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 / 열림원 / 2007년 12월
절판


무슨일로들 바삐 움직이는 거리의 행인들이 밤마다 어딘가에 있는 자기방을 찾아들어가 여덟시간 정도 정신을 놓은채 잠을 자고 나온다는 생각이 들면 쭈뼛선다. 사람이란게 몸에 스위치를 꽂고 밤새 배터리를 보충하는 공상소설 속의 사이보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적당한 온도와 습도와 햇빛만 갖추면 솟아나는 버섯같이 추상적인 존재로도 여겨지는 것이다. 버섯이 밥을 먹고 지하철에 실려가 돈을 벌고 마음을 숨긴채 다른 버섯과 대화를 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랑을 나누고 가끔 강에 가서 시름을 흘려보내며 운다해도,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에 비해 별로 이상하지도 않다.-168쪽

세상이 얼마나 연약하고 우발적이고 잔인하고 무책임한 것인지.
세상이 아전인수의 장이며 거짓말의 바벨탑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성숙일까? 절망일까? 아니면 그게 바로 삶일까? 그런때면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기면서 버섯처럼 마음이 차갑게 식곤했다. 겨우 스무살에 말이다.-169쪽

k와의 관계에서 내가 후회하는 것은 우리 관계가 시련에 처했을때, 친구들의 여러가지 말과 비난과 그들의 측도에 휩쓸려 내 진심의 갈피를 잃었다는 것이다. 나와 k의 가치를 저버렸을때 우리 사랑의 생명은 물거품처럼 꺼져버렸다. 그러니 오래 나를 괴롭혔던 실연의 아픔은 다름 아닌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다. 사랑이 다시 온다 해도 난 뒷걸음질 칠것만 같다. 사랑은 나를 격정적으로 만들고, 균형잡힌 관계들을 훼손시키고, 나의 일상의 페이스들을 무너뜨린다. 내 사랑에 대해 내가 보는 눈과 다른사람들이 보는 눈은 다를것이다. 무엇보다 사랑은 반드시 끝이난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걸까?-182쪽

사랑은 어쩌면 달나라에 가는 것과 비슷할꺼야. 지구의 중력을 이탈해 별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무한의 우주를 지나 꿈꾸어온 달에 착륙하는 여행 말이야. 그 여행이 엄청난 것은 우주선도 없고 연료도 없이 오직 단둘이 끌어안고 스스로 발사체가 되어 날아간다는 점이지. 그리고 달나라에 갈 수는 있지만 그곳에서 살 수는 없는 것처럼. 사랑속에 안주해서 살수는 없단다. 실제로 달은 채석장처럼 끔찍하게 척박한 곳이고 인간의 발을 둥둥 뜨게 만드는 곳이지. 단지 지구와 달 사이 원심분리기 같이 굉장한 속도로 회전하는 허공만이 사랑의 현장인거야. 사랑이 끝나고 지상으로 돌아올 때는 우주선을 버리고 각자의 낙하산을 펴야하지. 이 지상에 따로따로 떨어져 착륙해야 하는 것, 사랑은 그런거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때 함께 있든, 혹은 헤어져 있든, 무사한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결국 끝이나. 삶은 사랑의 열정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로 사는 거거든.-195쪽

그리고 평생 계속될 것만 같이 단단하게 뭉쳐서 희끗한 형체의 유령처럼 등 뒤를 따라다니던 감정의 응어리도 때가 되면 결국 재처럼 부서져 흩어지겠지. 단둘만의 달나라를 보았던 동질성조차 겨우 이년 혹은 삼년정도면 무화되고 타인이 되는 것이다.. 진짜 상실의 아픔은 그것이다. 평생 계속되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다.-195쪽

텔레비전 화면에 달의 사막과 절벽과 메마른 강과 구릉지와 분화구와 마른 갯벌 같은 평원이 슬픈 꿈결처럼 펼쳐졌다. 그리고 엔딩 나레이션이 흘러나왔다.
" 달에서는 우리가 꿈꾸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곳에 한번 찍힌 발자국은 수백년이 흘러가도 없어지지 않고 모래성을 쌓으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답니다. 비도 내리지 않고 바람도 불지않고 중력도 거의 없으니까요."
-196쪽

"넌 타락이 뭐라고 생각하니?"
"타락이란, 살기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사는 거야."-229쪽

나는 색색의 종이배를 창문 아래로 하나씩 떨어뜨리고 두팔을 활짝 펼쳤다.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과 무언가를 주고 싶은 다정한 마음이 똑같이 차올랐다. If life gives you a lemon, make lemonade! 생은 시어빠진 레몬 따위나 줄 뿐이지만, 나는 그것을 내던지지 않고 레모네이드를 만들 것이다.-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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