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 - 이 시대를 사는 40대 여성들을 위한 위로 공감 에세이
한혜진 지음 / 체인지업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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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에게 40대가 된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대학을 졸업하고 갓 직장인이 된 20대때에는 의미 생각 이전에 펑퍼짐한 아줌마이자 꼰대이자 남의 얘기였다. 직장에서 어느정도 자리잡고 연애도 하며 결혼을 생각할 30대에서 비로소 40대 얘기가 들려온다. 주로 엄마가 된 언니들의 이야기인데 40대가 되면 아프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30대인 나보다도 건강하고 잘 놀고 유쾌하고 강하게 사는 그들이 아픈 시기를 겪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 나도 39살에 두 아이 엄마가 되었다. 40대를 목전에 둔 나는 그녀들이 그 누구보다 강하고 활기차게 사는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픔을 온 몸과 마음으로 겪어내었기 때문임을. 아픔이라는 허물을 벗고 더 단단해졌을 것이라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엄마로 살다 보니 내 인생에 이미 결론 나버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랑도 꿈도 모두 종착역에 다다른 것 같았다.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 中>

올 해 나는 둘째를 낳았고 39살이 되었다. 나 역시 40대 직전이 되자 몸이 여기저기 말썽이고 아프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 교육, 편찮으신 부모님까지 얽히면서 몸도 마음도 많이 얻어맞고 있다. 그러던 때 나와같은 여자들을 위한 책이 나와주었으니 보물과 같은 이 책을 어찌 어루만지지 않을 수 있으랴.

마흔이 되고 보니 가만히 앉아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나이와 노화뿐인 것 같다.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 中>

저자는 마흔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을 먼저 지나치며 이 구간은 이렇게 조심하라 알려주려 본인이 겪은 감추고 싶은 상황까지도 꺼내어준다. 다사다난했던 어린 시절, 두 아이를 키우며 느꼈던 바닥. 그 곳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려한 그녀의 몸부림은 비록 여자이자 엄마의 생존본능이었더라도 그것을 대중에게 꺼내어 보임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용기에 기대어 비슷한 우리 세대 엄마들은 자신 안에 꽁꽁 감추었던 부끄러운 일들에 빛을 비춰줄 수 있었다.

너만 그런 것 아니라고. 나도 그리고 또 다른 여자들도 그렇게 힘든 시간과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을테지만 우리는 아직 40일 뿐이라고. 더이상 어리지도 않고 공식적인 청년도 아니고 꼰대중년과 젊은이 사이에 있는 애매한 나이이지만 아직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더 많은 시간을 살아내야하는 정 중앙쯤 되는 나이대라고. 그런 우리 나이에 아이 키우랴, 부모님 노후 챙기랴, 가정의 경제적인 부분도 챙기랴 바쁘지만 그 사이에 나를 잃으면 안된다고 그녀는 말해준다. 무조건적으로 내 편에 서서 말이다.

 

이 책에서는 1장 2장 3장은 자식으로 살다 여자로 살다 엄마로 살며 겪게 된 그녀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4장은 자식 교육에 대한 부분, 5장은 나를 찾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이 책은 그녀가 삶의 철학을 찾기까지 도움을 준 책과 현 상황에 도움이 될 자료들도 수록되어 설명해주고 있다.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40대를 위한 에세이라하면 그녀의 인생과 앞으로의 다짐을 에세이로 말하고 끝일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책은 그러하지 않다. 그녀는 육아가 어려우면 수백권의 육아서를 읽고 방법을 찾는, 어려움을 발전의 계기로 삶기 때문에 그녀의 책에도 그러한 모습이 담길 수 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그녀의 말에 더 설득력이 있으며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따라가게 되어 있다.

내가 나를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으면 남들이 나를 부정확하게 규정한다는 것을 갓 엄마가 되었을 때는 몰랐다.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 中>

책 뒷표지에 '소설 속 김지영의 현실판 이야기'라고 되어 있어서, 이 건 좀 82년생 김지영의 후광을 얻고자 하는거 아냐?라고 생각했으나 그 말이 진짜임은 초반 에피소드만 읽어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보며 공감을 한 많은 또래 여성이자 엄마들에게는 이 책 역시 공감을 얻을 수 밖에 없었다.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이라서 한 겹 너머의 인생을 지켜보겠지만 이 책은 그게 아니라 날 것 그자체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더 내 이야기 같았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기 힘들다. 나는 일을 하고 돈을 벌 때 자존감을 얻었다. 자존감을 쓸모에 기대어 산 것이다.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 中>

육아로 자의반 타의반 일을 그만둔 엄마들이 알바를 구한다는 모집광고에 눈길이 가는 것도 그러했지만, 특히 요실금 이야기에서 이 책이 확 내 삶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엄마들은 아이 출산 후 탄력 잃은 피부와 신체 여기저기 삐그덕 거린다. 늘어진 피부와 괄약근은 엄마가 되어 스스로가 늙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만들어버린다. 몸의 그러한 문제는 삶의 질만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가을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부분은 소설에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말초적인 부분이니까. 그러나 여성들의 40프로는 요실금을 느껴봤다하니 소설 속 한 겹을 아우른 꾸민 세상 속 이야기보다 현실은 더더욱 적나라하다.

드라마에서 아이를 낳는 장면을 보면 땀을 뻘뻘 흘리고 얼굴에는 붓기라고는 없는 예쁜 여자가 소리 지르다가 아이를 낳고 아이는 예쁜 얼굴로 울며 엄마는 미소 짓는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굳이 현실을 상기시키지는 않으려 한다. 이 책을 읽은 독자, 읽을 독자라면 그 현실이 어떠한지 잘 알 것이기에.

그런면에서 내 또래 엄마들에게 이 책을 강력 추천하고 싶다. 우아하고 당당하게 겉으로 꾸미지만 그 수면 아래에서는 수없이 발을 버둥거려야 함을 우리는 알고 있기에. 겉으로 보이는 우아함과 당당함이 내면까지 스미기 위해서 특히나 이 책을 통해 나를 사랑하고, 내 삶을 사랑하고, 내 꿈을 찾는 길을 알아가길 바란다.

나는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 안의 나에게도 말해줬다.

"너도 본래 태어날 때부터 예뻤어. 네 모습 그대로 여전히 예쁘단다. 네 모습 그대로 사랑해도 괘찮아."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 中>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아이들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만큼 나 역시도 내 보습 그대로 예쁘고 사랑을 받았음을 말해주는 것. 그녀가 대신 전해준다. 너도 본 모습 그대로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돈을 벌고, 엄마로서 잘해야 하고, 아내로서 잘해야 하는 이 관계를 벗어나서 네가 실수투성이에 못난 짓을 하더라도 너의 본 모습 그 자체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노라고.

살면서 가장 큰 위험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데에서 오니까.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 中>

그녀는 엄마 이기 이전에 여자로서의 나, 여자 이전에 사람으로서의 나를 돌아보게 해준다. 처음은 그녀가 겪은 여자로서의 불합리함, 엄마가 됨으로서 겪는 약자라는 위치와 그를 강제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사회, 그리고 아이를 낳은 후 겪는 생물학적인 어려움 등을 통해 독자들에게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라고 위로를 해주고 있다. 위로로 끝났다면 왜 굳이 없는 시간을 쪼개 엄마 독자들이 이책을 읽고 눈물을 지었겠는가. 이 책을 쓰며 눈물을 수 없이 흘렸을 그녀와 더불어 우리 역시 눈물을 수 없이 흘렸을 것이니 그녀는 그녀가 스스로 몸부림치며 체득한 '시크릿'을 전달해준다. 정말 '시크릿'에 버금가는데 이는 해보지 않음 알 수 없으니 더더욱 숨겨진 보물이다. 나와 내 꿈을 찾는 '시크릿'

우리가 인생에서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가 '나'다. "나는 왜 살아야 돼? 나는 어떻게 살아야 돼? 무엇을 하며 살아야 돼?"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다 보면 어느새 작은 꿈이 생긴다.

꿈은 오직 '나 다움'이다.

내 집 마련, 공무원 되기, 돈 많이 벌기, 성공 하기. 이건 꿈이라기 보다는 목표다.

꿈이라는 건 '나는 어떤 사람으로 평생 살아갈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다.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 中>

나를 찾고 꿈을 찾는 시크릿이란 읽고, 쓰고, 실천하는, 그녀가 직접 지은 이름인 '책쓰천'을 실천하는 것이다. 엄마로서, 여자로서, 나로서의 인생이 흔들림을 감지한 분들이 이 책을 손에 잡았으리라 생각한다. 그 흔들림을 들여다 볼 방편으로서 책을 추천하며, 객관화와 더 세밀하게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서 쓰기를 추천하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실천을 해야한다.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다.

질문하고 찾으며 읽고 쓰다 보면 꽁꽁 숨어 있던 '나'의 본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그 것이 첫 번째다.

아이를 키우듯 꿈을 키우세요. 좋든 싫든 기분 좋은 날이든 나쁜 날이든 우리는 당연하게 아이를 키웁니다. 그 마음으로 꿈을 키우면 반드시 이룰 수 있습니다.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 中>

이 문장에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아이를 키우며 나도 성장한다고는 느꼈으나 그 뿐. 아이 키우듯 나도, 내 꿈도 키워야겠다는 왜 당연한 부분을 깨닫지 못했을까. 엄마라는 사회가 정한 틀에 나를 맞추어 내 모든 것을 포기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 생각은 세뇌가 아닐지. 그로 인해 많은 엄마들이 정작 이유도 모른체 우울감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지...

아이를 키우듯, 나도 키워야 한다는 것. 이 당연한 명제를 잊고 있었다. 내가 살지 않으면 아이도 내 가정도 다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버려두었다. 그 거짓된, 만들어진 행복을 아이가 진정 바라고 있을까? 아이도 엄마를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 조건 없이 엄마라서 사랑한다. 그렇다면 아이도 엄마가 나를 찾고 꿈을 찾기를 바라지 않을까. 그리고 그를 통해 자신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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