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21 - 5부 5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21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책 <토지>의 마지막 한 권.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시원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래서 빨리 읽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하며 힘겹게 읽어갔다. 과연 책 <토지>의 마지막은 어떻게 끝날지. 궁금증에 궁금증을 더하며 읽어간 책 <토지>.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의 느낌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허탈했다. 힘겨웠던 토지의 삶은 조국의 광복과 함께 끝이 났고, 몇 달에 걸쳐 읽어 온 책 <토지>의 이야기도 끝이 났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쩜 난 극적인 결말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 <토지>는 영웅소설이 아니었기에 극적이지 않았다. 다만 우리네의 다양한 삶을 진솔하게 담아냈을 뿐. 그렇기에 책 <토지>의 끝도 화려하기 보단 잔잔했다.

 

 

“그래, 그래서 조형은 그놈의 물과 인연을 맺으면서 소망을 이루었소?”

역시 우문이었다.

“아니지요. 애당초 이루기 위해서라기보다, 뭐랄까요? 소망을 위탁했다. 하하핫핫... 뭐 그런 것 아닐까요?”

“이루어지지도 않을 소망을 위탁하면 뭘 하겠소.”

그 말은 물론 지감의 진심은 아니었다. 그는 조병수를 결코 예사롭게 보아 오지 않았으니까. 다만 지감은 말의 흐름을 탔을 뿐이다.

“불구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화려한 날개를 뽐내고 꿀의 단맛에 취했을 것이며 세속적인 거짓과 허무를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내 이 불구의 몸은 나를 겸손하게 했고 겉보다 속을 그리워하게 했지요. 모든 것과 더불어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물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그리움 슬픔 기쁨까지 그 나뭇결에 위탁한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내 시간이 그리 허술했다 할 수 없고 허허헛헛... 내 자랑이 지나쳤습니까?”

지감의 아픈 곳이 바로 그것이었다. 또 병수에게 경애심을 갖는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 <토지 5부 5권> 중에서 -

 

 

이야기가 끝나갈 수록 책 <토지>에서 작가 박경리 선생님의 생각이 많이 담겨져 있었다. 어쩜 그것은 내가 박경리 선생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후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인물 하나하나에서 박경리 선생님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분의 삶이.

 

힘겹게 인생을 살다 가신 박경리 선생님. 그분의 말년은 평온했지만, 그분의 인생을 돌아봤을 때 그분의 생을 두고 가히 평온하기만 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책 <토지>를 우리에게 남겨주실 수 있으셨을 테지만. 불구의 몸으로 모진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조병수. 그의 말에서 박경리 선생님의 생에 대한 고백이 담겨져 있는 듯 했다.

 

모든 것이 평범하지 않았던 가정생활. 어찌 보면 불구 같은 가정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빠 없이 어머니와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되 일찍 죽음을 맞이한 남편으로 인해 젊은 과부로 어린 딸을 키워야 했으며, 사상범으로 몰린 사위 때문에 어린 손자를 혼자 키우는 딸을 지켜봐야했다. 하지만 불구 같던 가정생활을 보냈기에 박경리 선생님은 화려한 꽃을 찾아다니며 뽐내는 나비 같은 삶이 아니라, 모든 것과 더불어 사는 겸손한 물과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닐련지.

 

 

거대하고 은밀하며 기적과도 같은 우연, 만나는가 하면 헤어지고 아아, 인간들의 끝이 없는 드라마, 오가다는 진정 그 찬란함에 눈부심을 느낀다.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간에 행복이든 불행이든 간에 삶은 찬란하고도 신비롭다. 그것은 어떠한 힘으로, 무엇에 의해 짜여졌더란 말인가. 그것은 어떠한 힘으로, 무엇에 의해 짜여졌더란 말인가. 오가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지금 나는 무슨 생각을 했나? 사람들은 뿌리 뽑힌 잡초같이 전쟁에 쫓기고 방황하며 죽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오가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과연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인간의 삶은 찬란한가. 신비스런 것인가, 지층을 울리며 지금도 어디선가 지나가고 있을 군화소리, 개미떼같이 지나가는 그것을 찬란한 삶이라 할 수 있을까? 헐벗고 굶주리며, 생면부지의 인간들이 이유 없이 서로를 서로가 죽이며 벌레처럼 하찮게 죽어가는, 도시 그것은 어떠한 힘으로 무엇에 의해 짜여진 드라마인가.

 

- <토지 5부 5권> 중에서 -

 

 

작가 박경리 선생님이 바라본 인간사가 이러했으리라. 눈부시도록 찬란해보이다가도 한없이 하찮아 보이는 인간들.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너무나 많은 일을 겪은 이에게 인간들의 삶이란. 허무하기만 했다. 책 <토지>를 읽고 난 뒤 난 100살이 넘게 산 것처럼 폭삭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너무나 많은 인간사를 보며, 나 역시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인간사를 겪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리광쟁이인 것만 같았던 서희가 다시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며, 악독했던 조준구가 결국 추하게 죽어가는 것이며, 책 <토지> 속 여러 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며 난 그들과 함께 많은 걸 경험하고 겪어야 했다. 그것은 내가 삼십년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감정을 소비하게 했다.

 

 

“누님도 큰아버님과 같은 편견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지는 않지만 색다르긴 하지. 남이 안 하는 일, 자칫 잘못하면 어릿광대로 보일 수도 있고.”

유키코는 조용하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그게 편견 아닐까요? 어떤 사실, 혹은 진실만 논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너 자신은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누이나 엄마의 처지에서는 객관적으로 보아야지 않을까?”

“그건 그렇습니다.”

“나는... 시류를 타는 경박을 경계하지만 젊은 사람, 내 자식들한테 ‘진실을 외면하라’ 그런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아. 물론 적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사물을 보는 폭을 넓혀가야, 그런 뜻에서 당국이나 우익진영에선 다소 신경질적이며 감정적인 것 같더구나. 지휘관과 병사만으로 사회가 구성되는 건 아닐 테니까.”

 

- <토지 5부 5권> 중에서 -

 

 

박경리 선생님의 속마음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책 안에서는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유키코처럼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양한 사상들에 대한 견해를 담아내었다. 어느 한 쪽도 일방적이지 않았고, 각 사상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등장인물들을 통해 쏟아내었다. 책 <토지>의 마지막도 그저 조국의 광복을 기뻐할 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는 구분짓지 않았다.

 

 

 

- 연필과 지우개 -

 

 

 

 

 

제5부

1940년경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억압을 견뎌내야 했던 민족의 삶이 확대된 공간을 오가며 다양하게 펼쳐진다. 서희는 박 의사의 죽음, 양현과 영광의 슬픈 사랑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으며, 인실과 오가다의 재회, 길상의 관음탱화 조성, 소목장이가 된 조병수와 아버지 조준구의 처절한 죽음, 후일담형태로 채워지는 평사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로 주요 인물간에 얽혔던 한이 한겹씩 풀어진다. 또한 해도사와 소지감 등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모임, 이홍의 딸 상의의 일본인 학교생활, 일본인의 앞잡이가 된 우개동의 행패 등을 통해 일제말의 현실이 적극적으로 그려진다. 1945년 8월 15일, 양현은 강가에 나갔다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이를 서희에게 전한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1897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달려온 <토지>의 마지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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