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8 - 5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8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책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님의 다큐멘터리를 봤다. 다큐멘터리 제목은 <내 어머니 박경리> 이었다. 그 제목은 나에게 ‘내 책 <토지>의 어머니 박경리’로 느껴졌다. 그녀의 삶은 딸로서도, 여자로서도, 어머니로서도 참 쉽지 않았다. 책 <토지>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처럼. 대작가 박경리이기 이전에 이혼녀의 딸로, 과부로, 사상범인 사위를 둔 어머니로 살아온 그녀의 삶. 5부 1권을 읽은 뒤 한동안 책 <토지>를 만날 수 없었지만, 난 책 <토지>에 전보다 더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책 <토지>에 나오는 이들에게서 박경리 선생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5부에 들어서자, 책 <토지>의 등장인물들은 1세대를 넘어 2세대로, 3세대로 그리고 또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책 <토지>를 읽으며 책의 흐름에 따라 가다보니, 나 역시 가끔은 너무 많은 세월을 산 듯한 느낌이 들어 왠지 모르게 허전하곤 했다. 그리고 세월의 흐름이 어쩌면 이리도 야속하게 느껴지던지. 서희가 조준구를 내몰고 조국 땅에서 최씨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긴 했지만, 조국은 여전히 독립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일본의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흐르고 많은 이들이 죽고 태어나고 했건 만, 조국의 광복은 아직도 멀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책으로만 읽고 있는 나도 답답하게 느껴지는데,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았을 우리 사람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세대가 이어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과거는 더 얽히고설키었고, 그것은 살아 있는 이들에게는 가슴의 응어리로 남겨지게 되었다. 모두들 가슴에서 그 응어리를 들어내지도, 쉬이 잊지도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비천한 출신이 응어리였고, 어떤 이에게는 놓쳐버린 권력이 응어리였으며, 어떤 이에게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응어리였다.

 

최 참판댁 여인네 역시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윤씨부인에서 별당아씨로, 서희로 또 양현에게로. 그리고 윤씨부인이 가슴에 담겼던 응어리는 조금씩 바뀌어 가며 다음 세대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이제 그 응어리는 서희가 아닌 양현에게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최 참판댁의 양녀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뭐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양현. 하지만 모두가 그녀를 사랑한 것만은 아니었기에 그녀의 응어리는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귀하게 자란 것과 달리 비천하게 태어난 그녀. 그 괴리감은 너무나 컸고 그것은 그녀의 가슴에 큰 응어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차라리 비천한 출생대로 그야말로 비천하게 성장했더라면 그녀의 응어리는 이처럼 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길 잃은 아기 새 마냥 맑고 순수했기에 더 큰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서서히 자신의 응어리를 풀기 시작했고, 조금씩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다.

 

양현, 그녀 뿐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도망만 치던 상현도, 자신의 마음을 꽁꽁 싸매기만 했던 인실도, 틀 안에 자신을 가두었던 홍이도. 단단하기만 했던 자신의 응어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푼 건 가슴 속 응어리만이 아니었다. 세월이 가는 만큼 단단해지고 깊어졌던 응어리가, 다시 세월을 만나 약해지고 얕아지게 된 것처럼. 조국의 광복을 위해 끈끈하게 서로를 묶던 독립운동의 끈 역시, 점점 더 멀어지는 조국의 광복 앞에서 풀어지게 된 것이다. 난 이미 끝을 알고 있기에 슬프지 않았지만, 이들이 그나마 간신히 유지해오던 독립운동의 끈을 풀어버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가슴이 아팠다.

 

 

“재능도 모자라고 불꽃 튀는 삶과의 정직한 대결도 없고 그림이란 화실 안에서 반복되는 수련의 과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새삼스럽게 절실히 깨달았다.”

환국은 부친의 탱화에서 받은 충격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 <토지 5부 2권> 중에서 -

  

‘가엾은 이모, 어찌 사람이 저 모양으로 변해가는 걸까? 아무도 도울 수가 없어. 명성이란 마약 같은 것일까? 마약이 떨어진 아편쟁이... 이모는 아편쟁이처럼 변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명성은 나비 같은 걸까? 너무나 이르게 서리가 내렸어. 가엾은 이모. 어머니 아버지는 왜 좀 따뜻하게 대해주질 않는 걸까?’

 

- <토지 5부 2권> 중에서 -

  

“그렇지 않아. 밖에서 무기를 생산하고 있는 한.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내용으로 본다면 다 같이 생산고 위주의 유물론 아니겠어? 다만 어떻게 간리하고 분배하느냐의 차이지. 나는 언젠가 그것이 벽에 부닥칠 것이란 생각이다. 만가지가 다 이자를 먹고 살아야지 원금을 찢어먹는다면 결국 파탄할밖에 없지. 가령 땅이 원금이라면 그해 나는 농작물은 이자다 그 말일세. 더 비근한 예를 들자면 머릿속에 든 지식은 원금이요 취직하여 받아먹는 월급은 이자다 그 말이야. 만사 이치를 그 자로 재면 모든 게 합리적이지.”

 

- <토지 5부 2권> 중에서 -

 

 

 

- 연필과 지우개 -

 

 

 

 

 

제5부

1940년경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억압을 견뎌내야 했던 민족의 삶이 확대된 공간을 오가며 다양하게 펼쳐진다. 서희는 박 의사의 죽음, 양현과 영광의 슬픈 사랑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으며, 인실과 오가다의 재회, 길상의 관음탱화 조성, 소목장이가 된 조병수와 아버지 조준구의 처절한 죽음, 후일담형태로 채워지는 평사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로 주요 인물간에 얽혔던 한이 한겹씩 풀어진다. 또한 해도사와 소지감 등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모임, 이홍의 딸 상의의 일본인 학교생활, 일본인의 앞잡이가 된 우개동의 행패 등을 통해 일제말의 현실이 적극적으로 그려진다. 1945년 8월 15일, 양현은 강가에 나갔다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이를 서희에게 전한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1897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달려온 <토지>의 마지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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