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 <시민 불복종> 수록 펭귄클래식 83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홍지수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펭귄클래식코리아판 <월든>은 번역이 오류가 너무 많다. 마이클 마이어 서문 때문에 사 봤는데, 너무 실망스럽다. 이런 책을 문장마다 맥락에 맞춰 바꿔서 생각하며 읽은 순 없는 노릇이다. 서문이 보고 싶다면 서점에서 그것만 슬쩍 보고 다른 판본의 월든 구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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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주마"관"산으로 뒤적이기 (82) : <율리시즈> 번역본에 관한 몇 가지 생각...

 

생각의나무에서 김종건 교수의 <율리시즈> 번역본이 새로 출간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은 그렇잖아도 잔뜩 쌓아두고 있는 조이스 관련 번역서-연구서-전기 위에 또 한 권이 더 얹혀지게 되었다는 생각이었고 (이건 또 어디다 쑤셔넣는담!) 그 다음은 왜 하필이면 출판사가 "생각의나무"냐 하는 것이었다.(나중에 혹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출판사, "생각의 나무"가 아니라 "생각 있나 뭐"라고 본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야말로 "요란하게 후려치기"와 "양으로 밀어내기"에 익숙한 상업출판사의 전형이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이제는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선뜻 손이 안 가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다. 첫째는 표지는 번쩍이지만 내용은 영 아닐까봐, 둘째는 기껏 사놓고 미처 읽지 못하고 일이 년 지나면 또 대형서점 재고매대나 인터넷 할인행사에서 반에반값에 팔려나가고 "보급판"이 출간될까봐, 셋째는 책을 받아 펼쳐보았더니 제본이 쩍쩍 갈라지는 부실품일까봐, 넷째는 하도 사방팔방에서 떠들어 대니 묘한 반감이 생기는 바람에.) 김종건 교수의 두 번째 <율리시즈> 번역 겸 "조이스 전집"이 범우사에서 나왔고, 몇 년 전에는 역자 나름대로의 숙원이었을 <피네건의 경야> 번역도 범우사에서 나왔으니 앞으로도 계속 밀월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출판사를 바꿔서 세 번째 번역본이 나온다니 좀 당황스럽다.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원래 저(역)자와 출판사가 가급적 끝까지 서로 지조를 지키는 상당히 낭만적인 (나아가 한국인의 정서에는 안 맞는) 상황을 선호하는 내 취향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김종건 교수는 대학 졸업논문부터 조이스에 관한 것으로 시작해서 평생 조이스 작품의 연구와 번역에 매달려 온,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별로 찾아볼 수 없게 된 "한 우물만 파는" 학자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율리시즈>는 "역자에게는 일종의 성서였다. 로마에서 산 성서의 커버용 흑피를 <율리시즈>에 씌우고, 언제부턴가 외출할 때면 재산목록 제1호로 챙기면서 세 주인공과 함께 4반세기 이상을 살아왔다"(범우사 간 구판 <율리시즈> 상권, 18쪽)고 고백할 정도로 그 한 권의 소설에 강한 집착을 보여 왔다. 김종건 교수가 처음으로 펴낸 <율리시즈>는 1968년에 정음사의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제51, 52권으로 나온 <율리시이즈>였다. 그런데 이후의 개역판에서는 이에 관한 언급이 나오지 않고 있지만, 사실 이 번역본은 출간 직후에 치열한 "오역"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에 관해서는 김병철 교수가 <한국현대번역문학사연구> 하권에서 "<율리시즈> 오역 논쟁 시비"라는 제목으로 한 절을 할애하여 약 10여 쪽에 걸쳐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 참고할 만하다. 당시 이 책에 등장하는 오역 부분을 지적한 사람은 이재호 교수(요즘도 종종 "오역" 지적자로 언론에 오르내리는)였는데, 김병철 교수는 30여 개에 달하는 논란 대목 가운데 10개를 골라 소개하면서 "인신공격적인 점도 많았지만, 전번의 셰익스피어 논쟁시의 반박문보다는 몇 배 그 질에 있어 학구적이며, 논지에 쌍방이 다 성실했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383쪽)이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김종건 교수가 이후에 조이스 공부에 더 열을 올려 미국 유학과 더블린 답사 등을 통해 여러 해의 각고 끝에 <율리시즈> 개역판을 펴내게 된 것 역시 "이 논쟁이 그 원동력이 되었다고" 김병철 교수는 믿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해서 1988년에 나온 것이 범우사 판 제임스 조이스 전집 3-5권인 <율리시즈> (상)(중)(하)권이다. 이 전집(이라기보다는 사실 선집에 가까운)은 모두 여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권은 <더블린 사람들>과 <망명자들>, 제2권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시집>으로 되어 있고, 제6권은 김종건 교수가 당시까지 사반세기 가량 조이스를 연구한 결실인 <율리시즈 주석본>이다. 이 책에는 <율리시즈> 본문 번역서 세 권에 등장하는 갖가지 사항에 관한 주석이 빼곡이 들어차 있고, 곳곳에 김종건 교수가 여러 차례에 걸친 더블린 답사에서 직접 찍어 온 사진들을 수록했다.(물론 모두 흑백.) 김종건 교수의 조이스 관련 자료 수집열을 어찌나 대단한지, 한 번은 주한 아일랜드 대사가 그의 연구실을 방문하고 나서 "이 방이야말로 조이스 박물관이나 마찬가지"라고 감탄했다는 일화(김병철 교수의 기록)가 전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점은 <주석본> 맨 뒤의 "참고자료"에는 <율리시즈>의 초고 교정쇄의 한 장을 찍은 사진과 나란히 김종건 교수 본인의 1968년 번역본인 <율리시이즈> 개역 원고 사진이 한 장 들어 있다는 점이다. 즉 김종건 교수는 1977년에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에 구판본 <율리시이즈>를 펴놓고 자신의 예전 오역을 빨간 볼펜으로 수정, 보완하며 주석을 달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구판본 가장자리의 여백이 모자랄 정도로 고칠 것이 너무 많아져서 부득이하게 전면 개역 작업에 돌입하는 한편, <주석본>을 일종의 자매편으로 별도 출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그런데 정말 처음부터 새로 번역했다기보다는, 주석만 더 붙여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범우사 판 제임스 조이스 전집은 본래 양장본과 반양장본 두 가지로 출간되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그중 반양장본이고, 양장본은 예전에 낱권으로 한두 권 갖고 있다가 처분했는데, 제본이 제법 단단하고 케이스까지 튼튼해서 장서용으로는 꽤나 그럴듯한 물건이었다.(물론 새 번역이 나왔으므로 이제는 시효가 지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기념용으로는.) 단 수량이 많지 않은지 지금은 헌책방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한때 범우사의 "비평판" 세계문학전집을 열심히 모으고 또 읽던 때가 있었다. 범우사라는 이름이 그때는 얼마나 그렇게 대단해 보였던지! 하지만 세월이 지나 그런저런 기본적인 교양서를 거쳐 좀 더 세부적이고 좀 더 복잡한 주제를 건드리다 보니, 이제는 솔직히 범우사에서 나온 책을 다시 뒤적여 보다가 실망하는 일이 없지 않은 거다. 이상하게도 한때나마(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고전 번역서 중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시리즈인데도 불구하고, 범우사의 고전 번역서에 대한 평가는 예상 외로 그리 호의적이지가 않다. 가령 영미문학연구회의 <영미 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에서 다룬 작품 가운데 범우사에서 나온 고전 중에서 추천본으로 낙점받은 것은 이창배의 <실낙원>을 빼면 하나도 없는 듯하다. 도리어 "신뢰할 수 없는 번역"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고(어쩌면 범우사 "비평판" 전집에 수록된 번역 대부분이 "옛날" 번역자들의 작업이라는 면이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심지어 김종건이 번역한 <더블린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색한 우리말 문장이 적지 않아서 가독성이 많이 떨어진다. 작품 이해에 도움이 안 되는 역주가 많다는 점도 문제"(414쪽)라는 따끔한 지적을 받고 말았다.(물론 영미문학연구회가 사용한 "평가" 방법은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영어를 어떻게 한국어로 정확히 옮기는가"라는 문법적인 문제에만 지나치게 치중한 평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좀 자세히 뜯어보도록 하자.)  어쩌면 이것은 <율리시즈>를 비롯한 김종건의 다른 번역 작품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 가능한 이야기일런지 모른다. 물론 <율리시즈>가 분명 "껌"처럼 쉬운 작품은 아니겠지만, 솔직히 내 생각으로는, 지난 번에 <피네간의 경야> 완역본을 잠깐 뒤적이다가 포기하고 나서 문득 "이 작품을 과연 이렇게까지 해서 꼭 번역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이스가 대단한 작가라고는 하지만, 과연 우리말로 번역되어서도 무슨 암호가 따로 없을 정도로 난해하고 복잡한 소설이라고 하면, 과연 이걸 그렇게(심지어 김종건 교수는 한자 신조어까지 새로 만들어가며 번역에 임했다고 하는데)까지 해서 꼭 내놓아야 할지 의구심이 없지 않았던 까닭이다.

 

 

 

 

 

 

하여간 범우사 "비평판" 세계문학선은 1997년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커다란 판형으로 바뀌면서 주요 작가에게 고유번호를 매겼는데, 제임스 조이스는 그중 9번을 차지하게 되었고, 기존에 나왔던 여섯 권의 전집을 재편집(특히 <율리시즈>는 별권이었던 주석본의 내용을 본문과 합치면서 모두 네 권으로 분권되었다)하고, 거기다가 새로 번역한 조이스의 비평문, 그리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초기 원고였던 <영웅 스티븐>의 번역 등이 추가되면서 현재 8권으로 완간되었다.(혹시 나중에 서간집이 추가될런지 모르지만.) <율리시즈>의 경우에는 1988년 개역본과 1997년 재편집본 사이에 큰 차이는 없고, 내가 뒤적여 본 바로는 다만 경어체라든지 이런저런 문장이 약간 손질된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만약 지금 다시(그러니까 초역본으로부터 약 40년만에, 그리고 가장 최근 개역본으로부터 20년만에) 나오는 번역도 어쩌면 김종건 교수가 초역본과 개역본, 즉 초판과 2판 번역본 사이에 했던 것처럼 각주를 좀 더 자세히 달고 몇몇 생경하거나 구식이 된 표현을 고치는 것 정도에 그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실제로 초판과 2판 사이에는 표현이 많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한자어 위주의 주요 번역어는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니 말이다. 게다가 앞서 영미문학연구회의 <더블린 사람들>에 대한 지적에서처럼 "어색한 우리말 문장" 같은 것은 적지않은 고민거리일 것이다. 물론 조이스 자신이 언어에 대해 무척이나 까다로운 입맛(?)을 자랑했다고 하니, 영어 문장이라고 해서 쉬운 것도 아닐 것이고, 조이스가 막상 어렵게 써 놓은 것을 우리말로는 쉽게 풀어쓰는 것도 번역자로선 선뜻 결정할 수 없는 고민거리이겠지만 말이다. 또 지금 와서 다시 뒤적여 보니 약간은 의구심이 드는 대목도 없지 않다. 맨 먼저 보이는 것은 제1장 초반에 벅 멀리건이 스티븐 디덜러스를 "이 겁장이 제수이트 교도!"(you fearful jesuit!)라고 부르는 것인데, 다들 알다시피 "예수회(제수이트)"는 장로교나 감리교 같은 "교파"라기보다는 일종의 "수도회"로 보아야 한다. 즉 그곳에 속한 "성직자"는 있지만 "신도"는 없는 것이니 "예수회 교도"라는 말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예수회 회원"이라고 하던지, 아니면 "제수이트(예수회원)"라고 부르면 그만일 것이다.(그리고 fearful 을 과연 "겁장이"로만 옮겨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일반인이 아니라 "예수회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이 경건한 예수회원 녀석 같으니!" 하는 뉘앙스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하여간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면 이번에 나올 제3판은 기다려지는 한편 좀 걱정스럽기도 하다. 물론 개정되건 말건 간에, 어차피 읽기 힘든 책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이건 아마 처음 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잠깐 소개하자면, 보시는 그대로 제임스 조이스의 서한집(일종각 발행, 1982)이다. 조이스 전문가인 리처드 엘먼(책세상에서 나온 조이스 전기도 그의 저서다.)이 편집한 조이스 서한집 가운데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무려 사반세기 전에 나온 책이라서 더욱 특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율리시즈>의 출간에 관한 편지는 전체 5장 가운데 제4장인 "파리" 편에 등장한다. 사실 나로선 <율리시즈>라는 작품 자체보다도 그 출간에 얽힌 일화가 더욱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 책이 잡지 연재 당시부터 큰 화제를 모았으며, 무엇보다도 중간의 그 "외설적인" 묘사 때문에 영어권 사용국가(미국과 영국, 아일랜드 등)에서는 모조리 출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때 조이스를 도와주겠다며 나선 인물이 바로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의 파리 레프트 뱅크에서 도서대여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파니"를 운영하던 실비아 비치였다. 그 와중의 우여곡절은 굳이 설명할 것이 없겠고, 하여간 그렇게 해서 각고 끝에 나온 <율리시즈>는 이후 "파리에 간 영국인/미국인 관광객은 으레 한 권씩 몰래 들여오는 기념품"이 되었다. 즉 처음에는 이 책이 사실 예술 작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외설물"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심지어 이 책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고무된 D. H. 로렌스조차 하루는 실비아 비치를 찾아와 자기 책, 바로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좀 펴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원래 조이스의 팬이기 때문에 좋은 뜻에서 돕기 위해 출간을 자처한 것일 뿐 출판사, 그것도 "에로문학 전문 출판사"를 운영할 생각은 없었던 실비아 비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나중에는 <나의 생애와 사랑>의 저자인 프랭크 해리스도 원고를 싸들고 왔으며, 그 외에도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숱한 "에로소설" 작가들의 원고가 물밀 듯 몰려들어 왔음은 물론이었다. 물론 비치는 모두 다 거절했지만.) 그랬던 <율리시즈>가 미국에서 출간되게 된 과정 역시 무척이나 드라마틱하다. 랜덤하우스 설립자인 "구라쟁이" 베네트 서프의 입을 통해 나온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서프는 파리로 조이스를 찾아가 미국판 출간 계약을 하고 선인세를 지불한 다음, 미국에서 <율리시즈>의 출간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가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로 비화시킬 작정을 했다. 그는 저명한 변호사이자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까닭에 <율리시즈>의 미국판이 출간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던 모리스 언스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이와 비슷한 판결에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판결을 내렸던 존 울시 판사로부터 판결을 얻어내기로 작정하고 치밀한 "작전"에 돌입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발한 것은 이른바 "특별판 <율리시즈>"로 외부 권위자들의 견해를 참고진술로 채택하지 않는 당시 미국 법정의 정황을 고려해, 에즈라 파운드를 비롯한 유명 작가들의 <율리시즈>에 대한 옹호를 비롯해서 "유리한 증거가 될 만한 글들"은 모조리 끼워넣은 <율리시즈> "특별판"을 하나 만든 것이었다. 누군가를 시켜 바로 그 "특별판"을 미국에 입국하는 과정에서 세관에서 발각당해 "압수"당함으로써 이 문제를 법적 분쟁으로 비화시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 책을 "압수"해야 할 미국 세관 측이 영 탐탁찮아 하며 "유럽에 다녀오는 사람들은 다 한 권씩 가져오는 책이니, 그냥 압수하지 않고 모른 척 해주겠다. 그냥 가시라"며 등을 떠미는 바람에, 오히려 "특별판"을 가진 사람이 정식으로 "압수 요청"을 하고 나서야 <율리시즈>는 법정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이상은 베네트 서프의 자서전 <내멋대로 출판사 랜덤하우스>에 나온다. 하지만 워낙 "구라쟁이"이니 뭐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리하여 <율리시즈>는 법정에서 "이 책을 출간하는 것은 합법적"이라는 판결을 받아냈고, 그리하여 1934년 1월에 랜덤하우스에서 <율리시즈>가 영미권 국가에서는 최초로 출간되었다.(이후 랜덤하우스 판에는 울시 판사의 판결문도 수록되어 있는 것이 일종의 관례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비치와 조이스의 관계는 생각만큼 잘 풀리지가 않아서, 비치는 <율리시즈>의 해외 출간으로 인한 수익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씁쓸하게 조이스에 관한 모든 일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물론 본인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조이스의 팬이라 "돕기" 위해 한 일이니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한 가지 일화를 덧붙이자면 실비아 비치가 1941년 말에 독일의 파리 점령과 함께 결국에는 문을 닫게 된 것도 사실은 조이스 때문이었다고 한다. 즉 나치 점령 하의 파리에서도 비치는 피난을 가지 않고 도서대여점을 운영했는데, 하루는 웬 나치 장교가 가게 안으로 쓱 들어오더니 진열대에 있는 조이스의 신작 <피네간의 경야>를 팔라고 했다는 (그것도 완벽한 영어로) 것이다. 비치가 난색을 표하면서 "그건 내가 가진 유일한 책이라 안 된다"고 하자 나치 장교는 인상을 팍 쓰면서 "내가 누군줄 아느냐. 여차 하면 이 가게 문을 닫게 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간이 콩알만해진 가운데서도 비치가 끝끝내 "싫다"고 반항하자 "두고 보자"며 떠나갔다고 한다. 이에 놀란 비치는 그날 밤으로 가게에 있는 책을 모조리 빼돌리고 친구의 집에 숨어 지냈다가, 한때 포로수용소에 수감되는 등 전쟁 기간 동안 고초를 겪어야 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즉 실비아 비치가 운영했던 파리의 "도서대여점"은 사실 1941년을 마지막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1950년대에 들어 미국인 조지 휘트먼이 파리에 헌책방을 차리면서 실비아 비치를 찾아와 "당신 가게의 상호를 쓰고 싶다"고 해서 요청을 들어주었을 뿐, 현재 존재하는 파리의 "헌책방"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실비아 비치와는 사실 무관한 곳이다.

 

 

그나저나 <율리시즈>는 과연 위대한 소설일까? 우리나라에서는 영문학 전공자나 단순 호사가들이나 알고 지냈을 이 책이 지난 10여 년간 유난히 주목을 받게 된 까닭은 아마도 1990년대 후반에 미국 랜덤하우스에서 발표한 20세기 최고 소설 가운데 이 작품이 단연 1위를 차지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비록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조이스라는 작가에 대해, 또는 <율리시즈>라는 소설에 대해 일종의 "거품"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끝내 떨칠 수가 없다. 쉽게 말해 이전에 엘리엇의 <황무지>를 평가하면서 했던 말과 마찬가지로,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1920년대와 30년대, 즉 집필이나 출간 당시에는 무척이나 획기적이고 놀라우며 기발한 시도였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으로 따지면 이미 팔순이 지난 노인 격이니, 지금 와서는 아무래도 그때 그 독자들이 느꼈을 만한 "신선함"을 맛볼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게 문제다. 즉 그때 당시의 사람들이 열광했을 만한 "실험"적인 내용은 이제 와서는 오히려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고, 그때 당시의 "신선함"은 이제 와서는 오히려 "난해함"으로 굳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가령 조이스가 써먹은 갖가지 문체나 풍자나 동음이의어나 말장난 같은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시일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이걸 쉽게 설명하자면, 앞으로 한 50년 뒤에 황지우의 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KBS 연속극 <산유화>나, 농심 스낵 B-29나, 안의섭의 <두꺼비>라는 시사만화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에 딸린 하나의 "각주"로 접하게 되는 상황에서 느낄 생경함이랄까, 암담함 같은 것을 떠올려 보면 된다.) 그런 "난해함"이 지닌 또 하나의 문제는 해석이 안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럴 듯해" 보인다는 점에 있다. 즉 <율리시즈>가 20세기 최고의 소설인 것은 아직까지도 어느 누구도 이 작품을 놓고 딱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데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가령 한국 문단에서 일종의 "괴물" 취급을 받는 박상륭이 한때 이런 대접을 받았다. 즉 그가 소설 속에서 펼쳐 보이는 불교(밀교)와 신화와 종교 상징의 갖가지 어휘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비평가들이 하나같이 "박상륭을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을 자칭 평문의 서두에 토로하는 것을 일종의 "관례"로 여긴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과연 "난해함"은 절대불변의 "미덕"일 수 있을까? 물론 기준을 어디 놓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솔직히 나 같은 일반독자가 보기에 <율리시즈>는 문학사적으로, 다시 말해 20세기 초라는 "과거"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대단한 작품이고 위대한 작품이고 걸작인지 몰라도,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일종의 "시효가 지난" 작품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쉽게 말해 연대적으로는 우리와 훨씬 더 가까운 엘리엇의 <황무지>보다는 그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가 더 이해하기 쉽고 공감이 가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20세기의 작품인 조이스의 <율리시즈>보다는 기원전의 작품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더욱 우리에게 더 와닿는 것이다. 물론 조지 오웰이 "문학의 우수성을 결정짓는 엄격한 문학적 시금석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버지니아 울프나 조지 무어의 작품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오랫동안 독자들에 의해 읽힐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더 많이 지지할 것이다"(좋으면서 나쁜 책, <코끼리를 쏘다>, 123쪽)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읽기는 쉽지만 걸작이라고 할 수 없는" 2류 작품보다는 "난해하지만 독특한" 조이스가 더욱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솔직히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즉 <율리시즈>가 "어쩌면" 20세기 최고의 걸작, 또는 인류 최고의 대작, 아니면 영어로 쓰여진 최고의 소설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재미있는" 소설은 결코 아니라고 말이다. 문학사를 뒤져보면 그런 신기함이나 진기함이나 독특함 때문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지만, 솔직히 그 가운데에는 대중과 적잖이 괴리된 것들, 즉 강의용 교재나 논문 작성용으로나 명맥을 유지하는 작품도 없지 않다. 어쩌면 <율리시즈>도 이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책인지 모른다. 물론 대중성을 모든 문학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자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해성을 기준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실비아 비치 같은 경우에는 조이스의 책을 "무척 좋아했고" 또한 "재미있게 읽었다"고 썼지만, 글쎄, 거의 반세기 가까이 이 책을 끼고 살았다는 김종건 교수,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아마 <율리시즈>를 가장 깊이 연구한 인물이 아닐 수 없는 그 장본인조차도 "그 동안의 긴 작업은 내 영혼과의 투쟁이었다"고 토로했으니, 이것은 <율리시즈>를 읽고 연구하는 것이 큰 보람이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적잖이 힘들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조이스를 평생 연구한 영문학자도 갖가지 언어와 상징으로 범벅된 이 책의 미로에서 허덕이고 있으니, 일반인은 차마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구태여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율리시즈>의 어려움을 강조하는 까닭은 나 역시 이 작품의 몇몇 주요 장면을 뒤적여 본 적은 있지만, 결코 이 작품을 "완독"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한편으로는 "이렇게 유명한 작품을 완독조차 할 수 없었다니" 하는 자괴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둔한 나 자신의 머리나 깜깜한 눈을 탓하기 전에, 어쩌면 이 작품 자체에 뭔가 결함이라든가, 어떤 (시대적이고 상황적인) 한계는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기 때문이다. 영어권 독자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지적한 박상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국어로 글을 썼지만 여전히 난해한 작가는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율리시즈>나 <피네간의 경야>를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해도 여전히 모호함과 난해함은 그대로이듯이, <죽음의 한 연구>나 <칠조어론>을 한국에서 영어로 번역해도 모호함과 난해함은 여전히 그대로일 것 같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작가의 어떤 "의도"나 "생각"을 딱 찝어내지 않는 한은 여전히 모호함과 난해함 투성이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솔직히 작가가 "자기 손으로" 쓴 작품이 이처럼 난해하니, 그 정확한 의미를 꿰뚫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문득, 리처드 엘먼의 전기에 나온다는 조이스의 말(그가 <율리시즈>의 프랑스인 번역가에게 했다는)이 농담 아닌 "진담 중의 진담"처럼 들리게 된다. "나는 이 책 속에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를 도입했기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 교수들이 바쁠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 나올 "생각 있나 뭐" 판 <율리시즈> 덕분에 우리나라에도 당분간은 조이스의 늪에서 다시 한 번 허우적거릴 독자가 좀 더 늘어나지 않을까.

 

 

얼마 전에 구입한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라는 책을 보니, 마릴린 먼로가 <율리시즈>를 읽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미국의 사진작가 이브 아널드는 1952년에 로드아일랜드에서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찍으면서 "그녀가 <율리시즈>를 읽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그 모습을 실제 사진으로 남겼다.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 금발의 섹스 표상인 마릴린 먼로가, 20세기 고급 문화의 표상이며 많은 사람들이 현대 소설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라고 평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읽었을까, 아니면 그냥 읽는 척하는 것일까?"(249쪽) 하고 질문을 던진다. 백치미의 상징과 난해함의 상징이 한자리에 모인 형국이라니, 제법 그럴 듯한 생각이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의 저자는 <율리시즈>라는 문학작품이 지닌 또 하나의 상징성을 간과한 듯하다. 그건 다름아닌 "섹스"로서의 상징, 즉 "음란물"으로서의 상징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율리시즈>는 그 문학성을 떠나서 그 안에 묘사된 "외설적 장면"으로 인해 대중에게서 몰매를 맞았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중이 이 책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이 책이 "외설물"로 두고두고 오해를 받은 것에도 그 난해함이 한몫을 거들진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정말로 이 책을 "모두" 이해할 수만 있었더라도 독자들은 이 책이 지닌 외설적인 면 대신에 다른 장점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사람들은 이 책이 지닌 여러 단점을 먼저 발견하고, 그중에서도 "외설적" 측면을 더욱 두드러지게 인식한 모양이다. 결국 자기들이 보고 싶었던 대로 봤다는 뜻일까.(최근의 어떤 책을 바라보는 광기어린 시선들처럼.) 그러니 "외설물" <율리시즈>를 "섹시스타" 마릴린 먼로가 들고 앉아있는 것(그것도 펼친 면의 분량을 비교해 보건대, 어쩌면 맨 마지막의 그 유명한 "몰리 블룸의 독백"이 아닐까 싶다!)이야말로 정말 그럴듯한, 정말이지 성적 암시가 물씬물씬 풍겨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물론 마릴린 먼로가 "백치미"를 보여주긴 했지만 결코 "백치"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마릴린 먼로야말로 겉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똑똑한 편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금발 미녀"의 고정관념을 계속해서 요구하는 바람에 졸지에 희생자 신세가 되었다고 지적한 것은 아마 글로리아 스타이넘이었을 것이다. 액터스 스튜디오의 설립자 리 스트라스버그 역시 마릴린 먼로에 대해 긍정적으로 회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어찌하랴, 먹고 살려면 계속 그렇게 과다노출 -- 사실 나는 위의 사진에서도 "책" 대신 그녀의 가슴 굴곡에 눈이 더 가니까 -- 과 헤퍼 보이는 웃음을 팔아야 했던 것을.) 사진작가 본인은 일종의 우연인 척하지만, 글쎄, 사진이 한 장이라면 몰라도 무려 두 장(그것도 옷차림이 다르다)이라는 점(물론 앞서 말한 책에선 왼쪽 사진만 실렸다)을 감안해 보면, 어느 정도 사진작가의 의도가 담겼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오늘날 <율리시즈>는 더 이상 "외설물"로 취급받지 않는다. 이 책을 펴내는 출판사나, 이 책을 사보는 학생이나, 이 책을 사주는 부모나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이 책, 그러니까 제임스 조이스가 갖가지 "수수께끼"를 잔뜩 집어넣어 만든 소설 <율리시즈>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시선은 앞으로도 무수히 바뀌게 되리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그 소설이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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