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쟁이와 저녁식사를 - 신현정 시선집
신현정 지음 / 북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빨간 우체통 앞에서 / 신현정

새를 띄우려고 우체통까지 가서는 그냥 왔다

오후 3시 정각이 분명했지만 그냥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냥 왔다

난 혓바닥을 넓게 해 우표를 붙였지만 그냥 왔다

논병아리로라도 부화할 것 같았지만 그냥 왔다

주소도 우편번호도 몇 번을 확인했다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 자리에서 냉큼 발길을 돌려서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알 껍데기를 톡톡 쪼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새여 하늘은 그리도 푸르렀건만 그냥 왔다

새를 조각조각 찢어버리려다가

새를 품에 꼬옥 보듬어 안고 그냥 왔다.

#시읽는_신학도

*시인은 분명 그냥 오면 안될만큼 수없이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냥 왔다. 그냥 왔다는 말이 왜 이렇게 아플까. 그냥 올 수밖에 없었을 시인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몰라도 괜찮다. 그래도 그냥 왔던 경험이 있는 우리 모두는 충분히 애처롭고, 가여운 존재가 된다. 역설적으로 "그냥 왔다"는 말이 편지와 그대에 대한 나의 그리움과 사랑의 크기를 대변한다. 반복된 말은 꼭 그만큼 깊다. "그대여 나의 새여 하늘은 그리도 푸르렀건만 그냥 왔다" 이 문장은 언젠가 다시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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