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픔과 애환과 행복이 깃든 실들로 만들어지고 있는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오랫동안, 천천히 들여다본 느낌이다. 어떤 실은 아플 정도로 강렬한 색을 띠고 있었고, 어떤 실들은 희미하지만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어떤 실들은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기도 했다. 그 하나의 실들이 엮이고 엮여 형상을 만들고, 형상들이 모여 종국에는 거대한 작품을 완성한다. 책의 등장인물들인 게노베파, 미시아, 미하우, 이지도르, 크워스카, 아델카, 루타, 파베우 등등 모든 인물들은 그 하나의 실 들이며, 그들이 태고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에피소드가 되며, 모든 에피소드들이 보여 태고라는 세계를, 태고라는 우주를 팽창시켜 나간다. 그렇다, 이 태고라는 태피스트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태피스트리인 것이다. 그런 느낌으로 이 책, '태고의 시간들'을 읽어나갔다.

태고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1

상속자가 있고, 방앗간이 돌아가고, 누군가는 평생을 상속자의 성 지붕을 고치며 살아가는 태고라는 마을. 모든 사람들이게 '수호천사'가 있는 그런 세계, 태고. 마을의 경계에 이르면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게 되는, 마법의 공간 같은 마을. 여기에서 묵묵히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어딜 가도 그렇듯이, 조금은 미친 사람들도 있다. 작가는 인물들이 겪는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조금씩 보여주며 태고라는 마을에 사는 인물들의 삶을 보여준다. 전쟁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방앗간을 운영해나가는 '게노베파', 게노베파의 아름다운 딸 '미하우' 조금은 모자란 아들 '이지도르', 남자들에게 몸을 팔며 살아가다 아이를 잃고 사람들을 거부하며 숲에서 살아가는 '크워스카', 그녀가 나중에 얻은 딸 '루타', 미하우에게 한눈에 반한 남자이자 운명을 개척하고 싶어 하는 '파베우' 등등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신화적이며 이 세상의 공간이 아닌 태고라는 마을이 중반부부터는 갑자기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마을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마을은 2차 세계 대전에 휘말리며, 등장인물들은 현실의 전쟁을 겪게 된다. 군인들이 몰려오고, 마을의 제일 좋은 집을 점거한다. 또 다른 군인들이 들어오고, 마을은 불탄다. 전쟁은 너무나 끔찍해서 꿈같은 시간들을 보내던 인물들을 현실의 어둠과 슬픔으로 순식간에 끌어내린다. 전쟁을 두 눈앞에서 목격한 게노베파는 자신의 신체 속으로 숨어버렸고, 자연과 교감하곤 했던 루타는 태고를 벗어나기 위해 권력자에게 자신을 팔아버린다. 파베우는 어느 순간 권력의 중심에 다가가고 있었고, 미시아는 변해버린 파베우로부터 가족들을 지켜나간다. 총칼이 등장하고, 권력이 등장하고, 섹스와 불륜이 등장한다. 독자들은 그제서야 태고라는 마을이 단순히 상상의 마을이 아님을, 태고라는 곳은 어딘가에나 있을 법한, 어딘가에나 있어왔던 그런 마을임을 깨닫게 된다.

"그만 깨어나고 싶어"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델카가 의아해하며 미시아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미시아는 깨달았다. 유대인을 향한 무차별 포격, 플로렌틴카와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죽음, 저들이 루타에게 한 짓, 폭격, 피난, 어머니의 마비된 다리에 관한 꿈을 꾸는 아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미시아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마치 통조림통의 뚜껑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 신이 사람들을 가두어 놓은 것만 같았다. 198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책은 1914년부터 1990년대까지 폴란드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을 바탕으로 한 책이라고 한다. 폴란드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나에게는 단지 우리네의 '인생'을 묘사한 소설이라고만 생각했지만, 폴란드인들이나 폴란드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가슴에 묵직한 돌을 얹어주는, 또는 과거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는 소설인 셈이다.

올가 토카르추크, '당신이 알지 못했던 20세기 최고의 소설가', '폴란드의 대표 작가', 한마디 한마디가 폴란드 뉴스 헤드라인에 오르락 내리는 유명 인사, 'Book of Jacob(2014)'으로 Nike prize 수상 후 한 소감 발표로 인해 단숨에 폴란드의 '배신자'로 찍혀버린 작가, 수많은 살해 위협을 받아 경호원들에게 보호를 받기도 했던 작가.

"모든 문화는 방어 체계 위에 세워져있다. 이는 매우 정상적인 것으로, 우리는 우리를 불편케 하는 것들을 억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의 역할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외면하고자 하는 역사의 단면을 살펴보게 하는 것이다. 나는 과거를 위한 심리치료사이다.(Olga Tokarczuk's novels against nationalism, Newyorker) "

태고의 시간들에서 그녀가 들춰내 보인 폴란드의 역사가 무엇인지는 읽으며 발견해 보시길 바란다. 하지만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이 작품이 나에게 큰 울림을 준 것은, 폴란드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좋은 작품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녀가 태고의 시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들이 우리의 보편적인 '인생'이기 때문이다. 잔잔하기도 했다가, 파도가 휘몰아치기도 했다가, 찬란하기도 했다가 종국에는 스러지는. 더불어 그녀가 묘사한 다양한 캐릭터들 중 적어도 몇몇에는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쓸쓸하게 바이올린을 켜는 파베우에게 공감하고, 내용 없는 편지를 끊임없이 부치는 이지도르에게 공감했던 것처럼.

그는 바이올린을 들고 집 앞 계단으로 나가서 연주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지막 일요일에'를, 다음에는 '만추의 언덕 위에서'를 연주했다. 나방들이 등불을 향해 몰려들었고, 머리 위해서 빙글 빙글 맴돌았다. 날개와 더듬이가 달린, 움직이는 후광이 그의 정수리에서 환하게 빛났다. 그날 파베우는 아주 오랫동안 연주를 했다. 먼지투성이의 빽빽한 줄이 하나, 둘, 모두 끊어질 때까지.350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흐른다. 찬란할 것만 같았던, 혹은 찬란하다고 생각했던 인생이, 끔찍한 일 투성이었다고 생각했던 인생이 사실은 평범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숨을 수 있는 껍데기를 찾아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텨'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가방을 열어 그라인더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운전기사가 이상하다는 듯 백미러를 통해 아델카를 흘끔거렸다.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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