욱 큰 권한과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마지막장인 8장 "잃어버린 헌법,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서는 인종적 문화적 차이가 극심한 미국에서 차별 철폐를 위한 각종 사회적 소송과 법원의 판결에 관한 역사를 보여 주었다. 더불어 차별방지를 위한 우리나라의 제도적 장치를 소개하고 그 한계와 극복방안까지 제시 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그 동안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우리나라 법조계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또한 헌법에 담겨있는 정신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그 정신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각성과 노력이 필요한지 알게되었다. 법률가들이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기득권을 과감히 내던지고 잘못된 특권의식을 벗어 버릴 때 우리 법조계가 바로 설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나아가 국민 한명 한명이 법률가들에게 가졌던 무조건적인 경외와 불신을 떨쳐버리고 법에 관해 올바른 인식과 앎을 갖추어 법률가들을 바라 볼 수 있을 때에 이르러서야 진정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법치주의가 이 땅에 확고히 뿌리 내릴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동안 사법시험을 위한 수험서 외에는 교양 법률도서가 시중에 그리 많지 않았었다. <헌법의 풍경>은 친근하고 쉬운 문체와 다양한 사례 위주의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법률적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다가설 수 있게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한번쯤은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우리 헌법의 풍경이 앞으로는 좀 더 밝고 긍정적인 모습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