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을 무릎 위에 펼쳐 놓고 세 개의 비커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비커 안의 빈 공간에 점을 찍기 시작했다. 첫번째 비커에는 드문드문 열 개 안팎의 점을 찍었다. 두번째 비커에는 첫번째 것보다 세 배쯤 많은 점을 찍었다. 그것이 마음속에 앙금이 많은 사람과 덜한 사람의 차이겠구나, 생각하는데 세번째 비커는 완연히 다른 그림이었다. 비커 밑바닥 4분의1 쯤 되는 지점에 가로로 선을 그은 다음 그 아래쪽에만 서른 개쯤 되는 점을 찍었다. '이런겁니다. 이게 몸을 아프게 하고...' 면담자는 세 번째 비커 아래쪽에 계속 점을 찍으며 말했다. 무의식의 영역에 억압해 둔 마음의 앙금들이 거기 있었다. 비커 위쪽 한점 티끌도 없는 맑은 공간이 내 의식의 영역,그동안 내가 잘해 왔다고 믿어 온 마음 상태일 것이다. 그는 비커 위쪽, 한 점 티끌도없는 맑은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사기죠. 세상은 멋진 거짓말입니다.' -119쪽
인혜는 이제 사랑에 대해 어떤 환상도 품고 있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어쩐지 낯이 익고, 두 번째 만남에서 동질감을 발견하고, 세 번빼 만남에서 운명이나 인연을 거론하는,그런 사랑의 환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한때 인혜도 그런 식의 사랑의 환상을 믿은 적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 온몸이 감전되는 전율과 함께 찾아오는 천둥번개 같은 사랑,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일상과 관습이 사라지는 정전 같은 사랑, 온몸과 마음을 혼곤하게 취하게 하는 봄빛 같은 사랑...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것은 사랑의 다양성이 아니라 환상의 다양성일 뿐이었따. 그때는 사랑이 순수한 열정이고 아름다운 애착이고 낭만적인 체험이며 순결한 정서라 믿었다.-40쪽
인혜는 그것이 지적인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오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화가 통하는 여자를 만났으면 한다는 것, 그 소망에는 여성이 대체로 무지하다는 편견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 그럼에도 여성과 진지한 토론을 하거나 논쟁이 붙게 되면, 여자가 귀찮게..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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