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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이야기 - 고담 핸드북
소피 칼.폴 오스터 지음, 심은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뉴욕에 머물면서 읽게 된 뉴욕에 관한 책들 중 가장 얇은 책이었다. 뉴욕에 관한 책들이란 거의 대부분 뉴욕 정보나 사진이 담긴 여행 책들이다 보니 그 두께가 두툼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상당히 달랐다. 얇은 다이어리 정도의 포켓북. 짧은 소설 같은 책이라는 주인언니의 말을 들은 뒤라 그 내용이 상당히 궁금했다.
그래서 나보다 먼저 읽은 이에게 내용은 절대 말하지 못하게 한 채, 그냥 "재미있나? 없나?"와 "깊이가 있나? 없나?"의 단답형 대답만 하게 했다. 내가 들은 대답은 '그럭저럭 재미있다'와 '깊이가 없는 것 같은데 끝에 가면 깊이가 있는 것 같다'였다. 뉴욕 이야기라는 참 쉬운 제목을 가지고 나는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았지만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책의 내용은 과연 뭘까....?
하지만 책을 펼치자마자, 나는 나의 아리송했던 기대감을 싹 밀어버리는 안타까움을 먼저 추슬러야 했다. 아직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 이 책이 <이중 게임>이라는 7개의 시리즈 중 마지막이라니 실망이 될 수밖에. 그리고 난 읽지도 않고, 갖고 있지도 않고, 당장 구할 수도 없는 <거대한 괴물>이라는 책이 이 책의 시초라니 난감할 수밖에..
몇 장 되지도 않는 책에서 여러 장을 차지해 버리면서까지 나의 기대감을 무너뜨린 소개 글을 훌쩍 넘겨버리자, 곧바로 나의 호기심은 다시 스물스물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을 펼친 자리에서 단숨에 다 읽어버리게 되었다.
낯선 미국 땅에서 가장 활기차다는 뉴욕에서, 동양인 여행객인 나. 뉴욕의 분주함은 서울의분주함과 많이 닮아있었지만, 그럼에도 뉴욕은 나를 조심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들의 타인에 대한 습관적인 배려. 내가 동양 여자이기 때문일지 몰라도 눈이라도 마주 치면 살짝 미소지어주는 사람들, 어쩌다 옷깃이 살짝 스친 것뿐인데도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들, 내가 조금 특이한 것만 갖고 있어도 말을 거는 사람들.
이들 사이에 있다 보니, 나 역시도 아주 작은 것에도 "Excuse me," "I'm sorry," "Thank you," "We're welcome," "That's fine."은 입에 달고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인에게는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문화다 보니, 하긴 하면서도 내 스스로 어색해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 내가 잘 말 한 건가? 혹시나 내가 실수한 건 아닌가 싶어서.
어떤 이들은 내가 "Excuse me"하고 지나갈 때, "Sorry"하며 비켜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말없이 비켜주는 사람도 있고, 뭐라뭐라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덧붙이는 사람도 있다. 내가 여기 있는지 몰랐다든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든지 짐이 많다든지 하는 변명 섞인 이야기들 일거다. 그렇게 작은 스침에도 다양한 반응들을 보이니 단지 "Excuse me"라는 짧은 영어를 내뱉으면서도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 내가 지나가다 살짝 부딪친 건데도 호들갑을 떨면서 나한테 '미안하다고 괜찮냐고 다친데 없냐'고 하는 사람도 있으니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건 나름 상당한 재미가 있다.
가끔은 나보다 먼저 나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내는 사람을 보며 절로 미소가 지어질 때도 있다. 늦은 저녁 숙소에 들어가기 전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들린 치킨집. 이미 몇몇 남자 아이들이 주문 한 치킨을 받으며 값은 치르고 있었다. 내가 주문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무표정으로 남자 아이들에게 치킨을 건네주시던 치킨집 아저씨. 내가 아저씨 앞에 서자 아저씨는 그 굳어있던 얼굴에 어색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기 위해 노력하며 내 주문을 받으셨다.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아저씨의 미소에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났다. 날 위해 애써 미소 지으려는 아저씨를 보면서.
<뉴욕 이야기>를 읽은 뒤이기 때문일까? 나는 문득 뉴욕의 그리고 아메리칸 대륙의 남자들은 동양인 여자를 볼 때마다 폴 오스터의 게임법칙을 떠올리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남자들을 대할 땐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다가도 여자를 보면 특히나 동양 여자를 대할 때면 그 굳은 얼굴에 어색하게 나마 미소를 띄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낯선 이에게 미소 짓고, 말을 걸고 하는 소피를 보면서 나는 뉴욕에서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공중전화를 그녀의 소유물인양 열심히 꾸미는 것조차도 나에겐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공원에서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도토리를 주워서 나무 밑에다 다람쥐를 위한 거라며 도토리산을 만들던 나이기에.. 하지만 낯선 이에게 돈이 아닌 무언가를 주는 건 정말 쉽지가 않았다. 바로 어제였다. 공연장에서 공연 시간을 기다리면서 초콜릿으로 주전부리를 하다가 내 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홀로 앉아계신 할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나는 초콜릿을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드셔보시라고 하나 갖다드릴까? 옆에서 갖다드리라고 성화를 내는 이가 있었음에도 난 초콜릿을 들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 초콜릿은 내 입 속으로 넣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소피의 용기에 난 뒤늦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면서 폴 오스터의 게임 법칙만 따라도 이 세상은 조금 더 훈훈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먼저 타인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타인과 관심어린 대화를 나누고, 내가 갖고 있는 작은 무언가를 타인에게 나눠주고, 타인과 공유하는 공간을 정성으로 가꾸고.. 설사 매일매일 이 모든 걸 지키지 못한다 해도,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지키려고 노력한다 보면, 언젠가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을까? 그리고 타인에게는 나 역시도 타인임을 좀 더 많은 이들이 자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타인과 벌어진 틈을 조금 더 좁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뉴욕에서의 여행은 소피 못지않게 나를 폴 오스터의 게임 규칙에 따르게 했고, 폴 오스터의 게임 규칙을 따르고 있는 많은 이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정작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폴 오스터의 게임 규칙이라는 것을 모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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