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행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395
조용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와 한 청년의 사랑: 조용미의 "헛되이 나는"을 읽고


헛되이 나는 _조용미
  
헛되이 나는 너의 얼굴을 보러 수많은 생을 헤매었다
거듭 태어나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위미리 동백 보러 가 아픈 몸 그러안고서도, 큰엉해안이나 말미오름에서도, 빙하기 순록과 황곰 뼈의 화석이 나온 빌레못동굴 앞에까지 와서도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저 멀구슬나무나 담팔수, 먼나무가 당신과 아무 상관없다고 확신할 수 없는 이 생이다
너에게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가지 않으려고

헛되이 나는, 이 먼 곳까지 왔다

-

제목에서 사용된 ‘헛되이’와 ‘나는’은 각각 부사와 주어라는 품사의 옷을 입었다. 부사와 주어가 나란히 놓인 구(句)가 이 시의 제목이다. 우리말 문장에서 주어는 맨 앞에 나오는 것이 통상적인데 여기서는 주어가 맨 뒤에 있다. “헛되이 나는”이라는 제목은 아름다운 성경책 전도서의 한 구절을 보는듯하다. 그러나 부사와 주어로 구성된 이 제목은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의 외침과는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다. 코헬렛은 이렇게 노래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장2절) 어느 시인은 다시 보면 예쁘다고 했던가. 이 구절은 다시 보아도 어지럽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어지럽고 아득한 이유는 코헬렛이 헛되다는 말을 원인, 결론, 반복 등의 수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세계’를 완벽하게 정의했다. 그런데 코헬렛이 이 문장을 통해 ‘세계’의 헛됨을 해설했다면, 시인은 세계가 아닌 ‘나’를 해설하고 있다. 이 해설은 노래(詩)인 해설이다. 코헬렛은 세계가 헛되다고 노래하고, 시인은 내가 헛되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노래는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코헬렛의 눈은 세계를 응시하고 있어 세계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시인은 세계가 아닌 세계의 주체가 되는 자신 ‘나’를 응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같은 노래를 부르는 듯하나 피치(pitch)과 옥타브(octave)가 다른 셈이다. 코헬렛이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남성의 목소리를 지닌 반면, 시인은 근대 이후 여성의 목소리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둘의 목소리가 혼성듀엣의 하모니처럼 들릴지도. 그 가락는 귀를 매혹하고, 언어는 정신을 위협한다.

코헬렛의 수사는 잔인하다. ‘~며’, ‘~니’, ‘~다’ 지속, 원인, 결과로 논리적인 빈틈이 없다. 반면 시인의 수사는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다. 시인의 헛됨이 부사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사는 문장에서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데 문장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만 필요한 품사이다. 시인은 세계가 헛되다는 것에 동의하나 ‘나’가 헛되다는 것엔 아름다운 브로치(Brooch)를 씌워주고 싶었던 것일까. 시인의 아름다움은 제목의 여백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말 문장에서 주어는 맨 앞에 나오는 것이 통상적인데 여기서는 주어가 맨 뒤에 있다. 대개의 시들이 하나의 단어 혹은 구(句)로 제목을 정하기 때문에 특별할 것이 없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시의 제목엔 특별한 여운이 느껴진다. 그 여운이 소위 ‘여백의 미’가 된다. 시인이 ‘헛되이 나는’ 하고는 한 숨을 쉰 뒤 문장의 나머지를 말할 것만 같기도 하고 또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을 이어서 할까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옅은 아이보리 빛깔의 화선지에 생(生)이라는 작은 점(占)을 묵화(墨畫)로 그리고 남은 거대한 여백과 같이 “헛되이 나는” 뒤에 투명한 품사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을 것만 같다.

시의 제목을 자의적으로 난도질 했으나 어쩔 수 없다. 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글은 자기 길을 간다. 아니다. 어쩌면 이 글이 제 길을 가는 것이 시인의 의도일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의 잔인하고 아름다운 헛된 ‘나’는 시의 본문을 시작하면서 곧바로 자태를 드러낸다. “헛되이 나는 너의 얼굴을 보러 수많은 생을 헤매었다 / 거듭 태어나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내가 헛된 이유 먹먹하다. 내가 “너의 얼굴”을 보기 위해 헤맸기 때문이고, 너를 사랑한 죄로 이미 나는 죽었으나 다시 태어나도 또 너를 사랑할 것이기에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던 것이다. 나의 생은 온통 너로 인해 헤매고 괴로워하였기에 헛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물론 나는 시인이거나 시적 화자(話者)이겠으나, 나는 엉뚱하게도 시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천년 전 이 땅을 밟은 한 ‘청년’을 떠올렸다. 나는 이 시를 그가 부른 노래처럼 들었다. 그는 사랑하고 괴로웠던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그 청년은 세계를 사랑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하나의 인간을 사랑했다. 그는 루터가 말했듯, 본회퍼가 말했듯 나를 위한(pro me)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베들레헴, 예루살렘, 갈릴리, 사마리아를 헤맨 것은 나 때문이었고, 십자가에 고꾸라진 후 다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이 시는 그의 노래이다.

그러나 다시, 나는 이 시를 그 청년을 사랑한 나의 노래로 삼았다. 나 역시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헤매었고, 무거운 생을 이끌고 그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기 때문이다. 나는 닭이 운 후의 베드로처럼 그를 잊기 위해 멀리 도망갔다. “위미리 동백 보러” 간 곳이나 “큰엉해안”, “말미오름” 있는 곳, 심지어 “빙하기 순록과 황곰 뼈의 화석이 나온 빌레못동굴 앞”까지 나는 필사적으로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삶의 어느 곳, 삶의 어느 순간에서 만나는 그 어떤 것도 “당신과 아무 상관없다고 확신할 수 없”기에, 어디에서도 나는 당신과 고목의 뿌리처럼 땅 밑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피할 수 없기에, 당신과 나는 운명처럼, 필연처럼, 예정처럼 뗄 수 없는 사이라고. 나는 그저 프란시스 잠이 고백했던 것처럼 고백할 뿐이다. “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괴로워하고 사랑하나이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결국 나의 존재와 당위는 그로부터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가지 않으려고” 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운명이 헛헛하다.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으로 멀리 도망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품에 안길만큼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 한 채 헛되이 나는 “이 먼 곳까지” 와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