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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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박한 이 시기에 두 분의 편지글을 통해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고, 두 분의 곧은 마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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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프랭클,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자아실현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제일 우선시되는 의지도 아니다. 자아실현 자체에 목표를 두게 되면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적인 특성과 모순을 이루게 된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자아실현도 하나의 결과, 즉 의미를 성취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의미를 성취했을 때만 인간은 자신을 성취한다. 만약 의미를 성취하기 보다는 자신을 실현시키기 위해 일을 착수한다면 자아실현은 즉시 그 정당성을 잃게된다.

 

나는 자아실현을 '삶의 의도성에 의해 얻어지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위대한 철학자 칼 야스퍼스만큼 이 문제를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인간은 그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은 바로 그 원인으로 인해 그와 같은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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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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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白石)의 시를 처음 조우한 것은 막 고3에 진입했을 시점이었다. 전년도(2004년) 수능에 그이의 시가 혜성같이 등장하면서 입시계에서 그를 급 조명하였고, 이후 백석의 시를 EBS 문제집, 모의고사 등등에서 지겹도록 보고 수능을 치렀었다.

 

(사실 백석의 시 뿐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시가 수능때문에 알게된 것이다...그런점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 즈음에서 보면 입시라는게 꼭 나쁜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주입"과 "암기"없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문학작품을 접하고 책을 읽을수 있을까.)

 

고등학교때의 백석의 詩는 ㅡ 저자가 이 책에서도 주목하고 있지만 ㅡ 특이한 평안도 방언, 향토색이 가득한 단어 때문에 신선했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기억에 남는것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한창 억압받던 고3 시절에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산골로 가자/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거나,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라던가 하는 싯구들을 접하면 뭔가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것도 있었고.

 

위에 언급한 정도에 그의 연인이었던 자야(子夜) 이야기* 정도가 내가 아는 거의 전부였는데, 백석의 인생을 서사적으로 서술하면서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안도현의 <백석평전>을 통해서 그이에 대한 이해를 좀 더 넓힐 수 있었던것 같다. 생각외로 백석이 잘생긴 "모던보이"였다는 사실과, 광복 후에 북한에서 살면서 겪은 여러 일들도 알게 되었고, 일제시대를 살았던 시인들 치고는 독특한 그의 시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힌것 정도?

 

* 햐..그리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한 글(261쪽)을 보니 백석이 연애고수였다는 사실도 새삼 처음 알게된것ㅋㅋ

 

소설가 이선희(당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의 소개


“최신제품의 시인 백석씨는 외모는 모던보이 종족에 속하시나 시상은 옛날로 돌아가 뿌리를 박고 계시답니다. ‘로버트 번즈’를 생각나게 하는 향토시인이라고 하면 어떨는지요. 증나물, 돼지비계, 거름댕이, 잎담배-현대가 상채기를 내지 않는, 우리들의 살림살이를 묘하게 노래하셔서 즐겁습니다.”

 

※ 로버트 번즈 :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시인, 농사를 지으면서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시를써 인기를 얻은 시인  

 - 책 122쪽

 

이처럼 백석은 "외모는 모던보이 종족에 속하시는" 잘생긴 시인이었지만, 시는 평안도 방언과 향토적인 언어로 . 저자는 이러한 백석의 시 스타일이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서 당시 팽배하던 '주관적 감상주의'(김광균, 김기림 등 서구의 모더니즘, 회화적 이미지)와 '계몽주의'(KAPF등)를 넘어선 "그무엇"을 찾기 위한 백석의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중략) 백석은 식민지로 오염되고 왜곡되기 이전의 고향, 즉 시원의 순결성을 가지고 있는 고향과 고향의 방언에 착안했다. 고향의 말인 방언이야말로 몰락의 길로 치닫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지켜낼 수 있는 하나의 시적인 역설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판단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것,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가장 새로운 것이지"  -책 100쪽

이런 백석의 시는 광복 전 만주 유랑중에서도 계속되었지만, 광복이후 변화를 맞게 된다. 북한에 정착하여 살게 되면서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환경에 처한 것인데, 백석은 "멧돼지" "강가루" "기린" "산양" 등 정치색이 덜한 동시의 창작을 시도하면서 새로운 환경을 타개해나갔지만, 동시에 계몽성, 사상성을 넣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가지고 50년대 북한에서 벌어진 <학령 전 아동논쟁> 등을 겪으면서 삼수군 농장으로 파견되어 여생을 마치게 된다.

 

(삼수군 농장으로의 파견이후) “원래 남편은 글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지요. 삼수군으로 내려와 농장원으로 일했지만 농사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마을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어요. 남편은 도리깨질을 못해서 처녀애들에게 배웠을 정도였으며, 너무 창피해서 달밤에 혼자 김매기를 연습하기도 했지요”


리윤희의 증언은 이어졌다.


“남편은 하루에 한 사람을 열번 만나도 매번 가슴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지나가곤 했어요”


일본 유학 후 조선일보사에 근무할 무렵의 백석은 “녹두빛 ‘더블부레이스트’를 젖히고 寒帶의 바다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검은머리의 ‘웨이브’를 휘날리면서 광화문통 네거리를 건너가는 한 청년”이었다. 그는 남들이 자주 잡는 문의 손잡이를 잡지 않던, 결벽증이 심한 모던보이였다. 그런 백석이 삼수군 관평에서는 누구보다 인사성이 밝고 겸손했으니 삼수군 사람 중에서는 백석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372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영화 <마지막 황제>의 푸이가 떠오르긴 했는데 적절한 비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사라져간 모던보이 시인은 남한에서는 북한 작가라는 이유로 출판과 열람이 금지되었다가, 1987년에야 해금되었고, 그 뒤로 한참이 지나서야 고등학생들 문제집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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