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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건 맛있어 ㅣ 네버랜드 우리 걸작 그림책 64
김양미 지음, 김효은 그림 / 시공주니어 / 2019년 11월
평점 :
2020년 벽두부터 밥 잘 안 먹는 코딱지 때문에 깊은 시름에 잠겼다.
21개월 코딱지의 현황은 이렇다. 쌀밥은 아예 거들떠도 안 보고, 원하는 메뉴 콕 집어 말하고, 편식을 시작했다.
이건 섬유질이 많아서 먹으면 소화가 잘 되고, 이건 그건 먹었던 음식과 다른 식감인데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고, 이건 좀 매운데 슬슬 매운맛도 접해보면 재미있을 거고 매 끼니 설명했으나 아이의 귀에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인 것이 빤히 보였다.
이럴 때 해답은 그림책.
음식에 관한 그림책 몇 권 전면 책장에 꽂아놓으면 슬금슬금 다가가 관심을 갖는다.
표지가 익숙해지면 한두 페이지 책장을 넘겨보기도 하겠지.
그러다 궁금해지면 책을 뽑아 들고 온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심성의껏 읽어주며 익숙한 이야기로 만든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이 과정을 통해 치카치카 양치질도, 목욕도 재미있는 일과로 탈바꿈하는 마법을 겪은 터.
며칠 동안 열심히 책을 읽은 후 또 편식 기미가 보이면? 그림책 이야기를 슬쩍 흘릴 때가 됐다.
그럼 곰곰이 생각하다 한 술이라도 뜨려 노력한다. 기특하기도 하지.
반응을 바로바로 보여주니 절로 찾아 헤매게 된 '음식 그림책' 카테고리.
그중 단연 내 눈길을 사로잡은 상큼한 표지가 있었으니, 바로바로바로 <맛있는 건 맛있어>.
맛있는 건... 맛있지!
간단명료. 이 간단한 이치를 못 견디게 알려주고 싶다!!
그동안 보여준 그림책은 주요 편식 대상인 채소가 주인공이거나, 다양하고 먹음직스러운 메뉴가 줄줄이 나오는 등 식재료나 음식 그 자체에 관한 책이었다.
반면 <맛있는 건 맛있어>는 음식을 먹을 때 발휘하는 귀여운 상상력뿐만 아니라, 음식을 먹는 분위기, 환경, 한 마디로 TPO까지 보여준다.
식재료 자체에 집중하는 것도 직관적인 사고를 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요소다.
그런데 내가 이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것은 좀 다른 종류다.
차가운 비를 맞고 난 후에 따뜻한 팥죽을 후후 불어 먹으면 온몸이 사르르 녹는다는 것.
깨끗하게 목욕하고 난 후 마시는 바나나우유만큼 달달하고 개운한 것은 없다는 것.
그래서 어떤 메뉴는 기억에서 평생 잊히지 않는 음식이 되고, 그렇게 나만의 소울푸드가 탄생한다는 스토리텔링.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웃고 떠드는 시간은 인생에서 꼭 필요한 쉼표라는 암묵적 메시지.
바로 이 공감각적인 감각을 익히게 해주고 싶었는데, 진짜 정말 딱 걸맞은 그림책이 <맛있는 건 맛있어>였다.
이 느낌, 책 속 한 장면으로 소개하고 싶다.

포근하게 내려앉은 노을.
해가 저물 준비를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꼬르륵 울리는 배꼽시계와 마침 완성된 따뜻한 저녁식사.
오늘 있었던 일을 신나게 떠들며 왁자지껄 먹는 밥 한 그릇은, 하루를 소화시키고 내일을 살게 하는 에너지를 주겠지.
'밖'에서 지치고 힘든 일이 있어서 '안'에 들어오면 마음 편히 기대고 쉴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이 그림책에 실어 띄워주고 싶었다.
다음은 코딱지의 반응을 소개한다.
21개월 아이가 읽기에는 분량도 제법 많고 내용도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밤낮 가리지 않고 수시로 들고 와서 읽어달란다.
어젯밤 잠자리에서 읽어줄 때는 역대급 집중도를 보여주었는데, 목욕하면서 거품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보고는 "나도, 나도"를 외치는 게 아닌가.
집에 아이스크림 없다니까 "슈퍼마켓 가서 사오자"고 했다.
"지금은 겨울이라 너무 추워서 못 먹어. 곧 여름 되니까 여름에 먹자"고 말하니 '여름에 먹자. 여름에 먹자'라고 여러 번 곱씹는 게 아닌가. 세상에나.
꽂힌 부분이 몇 개 더 있다.
우선 노란 튤립이 활짝 피어난 면지부터 사랑에 빠졌다.
화분에 물 주는 페이지도 좋아한다. 코딱지도 집에서 키우는 반려 식물에 직접 물 주는 활동을 하기 때문에 더 공감하는 듯.
주인공 동생 연우가 단추 먹는 건 왜 재미있을까? 이 부분에 꽂힐 줄 상상도 못 했다. 이렇게 아이가 어떤 부분을 좋아할지 알 수 없는 게 그림책의 매력. 또 며칠 지나면 다른 부분에 꽂힌다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
이 책은 노란색을 참 예쁘게 썼는데, 노란색을 좋아하는 코딱지에게 레몬주스는 거의 천상의 음료처럼 보이는 것 같다.
태어나 아이스크림 한 번도 못 먹어본 21개월 인생. 거품목욕하는 부녀를 통해 아이스크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간은 코딱지가 꽂힌 특정 페이지에 반응했었는데 <맛있는 건 맛있어>를 읽으며 새로운 활동이 시작됐다.
위 페이지를 보면서 "밖에 뭐가 있나?"라고 묻기에 이건 나무고, 이건 전봇대라고 읽어줬는데 나무를 가리키며 자꾸 밖에 뭐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답은 뭘까? 알 수 없는 채로 코딱지 눈에는 뭐로 보이냐 물었더니 "밖에 소 있다. 밖에 호랑이 있다"고 얘기했다.
자신의 눈에 비치는 대로 발화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든 생각. 이제 너에게도 너만의 서사가 생성되었구나!
반가워, 코딱지. 이 세계는 수많은 이야기와 이야기로 이루어졌단다.
맛있는 거 맛있게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너만의 신나는 이야기를 꽃피우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