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라시보 > [퍼온글] 멋지다는 말 밖에...

모과양님이 쓰신 글이다. 사실 나는 이 글의 존재유무조차 몰랐었는데 어떤 님께서 서재 주인보기로 알려주셨다. 아무래도 나에 관한 글인것 같다고... 가서 읽어보니 오늘 페이퍼를 과하게 올린것과 여동생이 있어 언니의 위치에 있다는 점이 같아서 혹시나 하고 조심스래 물어봤더니 답은 빙고란다. 너무 좋게 써 주셔서. 그저 감사할 뿐이다. 사실 실제의 나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어쩐 일인지 이곳 알라딘에서는 꽤나 멀쩡한 인간으로 비춰지나보다. 이게 바로 현실과 넷이라는 가상공간간의 차인가 싶기도 하다. 흐흐. 아무튼 이 글을 써 주신 모과양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퍼오는걸 허락하신것도 감사해요^^) 다시 말하지만 이건 나에 대해 너무 좋게 써 주신거고 실제로는 저 글의 발 뒷굼치도 안되는게 나란 인간이다.

 

멋지다는 말 밖에...


서재 브리핑을 통해 그녀의 페이퍼가 올라왔다. 몇 분뒤, 또 다시 그녀의 페이퍼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긴 장문이다. 1시간이 조금 못되는 시간으로 그녀는 긴 장문을 써낸 것이다. 고개가 끄덕끄덕 절로 숙여진다. 그녀는 ‘달인’ 타이틀에 걸맞게 글을 참 잘 쓴다.


글 잘 쓰는 그녀를 난 존경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존경은 너무 거창하고 좋아하는 것과 존경의 중간인 ‘부러움’ 정도가 알맞겠다. 적당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고 적당히 써두는 나와는 달리, 그녀의 단어 선택은 적재적소다.


일단 내가 장문을 글을 쓰는 것을 힘들어하므로, 그녀의 장문 글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 할지 예상이 갔었다.

내 머리 속에서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려 워드를 치기 시작하면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들도 같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생각과 워드가 따로 놀고, 오타가 많고 중간에 다른 내용이 눈치없이 줄줄 끼이게 된다. 그래서 긴 글을 쓰려면 컴퓨터 앞에 오래 죽치고 있어야 한다. 내가 1시간동안 치는 글자 수와 그녀가 1시간 동안 치는 문장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그녀는 워드와 동시에 페이퍼를 술술 쓰는 듯하다. 머릿속에서 차분히 생각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 같다. 그러므로 힘들이지 않으면서, 우아하게 그녀의 말을 길게 쓸 수 있는 것 같다.


나도 필요할 때 내맘대로 술술 꺼내 쓰면 좋으련만 생각나는 그 순간, 써두지 않으면 그 주제에 대해 다음번에는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다. 나의 글 소재는 유통기한이 짧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순간에 신선했던, 그 때 그 맛까지 같이 잃어버린다. 그러니 나는 무작정 적고 보는 것이다. 떠오르자마자 적어놓은 글도 형편없지만 그래도 일단 적는다. 그리고 적지 않고 놓아두면 적을 때 까지 계속 생각에 생각을 반복하는 이상한 성격도 가지고 있다. -페이퍼 쓰면서 더 심해졌다.

(한마디로 기억력 짧고, 뒤에서 뒷말 잘한다는 뜻이다.)


그녀의 글에서 느껴지는 흡입력에 경외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냥 생각을 쭉 늘어놓기만 해서는 안 된다. 글의 전개에 연계성이 부족하면 집중력은 금방 소진된다. 그녀가 말문을 연 주제에 대해 내게 먼저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경우는 드물다. 그녀가 일찍 세상에 발을 내딛은 것도 있겠지만, 그녀의 생각깊이가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 까 한다. 본인은 부담스러워 할지 모르지면 확실히 그녀의 글은 세월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그녀의 글은 말랑말랑하지 않다. 따뜻하기보다 불에 데 일 듯이 뜨거운 경우가 더 많다. 따뜻하게만 보이는 글은 누구라도 감정의 기복만 타면 쉽게 쓸 수있다. 유쾌한 글은 글쓴이의 장난기를 조금 더 올리고,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노력여하에 따라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류의 글은 내공없이는 힘들다. 자기 속을 먼저 볼 줄 알아야하고, 주변인도 한번 생각해야한다.

그녀가 이루고자 하는 삶의 모습을 통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모습을 비교해 본다. 그녀가 손수 끓여먹는 라면과 내가 엄마에게 얻어먹는 라면의 맛을 비교해 본다. 그래서 그녀의 진한 라면 국물맛에 울기도하고, 혀를 데이기도 한다.

내게는 충고를 해줄 언니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글이 더없이 고맙다. 그녀가 실제로도 언니의 위치로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남동생의 누나의 위치로 살고 있다. 


오늘은 나도 그녀의 여동생이 되고 싶다.


그녀의 서재는 내가 소개하지 않아도 눈치 빠른 서재인이라면 다 알 것이다. 그녀가 나의 이런 찬양성 글을 보거나 퍼갈 가능성은 아주희박하다. 그리고 그녀에서 소개해서도 퍼가서도 안된다. 그녀에게 부끄러우므로...... 

 

ps. 그녀의 글을 논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냥 내 느낌대로 썻을 뿐이다. 혹시 이렇게 썼다고 화낼 지도 모르니, 조심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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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마태우스님의 홈피에서 퍼온 글입니다.-

* 제 홈피에 어느 분이 쓰신 글인데요, 마음에 들어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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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과학책 추천' 관련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데,
좀 성급한 일반화를 시키는 감은 있지만
일본인이 쓴 과학(?)관련 서적은
절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 아침형 인간?
: 저녁 5시 이후의 생활이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회식하자고 할 때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날이 어두워 져야 독서할 맛이 나는
나같은 사람은 어쩌고?
(난 운동도 주로 밤에 한다.)
사람이란 각자의 생체 리듬이 있는 법인데
이를 무시하고 획일화를 강요하는 것은 범죄이며,
내일도 새벽 3시에 일어나 생업에 힘쓰는
동대문, 남대문 시장 상인들을
두 번 죽이는 짓이다.
어느 일본 의사의 편집광적인 주장 하나에
일본국민 뿐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주, 그 밑의 직원들까지 현혹되어
놀아나고 고생하고 있으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음이다.

# 바보의 벽?
: 사람은 각자의 성장과정에서 각자의 성격과 취향을
가지게 되고 가치관을 정립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각자의 취향과 경향이 생기고
이는 웬만해선 잘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세대간 갈등, 좌우익간의 갈등.. 등등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
이는 불가피하다.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 된다.
상대방을 자신의 가치관대로 함부로 바꾼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또한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일종의 인권유린이니까.
그 갈등이 그렇게도 안타까운가?

이것이 뇌의 기능과 연관시켜서 설명할 문제인가?
그리고 가역적인 것이라 생각하는가?

정말 이 책의 저자가 의사인지
다시금 확인하였었다.

좋게 보면 "편견을 버리라"는 의도겠지만,
한 페이지 정도면 충분히 표현할 그런 주장을
이렇게 지면을 낭비하면서 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 물은 답을 알고 있다?
: 편광 현미경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다면
이 책 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인지 금방 파악이 될 것이다.
물 떠놓고 '사랑해, 사랑해' 되뇌이고나서
사진 찍으면 아름다운 결정체가 나온다고?

분명히 저자는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자기가 주장하는 게 옳다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다.
믿는 건 자유지만
이렇게 대중들에게 공표하는 용기가 가상할 뿐.

아름다운 결정체로 나타난 똑같은 물을
각도만 달리해서 찍으면
다른 모양이 나올텐데도
이에 대한 해명은 없다.

차라리 사진으로 나타낸 일종의 시라고 했으면
좋았을 걸...
왜 과학이라고 주장하는지..
이런 사이비 과학이 우리나라에도 먹힌다는 사실은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 뇌 호흡? 두뇌체조?
: 기가막힌 조어능력이다.
뇌가 호흡을 한다?

# 왜 일본책들은 하나같이...
이럴까?
1) 축소지향의 국민성이라 그럴지도...
축소 지향 내지는 혼자서 방안에 틀어박혀
어떤 주제를 깊게 파는 경향이
유달리 강한 민족이다 보니
오다쿠가 나오기도 하고, 편집광적인 경향도
쉽게 도출되는 것이 아닐까?
이는 동료들에 의해 서로 비판을 주고 받으면서
편견이 되지 않도록 자체 조절이 필요할 것인데
혼자 파다보니
이 과정이 생략되어
얼핏 그럴듯 해 보이는
어처구니 없는 사이비 이론이 만들어 지는게 아닐까?

2) 일본은 유달리 미신이 많다.
귀신 수만 300만명이라고 할 정도이고,
생활 하나하나에 미신이 깃들어 있다.
그러다 보니 이런 황당한 생각들을 쉽게 하는게
아닐런지.

3) 획일적이고 전체주의 취향이 잔존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주장하는 건 좋은데 남에게도 강요하는 걸로 봐서...

# 책으로 출판된 것이라고 신임하진 말자.
: 베이컨 식으로 보면 저자는 '동굴의 우상'에 취한 것이고,
우리는 '극장의 우상'에 현혹되는 것이리라.
책으로 나온 것이라면 검증된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쉬운데,
결코 현혹되지 말아야 할 지어다.

내 개인적으로 세운 감별 기준은 다음과 같다 :
1. 책 표지등이 상당히 예쁘다.
2. 제목이 매우 단정적이다.
3. 서문을 읽어보면 주장하는 바를 강요하는 느낌을 준다.
4. 원저자가 일본인이다.
5.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기준에서 적어도 3개가 해당되면
절대 피하는 것이 좋겠다.

세상은 넓고
읽어야 할 책은 많고
습득해야 할 지식도 넘치는 반면에
우리 인생은 그리 길지 않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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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친구가 보내 준 일러스트예요. 너무도 고운 그림이라 내 그림에 간직했던 것인데, 아, 저렇게 햇빛 속에서 책보면 눈 나빠지지 않을까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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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우리의 새 무감각증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통치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 하나가 이념적·정치적 타자를 폭력으로 분쇄시키는 ‘완력 정치’라면, 또 하나는 매체·군대 등 기제들을 동원해서 국가·자본 독재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합의’를 조작하는 등 사회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공작을 벌이는 것이다. 보통 지속적인 성공을 거둔 이 양면 전략은 한 가지 경우엔 실패하곤 했다. 한 민중이 자각하여 소중한 목숨을 내던지고 압제자들과 사투를 벌였을 때에는 ‘국민 총화’에 대한 기만의 연막이 순간 흩어져 국가 관료 자본주의 체제가 그 사회적인 헤게모니를 일시적으로 잃곤 했다. 전태일을 비롯한 열사들의 희생과 광주에서의 학살이 미국 제국의 진면목에 대한 각성을 가져다 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류의 동요부터 88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으로 대표되는 국가적 기만의 체제는 투사의 주검 앞에서 잠깐이나마 힘을 잃었다. 열사들의 희생과 억압자들의 학살 장면을 보는 순간은 우리에게 ‘진실을 보는 순간’이 아니던가. 사실 미국의 진보파들도 그들의 ‘민주주의’가 참여적 파시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초토화된 베트남의 마을을 보기 전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몇 가지 현상들이 생겨나고 있다. 첫째는 국가·자본의 폭력에 의한 약자들의 새로운 가시적인 희생들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노조 탄압에 죽음을 스스로 택한 한국 노동자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는데다가 최근 ‘불법 체류자 단속’이라는 인간 사냥으로 이미 9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살 등 죽음으로 내몰렸다. 또 입국 때 브로커를 통해서 한국 비자 발급 때 ‘송출 비용’ 등의 형태로 진 빚을 한국에서 월급 떼이고 체불당하느라 갚을 수 없었던 이들이 본국으로 끌려간 뒤에 자살로 몰릴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알 수 없다. 둘째는 최근 대미 예속의 틀에 안주하여 미구에 닥쳐올 재앙을 볼 줄 모르는 한국의 관료와 보수 정객들이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것은 새로운 희생자들이 한국과 이라크의 양민 저항세력 양쪽에서 나올 것을 의미한다. ‘제도적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국가 관료·자본의 통치의 비인간적인 진면목을 여실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약자의 가시적인 희생은 더이상 온건 ‘진보주의자’들의 의분을 자아내지 못한다. 이들 중에서 외국인 노동자 사냥이나 이라크 침략 동참과 같은 만행을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의 중요한 요인으로 보지 않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입장의 모순됨을 느껴서인지 보통 변명 식으로 ‘불가피론’을 펴는데, 이 ‘불가피’의 논리는 보수 언론의 ‘국익론’과 거의 구분하기 어렵다. 청와대 사이트 대량 메일 발송이나 항의 전화로라도 집권자들의 ‘표심’ 걱정을 일으켜 외국인 노동자 사냥과 같은 국가 범죄들을 저지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온건 ‘진보주의자’들은 국가 폭력을 방관함으로써 그 폭력의 공범이 되고 만다.

그러면 이들이 왜 이렇게 순치되었는가 배가 고팠던 1970~80년대보다 상당수에게 상대적인 풍요를 가져다준 1990년대 이후 남한에서의 국가·자본의 헤게모니가 가일층 강화됐다는 사실을 아쉽게도 인정해야 한다. 대다수 ‘개혁적인’ 지식인들은 이제 서구의 ‘온건 진보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시장시스템을 본격적으로 문제삼지 않으며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을 꿈꾸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흠모의 대상인) 서구인들처럼 이제 ‘개량주의’를 더이상 부끄러운 단어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국가와 자본은 정말로 ‘개량’되었는가 눈을 똑바로 뜨고 본다면, 외국인 노동자 사냥이나 이라크 파병 등만 보아도 매체·관변 학상배(學商輩)에 의해서 조작되는 국가·자본에 대한 우리의 환상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 당장 알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출처 : 인터넷한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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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맹’사회에서 책읽기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영화광이었다. 그것도 지독할 정도로. 그리하여 친구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내 별명은 ‘충무로’였다. 당연하게도 그 시절의 내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물론,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자 하는 바람도 품고 있었다. 허나 그 바람은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산산이 부서졌다. 부모님께 연영과에 입학하고 싶다는 소망을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나에게는, “네가 딴따라가 되겠다는 것이냐”라는 부모님의 힐난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정말 소심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권하시는 대로 법대에 진학했다. 그렇게 기대치 않았던 물결을 따라 꿈이 표류하게 되자마자, 내 일상은 갑자기 심심해지고 말았다. 예정된 수순처럼,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에게 묵직한 권태의 시간이 찾아왔다. 먹고 자는 일 외의 나머지 시간은 지리멸렬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갑작스레 맞게 된 그 지리멸렬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 하나가 절실했다. 그때, 내 손에 잡힌 것이 있었다! 바로 책이었다. 어릴 적부터 홀로 공상하기를 즐겼던 덕에 나는 책의 마력에 쉽사리 빠져들 수 있었다. 그 후 십년 동안 나는 책읽기의 매혹에 풍덩 빠져 살았다. 정말 잘난 척한다는 빈정거림을 들을 각오를 하고 말하건대, 정말이지 책은 남부럽지 않을 만큼 읽었다. 그렇게 해서 집에 쌓인 책만도 대략 삼천 권이다.

어쨌거나 나의 십대 끝자락과 이십대의 전부는 그렇게 흘러갔다. 당연하게도 그 시절 동안의 나는 혼자 방안 한구석에 몸을 파묻은 채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 많았다. 종종, 책맹(冊盲)사회에서 책에 미쳐 살아가는 일의 고독이 얼마나 큰지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내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시며 한숨을 푹푹 내쉬곤 하셨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꼴로는 나에게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렇게 타이르셨다. “책 그만 읽고 공부 좀 해라. 그렇게 책만 읽어서 어디다 써먹으려고. 쯧쯧.” 그럴 적마다 나는 너털웃음으로 화답했다. 어머니가 지칭하는 ‘책읽기’와 ‘공부하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지만, 적어도 그 시절의 나에게 책읽기와 공부하기는 동의어였던 탓이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르고, 그리하여 내 나이의 무게가 더해갈수록, 나는 내 스스로가 인생의 공식으로 세워두었던 책읽기와 공부하기의 등호관계가 점차 부등호관계로 어긋나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사회는 나이를 먹어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갈 시점에 이를수록 그 나이에 맞는 역할 모델을 강요했지만, 미련하게 ‘공부는 안 하고 책만 읽어 온’ 나는 그 역할 모델에서 점차 멀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서른의 나이에 이르고 보니, 어느샌가 나는 거의 한국사회의 부적격자가 되어 있었다! 이 오묘한 세상에 하나의 유한한 생명체로 태어나 먹고사는 문제에 초연할 수 없었던 나는, 그리하여 내 이십대를 온통 도배질하다시피 한 책읽기 이력이 갑작스레 버거워졌다. 최종학력이 ‘국졸’인 내 어머니의 한국사회 감식안이 십 년 넘게 대학 캠퍼스를 학생 신분으로 유령처럼 배회한 나보다는 수십배 더 예리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도 나는 내가 책벌레로 보낸 지난 십 년 남짓의 시절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아둔하게 ‘책만’ 읽어온 지난 세월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은 솔직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사회에서 책읽기와 공부하기가 등호관계에 가까웠다면, 아마도 나의 삶이 요즘처럼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맨 처음 본격적으로 책의 매혹에 빠져들었을 때에도 그러했고, 서른의 나이에 이른 지금에도 그러하듯, 이 나라 책맹사회는 책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공중부양이나 축지법을 꿈꾸는 몽상가 정도로 취급한다. 말로는 책 열심히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자기 자식이 책벌레 되는 거 겁내는 부모들이 꽤 많다. 과장이 아니다. 그건 내 삶이 증명한다.

이휘현/자유기고가·대학원생

출처 : 인터넷한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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