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
박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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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를 생각하면 백화점에서 말 잘하는 점원한테 혹해서 물건을 산 기분이 들때가 있다. 세상 사람들 기준에 좋은 물건임은 틀림없긴 한데 나에게 어울리는가, 내가 좋은가가 문제였다는 얘기다. -35쪽

은주는 석호와 사귄 지 십 년 가까이 되어서 그들의 미래는 이제 사실 가족이 되는 것밖에 없고, 유리는 이것저것 꿈꾸는 것이 많기도 하지만 결국 그 꿈의 결론은 최상품의 남편, 최상급의 결혼이다.-59쪽

유리의 주장에 따르면 남자에 대해 아쉬운 줄 모르는 여자만이 진정한 독신주의자로 거듭날 수 있다나. 하지만 나는 그 점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해본 적 없고 수진이 혼자 살든 어떤 남자와 같이 살든 간에 자신에게 어울리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유리에게는 누구의 옆자리에 있을 것인가가 아주 중요하겠지만, 수진에게는 누구를 자신의 옆자리에 놓을 것인가가 중요할 뿐인 것이다.-60쪽

사실 생각해보면 내 친구들은 유리, 하나를 빼놓고는 다 조건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다. 일단 돈이라면, 굳이 그것에 집착해야 할 만큼 가난했던 적이 없었고, 그래서 이 나이에도 나는 일을 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진은 여전히 돈을 내면서 학교를 다니고, 은주는 연봉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남자를 선택하는 기준 또한 능력보다는 얼마나 나랑 맞는 사람인가가 더 중요했다. 우리와 똑같은 기준을 갖고 있는 남자가 그들이라고 믿었다면 내가 어리석은 것인가.-121쪽

"볼거라곤 그 잘난 시험 통과한 것밖에 없는데, 그거 하나 통과했다고 미래가 일사천리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거 아냐? 이 선배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정말 이상했어. 이 선배의 인생은 모두 그 시험 합격 이후로 미뤄져 있었거든. 나 그런 거 기다릴 만큼 한가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잖니? 차라리 다른 걸 찾아보는 게 낫지. 세상에 남자는 많고 많아. 괜찮은 남자도 저 아이스크림 가게의 아이스크림 종류보다 많을걸. 우리 이런 의미 없는 얘기는 그만두고 아이스크림이나 먹자."-132쪽

나는 오늘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나는 누구와의 사소한 약속도 그냥 어겨본 적은 없다는 것을. 양해를 구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그러다가 상대방이 완전히 돌아섰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거듭해서 확인을 하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나도 돌아섰다. 어쩌면 유리는 전화를 끊으면서 그냥 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믿고 이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에도 유리가 이랬던 적이 있었다. 나는 왜 그날 전화 안했었냐고 묻지도 못했다. 사는 일이 참 허전하다. 오늘 여기서 그 누구에게도,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서.-139쪽

익숙하다는 것이, 늘 함께였다는 사실이 아무 의미 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친하다는 말이 포함하고 있을지 모를 그 수많은 모순들. 사랑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기대치를 포함하고 있기 마련이니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기대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그런 건 없는 모양이다. 언제나 당연하게 함께 자연스러울 수 있는 관계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걸까. 유리를 보면서 나는 쓸쓸해진다. 준 만큼 받을 수 없는 사랑은 쓸쓸하다. 준 만큼 받기를 원하면 쓸쓸해진다.-211쪽

"결혼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건 타인에게 비난받는 불륜이라서보다, 그 남자의 두번째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 같아. 아무리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해도 나는 언제나 두번째지. 첫번째가 아니어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런 사랑을 계속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224쪽

나는 할말이 없었다.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침묵한다. 상처주고 싶지 않아서,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달라질 게 없어서, 결국 아무것도 아니어서 말할 수 없는, 말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 수진은 혼자 시작하고 혼자 끝냈다. 친구라고 해서 내가 이러고저러고 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그것이 설사 상처로 남을 일이라고 하더라도 숨기거나 하지 않는다는게 그나마 위로가 된다.-225쪽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했던 남자와 친구로 지내는 건 유리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연인이 친구가 되는 건 명백히 등급하락이다. 진짜 좋은 남자를 친구라는 이름으로 내버려둘 여자는 세상에 없다. 그건 단지 전략적인 타협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유리는 지훈을 포기한 것이다. 어쩌면 내가 유리를 잃고 싶지 않은 것처럼 유리도 나를 잃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257쪽

잊지 말아야 한다. 매일 똑같은 것을 만들어내겠다는 강박관념으로 좋은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언제나 목표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요리를 만드는 것이다.-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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