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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요즘 놀라운 일을 며칠 째 경험하고 있다. 우선은 4일 전에 <어느 가족>이란 영화를 우연히 본 거고, 그 다음은 3일 전에 <생활의 발견>이란 책을 읽게 된 거고, 오늘은 <걷는 듯 천천히>란 책을 읽으며 내 마음이 풍성해짐을 느꼈다.
자주 얘기했지만, 나는 장기간의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꽤 오랫동안 상담을 받고 있는데, 내 행동은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심리치료는 내담자의 세계관이 현실에서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중요하게 다룬다. 선생님은 언제나 한적하고 선선한 느낌을 내게 전해 주신다. 난 고민과 마음의 답답함을 토로하고 위로와 지혜를 얻어가지만 그때뿐이었다. 내 세계관이 좀 더 융통성 있게 변화되어야 삶이 만족스럽게 다가올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시기는 잘 오지 않았다.
심리치료에 또 대략 이런 말이 있다. “치유는 상담가가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상담가는 내담자가 안전하게 치료에 참여할 수 있는 치유 공간을 만들어준다.” 보통의 신참 상담가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다. 요즘 내 마음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게 어쩌면 생활면에서 치유적인 작품을 많이 접하면서이다. 선생님을 매우 좋아하고 존경하는 나는 모든 공을 그분께 돌리지만,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제목이 무엇을 뜻하는 지 말해 본다.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어느 가족’을 보고 감상평을 썼었다. 근래에 본 매우 인상 깊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작년 이 맘 때 ‘그 후’와 겨울에 ‘원더’ 그리고 얼마 전에 ‘류이치 사카모토’란 영화를 흥미롭게 봤었다. 이 영화들 모두 관련된 도서와 음악이 있었다. 나로 하여금 그 후는 나쓰메 소세키를 읽게 했고, 원더는 원작 소설에 관심을 갖게 했고ㅡ읽지는 않았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그의 아름다운 음악과 영상을 찾아보게 만들었다.
<걷는 듯 천천히> 이 책이 의미하는 바도 다르지 않다. 어느 가족을 보고 매우 가슴이 뛰었던 나는 감독을 찾아봤다. 일본 영화감독 중에 자신의 영상미학을 일관되게 추구한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가 쓴 산문집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첫 산문집이란 타이틀이 내 마음을 더 끌어당겼다. 오늘 짬을 내 그의 책을 읽었다. 역시 예상대로 영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일상의 미학과 그의 세계를 엿볼 수 있어 좋았다.
200여 페이지의 얇은 책이지만 50쪽 정도를 읽고 독서평을 남기기는 처음이다. 책을 펼치고 읽자마자 일상을 관찰하는 그 특유의 담담함과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짧은 글로 묶여 있지만, 글이 전해주는 통찰과 깊이는 상당하다. 그럴 수 있는 건, 그의 평소 고민과 사색의 흔적이 글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매우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가족을 보고 동양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쓴 것 같은데, 이 책도 다르지 않다. 일본, 그러니까 동양 특유의 아름다움이 글 속에 녹아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이 동양의 지혜를 발하고 있는 점과 무척 닮았다. 미학을 펼치려면 여유가 가장 필요해 보이는데, 호흡이 짧은 나는 아직 한계가 있는 듯하다. 그래도 내가 읊을 수 있는 미학은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과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책 정도이고ㅡ물론 아직 읽지 못했다, <강의>란 책으로 유명한 신영복 선생님을 읽고 알게 된 그분의 미학이다. 더 나아가 내가 존경해마지않는 변화경영사상가 구본형 선생님의 미학 정도이다. 이분은 변화경영의 시인으로 불리다 죽기를 원했는데 뜻대로 되지는 못했다.
책 속 이야기 하나 하고, 글을 마무리 짓자. 어느 시인이 했다는 말인데 “시는 메시지가 아니다. 메시지는 의식한 것에 불과하지만 시는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꿈과 영혼의 중요성을 강조한 분석심리학자 칼 융을 무척 좋아한다. 그는 우리 삶이 신화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했다. 신화도 우리의 무의식 영역과 접촉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저자의 영화가 관객들로 하여금 매우 편안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가 우리의 무의식과 친숙하게 지내는 데 익숙한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그 비밀을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