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와 사랑. 싯다르타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29
헤르만 헤세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1998년 2월
평점 :
품절


  우연히 헤르만 헤세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출판사에서 나온 판을 구해 읽었다. 그렇게 천재 헤세와 만나게 됐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읽었다. 지금껏 책은 좋아했지만 문학은 거의 읽지 않던 나이기에 별 기대도 없었다. 한 가지가 있다면 헤세가 칼 융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바는 있었다.


  시작 부분은 주변 배경 묘사로 쓰여 있었다. 그런데 다음 장부터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그 흡인력이 약 100페이지 정도 됐다. 주인공 골드문트가 방랑을 떠나기 전 나르치스와의 대화와 긴장 관계는 정말 최고였다. 내가 읽었던 어떤 소설보다 완전했다. 내심 헤세가 천재라고 생각했다. 만약 모든 소설이 이 정도로만 습작된다면 난 기절초풍하며 빠져들 거다. 주인공 두 명의 심리묘사와 그들에 대한 통찰, 독자를 빠지게 만드는 솜씨 등 모든 게 완벽했다. 그래서 난 헤세의 소설을 모조리 주문했다.


  하지만 책을 더 읽어나가니 내가 기대했던 바는 거기가 끝이었다. 뒷부분도 나를 충분히 빠져들게 했지만 첫 날에 읽은 흡인력에 비하면 약했다. 하지만 소설 전체로 본다면 강약 조절이 충분히 됐다고 봤다.


  이 책이 헤세의 소설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모른다. 듣기로는 헤세의 ‘영혼의 자서전’이라 불린다고 했다. 이성으로 대표되는 수도원의 지성 나르치스와 그의 가르침 덕에 감성을 깨우게 된 골드문트의 대비를 통해 소설은 펼쳐진다.


  그 중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부분도 주인공 골드문트의 잠재력이 깨어나는 이야기였다. 나도 젊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건 나만이 아니라 젊은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겪게 되는 거다. 스승이나 거장의 손을 거치면 우리는 그들을 만나기 전의 우리가 아니게 된다. 새롭게 우리의 내면이 깨어난다는 이야기다. 나의 경우에는 위대한 인물과 접촉은 했지만 깊이 있는 만남을 갖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경우는 아니고, 그들을 존경한 나머지 먼발치에서 깨우침을 받은 축에 속한다.


  나도 이성과 감성으로 대비되는 기질을 깨울 기회를 젊은 시절 가졌다. 어느 시기부터 책에 빠져들어 나의 이성은 발달하였다. 최고의 깨어짐은 훌륭한 스승을 접하면서 이뤄졌다. 그 경험을 통해 사람은 사람에 의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는 걸 알게 됐다. 그 후 나는 원치 않았던 30대의 방황 시절을 겪는다. 그 출발선은 감성으로 대표되는 예술 세계 혹은 있는 그대로의 나였다. 그때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내 생의 그 어느 때보다 고양돼 있었다. 난 그 둘의 모순과 충돌 그리고 통합되지 않는 갈등으로 인해 무척 고통스러웠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지만, 헤세가 이 작품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글이 많이 돌아왔는데, 헤세는 두 주인공을 통해 어느 작가도 도달하지 못한 지점인 내면 통찰과 심리 묘사와 관찰에 천재적인 면을 보여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잘하는 점도 이 점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말이다. 소설 이야기를 더 하자면, 사람을 꿰뚫어볼 줄 아는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잠재돼 있는 내면 모습을 끌어내 준다. 이 부분이 앞서 말했지만, 이 소설 최고의 절정 부분이다. 그 후 골드문트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둘은 서로 강렬하게 서로를 각인하고, 결국 마지막에 가서 재회한다. 다시 말하면 이성과 감성의 만남 후 마지막에 그 두 부분은 화해하고 조화를 이루게 되는 내용이다.


  헤세는 이 작품으로 내 인생을 든든하게 붙잡아주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문학의 재미와 통찰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삶은 쉽지 않고 흔들리는 거다. 그래서 우리 곁에는 사람이 필요하다. 문학은 충분히 그 역할을 해 주는 것 같고, 우리 삶에 이야기를 더 해 준다. 천재의 갖은 번민과 고초는, 우리 삶에 얼마나 유익함을 가져다주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